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읽다 보니 얼마 전에 읽었던 브라질 작가 베리시무의 <비프스튜 자살클럽>이 생각났다. 두 권의 책을 모두 읽은 분들이라면 아실 테지만 둘 다 음식이 상당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더욱이 그것이 죽음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보다 환상적이며 죽음에 대한 태도도 보다 ‘건전’한 에코 쪽이 더 좋았다.
발터 뫼르스의 차모니아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들 중 하나인 이 책은 다른 차모니아 소설들보다는 보다 ‘가정적’인 분위기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그리고 있다. 말하자면 요리가 나오고 무대는 소름마법사의 성과 그 주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대륙 곳곳을 누볐던 <루모>나 광대한 지하세계 탐험이 그려졌던 <꿈꾸는 책들의 도시>보다는 스케일이 작게 느껴지기도 하지만(분량도 적은 편. 굳이 두 권으로 만들 필요가 없었을듯하다) 그래도 환상적인 차모니아의 존재들이 많이 나오니 그 점에 대해서는 염려할 필요가 없다.
내용은 비교적 간단하다. 병자들로 가득찬 도시 슬레트바야(동유럽의 도시를 떠오르게 하는 지명이다. 구체적으로는 브라티슬라바)에서 그 질병들의 생산자인 소름마법사 아이스핀과 주인 잃고 굶주림으로 죽을 지경인 코양이 에코가 계약을 한다. 한달동안 호화롭게 잘 먹여 살찌워주는 대가로 한 달 후 코양이는 마법사의 연금술에 필요한 재료인 코양이기름을 내놓아야 하는 것이다. 굶주려 죽을 것이냐 때깔 좋게 잘 먹고 죽을 것이냐의 기로에서 에코는 당연히 후자를 선택한다. 그러나 배가 불러지니 죽기 싫어지는 건 당연한 일. 목숨을 지키려는 에코와 기름을 얻으려는 아이스핀의 대결이 후반부를 차지한다…

먹고-죽기
먹는다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 욕망 가운데 하나이다. 나도 먹는 걸 좋아한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의 행복감은 다른 어떤 감정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강렬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또한 과도한 미식 취미에는 거부감을 갖고 있다. 과유불급이라고 무엇이든 지나친 것엔 타락의 기운이 서려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서두에 언급한 <비프스튜 자살클럽>에서는 회원들이 사족을 못 쓰는 음식들이 그 자신의 죽음의 도구가 되며 심지어 바로 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더욱더 거부할 수 없는 마력을 갖는다.
불쌍한 코양이 에코는 굶주려 죽는다는 끔찍한 운명을 피하기 위해 아이스핀의 제안을 받아들이지만 그것은 고작해야 한 달간의 생명 연장일 뿐이다. 물론 그동안 소박한 음식만을 먹어 왔던 에코는 그 한 달간 남들은 상상도 못할 호사스런 음식들을 먹을 뿐 아니라 소름마법사의 특기인 변태식(變態食-말 그대로 변신하게 해주는 음식)을 먹고 연어, 가죽쥐, 데몬꿀벌로 변하는 희귀한 경험까지 하게 된다. 아이스핀이 데몬꿀벌로 변신하게 해주는 변태식-꿀바른 빵을 내놓으면서 곁들인 쪽지에는 식욕과 죽음의 욕망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짐작케하는 내용이 있다.

…하지만 조심해서 씹어라. 드물지만 침이 안 뽑힌 벌이 들어가 있는 경우도 있으니까. 입천장이나 혓바닥에 가시가 박히면 죽지는 않지만 어쨌거나 한동안 아주 불편해져요. 사실 그런 위험도 벌빵을 먹는 즐거움의 일부라고들 하지.(2권 8페이지)

말하자면 독이 완전히 제거된 것인지 알지 못하고 복어를 먹는 시식협회의 회원들(<비프스튜 자살클럽>)처럼 위험이 가까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식욕을 돋우는 양념이 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아이스핀과 에코가 벌이는 와인 파티에 등장하는 피를 먹고 자란 포도주 이야기는 또 어떤가? 이렇게 이 소설에서는 죽음과 진미가 밀접하게 얽혀 있다.
실제로 아이스핀이 에코에게 먹이는 음식은 건강식과는 거리가 멀다. 고열량식을 듬뿍 먹여서 아마 굳이 죽이지 않더라도 그런 식으로 먹다간 동맥경화, 고혈압, 당뇨 등으로 생명이 단축되기 십상인 것이다. 그러나 혈관이 막히는 부작용은 상상할 수도 없이 굶주림에 일상적으로 노출되어 긴긴 세월을 보낸 우리의 유전자는 고열량의 음식을 사랑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는 것이다.

뒤틀린 사랑
그러나 이 이야기에는 요리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이것은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이기도 한데, 그 주인공은 다름 아닌 소름마법사 수쿠비우스 아이스핀이다. 위에서 보았듯이 이 연금술사는 매우 현란한 솜씨를 자랑하는 요리의 달인이기도 한데, 그 솜씨는 곁에 없는 그의 연인-그리고 그는 알지 못했지만 이미 죽은 그의 연인-을 위해 만든 호화로운 요리들을 통해 갈고 닦아진 것이다. 물론 그의 손을 거친 것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이 요리들도 에코를 구역질하게 만드는 매우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연금술사의 목표는 ‘현자의 돌을 찾고, 영구운동기관을 만들고, 불멸에 도달하는 것, 그리고 납을 금으로 변화시키는 것’(2권 185페이지)이다. 그리고 아이스핀은 이미 금 아닌 것으로 금을 만들어내는 방법을 안다. 그가 그토록 필요로 하는 코양이기름은 다름아닌 불멸을 얻기 위한 것인데 이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이미 죽은 후에 찾아낸 그의 연인 플로리아를 되살리기 위해서인 것이다. 무덤에서 연인을 꺼내 오는 이 ‘미친 사랑’의 이미지는 지붕 밑에서 아이스핀과 동거하는 가죽쥐들의 이미지와 겹쳐지면서 이 마법사에게 드라큘라적인 면모를 부여한다(실제로 아이스핀은 자신의 뱀파이어 기질을 북돋기도 한다).
이 광기의 사랑에 소름마녀 이자누엘라의 아이스핀에 대한 짝사랑이 더해진다. 아마도 아이스핀이 이자누엘라와 에코의 계략에 넘어가 죽은 연인 대신 살아 있는 연인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면 이야기는 모두에게 해피엔딩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에코와 보낸 한 달로는 아이스핀의 심장에 쌓인 굳은살을 모두 벗겨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다른 존재의 생명을 거둬감으로써 연금술을 완성시키려는 아이스핀과 살아있는 식물-소름참나무-로 된 집에 살며 지하실 가득 키우는 식물들로 치유약을 만들고 사랑의 묘약을 만드는 이자누엘라는 반대의 지점에 서 있다. 어떤 것이 더욱 강력한지는 클라이맥스에서 알 수 있다.

뫼르스의 차모니아다운 그 모든 존재들
말했듯이 줄거리가 복잡하진 않지만 이 책도 다른 차모니아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신기한 상상력의 산물들로 가득 차 있다. 고피트 레터케를의 옛 동화를 힐데군스트 폰 미텐메츠(<꿈꾸는 책들의 도시>의 주인공인 작가 공룡)가 다시 쓴 것을 발터 뫼르스가 번역했다고 주장하는 첫 장부터가 그렇다. 그의 다른 소설들처럼 여기에도 저자가 직접 그린 매력적인 삽화들이 책 읽기의 재미를 더해준다. 홈통에서 잠든 코양이 에코와 울퉁불퉁한 모습이지만 더없이 선량한 눈빛을 한 무당개구리 그림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그런가 하면 모든 신기한 존재들 중에서도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고통의 초’였다. 아이스핀의 성격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존재라고 할 수 있겠는데, 척추와 신경조직으로 된 심지에 붙은 불로 인한 고통으로 신음하면서 달팽이처럼 느릿느릿 움직이는 이 초는 매우 끔찍하면서 독창적이었다. 풍부한 지식을 자랑하면서도 언제나 어려운 단어를 발음할 때면 음절들을 뒤섞어버리는 외눈박이 부엉이 피요도르 F. 피요도르, ‘아무도 이해 못 할’ 성격을 가진 가죽쥐들 블라드 1세부터 2,438세까지, 살생본능에 시달리는 백설과부, 그림자 괴물 등이 출현해 우리를 즐겁게 혹은 두렵게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슬레트바야 전체를 굽어보는 위치에 우뚝 솟은 소름마법사의 성이 있다. 아이스핀이 주인으로 오기 전부터도 구구절절한 역사와 갖가지 전설들로 채식된 성은 유리창 없는 창문들, 아이스핀의 재난 그림들과 괴물 박제들로 으스스하게 꾸며져 있어 공포 영화의 배경으로 더없이 어울린다. 물론 이런 장소에 없어선 안 될 지하 공간도 많다. 한 마디로 주인과 아주 잘 맞는 공간이다. 이 성은 위치상으로도 슬레트바야를 압도하지만 실제로도 도시를 지배한다.

‘몇몇 시커먼 창구멍에는 기이하게 구부러진 망원경이 설치돼 있었다. 이 망원경들을 가지고 소름마법사는 도시의 어느 지점이든 염탐할 수가 있었다. 원할 때는 언제든.’ (1권 22페이지)

말하자면 아이스핀의 성은 지배 권력의 가시물일 뿐 아니라 판옵티콘이자 스스로의 광기를 가둬 두는 요새이기도 한 것이다. 카프카의 <성>이 생각난 것은 그래서인지도 모르겠다(그래서 도시 이름도 ‘슬레트바야’인가?). 다가갈 수 없는, 과연 실재하는 것인지 모호하지만 모든 사람들을 짓누르는 성. 죽음으로 그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기로 되어 있던 코양이의 성 내부로부터의 반란은 그래서 더욱 유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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