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la 2003-09-03
[starla] 상상의 서재에 이미 보관된 책들에 바침 * 일이 하도 안되어 잠시 업무중 소일;; -----------------------------------
책이 너무 비싸서 살 수 없던 때가 있다. 대학시절, 게을러 빠져서 남들 다 하는 아르바이트도 하지 않았던 나는 늘 용돈이 궁했다. 용돈은 궁해도 갖고 싶은 건 많았다.
기숙사에 들어있었기 때문에 세간살이가 필요한 건 아니었다. 화장도 안 했으니 몸치장에 돈이 드는 것도 아니었다. 오로지 갖고 싶은 것은 책 뿐이었던 시절이다.
그렇다고 무진장 자주, 많이 책을 샀던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학교 도서관에 있는 책들로만도 충분하고도 남았다. 하루키도, 이윤기도, 카잔차키스도, 도스토예프스키도, 모두 도서관의 먼지나는 서가 사이에 서서 읽었다.
그러나 어느 학교도서관이나 그렇듯, '새' 소설에 관해서는 도서관이 도와줄 바가 없었다. 문예계간지의 연재에는 한국작가의 소설 밖에 없어서 계간지만 내리 반나절을 뒤적이고 난 오후엔 마치 한쪽 바퀴로 고속도로를 달리는 고물차가 된 기분이었다.
그러면 그 때는 비로소 학교서점에 갈 시간이다. 대체로 한산한 캠퍼스의 기분좋은 공기를 마시면서 서점에 당도한다. 그리고 읽어내린다. 서가에 꽂힌 책들의 제목을. 간혹 수줍고 간혹 도도하고 간혹 요염하게 서가에 꽂힌 자태들의 면면을 본다. 손짓해 부르는 책도 있고 조용히 쏘아보는 책도 있다. 때로는 아무 말도 안 해주는 책에 눈길이 붙잡힌다.
한 시간여를 서가 앞에서 서성이다가 마침내 한 권을 고를 때의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선택에는 책값이 싸서, 라는 이유가 흔했다(어처구니없는가?). 두꺼우니까, 도 흔했다.
단 한 권을 계산대에 올리고 돌아서면 최종심에서 탈락한 책들이 뒤통수를 노려보는 것 같았다. 서너번의 서점회람에서 번번이 탈락하고 만 어떤 책은 다시는 내가 사서는 안될 것 같았다. "그렇게 나를 무시한 주제에"라고 책이 말할 것 같았다.
늘상 마지막 순간에 선택되지 못한 책들이 아직도 뇌리에 선하다.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어제>, 페터 회의 <눈에 대한 스밀라의 감각>,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 이들 대신에 선택된 작가들은 아직도 '잘 나가'는 데 말이다. 폴 오스터도, 줄리안 반즈도, 알랭 드 보통도.
선택하지 못한 책들을 생각하면 어떻게 빌어도 다시는 용서받지 못할 것 같은, 울적한 마음이 되고 만다. 하지만 돈이 없어서 그랬던 것을 난들 어찌할까. 이미 수십번 넘게 그 제목 앞에 서성인 끝에 내 맘대로 소설의 스토리까지 짐작해버린 저 책들은, 어쩌면 좋을까.
상상의 서재에는, 아니 혹은 지금의 이 '나의 서재'에는 남들 모르게 그런 책도 슬쩍 가져다 둘 수 있겠다. 책 한 권 사는 것이 한 주 최고의 도락이었던 그 시절의 나를 증거하는 '구입되지 않은 책들'에게 용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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