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거로 읽는 역사도시의 기억들, 건축학자 손세관의 연구노트
이 책들은 저자의 시리즈물의 1차분이다. 책의 서문, 그리고 내용으로 알 수 있듯이 저자는 일반적인 건축서에서 도시를 다루는 방법과는 좀 다른 관점으로 도시를 바라본다. 관광객의 눈길을 단숨에 사로잡는 기념비적 건축물들을 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이 그 안에서 살아 가는 공간으로서의 도시, 우리가 영염집이라 부르고 그다지 눈길을 주지 않게 되는 건축물들을 중심으로 살펴 보는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이 두 도시는 내가 가봤었던 곳이고 이 도시들의 건축에 대한 책들도 상당히 읽었음에도 이 책들의 내용은 무척 신선하게 다가왔다. 저자는 먼저 도시가 형성되는 과정, 역사적 맥락, 시대에 따라 어떤 방향으로 도시가 변모하고 확장되었는지를 살피고 그런 변화와 함께 어떻게 주거용 건축물들의 형태가 변화해왔는지, 또 그런 변화를 가져온 요인들은 무엇인지까지를 꼼꼼히 짚어 준다.
흔히 '건축사적 가치가 있다'고 표현되는 기념비적 건축물들-여기서 다뤄지는 유럽 지역에선 주로 교회와 궁전, 시청사들이 되겠는데-은 그 도시의 첫인상을 결정하고 도시를 대표하는 얼굴이 된다. 그런 이유로 잠깐 도시를 들르는 관광객들은 그런 건물들만을 둘러보게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도 잘 알다시피 그런 유적들만이 도시를 이루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도시의 분위기, 개성을 나타내는 것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집들의 형태와 배치가 아닐까?
피렌체와 베네치아는 아름답다고 하는 이탈리아 도시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도시들이다. 운하와 파스텔 색조의 건축물들이 이뤄내는 꿈같은 분위기의 베네치아와 르네상스건축의 보물들이 가득 들어찬 피렌체는 건축에 문외한인 사람들에게조차도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발산한다. 그럼 이 도시들의 이같은 매력은 단지 아름답기 때문에 생긴 것일까? 물론 그렇지는 않다. 무엇보다도 이 도시들은 오랜 역사의 흔적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에 매력적이다.
이 시리즈에서는 도시의 구획과 부지가 시대별로 어떻게 변화, 확장되었는지와 더불어 개별 주택은 어떠한 형태로 구성되었는지를 계층별로 살핀다. 피렌체와 베네치아는 형성부터 달랐을 뿐 아니라 이후에도 매우 다른 개성을 갖춘 도시로 발전해왔다. 이 책에서는 그런 형태를 갖추게 된 사회문화적 요인들과 지정학적 요인들을 아울러 설명함으로써 도시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열어준다. 말하자면 중세 도시국가들의 치열한 경쟁의 산물인 피렌체의 중세 탑상주택들과 그 후손인 팔라초들의 방어적 외관의 필요성을 알게 되고 베네치아의 소광장이나 막다른 골목에 놓인 우물 뚜껑에 대한 궁금증은 '칼레 코르테'라는 독특한 형식, 즉 땅이 부족한 베네치아에서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한 지혜라는 것을 알게 된다. 만일 다시 이 도시들에 갈 기회가 된다면 기념비적 건물들뿐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주거 형식에 대해서도 좀 더 살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내용이었다.
한편 이런 책들을 읽으면 어쩔 수 없이 우리의 도시들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국내 여행을 하면서 늘 느끼는 것은 규모의 차이를 빼고는 모든 도시들이, 심지어는 작은 읍내조차도 모두 똑같아 보인다는 것이다. 몰개성한 콘크리트 건물들에 어디서나 똑같은 빨강, 노랑, 주황 같은 원색이 주조인 간판으로 전면을 도배한 거리들은 도대체 이 도시와 저 도시의 차이를 알 수 없게 만든다. 사람들이 사는 집은 또 어떤가. 과밀한 도시지역의 아파트는 그래도 필요악이란 생각이 들지만 농촌지역에 느닷없이 서있는 아파트들은 언제나 경악스럽다. 이 주거 환경의 황폐를 단지 전쟁과 식민지배의 탓으로만 돌려야 하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집'이 '부동산'으로 변모해가면서 우리의 도시들은 역사도, 지역적 개성도 모두 잃어버리고 탐욕의 대상으로 전락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