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슐러 K. 르귄Ursula K. LeGuin의 판타지인 어스시 시리즈는 ‘어스시Earthsea’라고 불리는(우리말로 하자면 다도해쯤 될까?) 가상의 세계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원래 총 6권인데 우리나라에는 아직 4권까지만 나와 있다. 소설의 주인공 게드는 곤트 섬 출신의 마법사인데 첫 권 ‘어스시의 마법사’에서는 그의 어린 시절과 마법 수업, 그리고 ‘그림자’와의 대결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림자-영혼, 무의식 또는 나쁜 반쪽
곤트의 대장장이 아들로 태어난 게드는 어린 시절 마을에 침입한 해적의 무리를 안개로 유인해 물리칠 정도로 뛰어난 마법의 능력을 보인다. 그의 재능을 알아본 마법사 오지언이 그를 가르치려고 하지만 언제나 ‘세계의 평형’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위대한 능력 같은 것은 보여주지 않는 스승의 말은, 너무나 젊고, 흘러 넘치는 힘에 이끌리는 게드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현자들의 섬 로크로 가 본격적인 마법 수업을 받고 능력을 키워 나가지만 그를 시기하는 다른 학생 ‘벽옥(Jesper)’과의 마법 대결에서 어둠과 죽음의 세계로 통하는 문을 열게 되고 거기서 튀어 나온 ‘그림자’에게 심한 상처를 입고 이후 그림자의 추격을 받게 된다.
여기 등장하는 ‘그림자’는 일종의 괴물 같은 존재로 로크의 현자조차 ‘어디서 왔는지, 무엇인지 모르는’ 그러한 존재이다. 우선 그림자를 불러 내게 되는 과정을 보자. ‘벽옥’은 귀족의 아들로, 그의 깍듯하지만 오만한 태도는 로크에 온 첫날부터 게드를 언짢게 한다. 그러한 갈등이 결국 두 사람을 금지된 마법 대결에까지 이르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게드를 이끄는 것 역시 오만함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된다. 벽옥이 자신의 신분과 능력에 대해 오만한 마음을 갖고 있다면 게드 또한 자신이 누구보다도 뛰어난 능력을 가진 자라는 오만함을 갖고 있다. 그런 오만과 과시하고픈 마음이 그를 현명한 스승 오지언으로부터 떼어냈을 뿐 아니라 그림자를 풀어 놓게 만든 행동으로 이끈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의 오만함을 인식하지 못하지만 그러한 성향을 벽옥으로부터 보고 분노하는 것이다. 성서의 비유를 들자면 ‘남의 눈의 티끌은 보면서 제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실 게드는 그림자를 본격적으로 풀어놓기 전에 이미 한 번 그 존재와 마주친 적이 있다. 그가 아직 모르는 마법을 해 보라는 부추김을 받고 스승의 책을 훔쳐 보던 때였다. 이 역시 무언가 대단한 능력을 갖고 싶다는 그의 과욕이 부른 화였다.
자신의 힘을 잘못된 방향으로 사용한 게드는 그 대가로 그림자의 추격을 받게 된다. 뒤에 얘기하겠지만 이 세계에서는 사람이나 사물의 진짜 이름을 안다는 것은 곧 그 존재에 대해 힘을 행사할 수 있다는 의미인데, 그림자는 게드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이 사실은 게드를 더한층 두렵게 한다.
이 알 수 없는 존재이면서, 또한 게드의 이름을 알고 있을 정도로 수상쩍은 친밀함을 보이는 ‘그림자’는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인가? 사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속 밑바닥에는 우리가 보고 싶어하지 않고, 알고 싶어하지 않는 어두운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때때로 그것은 그저 어리석고 유치한 부분이기도 하지만 종종 사악하고 잔인한 부분이기도 하다. 심리학자 융(C. G. Jung, 1879~1961)은 의식에 의해 억압된 이 어두운 부분을 적절하게도 ‘그림자’라고 불렀다. 물론 게드를 쫓는 그림자를 이 심리학적 ‘그림자’에 국한하여 생각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이 개념은 그림자의 정체를 이해하는 데 틀림없이 도움을 준다.

M. C 에셔Maurits Cornelis Escher(1898~1972)
서클 리미트4 Circle Limit IV , 1960
목판화woodcut in black and ocre, printed from 2 blocks
에셔의 이 재미있는 작품에서 우리는 인간 마음의 지형도 같은 것을 보게 된다. 이 그림은 어두운 부분을 주로 보는가, 밝은 부분을 주로 보는가에 따라 악마로도, 천사로도 보인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 마음에서 의식이 허용하는 부분, 의식이 인정할 수 있는 부분만 보려 하지만 보지 않는다고 해서 어두운 부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게드는 자신의 오만함을 벽옥에게 전가시키고는 자신의 어두운 부분에 대해서는 알려고도 하지 않은 채 세계의 균열을 가져왔다. 이 마음속의 어두운 부분은 이렇게 우리가 억누르고 감추면 다른 경로로 돌아와 우리의 뒤통수를 친다. 그러므로 그림자에 쫓기던 게드가 반대로 그림자를 쫓고, 그것과 맞서고 마침내 그림자를 불러 들여 자신의 어두운 부분까지도 인정하고, 다스릴 수 있는 온전한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소설의 결말 부분은 매우 적절하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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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묘약 E.T.A. 호프만 지음, 박계수 옮김/황금가지 |
이러한 그림자, 혹은 ‘나쁜 반쪽’의 문제를 탁월하게 다룬 작품으로는 E.T.A 호프만(1776~1822)의 ‘악마의 묘약’이 있다. 여기서의 그림자, 나쁜 반쪽은 괴물이나 알 수 없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으로 나타나지만 그럼으로 해서 더한층 알 수 없고 우울한 분위기가 흐른다. 여기서도 ‘천사 같은’ 메다르두스 수도사를 악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발단은 자신의 열정적인 설교가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 그로 인해 자신은 이미 성자라는 생각을 하게 된 데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경건한 하느님의 대변자라고 굳게 믿고 있었지만 사실은 다른 모든 수도사들을 능가하는 존재라는 오만함이 이미 그의 마음을 좀먹고 있었던 것이다. 능력 있는 사람들에게 오만함이란 얼마나 피해가기 어려운 것인지!
이런 소설들과는 조금 방향이 다르지만 역시 흥미로운 방식으로 그림자를 다룬 소설이 있다. 이것은 그림자가 그 사람의 영혼이라는 오래된 믿음과 관계가 있다.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Adelbert von Chamisso(1781~1838)의 ‘페터 슐레밀의 기이한 이야기’라는 소설인데 여기서 가난한 주인공 페터는 금화가 끝없이 나오는 주머니를 받고 자신의 그림자를 팔아버린다. 그는 무한한 양의 황금을 차지했지만 행복한 삶은 그에게서 영원히 멀어져 버린다. 악마에게 영혼을 판다는 이야기는 많지만 여기선 그 영혼이 그림자로 나타난다는 것이 흥미롭다. 그러므로, 그림자는 단순히 나쁜 것, 없애버려야 할 것만은 아닌 것이다. 자신의 심연을 들여다보고 자신이 진실로 어떤 존재인지를 아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고 이 책들은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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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투안의 무덤 어슐러 K. 르 귄 지음, 이지연, 최준영 옮김/황금가지 |
어스시 시리즈의 두번째 책 ‘아투안의 무덤’에서는 어둠의 정령들에게 바쳐진 소녀, 테나가 주인공이다. 빛이 들어올 수 없는 지하 미로에 갇힌 이 존재들은 원형적인 악의 존재들이다. 인간이 다루기에는 너무 오래되고 강력한 악. 그래서 게드는 단지 테나를 데리고 그곳을 탈출할 수 있을 뿐이다. 소녀의 원래 이름은 테나이지만 무덤의 대무녀가 되면서 이름을 그녀는 빼앗기고 ‘삼켜진 자’라는 뜻의 ‘아르하’라고 불릴 뿐이다. 이 세계에서 이름은 단지 정체성을 나타내는 표지일 뿐 아니라 정체성 그 자체이기 때문에 이름을 빼앗는다는 것은 인간성 자체를 빼앗는다는 것이 된다.
이름의 힘
게드가 로크 섬에서 배우는 마법의 핵심은 이름 외우기, 이름 알아내기이다. 사물이나 인간, 동물의 진짜 이름을 알고 그 이름을 쓸 수 있는 힘이 있으면 이름으로써 존재에게 힘을 행사할 수 있다.
이런 내용을 읽고 내게 처음 떠오른 생각은 프레이저(James George Frazer)의 ‘황금 가지’에서 읽었던 것이었다. 예로 든 원시 부족 중 하나는 이름에 그 사람의 영혼이 담겨 있다고 생각하여 본명을 쓰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자신의 진짜 이름은 아무도 모르게 숨겨 두고 평시에는 다른 이름을 부른다는데, 이 어스시 세계의 사람들이 바로 그렇다. 게드는 평소 ‘새매’라는 이름을 쓰고 게드의 친구 에스타리올은 ‘들콩’이라 불리고… 뭐 이런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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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과 어머니 원형 C. G.융 지음, 한국융연구원 C.G. 융 저작 번역위원회 옮김/솔출판사 |
이름에 대한 이런 생각은 사실 아주 오래되고 거의 전 문화권에 퍼져 있는 것이다. 융의 ‘영웅과 어머니 원형’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자.
명명 행위는 세례와 마찬가지로 인격의 창조를 위해서 엄청나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옛날부터 이름에는 마술적인 위력이 있는 것으로 믿어져 왔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비밀스러운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를 지배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중략) 그러므로 이름을 준다는 것은 힘을 준다는 것, 특정한 인격이나 혼을 부여하는 것이다.
어스시 세계의 이름은 정확히 이런 의미를 갖고 있다. 사실은 우리에게도 이런 생각은 그리 낯선 것이 아니다. 예전에 우리 조상들도 본명이 함부로 불리는 것을 꺼려하여 자나 호, 아명과 같은 다른 이름들을 썼다. 어린 아이에게 닥칠 화를 예방하려고 천한 이름을 일부러 붙여 주기도 했다. 지금도 새로 태어난 아기에게 이름을 주는 것은 부모들을 많이 고민하도록 만드는 문제이다. 서양인들이 아기에게 성인들의 이름을 따서 붙여주는 것은 그 성인의 가호와 함께, 그 이름이 가진 힘을 아이에게 부여해주기 위함이다.
어스시에서 진짜 이름이 ‘용들이 쓰는 태곳적 언어’로 되어 있다는 설명에서는 식물이나 동물의 학명이 생각났다. 우리가 보통 때 부르는 이름들과 달리 이 전문적인 이름들은 어느 나라의 학자들에게도 바로 그 생물을 나타내 준다.
그리고 지금 인터넷의 가상 세계에서 바로 이름은 그런 식으로 쓰인다. 본명은 ‘개인정보보호’의 방패로 싸여 뒤로 감춰지고 아이디를 써야 하며, 더 나아가서는 제 2의 이름이 된 아이디 대신 별명이 쓰이기도 한다. 가상 세계에서 우리는 본명을 이중 삼중의 방패로 가려 두고자 한다. 사실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이름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주민등록번호인데,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로 이루어진 하나의 쌍은 정확히 그 사람을 나타내주는 좌표로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이 웹 세상의 ‘마법사’들은 우리가 숨겨두고자 하는 아이덴티티들을 곧잘 찾아내어 사용한다, 주로 나쁜 방법으로. 이름+주민등록번호를 다른 사람으로부터 ‘훔쳐낼 수 있다면’ 이 가상 세계에서는 그 사람으로 ‘변신’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사실상 이름뿐 아니라 언어 자체가 지극히 자의적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하지만 수천년, 혹은 그 이상 언어를 써 오면서 언어가 지시하는 바(기의)와 언어(기표)는 너무나 밀접하게 우리 머릿속에서, 마음속에서 연결되어 있어서 자의적인 음절일 뿐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마치 사물의 이름이 그 사물 자체인 것처럼 생각되는 것이다. 장미는 장미가 아니라 다른 이름으로 불려도 여전히 향기롭다고 하지만 장미가 ‘쓰레기’라고 불려도 과연 그럴지는 의심스럽다. 언어의 진짜 힘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