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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의 진자 1 - 개정판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1월
평점 :
나이가 들어가면서 세상 사는 일이 뻔하고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 유리단지처럼 훤히 보인다는 느낌이 들곤 한다. 휘황함이 사라진 세계에 실망할 때쯤 이런 책을 읽어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비밀이나 음모 등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음모 이론에 깊숙이 끌려들어가는 이유는 바로 삶의 심상함에 지쳐 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책의 주인공들, 벨보, 디오탈레비, 그리고 까소봉 역시 허황된 비밀들에 천착하는 '귀신떨거지들'의 원고 속에서 지루함을 느끼다가'너희들이 원하는 게 이거냐?'하는 식으로 자신들 스스로의 '계획'을 만들어내는 일에 몰두하게 된다. 장난으로 시작한 일이지만 그들은 역사적 사실들과 사료들을 엮어 내어 자신들의 이론에 꿰맞추는 작업에 점점 빠져들게 되고, 급기야는 스스로도 그것을 반쯤은(혹은 그 이상) 믿게 되고 만다.
문제는 세상이 바로 그것을 원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미 싹트고 있던 것에 그들은 물을 뿌리고 거름을 준 셈이 되었다. 비밀, 음모, 계획에 목말라있던 사람들은 곧 그것을 '진짜'로 믿게 되고, 자신들이 만든 계획이 결국 스스로의 덫이 되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비밀이 스스로 존재하게 되고 만 것이다.
음모이론에 맞추어 역사를 재구성하는 와중에 우리는 에코가 펼쳐 놓은 역사적 사실들과 인물들, 문헌들의 촘촘한 망 속에서 상당히 '난해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유럽 역사와 연금술, 비학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다면 그런 느낌은 더 강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런 책은 사실 선뜻 권해 주기 어려운 책이기도 하다. 잘못하면 '무슨 그런 책이 있냐,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는 원망을 듣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운 분야의 새로운 지식에 흥미를 느끼는 분들이라면 한번쯤 도전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역사와 비학에 대한 책들을 찾아 읽고 싶은 마음이 들지도 모른다.
이 책이 초판 나왔을 때 읽고, 한 번 더 읽어야겠다고 생각만 하다가 이제 다시 개정판으로 읽게 되었다. 하드커버로 된 제본은 좋은데 '개정판'이란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너무 많은 오자들이 눈에 거슬렸다. 제대로 교정을 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영문판에서의 중역이란 점도 여전히 좀 불만스럽다. 역자 이윤기 씨의 어려운 한자 어 사용 역시 책의 난해함에 또 하나의 난해함을 더한 듯한 느낌이고(한자에 약한 나 같은 사람에겐 더욱 더...) 남자는 반말, 여자는 꼬박꼬박 존대말인 점도 마음에 안 든다.
덧붙여서, 이 책의 관념들에 흥미를 느낀 독자분들께는 보르헤스의 소설집 <픽션들>에 들어 있는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를 읽어 보시라고 권해 드린다. 세 권에 이르는 <푸코의 진자>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적은 분량이나 이 소설의 씨앗이 될 만한 요소들을 남김 없이 갖춘 작품이며, 난해하기로도 에코를 능가한다. 이 작품이야말로 에코가 <푸코의 진자>를 쓰도록 만든 작품일 것이라고 나는 굳게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