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
알랭 레몽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읽을 책을 쌓아두고서도 서점을 기웃 거리는 이유는, 나를 설레게 할 새로운 이야기를 만날 기대감 때문일 것이다. 나에게 문학은 책에게 다가가게 해주고, 책 읽기를 즐겨하게 된 바탕을 만들어 주었다. 소설을 읽는게 뭐가 재미있냐는 핀잔을 듣기도 하지만, 새로운 이야기를 만날 기대감을 갖는 것은 삶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 그날의 기분과 금전적인 여유에 따라서 책을 고르는 양상이 달라지긴 하지만, 서점을 기웃거릴 수 밖에 없는 이유인 것이다.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을 번역한 김화영님은 파리의 서점에서 책이 얇아 만만해 보여, 집어 들었다고 했다. 한 달 간의 휴가를 마치고, 비행기 안에서 읽을 책을 고르다 그만 비행기를 타기도 전에 다 읽어 버렸다고. 내가 이 책을 집어 든 곳은 헌책방이었다. 헌책방은 괜찮은 가격에 좋은 책들을 구입할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이 그득한 곳이다. 김화영님이 번역했고, 출판사가 낯익다는 이유로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집어 들었다. 파리에서 우연히 집어든 책을 번역까지 하게 되고, 그 책을 나는 헌책방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일련의 우연들로 맺어진 책과의 인연. 하지만 책 내용은 내 마음을 많이 아프게 했다.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만 보아도 스산한 가을의 막바지에 이 책을 만나게 되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숲을 떠나면서 샤토브리앙의 [무덤 저 너머의 회상] 에서 읽은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 이라 글귀를 떠올린 것. 거기에서 저자의 자전적 소설이 아닐까라는 느낌을 받았다. 더불어 자기치유적인 회상들로 써내려간 어린시절의 이야기는 심연의 아픔을 쿡쿡 찔러 대고 있었다. 자신의 가족이 복닥 거리며 살던, 추억이 잔뜩 묻어 있는 집이 팔렸다는 소식으로 시작하는 책은 깊은 회한을 드러낸다.

 

  열 명의 대 식구는 그동안 단칸방 생활을 접고, 방이 세 개인 집으로 이사한다. 그 전에도 이사는 있어 왔지만, 지은이의 기억에는 없다. 태어나지 않았거나, 너무 어려 기억이 없었을 것이다. 지은이가 태어나기 전에 식구들은 전쟁의 고충을 겪기도 했다. 어머니가 포탄 파편에 맞기도 했지만, 무사했고 죽음을 넘어 살아남은 가족들은 이사를 한다. 아이들은 계속 태어나고, 식구가 많은 집, 독특한 집안분위기를 가진 집으로 어디서건 사람들의 눈에 띈다. 아이들이 커나갈 수록 한 명씩 집을 떠나 기숙사에서 생활을 하는 집안의 의식 같은 것이 진행된다. 큰 형이 떠나고, 누나가 떠나고 자신의 차례가 되어 우울한 기숙사에서 생활을 해보니 집이 못견디게 그리웠다. 고향의 냄새부터 추억, 모든 것이 머리속에서 피어났고, 방학을 맞아 집으로 향할때면 그 기쁨은 형언할 수 없는 들뜸으로 나타나곤 했다. 형제자매들이 모여 웃고 떠들며 파티를 하는 모습은, 가난하지만 너무나 즐거워 보였다. 적어도 집안의 또다른 어두움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말이다.

 

  일련의 줄거리만 살펴보면, 가족 많은 집의 어린시절의 추억을 회상하는 정도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문장과 문장 사이에 녹아 있는, 내면을 비집고 올라오는 깊은 슬픔을 어떻게 드러낼 수 있을까. 기억들이 지워질까 빠르게 써 내려 간 듯한 글을 따라 가면서, 감탄과 탄식을 자아내는 아픔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옮긴이는 '하마터면 수십 년 동안 참았던 울음을 퍽, 하고 터뜨릴 뻔했다' 고 고백했다. 수십 년 동안 참았던 울음이 뭘까. 그건 어린시절 안에 감추어 있던 환희와 함께 버무려진 나름대로의 성장의 고통이 아니였을까. 세상에 나혼자만 던져진 것이 아니라, 가족 안에서 구성원으로 존재해야 했던 배부른 불평에서 오는 번뇌가 아니였을까.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가슴이 먹먹했던 이유는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올라서였을 것이다. 우리집과 너무나 닮아있던 어린 시절. 많은 가족, 가난, 차레차례 집을 떠나가는 자녀들의 행렬. 저자는 열명의 자녀 중 여덟번째였다. 나는 대가족의 막내였기에, 그가 누렸던 추억과 종종 엇나갈 때가 있었다. 늘 누군가가 떠나간다는 두려움이 있었고, 혼자 남겨진 나는 외로움을 많이 탔었다. 언니와 오빠들이 주말에 다녀갈때면 눈 만난 강아지마냥 좋아 폴짝폴짝 뛰다가도, 일요일이 되어 모두들 떠나가면 우울함이 나를 덮쳐왔다. 지금껏 고백해 보지 않은 나의 어린시절을 샅샅이 훑고 지나가며 파헤치는 듯한 저자의 고백. 그 고백들이 아플 수 밖에 없었다.

 

  가난했지만, 화목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어린시절의 추억이 그다지 나쁜 것만은 아니었지만, 부모의 사랑이 기울어짐에는 아이들도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저녁이면 전쟁을 몰고 오는 아버지 앞에서 가족과 어머니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런 아버지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며 자랐으면서도, 막상 아버지가 병들어 죽음을 앞두고 있자 '바야흐로 우리는 그를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심정이 되어버렸다' 라고 말한다. 결핍된 사랑을 받으면서도 자연스레 흘러들어가는 사랑을 어쩔 줄 몰라했던 가족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에게 모든 짐이 드리워지고, 그런 어머니마저 병들어 돌아가시자 남아있는 건 형재자매들 뿐이다. 많은 가족이었기에 동떨어짐을 느끼진 않았겠지만, 각자의 가슴에 간직되어 있는 외로운 존재감을 나는 이해한다. 한 부모에게 나온 자녀들이지만, 결국은 혼자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하는 고충. 그런 고충을 인식하기도 전에 고향집은 사라지고 있었다.

 

  '전쟁을 끝내기 위해 이 책을 썼'고, '산 사람들, 그리고 죽은 사람들(아버지,어머니, 누이), 그를 모두와 평화롭게 지내고 싶다'고 고백한 저자. '어린 시절은 치유되지 않는 법이다. 지상낙원의 기억은 치유되지 않는다' 라고 회상하던 그는 무엇과 평화롭게 지내고 싶어 했을까. 정말 죽은 가족들과의 단순한 평화만을 원했을까.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는 어린시절의 추억을 좀 더 평안하게 지키고 싶어했던 것은 아니였을까란 생각이 든다. 그런 느낌 때문에 자기치유적인 소설이라는 조심스런 추측을 해보지만, 그로인해 나의 어린시절에 대한 기억도 많은 위로를 받았다. 왈칵 울음을 터트릴 정도의 회한이 깊이 자리하고 있진 않았지만, 가슴이 먹먹해지며 한 없이 서글퍼지는 마음은 가눌 길이 없었다. 헌책방에서 우연히 집어든 책 한권이 이런 느낌을 가져다 줄 것이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옮긴이의 손에 붙들려 먼 길을 향해 온 한 권의 책.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이라는 제목이 그제서야 서글프게 다가온다. 이 이야기는 얼마나 많은 이별을 겪고 내 곁으로 왔던 것일까. 이별의 하루를 살고 있는 나지만, 잠깐이라도 그 아픔을 보듬어 주고 싶다. 내 품에서 편히 쉬라고, 펑펑 울음을 터트리라고 위로해 주고 싶다. 그 대상이 단지 이 책의 주인공에게만 국한되지 않음을 내 자신이 무엇보다 잘 알고 있음을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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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 주의 영광을 보네 - 벼랑 끝에서 산 소망을 찾은 산소망선교회 이야기
김재홍 지음 / 두란노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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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집에 도착 하면 컴퓨터를 켜자마자 블로그를 살펴 본 후, 30분 정도 블럭 맞추기 게임을 한다. 그러곤 스탠드 불빛 아래서 책을 읽는데, 책을 읽고 나면 눈이 무척 아프다. '눈에 무리를 주는 일들만 했구나' 라며 눈 맛사지를 위해 눈을 감으면 앞이 깜깜하다. 그럴 때면 김재홍 목사님 생각이 난다. 눈 맛사지를 위해 잠시 어둠 속에 갇힐 때면, 이 어둠이 걷히지 않았을 목사님은 어떠했을까 하는 울컥함과 두려움이 몰려온다. 황급히 눈을 뜨고 내 눈이 멀지 않을 거라는 확신 속에서, 김재홍 목사님의 일은 나와는 먼 얘기라고 순간 안심하고 만다.
 

 누구나 한번쯤 그런 생각을 해 봤을 것이다. 나의 눈이 멀게 된다면, 나의 몸이 불구가 된다면 어떻게 될까 라는 생각. 잠깐의 상상뿐이었지만, 그런 나와 맞설 자신이 없어 황급히 떨쳐 버리고 만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서 내가 갖었던 잠깐의 상상이 현실이 된 분을 만나게 되었다. 서른 살의 나이에, 그것도 결혼한지 6개월 만에 베체트 병에 걸렸고, 아내는 임신 중이었다. 한국은행에 다닐만큰 재원이었던 김재홍 목사님은 결국 시력을 잃는다. 시력만 아니었다면 앞길이 창창한 그에게 너무나 큰 시련이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볼 수 없다는 슬픔은 뒤로 하더라도, 어둠 속에 갇혀 있는 자기 자신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가. 김재홍 목사님은 좌절한다. 그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한다. 그때 불현듯 "자살 하면 지옥 간다" 라는 말이 생생히 떠올랐다고 한다. 자살을 하는 대신 지옥이 정말 있는지 확인하려는 생각으로 목숨을 지켰다고 했다. 그러나 목숨은 지켰지만, 산 목숨이 아니었고, 모든 것은 절망스러웠다.

 

  김재홍 목사님은 결혼 전, 자기 딸을 데려가려면 교회를 다녀야 한다는 장모님의 말씀에 따라 교회를 다녔다고 했다. 그러나 진정한 하나님은 만나지 못했다고 했다. 당장 몸이 아프고, 영이 흐트러지니 오로지 하나님께만 매달렸다. 성경 말씀 중 욥기가 위로가 될꺼라고 해서 말씀 테이프를 사다가 들었다. 김재홍 목사님보다 더 한 시련을 당한 욥은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니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을지니이다 -욥기 1:21' 라고 고백했다. 목사님은 그런 욥을 통해 오로지 하나님께만 위로를 받았다. 병을 고치기 위해서 강원도 오지에서 생활을 할 때도, 눈이 멀어 버린 후에 하나님의 뜻을 받기 위해 기도할 때도 오로지 하나님께 매달리고 또 매달렸다. 그리고 사람이 깜깜한 일을 만나면 네 가지 단계를 거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의심과 부정, 분노, 수용, 재활. 목사님에게는 재활의 단계가 필요했다. 그리고 신학대학을 다니고 싶다고 아내에게 말하고, 3년간의 피눈물 나는 학교 생활을 무사히 마치게 된다.

 

  책을 읽어 나가다 보면, 목사님의 시선에서만 씌여진 것이 아니라 사모님의 시선으로 씌여진 글을 발견할 수 있다. 목사님의 글 바로 뒤에 나오기 때문에 그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며, 이겨 나갔는지를 좀 더 객관적인 시선으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객관적인 시선으로 볼 수 있다는 장점보다 사모님의 글을 통해서 김재홍 목사님이나 가족의 고충이 훨씬 더 크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두 분다 실로 놀라울 정도로 담담하게 써 내려 간 글에서 고통을 읽을 수 있었지만, 목사님은 홀로 싸워야 했고, 사모님은 그 모든 것을 아울러야 했다. 생활비를 벌어야 했고, 아이를 돌봐야 했고, 목사님이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도와줘야 했다. 다니 던 학교를 그만 둘 수 없어, 야간반으로 옮기고 나머지 시간에는 목사님이 학교를 다닐 수 있도록 배려하고, 글을 읽을 수 없는 목사님을 위해 대신 레포트를 써야 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도무지 해나갈 수 없는 일을 사모님은 해나갔고, 목사님 또한 그런 사모님의 배려 속에서 최선을 다해 공부를 했다. 그 가운데서 도움을 받은 분들이 많았다. 작은 것에서 부터 큰 일까지 하나님이 그 가정을 돌보고 계신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보살핌이 계속 되고 있었다.

 

  하지만 학교를 무사히 마친 목사님을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눈이 보이지 않은 목사님을 받아줄 만한 곳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신기할 정도의 또 다른 현실에 부딪히고 만 것이다. 집안에서 보내는 시간 동안 묵상하며, 하나님의 뜻을 보여 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처럼 눈이 먼 사람들을 위해 목회를 해보는 것이 어떠겠냐는 하나님의 뜻이 들려왔다. 일년에 4 천명의 사람들이 사고로, 병으로 시력을 잃어 버린다고 했다. 그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희망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서너 명에서 기도 모임을 갖고, 작은 출발을 시작했다. 많은 시련들이 있었다. 중도 실명자와 시각 장애인이 집안에서 어떤 대우를 받는지, 그들을 데려오는 일, 그들을 먹이는 일, 봉사자를 찾는 일, 예배를 드리는 일부터 모든 것이 시련의 고비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곳곳에 도움의 손길을 심어 놓으셨고, 지금은 예배를 드리기 위해 11대의 봉고차가 움직일 만큼 성장한 교회가 되었다.

 

  나에게 오는 책들은 대부분 사무실로 도착 하기 때문에, 제일 먼저 책을 펼쳐보는 곳도 사무실이다. 표지도 산뜻하고, 책도 가벼워 보여 잠깐 읽어볼까 하고 펼친 것이 퇴근을 하기 전에 다 읽어 버렸다. 그러나 사무실이여서 눈물을 참았지, 집에서 읽었더라면 왈칵 눈물을 쏟아낼 만한 부분이 너무 많았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두 분의 글은 담담했고 그 세월을 이겨낸 분들 같지 않았다. 내가 가질 수 없는 평안함이 있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 분의 뜻을 따라 살아왔기에 현재의 그 분들의 모습이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통해서도 이렇게 가슴이 먹먹해지고, 삶의 고통이 이렇게 치열할 수 있을까란 생각이 들었는데 실재로 그 삶을 살아오신 분들은 어떠했을지 상상조차 가지 않는다. 어둠 속에서 세상을 바라봐야 했을 때의 그 막막함처럼, 글 밖에 감추어진 이면의 삶의 고통은 훨씬 컸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고통이라고 해서 무조건 힘들고, 삶을 포기해 버리라는 뜻이 아님을 이 책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인간의 힘으로라면 절대 버티지 못하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을 난관. 그 난관 속에서 늘 우리를 지켜보는 하나님이 계셨고, 하나님은 끝까지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 사실을 잊고 있으면 산소망선교회의 존재의 기쁨을 잊게 된다.

 

  가끔 믿지 않는 자들이 그런 말을 한다. 하나님은 왜 꼭 사람들이 불행해져야 나타나냐고. 왜 사랑한다면서 사람들을 불행에 빠트리냐고. 그런 이들을 보면서 피눈물을 흘리시며 더 가슴 아파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져버리는 질문이다.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시지만, 인간의 불행과 행복을 일부러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 아니시다. 우리가 어떠한 고통에 빠져 있을 때라도 먼저 다가와 주셔서 보듬어 주시고, 위로해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 바로 그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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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1 (반양장)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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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크헉 완결도 아니고.. 그런데 프린트 된 사인본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없어요 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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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강물처럼
파울로 코엘료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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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을 읽을 때 나의 모습은, 이틀 동안 감지 안은 머리를 돌돌 말아놓고 나도 모르게 올라가는 손가락으로 박박 긁고 있을 때였다. 그때 '작가는 항상 안경을 걸치고, 절대 머리를 빗는 법이 없다.' 라는 문장과 마주쳤다. 어머니가 작가가 되겠다는 저자를 타이르자 저자가 작가에 대해 조사한 바를 나열한 첫 문장이었다. 책을 읽고 있는 나의 모습과 너무나 비슷해 어이없는 웃음을 흘리고 말았지만, 1960년대 초에 작가에 대해 조사한 내용은 진지하면서도 우스웠다. 파울로 코엘료의 첫 산문집이라고 해서 약간 긴장하고 펼쳤는데, 프롤로그를 읽고 마음을 느긋하게 놔버렸다. 

 

  파울료 코엘료가 국내에 바람을 일으키기 전인 2002년 말에 <연금술사>를 읽었다. 나름 감명을 받아 다음 작품도 읽어보려 기억하고 있던 작가였다. 그러던 중 <연금술사>는 붐을 일으켰고, 그의 인기는 식을 줄 모르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저자에 관한 나의 관심은 깊은 심연 속으로 떨어져 버렸다. 언제 바람이 잦아지나를 기다렸지만 허사였다. 그의 작품이 출간될 때마다 싸그리 무시하고 있었는데 이 책을 선물 받았다. 선물 받지 못했다면, 여전히 구경만 하고 있을 작가였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사연이 있는 작가의 책을 마주하고 있다는 것은 나름대로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편견을 섞지 않고 읽을 자신이 없었고, 작가와의 재회에 실패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도 있었다. 그냥 책을 읽으면 되는 것 아니냐는 물음을 던질 수 있겠지만, 소소한 추억으로 간직해 오던 작가가 주목 받게 되면 나같은 소심한 독자는 혼란에 빠지게 마련이다.

 

  이런 사연이 있었으니, 파울로 코엘료의 신작 앞에서 얼마나 수선을 떨었을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프롤로그에서 그동안 쌓아온 시샘과 편견이 간단히 무너져 버렸으니 허무했다. 소설이 아닌 산문이었기에 더 편안하게 다가왔을지도 모르지만, 이 책으로 인해 저자와 나름 성공적인 재회를 일궈냈다고 생각하고 싶다. 이 책에 담긴 글들은 저자가 겪은 일화, 다른 사람에게 들은 일화와 전 세계 신문과 잡지에 게재된 것들이라고 했다. 독자들의 요청으로 책으로 묶이게 되었다고. 이 책의 탄생 배경만 살펴보더라도 얼마나 다양한 이야기가 펼쳐질지 짐작조차 할수 없었다. 저자의 책을 한 권 밖에 읽지 않은 상태였고, 공백기도 6년이나 되어서 그의 글이 어떻게 다가올지 무척 궁금했다. 조심스레 넘기는 종잇장들 사이로 펼쳐지는 저자의 내면. 타인의 이야기든, 들은 이야기든 저자를 거쳐 왔기에 그 모든 이야기는 저자를 통해 재조명 되었다고 생각한다.

 

  어느 정도 유명세를 타고 있는 작가라면, 독자들은 그의 소소한 일상을 무척 궁금해 한다. 그의 일상을 느끼며 함께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에 커다란 감회를 느끼기도 하면서 말이다. 그런 독자들의 마음을 이해했는지 파울로 코엘료는 자신의 소소한 일상에서부터 출발했다. 자신의 삶은 서로 다른 세 악장으로 이루어진 교향곡 같다던 저자는 <아무도 없이> 혼자일 때의 일상으로 이끌었다. 일에서 잠시 벗어나 자연을 만끽할 때와, 인터넷으로 세상과 연결된 자신을 비교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저자. 잠시나마 그의 일상을 들여다 봄으로써 평안함을 느꼈다. 어떠한 글이 펼쳐지던지간에 책의 제목처럼 흘러감을 인정해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으면서.

 

  초반에 이 책을 어떻게 만나야 할지 감지해서인지 모든 것이 순탄했다. 글을 써내려간 저자의 행위가 과거의 일이 되어 독자에게 전해지는 것도, 글을 읽고 또 다른 세계를 만끽하는 독자도 자연스러운 흐름에 따랐다. 그러나 그 세계는 너무나 광활해서 마음속에 일렁이는 파도를 잠재우지 못할 때도 있었다.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는 저자의 이동 경로, 일상에서 내면의 깊은 곳까지 아우르는 저자의 항해 때문이었다. 저자는 배 한 척을 가지고 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 배는 가끔 필요에 따라 목적지에 정박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흐름에 맡겨졌다. 어디든 자유롭게 갈 수 있었고, 곳곳에서 들려오는 수 많은 이야기를 뱃전에 차곡차곡 실었다. 뱃전에는 많은 이야기로 넘쳐났다. 신비로운 이야기, 깨달음을 주는 이야기, 감동과 기쁨이 밀려오는 이야기, 모호함을 던져주는 이야기 들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공통된 무엇을 찾는다기 보다는 다양한 삶의 잔상들로 인해 일순간 나이를 먹은 느낌이었다. 내가 살아온 삶의 구석구석에 박혀 있는 추억들을 모두 꺼내놓은 것 같았다. 그 추억들로 인해 나는 회한의 깊은 주름을 간직한 노인이 되어 갔다.

 

  저자가 들려주는 얘기를 들으면서 내 마음에는 어떤 소리들이 났을까. 저자가 운행하는 배에 올라타기 전에 갖었던 온갖 잡생각들은 모두 사라지고, 어느새 내 눈에 보이지 않은 것들 까지 바라볼 수 있는 심연의 눈을 가지게 되었다. 갈수록 염세주의적이 되어간다던 저자의 신에 대한 경외심이 그런 세계로 이끌었던 것 같다.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많은 다른 신을 존중해 주려는 모습, 생각을 거듭해도 뜻을 알 수 없었던 이야기들로 통해 나의 눈은 깊어져 갔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조금씩 넓어지더라도 저자가 펼쳐놓은 광활한 세계를 두루두루 살펴보지 못했지만 말이다.

 

  자신이 경험한 것, 타인에게 들은 얘기들을 통해 저자는 여전히 삶을 향해 도전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익숙한 단란함을 떨치고 도전에 응하도록 우리를 충동질하는 힘때문에 삶의 의미를 좇게 된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지상에서의 삶이 덧없다 할지라도 삶의 의미를 좇고 독자들에게도 일깨워주는 저자. 아주 오랜만에 만난 저자의 세계에 푹 빠진 느낌이었다. 저자와 나 사이에 긴 공백기가 있었지만, 그 세계는 여전히 <연금술사>처럼 신비로웠다고 말하고 싶다. 현실적인 이야기, 삶의 자질구레한 이야기들이 더 많았지만, 그 가운데서 신비로움을 좇아 내면을 아름답게 가꾸고 싶은 나의 욕망 때문에 그렇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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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리고 쏠리고 들끓다 - 새로운 사회와 대중의 탄생
클레이 셔키 지음, 송연석 옮김 / 갤리온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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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에게 어떤 이슈 거리가 있거나 심경의 변화가 생겼을 때, 주변 사람들에게 먼저 말하기 보다 개인 블로그에 토로하게 된다. 무의식적으로 행하던 행동이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변화에 자연히 적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인 일들을 토로할 공간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여전히 아무도 보지 않는 일기장에 끄적이고 있었을 것이다.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해서 그 행위가 무가치 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자신을 드러내려고 맘 먹으면 얼마든지 드러낼 공간이 생겼다는 말이다. 나 또한 그러한 공간을 만나서(블로그) 많은 사람들과 교류를 나눌 수 있었다. 가끔 컴퓨터를 끄고 혼자 생각에 빠질 때면 온라인 세상과 오프라인 세상을 어떻게 생각해 봐야 할지 난감해 지기도 한다. <웹 진화론 2> 라는 책을 통해 두 공간 모두 무시할 수 없는 세상을 살게 될거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지만, 웹 공간 뿐만이 아닌 새로운 사회의 들끓음을 어떻게 감지하고 인식해야 할까.

 

  2006년 6월, 뉴욕 주 코로나에 살던 16세 소녀는 경찰에 체포된다. 우연히 택시 안에서 주운 휴대폰 한 대 때문이었다. 휴대폰을 주웠다고 경찰에 체포까지 되다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휴대폰을 잃어 버린 여성은 중요한 고객의 명단이 저장되어 있는 고가의 휴대폰을 찾기 위해 돌려주면 사례를 하겠다는 메세지를 남겼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새 휴대폰을 구입하게 되었는데 자신이 잃어버린 휴대폰을 주운 사람이 사진을 찍어 메일로 보내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메일 주소를 알게 되어 사정을 말하고 휴대폰을 돌려달라고 했지만, 돌려 받을 자격이 없다는 인종차별적인 욕설이 답으로 돌아왔다. 그런 실랑이가 며칠 간 계속 되자 휴대폰 주인은 간단한 웹 페이지를 만들어 '도난당한 사이드킥(휴대폰 상품명)'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그리고 그 웹 페이지를 친구들에게 알리기 시작했다. 취지는 간단했다. '분실물을 주인에게 돌려주는 에티켓'을 시사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일은 생각보다 훨씬 크게 퍼져 나갔다.

 

  그 웹페이지는 퍼지고 퍼져서 수 많은 사람들이 보게 되었다. 휴대폰 주인은 자신의 휴대폰을 가지고 있는 소녀가 보낸 협박을 업데이트 했고, 많은 사람들이 도움의 손길을 뻗쳐 왔다. 순식간에 이슈가 된 이 사건에 결국 경찰까지 개입을 하게 되었고, 분실이 아닌 도난으로 처리되어 그 소녀는 체포된 것이다. 순식간에 군중이 몰려들었고, 공감을 했으며, 휴대폰을 찾게되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저자는 5년 전만 해도 이 사건은 성공하지 못했을 거라고 했다. 그때는 그녀가 사용한 웹이라는 도구가 없었을 뿐더러, 믿고 의지 할 수 있는 사회구조 또한 갖춰져 있지 않았다고 했다. 그렇다면 휴대폰을 주운 소녀는 자신의 행위는 제쳐두고라도, 그 휴대폰 뒤에 몰려 있는 수백만명을 예측할 수 없음을 안타까워 해야 했을까?

 

  이런 사례는 수없이 많았다. 저자는 다양한 사회의 변화를 예를 들어가며 어떠한 시대를 맞고 있는지 드러냈다. 거기에는 소비자라는 집단, 순식간에 만들어진 대중앞에 무릎을 꿇은 기업, 정부의 사례도 있었다. 대중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시대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런 세력은 순식간에 사람들을 모았다가 해체시키며, 뜻을 함께 했을 때의 위력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한 두명의 사람들이 뭉쳤을 때는 무시하던 단체도,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었을 때 내는 목소리의 힘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들은 이전에 알고 있던 사람들이며, 같은 뜻을 품은 사람들이었을까? '도난당한 사이트킥'의 여성처럼 도구를 통해 낯선 사람들을 불러 보아 한 목소리를 낸 것 뿐이었다. 그런 도구는 웹, 휴대폰, 메일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도구의 씌임에 따라 사회도 변하고 있었고, 대중의 움직임 또한 달라졌다.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뿐만이 아닌, 지식을 드러내는 공간의 변화도 무시할 수 없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네티즌들은 웹 2.0을 경험하고 있을 것이다. 인터넷상에서 정보를 모아 보여주기만 하는 웹 1.0에 비해 웹2.0은 사용자가 직접 데이터를 다룰 수 있도록 데이터를 제공하는 플랫폼이 정보를 더 쉽게 공유하고 서비스 받을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고 한다. 블로그(Blog), 위키피디아(Wikipedia), 딜리셔스(del.icio.us) 등이 이에 속하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위키피디아는 유저가 편집할 수 있는 웹사이트다. 어떠한 정보를 올려 놓으면 그것에 대해 더 잘 아는 사람이 수정에 수정을 거듭해 질적으로 향상시키는 것이다. 간단하지만 백과사전을 능가하는 정보를 창출해 내는 공간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각광을 받고 있다. 엉터리 글을 도배시키는데 더 어려움이 따르는 구조였다. 거기다 책으로 만들어진 백과사전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였으니, 이제 사람들은 무언가를 알고자 할 때, 무거운 백과사전을 펼치기 보다는 컴퓨터 앞에서 검색을 하는 일에 익숙해져 있다. 기존 사회와 비교 하자면 엄청난 변화인데, 많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진화되어 왔다고 생각한다. 그런 진화의 뒤에는 새로운 대중의 역할도 있었으리라. 저자는 유저 한명이 생길 때마다 소비자이자 생산자인 사람이 한명씩 늘어나는 셈이라고 했다. 1대 1로, 또는 다수 대 다수로 협력할 수 있는 독자의 등장은 새로운 미디어의 주체, 즉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대중의 탄생을 의미하는 거라고 말이다.

 

   사회의 변화, 대중의 변화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루어진 것일까. 휩쓸려 가다보니 어느새 내가 이러이러한 위치에 있었다고 맹목적으로 대답하는 현대인에게, 저자는 다양한 방법을 통해 변화의 법칙을 일깨워 주기도 했다. 네트워크 법칙, 20대 80의 법칙을 통한 오픈소스의 효용을 경험할 수 있었다. 어쩌면 생소한 용어와 새로운 접근이 낯설어 어렵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지지부진한 이론들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풍부한 예시가 있고, 그런 예시를 통해 저자가 전해주고자 하는 것들보다 더한 가치를 일궈내기도 했다. 한 권의 책을 읽었지만,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를 수도 있다. 책의 느낌을 정리하고자 하는 내가 일부분만 들춰 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 생각들은 당연한 사실이다. 통찰력 있게 이 책의 요점을 끌어낼 수 없을 뿐더러, 내가 느끼는 것 또한 무한하기에 나의 얕은 지식으로 모두 다 드러낼 수 없다. 그러나 저자가 말했던 새로운 사회와 대중의 탄생의 저변에는 웹이라는 공간이 있음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인터넷 소사이어티 이사였던 스콧 브래드너는 "인터넷에서는 뭔가를 시도해 보기 앞서, 자신의 시도가 좋은 아이디어라고 남들을 설득할 필요가 없다" 라고 피력했다. 그런 공간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었기에 자연스러운 변화에 따라가게 된 것이 아닐까. 그런 공간 속에서 내가 어떠한 사회의 일원이 되고 대중이 되는 가는 각자의 인성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거기다 재능까지 발휘된다면 더더욱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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