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시력이 안 좋다. 어느 정도로 안 좋은가 하면 요즘 사람들이 많이 하는 시력교정 수술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나쁘다. 아니, 수술 자체야 받을 수 있겠지만 해봤자 전혀 시력 개선이 안 되는 지경인지라 안과의사들이 권하지 않는다.
어렸을 때부터 눈이 나빴다. 그래서 유치원 다닐 때부터 안경을 끼기 시작했다. 내 인생 최초의 암울했던 기억은 처음 안경을 맞춰 끼고 유치원에 가던 날이다. 절대 유치원에 안 가겠다고 버티다가 출근하는 엄마아빠한테 잔뜩 혼나고 결국 일하는 언니 손에 질질 끌려가다시피 유치원 문 앞에 도착했다. 문 앞에서도 한참을 실갱이하다가 결국 선생님 손에 이끌려 교실로 들어갔는데, 그때 온몸으로 느껴지던 아이들의 시선이라니.. 정말 어린 맘에도 죽고 싶었다. -_-
중학생 때부터는 렌즈, 그것도 난시 교정이 되는 하드렌즈를 꼈고 지금도 여전히 끼고 있다. 요새는 옛날보다 렌즈 기술이 좋아졌네 어쩌네 하지만 내가 느끼기에는 똑같다. 가격이야 물론 옛날에 비해 엄청나게 올랐지만 그렇다고 월등히 잘 보이는 것도, 엄청시리 눈이 편한 것도 아니다. 그냥 그렇게 적응하며 살 뿐이다.
그렇다면 난 왜 이렇게 눈이 나빠졌을까? 울 엄마 주장으로는 어렸을 때부터 TV를 코앞에서 봤기 때문이란다. 그럴지도.. 하지만 그건 세상 모든 엄마들이 자기 자식들을 겁주기 위해 하는 말 아니던가. 그리고 TV시청과 시력은 무관하다는 기사를 읽은 기억도 있다. 또 다른 의견으로는 책을 많이 봐서 그렇다고도 하는데, 그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 좋겠지만 나보다 몇 갑절 더 많은 책을 읽은 친구는 여전히 1.5의 시력을 자랑하고, 또 유치원 시절까지 내가 책을 읽어봤자 얼마나 읽었겠는가 말이다. -_- 그렇다면 단 하나 남은 유력한 설은 유전. 그렇다. 나는 아빠 땜에 눈이 나쁜 거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타고난 대로 살 수밖에.
그런데 워낙에 눈이 나쁘다 보니, 오래 전부터 가슴속 깊이 싹터온 불안이 하나 있다. 이러다가 혹시 영영 앞을 못 보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끔찍한 생각이긴 하지만 아예 가능성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요새도 실명을 유발하는 병들은 꽤 있고, 의학적으로 어찌해볼 수 없는 시력 퇴화 현상도 있는 거니까. 시력을 잃게 되면 책도 못 읽고, TV도 못 보고, 인터넷도 맘대로 못하고, 물론 바깥 외출도 불편하고..
하지만 세상에는 수많은 시각장애자들이 있고 그들은 나름의 삶을 알차게 꾸려나가고 있지 않은가. 단지 사는 방식의 문제일 뿐이다. 그래도 혹시 닥쳐올지 모르는 내 미래를 위해 저금하는 심정으로 하는 일이 하나 있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도서관에서의 봉사활동이 그것이다. 원래는 녹음봉사를 하고 싶었는데 담당자가 내 꾀꼬리 같은 목소리를 몰라주고;; 입력봉사를 맡겼다. 하긴 내가 집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고 했으니까 그랬겠지만(이렇게라도 스스로 위안해야 한다).
입력봉사는 스캔한 책을 받아다가 적절한 편집을 해서 점자도서나 디스켓도서를 만들 수 있게 하는 일이다. 때로는 책 한 권을 통째로 입력하기도 한다. 처음에는 책도 읽고 봉사도 하니 와 좋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해보면 암 생각 없이 기계처럼 입력만 하게 된다. 가끔은 출판사에서 책을 낼 때마다 그 파일을 시각장애인 도서관에 기증해주면 안 되나..하는 생각도 든다. 그럼 이런 2중 작업을 거치지 않고 시각장애인들도 일반인들처럼 바로바로 신간을 접할 수 있을 텐데.. 뭐 물론 여러 가지 문제가 있으니까 못하는 거겠지만.
내가 입력한 책들이 리스트로 만들어져 필요한 사람들에게 서비스되고 있는 걸 보면 기분이 좋다. 하지만 내가 저 책들을 직접 이용할 날은 가급적 오지 말았으면 하는 게 솔직한 내 바람.
지금도 눈이 아파서 쪼끔 걱정이다. 컴터 끄고 책도 읽지 말고 자야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