몇년 전 우리나라에서도 했던 '인디애나 존스'라는 TV 시리즈가 있었다. 영화에서 보던 인디의 젊은 시절 이야기인데 그 시리즈에서 젊은 인디는 지난 세기 초의 유럽을 무대로 그 시대의 세계사를 주름잡던 유명한 인물들 틈에 끼어 '역사'를 만들어 나간다.이 책 <바우돌리노>를 읽으며 그 시리즈를 생각하게 된 건 역사의 틈새에 끼어든 허구의 인물이라는 설정도 비슷하거니와 더우기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의 실체는 이런 것이다'라고 천연덕스럽게 내놓는 '진실'들의 유쾌함 때문이었을 것이다.우리는 여기서 '허구'와 '실체'의 문제, '역사'와 '픽션'의 문제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고 그 경계가 모호하게 침투되는 것을 본다. 이 이야기 전체는 니케타스의 의구심 속에서 '하나의 거짓말'로 인식되고 역사로서 씌어지기를 거부당한다. 그러나 과연 진실과 허구의 경계가 그렇게 칼로 무우 자르듯 명확히 그어질 수 있는 것일까?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중세는 물질적 현실 못지 않게 정신적 현실 또한 중요한 시대였다. 그들에겐 예수의 신성과 위격의 문제가 전쟁을 불사하게 할 만큼 중요한 것이었으며 전설 속의 왕국인 요한 사제의 동방 제국도 그들 머릿 속에선 분명한 실재로서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중세인들의 의식구조 속에서 본다면 바우돌리노의 '거짓말'들 또한 언제든지 진실로 탈바꿈될 수 있는 것이었으며 우리는 소설의 곳곳에서 어떻게 허구가 진실로 바뀌는지를 목격하게 된다.중세사에 관심있는 독자들에게 이 책은 큰 즐거움을 준다. 인간적으로 묘사된 바르바로사 황제와 그의 측근들, 전설 속에 등장하는 반쯤 허구인 존재들-암살 집단의 우두머리인 산의 장로, 소설의 큰 줄기가 되는 요한 사제, 머나먼 세계에 대한 인간의 동경이 만들어낸 신화적인 동물들-을 만나고 알아 보게 되는 즐거움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황제의 죽음에 얽힌 미스테리를 푸는 과정에서 추리 소설의 흥미진진함까지 맛볼 수 있다.요한 사제를 찾는 과정에서 이 '가짜 동방박사들'이 왕국의 코앞까지 이르지만 결국 그 실체는 보지 못하는 것은 어쩐지 좀 밝게 각색된 '성(카프카)'을 보는 느낌이다. 하지만 그런 것이 유토피아의 속성이 아니겠는가.
이 책의 서문에도 등장하는 G. F. 영이 쓴 메디치 가문의 일대기(이 책보다 훨씬 두꺼운 분량의)를 읽었기 때문에 책의 내용 자체는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었다. 다만 두 저자의 시각 차이는 분명히 존재한다. 영의 책이 신화화와 우상화라고 생각될 만큼 메디치의 위대한 군주들을 찬양하는 반면 이 책은 보다 객관적 시각에서 이 유명한 가문의 공과를 펼쳐 보인다.한 가문의 성쇠를 한 권의 책으로 담아낸다는 것이 그리 쉬운 작업은 아닐 것이다. 아쉬움이라면 배경이 되고 있는 14세기에서 18세기에 이르는 유럽의 정치적 사회적 배경에 익숙치 않은 독자를 위한 설명이 좀 부족하지 않은가 하는 점이다. 책이 너무 방대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에 대한 설명이 미흡하단 생각이 들었다. 부록으로 나와 있는 예술 작품들에 대한 주도 물론 유용했지만 인물들과 사건 배경에 대한 간략한 주라도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가끔 어떤 물건이 눈에 밟혀 그것을 사지 않으면 못 견딜 것 같은 때가 있다. 그리하여 벼르고 벼르다가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음에도 그것을 사고야 만다. 그러나 그것이 막상 내 소유가 되었을 때에는 그것이 나의 것이 아니었을 때 내 눈에 보였던 휘황함은 사라지고 만다. 그리고 그때서야 나는 생각한다. 내가 무엇 때문에 그토록 이걸 원했던가?지라르의 이 책은 문학사의 걸작들을 통하여 그 안에 드러나는 욕망의 구조를 파헤친다. 소설들을 읽은 독자라면 이해의 깊이를 넓힐 수 있겠지만 읽지 않았더라도 이해하는 데 큰 지장은 없다. 그만큼 저자의 논리는 명쾌하며...더우기 위에서 말 한 것 같은 경험을 한 사람이라면 우리를 괴롭히는 욕망들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를 설명하는 이 책의 내용이 낯설진 않을 것 같다.내 영혼이 원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 없이, 외부에서 주어진 것을 자신의 욕망이라고 여기는 데서 현대 사회 인간들의 비극이 시작된다. 욕망이 외부로부터 주어졌으므로 그 충족 또한 외부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된다.최근 우리 사회의 '명품' 열풍을 보면서 이 텍스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가방은 가방 자체로서가 아니라 거기에 덧씌워진 이미지들에 의해 가치가 결정되고 그 가방으로 얻는 만족감은 남들의 찬탄 어린 시선을 받을 때에야 비로소 완성된다는 것... 이것이 바로 광고가 구사하는 전략이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유혹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리하여 모자란 것이 없음에도 더 많이 원하게 되고, 언제나 남들이 가진 무언가를 원하는 갈증에 시달리게 된다.여기 소개되는 책들이 최근에 발표된 것일수록 이러한 '존재론적 질환'을 더욱 심하게 드러낸다는 사실은 현대가 어떠한 시대인지를 인식하게 한다. 문학 평론이지만 훌륭한 문학은 또한 현실의 날카로운 반영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현실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하는 책이었다.
이 책은 지적인 모험을 좋아하는 독자들을 끌어 들일 만한 겉모양새를 하고 있다. 삼총사를 쓴 아버지 뒤마의 이야기와 고서적상들의 암투, 거기에 악마학과 신비주의로 밀교의 분위기를 띄우고 있으니... 그리하여 소설은 꽤 복잡하게 펼쳐진 복선으로 시작하나 독자가 사기당했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은 책을 덮고 나서이다.뒤마의 원고와 <9개의 문> 고서가 무언가 관련이 있는 듯(그리고 그것이 이 소설의 긴장을 유지시키는 기본적인 복선이다) 진행되다가 마지막엔 결국은 주인공의 착각이었다-이렇게 끝나 버리니 독자로서는 작가에게 따지고픈 마음마저 든다.물론 책 애호가들, 수집가들의 편집증적인 집착과 그것을 양분으로 먹고 사는 책사냥꾼의 이야기가 나름대로 흥미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본적 골격이 빈약한 탓에 그러한 장식품들도 잘못 얹어진 듯(혹은 초가 삼간에 고급 가구들만 들여 놓은 듯) 따로 논다. 할 이야기는 많지만 그것으로 제대로 모양새를 갖출 능력이 없었거나, 자신이 펼쳐 놓은 복선을 끝에 가서 어떻게 처리할 지 몰라 억지로 둘둘 말아 감춰 놓은 듯한 느낌이다. 아무리 과대 포장이 광고의 본질이라고는 하지만 에코에 비교하다니, 어불성설이다.
세계사 시간에 스치듯 지나갔던 이름으로만 남아 있던 메로빙거 왕조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유럽 왕가들의 계보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카롤링거 왕조로부터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국의 독일이 형성되었고, 그 위로 거슬러 올라가면 만나게 되는 것이 메로빙거 왕조였기 때문에...최근의 역사서들은 중세를 고대와 르네상스 사이의 암흑, 잊혀진 심연으로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고 있다. 이 책 역시 샤를마뉴로 대표되는 카롤링거 르네상스 이전의 우둔한 바바리안들의 왕조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던 메로빙거 시대의 어두움에 의문을 던진다. 즉, 로마 문명의 폐허에 자리잡은 야만인들의 왕조라는 이제까지의 시각은 상당히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로마 몰락과 바바리안들의 유럽 사이의 시기에 그 두 이질적 문명은 상당한 동질화를 진행시켜 왔으며 그러한 결과로 생긴 것이 새로운 유럽이며 이것은 로나의 바바리안화-바바리안들의 로마화라는 양면적 변화의 형성물이지, 칼로 무우 자르듯 어느 날 갑자기 생성된 것이 안란 점을 강조하고 있다.저자는 자신이 미국인인 관계로 유럽의 역사에 대해 객관성을 갖고 볼 수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하여 프랑스도 독일도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쉽사리 인정하고 싶지 않아하는 메로빙거 왕조야말로 로마 제국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유럽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개설서의 성격상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해도 논의들이 깊게 다루어지지 못한 것은 아쉬움이지만 거의 관심을 끌지 못하던 시대의 역사를 훑어 볼 수 있어 즐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