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빨강 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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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터키 소설을 읽기는 이번이 두번째.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위치한 이 나라는 묘한 매력을 갖고 있으며 소설들 또한 그러했다.

이 책은 하나의 살인 사건과 범인 찾기라는 면에서 추리소설이지만 긴박감이 느껴지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살인은 극에 달한 갈등을 표출하기 위한 도구일 뿐 사건 자체가 중심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에서 그렇다. 그보다 이 책은 동양과 서양의 틈바구니에 있는 오스만 제국이 겪는 문화적 충격과 이슬람이 요구하는 예술적 가치 사이의 갈등을 궁정 화원의 세밀화가들 사이의 갈등을 빌어 이야기하고 있다.

사실 나는 이슬람 세밀화를 거의, 아마도 전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책을 읽는 동안 자주 책 표지에 있는 비흐자드의 세밀화를 들추어 보았다. 마치 페르시아 카펫처럼 복잡하면서도 평면적인 그 그림은, 확실히 유럽의 그림과는 다른 아름다움을 보여 준다. 또한 이슬람에서 그림이란 언제나 텍스트의 부가물과 같은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림은 언제나 이야기의 한 장면을 나타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서양 화가의 그림, 베네치아의 초상화는 이들에게 충격이었다. 그것은 한 개인의 개별성을 충실히 묘사하고 있을 뿐 아니라 어떤 이야기에 종속된 그림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들에게 낯설고도 일견 매혹적이며, 그렇기 때문에 더욱 위험한 것이었다.

이 새로운 그림이 가져다 준 충격과 매혹 속에서 세밀화가들은 갈등한다. 그것은 단지 전통을 고수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일 뿐 아니라 종교적인 문제이기도 했던 것이다. 어떤 구체적인 형상을 그리는 것을 금기시하는 이슬람에서 그림을 그린다는 것 자체에 내포된 불안감에 더해 세계를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림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불경일 수 있었던 것이다.

오르한 파묵은 무겁다면 무겁달 수 있는 이런 주제를 각 장마다 목소리를 달리하는 인물과 사물의 이야기를 통해서 마치 설화와도 같은 매력적인 스타일로 풀어 내려간다. 화풍을 둘러싼 화가들의 이야기가 한 축이라면 세큐레를 사이에 둔 세 남자, 카라와 하산, 그리고 세큐레의 아버지 에니시테의 긴장과 갈등이 또 한 축을 이루면서 독특한 러브 스토리를 들려준다.

범인을 찾는 과정에서의 반전을 기대한다면 결말은 다소 싱거울 수도 있다. 아마 범인이 누구인지를 눈치채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범인이 드러날 때쯤이면 누가 살인자인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기분이 된다. 한 시대의 끝을 바라보는 슬픔이 우리 마음에도 찾아오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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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만 신화 바그너 히틀러 - 논픽션총서 1
안인희 지음 / 민음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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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책을 선택하는 동기는 여러 가지가 될 수 있겠다. 나 같은 경우는 게르만 신화에 대한 관심 때문에 읽어보게 되었는데,  생각보다 훨씬 폭넓은 주제를, 어렵지 않게 다루고 있어 좋았다.

게르만 신화-북유럽 신화는 남부 유럽의 그리스 로마 신화와는 분위기가 참 다르다. 남쪽의 신들이 다소 경박스럽게 보일 정도라면 이 북구의 신들은 때로 장난스럽기도 하지만 종잡을 수 없으며 불안정하다. 신화도 결국은 대 파국-신들의 황혼으로 끝난다.

책은 이러한 게르만 신화의 특성으로 시작하여 그것이 어떻게 바그너의 손을 거쳐 거창한 양식의 음악 연극으로 확대재생산 되었는가, 그리고 바그너 예술의 사상적 배경이 어떤 식으로 히틀러에게 영향을 주어 20세기 최악의 대학살을 낳게 되었는가를 파헤쳐 나간다. 여기에 독일 근대사의 배경이 합쳐져 근대 독일이 안고 있던 문제점과 사회 문화적 분위기가 이런 비극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도 빼놓지 않고 있다.

일견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이는 신화, 그리고 예술이 이런 식으로 정치의 영역과 연결되는 것을 보는 것은 사실 좀 당황스럽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인간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러한 전용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 실제로 저자는 '옆길로 새기'에서 이중의 현실- 오프라인과 온라인의 세계-을 살고 있는 우리에겐 그것이 더욱 큰 위험이 되리라는 사실을 경고한다.

책을 읽으면서 스스로에게 아쉬웠던 것은 내가 클래식 음악에 무지하고 따라서 바그너도 거의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내 기억에 남아 있는 바그너는 영화 '지옥의 묵시록'의 공중 폭격 장면에 나오는 '발퀴레'의 한 구절 뿐이다. 물론 바그너 음악을 모른다고 해서 책읽기에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음악을 알고 있었다면 훨씬 깊은 이해가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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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랑드르의 화가 대 피터 브뢰겔 Pieter Bruegel the Elder(1525~1569)의 작품 중에는 '눈 속의 사냥꾼', '반역 천사의 타락'등 좋아하는 작품이 많지만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역시 이것이다.


 

 

 

 

 

 

 

 

 

 


대 피터 브뢰겔Pieter the Elder Bruegel (1525-1569)
바벨탑The Tower of Babel
Oil on oak, 1563
44.88 x 61.02 inches [114 x 155 cm]
빈 미술사 박물관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브뢰겔은 이 주제로 또 하나의 그림을 그렸는데 크기가 작아 보통 '작은 바벨탑'으로 불린다.

대 피터 브뢰겔 Pieter the Elder Bruegel (1525-1569)
"작은"바벨탑The "Little" Tower of Babel
Oil on panel, 1563
23.62 x 29.33 inches [60 x 74.5 cm]
Museum Boymans-van Beuningen, Rotterdam


바벨탑의 전설은 창세기 11장에 나오는데, 노아의 후손들이 하늘에 닿는 거대한 탑을 지으려고 했고 그것 때문에 야훼의 노여움을 사 서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여러 다른 언어의 기원 전설로 잘 알려져 있다.
바벨탑의 모델이 되 것은 바빌로니아(메소포타미아 남부 지역)에 세워진 지구라트Ziggurat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신을 모시기 위한 일종의 제단으로 브뢰겔의 그림과는 달리 사각형 기단 위에 좀 더 작은 사각형이 쌓아 올려진, 남미의 계단식 피라미드를 연상케 하는 모습이다.



우르Ur(지금의 이라크 남부에 있는 수메르의 고대 도시)에 남아 있는 지구라트의 유적과 그 복원도

이런 지구라트의 꼭대기에는 신전이 있었고 거기서 신에게 제사를 드렸다. 그러니 성서에 나와 있는 것과는 달리 사실 이것은 신에 맞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신을 모시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신이 야훼는 아니었을 테니 야훼의 분노 또한 정당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브뢰겔은 원래 건조한 사막 지대에 있었을 이 탑을 자신이 살던 플랑드르의 바닷가에 세워 놓았다. 탑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꼭대기는 이미 구름에 가려 있고 발 밑의 집들을 완전히 압도하는 거대함을 자랑하고 있다. 자세히 보면 이 탑은 자연적인 바위산을 토대로 삼고 있는데 전면에 보이는 비탈의 바위, 그보다 좀 올라가 오른쪽에 건물을 뚫고 나와 있는 바위를 보면 화가는 이 산의 자연적 비탈을 이용해 건축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나타내려 한 것 같다.
화면의 가장 앞쪽에는 왕인 듯 보이는 사람이 그의 군인들을 이끌고 나와 있다. 아마도 시찰하러 온 모양이다. 석재가 흩어져 있는 가운데 몇 명의 인부들이 엎드려 무언가 애원하고 있다. 부역이 너무 과중하다고 호소하는 것인지, 더 이상 높이 쌓기는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 건축 사업으로 인한 세금 부담을 도저히 이겨낼 수 없다고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공사를 빨리 진척시키지 못함을 탓하는 권력자에게 한번만 봐주십사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건물을 보자. 곳곳에 비계가 설치되어 있고 사람들이 오르락 내리락 분주히 일하는 건축현장이 보인다. 탑은 위로 가면서 좁아진다는 점을 빼고는 앞에서 본 지구라트와 닮은 점이 별로 없다. 연속되는 아치가 층을 이루며 쌓인 원형 건물 - 이렇게 보면 오히려 로마 콜로세움과의 유사성이 더 두드러진다. 브뢰겔은 외벽이 다 완성되지 않은 부분을 통해 탑의 내부 구조 또한 보여준다. 거대한 건물은 마치 바퀴살처럼 뻗어 있는 내부의 버팀벽을 통해 지지된다. 버팀벽 또한 아치로 연속되면서 건물 내부의 회랑을 만든다. 마치 고딕 건축의 플라잉 버트리스Flying Butress를 건물 내부로 옮겨 놓은 듯한 모양이다.
'작은 바벨탑'을 보면 주변의 풍경도 거의 없이 화면 전체를 이 건물의 위압적인 존재로 가득 채우고 있다. 탑은 먼저 본 그림보다 더 많이 지어져 있다. 짙은 구름이건물의 3분의 2정도 되는 부분에 걸려 있고 외벽도 이미 지어진 부분까지는 거의 덮여 있다. 아치형 입구와 창문의 검은 동공은 거의 무시무시할 정도이다. 탑은 불안정하게 좀 기울어져 있다.
왜 이 그림이 내게 그렇게 깊은 인상을 주었을까를 최근까지도 잘 알지 못했었다. 얼마 전 꿈을 꾸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꿈은 엘리베이터, 이상한 계단, 끝없는 복도들이 이어지는 규모를 알 수 없는 건물을 빠져나가야 하는 내용이었는데, 이런 거대하고 기묘한 건물이 등장하는 꿈을 나는 자주 꾼다. 어쨌든 이 꿈을 꾸고 나서 나는 며칠 전에 본 브뢰겔의 바벨탑 그림을 떠올렸다. 그리고는 깨달았다. 이 그림이 그토록이나 매혹적이었던 것은 내 꿈 속의 건물들과 닮아서였다는 것을 말이다. 저 아치 문 중 하나로 들어가면 꿈 속에서 자주 알 수 없는 존재에 의해 쫓겨 다니던 어두컴컴한 복도, 막다른 골목, 예상치 못한 곳에 위치한 문들, 계단과 사다리, 그리고 브뢰겔은 아마도 상상하지 못했겠지만 엘리베이터 들이 있을 것만 같다. 내 꿈 속의 엘리베이터들은 자주 엄청난 층수를 오르내린다. 백 층이 넘는 숫자들... 그것 역시 이 환상적인 건물과 닮아 있다.
꿈 속에서 나는 건물의 외부를 보는 적이 거의 없다. 나는 언제나 짐작할 수 없는 크기를 가진, 미로 같은 복도가 있는 건물의 속을 헤맬 뿐이다. 하지만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아마 그 건물은 이런 모양을 하고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물론 이 건물의 이미지는 나에게만 인상적인 건 아니었던 게 분명하다. 특히 16세기의 플랑드르에서는 이런 그림들이 많이 그려진 듯 하다. 몇 개만 감상해 보자.


알려지지 않은 플랑드르 대가Unknown Flemish Master, 16세기
바벨탑The Tower of  Babel
시에나 국립미술관Pinacoteca Nazionale, Sienna


헨드릭 반 클레베Hendrick Van Cleve, 16세기
바벨탑의 건설The Construction of Tower of Babel
크뢸러 뮐러 박물관Kroller Muller Museum, Otterlo

구스타브 도레Gustave Dore(1832~1883)
 바벨탑


 
물론 어느 것도 브뢰겔이 주는 신비로움을 능가하진 못하지만 이 건물들 역시 환상적이다. 특히 헨드릭 반 클레브의 작품은 지구라트처럼 사각형의 기단부를 갖고 있으며 건물의 1층과 연결되는 일종의 고가로를 건설해 놓은 점이 독특하다. 이 바벨탑 역시 약간 기울어 있는데 이것은 인간 오만성의 상징인 이 건물이 머지 않아 붕괴될 운명이라는 것을 나타내려 함인 것 같다.
시에나의 국립미술관에 있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화가가 그린 바벨탑은 마치 소라 껍질처럼 오른쪽 위로 향하는 나선형을 그리고 있다. 이것은 후대의 판화가, 삽화가인 구스타브 도레의 바벨탑 이미지와 유사하다. 도레의 바벨탑은 총안처럼 좁은 창문만 나 있어서 마치 감옥이나 요새처럼 보인다. 전혀 들어갈 마음이 나지 않는, 음울한 건물이다.


마지막으로, 바벨탑과는 상관이 없지만 H. R. 기거가 뉴욕을 주제로 그린 연작 시리즈 중 한 점을 보자. 이 스위스 태생 화가는 에일리언 시리즈의 비주얼을 창조한 것으로 유명하다.

H.R. Giger
뉴욕 시티 XI-엑조틱New York City XI-Exotic


그는 뉴욕의 마천루를 자신의 독특한 이미지들과 결합시켜 뉴욕 시리즈를 그렸다. 이런 거대한 건물들은 사람을 위압하고 길을 잃게 만들며 우리가 영화 속에서, 혹은 실제로 경험하듯이 재난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위로 치솟은 이 거대한 건물들에는 괴물적인 무언가가 있다.

 

 브뢰겔 - 16세기 플랑드르 최고의 화가, 시공 아트 026 | 원제 Bruegel

월터 S. 기브슨 (지은이), 김숙 (옮긴이) | 시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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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th99 2005-08-29 1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용이 좋아서 퍼갑니다. 감사합니다.

sun 2009-11-10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담아갑니다.
 
미켈란젤로 Art & Ideas 15
앤소니 휴스 지음, 남경태 옮김 / 한길아트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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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미켈란젤로의 장례식부터 시작한다. 이미 살아서 신화가 된 인물, '천재'의 이미지를 체현한 인물의 장례식은 화려한 것이었지만 그것이 예술가 자신이 원한 방식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우리가 미켈란젤로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은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서부터 허구일까? 저자는 미켈란젤로의 전기적 사실이 대부분 바사리의 '예술가의 생애' 그리고 그가 살아있을 때 그의 제자 콘디비가 쓴 전기에 의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키면서 그 책들의 진실성을 파헤친다. 그러면서 그를 신화화하는 데 일조한 사실들, 예를 들면 미켈란젤로가 언제나 혼자 작업한 '고독한 예술가'라는 이미지, 고객의 취향보다는 자신의 영감에 따라 작업했다는 이야기 등을 사료를 들어 반박한다. 또한 미완성작이 많은 이유를 작가의 심리적 문제에서 찾기보다는 밀려드는 주문과 언제나 우선순위를 차지하기를 원한 당대의 막강한 후원자들의 줄다리기에서 찾음으로써 보다 현실적인 미켈란젤로, 말하자면 작업장에서 돌 가루를 뒤집어쓰고 혼자 일하는 모습이 여러 동료, 조수들을 거느리고 후원자들의 주문에 따라 일하는 모습으로 바뀌었다고 볼 수 있다.

책의 많은 부분은 작품의 제작 과정, 작품 분석에 할애되고 있어 작품의 이해에 도움을 주지만 분량이 그다지 많지 않은 만큼 전기적 사실은 앞서 말한 대로 최근의 연구를 바탕으로 그간의 오해와 허위의 사실들에 의문을 던지는 정도로, 그다지 자세하다고는 할 수 없다. 또한 객관적 사실에 치중해서인지 문체는 건조하고 그다지 매력적이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다만 '고독하고 괴팍한 천재'라는 이미지 뒤에 숨은 그의 진짜 모습이 어떤 것이었는지, 이 예술가의 다른 면모를 보여 준다는 점은 이 책의 장점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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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수의 결사단 1
훌리아 나바로 지음, 김수진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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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엔 역시 추리소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머리 아프지 않고 흥미진진하기까지 하니 더위를 잊게 해 주기엔 그만이다.

이 책 역시 역사 추리소설로 분류할 수 있지만 '범인찾기'에 역점을 둔 본격적인 추리소설은 아니다. 물론 범인 혹은 범인들의 실체가 드러나는 것은 후반부이지만 독자들은 초반부터 어떤 식으로 일이 진행되어 가는 것인지 눈치챌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성 수의는 예수가 죽었을 때 아리마테아의 요셉이 가져다가 그의 시신을 감쌌던 아마포를 말하는 것으로 예수의 형상이 그대로 찍혀 있다고 해서 유명해진, 이탈리아 토리노 대성당에 있는 유명한 성물이다.

사건은 문제의 성당, 토리노 두오모에 화재가 발생하면서 시작된다. 예술부(이탈리아 경찰의 한 분과로 예술품 관련 사건을 담당한다고 한다. 워낙 문화재가 많은 나라다 보니 이런 것도 필요하겠구나 싶다) 반장인 마르코가 이 사건과 과거의 사건들이 모두 수의와 연관된 것이라는 가정을 세우면서 이 성물을 둘러싼 다툼의 역사가 드러난다. 템플 기사단과 에데사(지금의 터키 우르파)의 모종의 기독교 교단, 그리고 이탈리아 경찰이 벌이는 숨바꼭질이 펼쳐지고 예수의 시대와 십자군 시대, 그리고 현재가 중첩되면서 수의를 차지하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과 그것을 막으려는 자들이 부딪히는 것이다.

바울이 선교를 시작하면서 이미 기독교는 예수의 가르침과 별 상관 없는 종교로 변해 버렸다고 하지만 그것이 권력과 결탁하면서부터 결정적으로 타락했다. 내게는 이 모든 것이 광신의 증거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종교를 위해서, 혹은 신을 위해서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끔찍한 일들이 자행되어 왔는지 모른다. 독실한 신앙과 광신은 사실상 몇 발자국 떨어져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더우기 신앙을 내세워 결국은 자기 자신, 혹은 자신들 집단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것은 정말이지 역겹다. 그들은 신앙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자신들에게 봉사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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