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la 2003-09-04
[starla] 추리소설을 읽는 이유 -이어서 이어서 ----------------------------
노력을 전혀 안 해봤을 거라고 지레짐작하지는 말라. 시간날 때면 열심히 연마도 해보았다. 한 줄 한 줄이 추리의 맥이요 실타래라는 생각으로 눈에 기합을 넣고 읽어봤다. 등장인물의 이름을 종이에 쓰고 연관관계를 실선과 점선과 동그라미로 표시했다. 각자 주고받는 범행동기를 옆에 썼다. 범행시각과 관련된 알리바이와 범행트릭과 관련된 실행가능도를 메모했다. 하긴, 그러다보면 읽는 속도가 너무나 꾸물꾸물해지기 때문에 약 150페이지를 지나는 시점에서 통상 포기하곤 했다. 나로서도 범인이 궁금하니까 얼른 뒤를 읽어야지 않겠는가?
몇 번의 시도 끝에 속 편하게 포기하기로 했다. 달리 생각하면 나의 탁월한 망각력은 추리소설 독자로서 축복받은 능력일지도 모른다. 추리소설을 좋아하는데, 범인이 너무 잘 맞춰지고, 다시 읽으면 첫 장을 넘기자마자 머릿속에 떠오른다면, 얼마나 불행할까? 그러면 아이리쉬처럼 순문학(이런 표현 별로지만)으로도 읽음직한 작가의 책 말고는 다시 펴기 어렵지 않겠는가. 제발 범인을 다 알고도 다시 읽는 것이 즐거우며, 범인을 쉽게 찍어내었을 때야말로 탐정과 진정한 머리싸움을 겨루는 기분이라고 댓글을 달지는 말아달라. (이미 그대를 충분히 부러워하고 있다.)
그러니, 이 글을 읽을 지 안 읽을 지 모를 나의 '무슨 책이든-펴는 즉시-이상하게도-범인의 기색을 느끼며-그것이 대체로 들어맞는다는-누가 수학 전공 아니랄까봐-이상한 부분에서 민감한-그러나 친애하는-친구' refugee여, 추리소설 산 돈 아깝다고 알라딘에 물어달라고 하지 마라.
추리소설은 늙어서나 읽는 거 아니냐고 <독서일기> 5권에서 밝히신 장정일님, 쓰고 보니 굉장히 주제와는 거리가 먼 인용이었습니다만, 저 같은 사람에게는 추리소설은 세상에서 제일 극렬한 두뇌활동임을 알아주십시오. 젊어서 많이 굴려야 치매가 예방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역시나 주제와는 굉장히 거리가 먼 발언입니다만, 저는 당신이 속으로는 너무나 추리소설을 사랑하여, 영광스럽게도 노년에 읽을 부류로 예비해둔 것이라 철썩같이 믿고 있습니다.)
오늘도 한국에 출판되는 모든 추리소설을 섭렵하리라는 꿈으로 책을 읽는 추리소설 독자 여러분, 감히 마지막으로 한 마디 남기겠습니다.
저는 기억력도 이 모양이고 추리소설을 읽는 이유도 이 모양입니다만, 다른 분들은 (놀랍게도) 보통 그렇지 않(은 것이 지극히 정상이)더라고 합니다. 그러니 알라딘에 추리소설 마이리뷰를 써 주실 때는 다함께 스포일러는 자제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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