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디안텀 블루
오사키 요시오 지음, 김해용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6년 9월
평점 :
절판


'이게 아디안텀 블루인가요?'

'아디안텀 블루? 아닌데... 정확한 이름이예요?'

'네'

'잘 모르겠는데...'

 

우연히 들어간 화원에서 아디안텀 블루와 비슷한걸 발견해 물어보았더니 잘 모르겠단다.

내 기억 언저리로 그렇게 아디안텀 블루가 사라져 버린 느낌이다.

분명 아디안텀 블루를 만났더라면 확실했을 기억들.

망각 속으로 가라 앉아 버린 아디안턴 블루를 나는 건져낼 수 있을까......

 

그녀가 사과를 한다.

펜션 주인인 미셸에게 실은 여행이 아니라 죽으로 왔다고 사과를 한다. 미셸은 편히 있으라며 안됐다며 도리어 요코와 야마자키를 위로한다.

결국 참았던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익숙한 러브 스토리에 이 정도 가지고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고 무덤덤 했는데 요코가 미셸에게 사과하는 장면에서는 울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곧 죽게 된다면 그렇게 사과할 수 있을까...

세상에 대한 원망이 아닌 '나 여기서 죽어요.. 그래서 미안해요..' 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진부한 대입을 떠나, 나는 그럴 수 없기에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요코가 했기에 나의 마음은 어느새 허물어져 버렸다.

 

파일럿 피쉬의 연작격인 아디안텀 블루를 만났을때 친숙함 그 하나만으로도 편안했다. 글의 형식도 비슷해서 야마자키가 사랑했던 요코의 죽음이 처음에 나왔을 때도 조급해 하거나 상상하지 않았다.

때가 되면 나오겠지란 생각으로 읽어 나갔던 것인데 전혀 예상밖의 죽음이 원인이 책의 양상을 뒤집어 버렸다.

아파서 죽었다?

왠지 요시오의 소설 특징상 너무 서정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의 작품을 한편 밖에 읽진 않았지만 죽음의 원인이 서정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던건 왜 였을을까....

죽음의 원인이 진부하다는 느낌 아니면 너무 빤하다는 느낌이 들어서 일까.. 그러나 그런 드러남에도 소설은 뻔하게 흘러가지 않는다.

죽음이 예정되어 있다면 눈물을 펑펑 쏟고 세상을 향해 발악을 하는 등 익숙치 않은 죽음임에도 익숙할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야마자키, 요코 그 주변 사람들은 그런 것들이 진부하기라도 하듯 아니면 이것이 일본적이다 라고 말하듯 절제가 있었다.

요시오가 만들어 내는 세계에서는 진부하면서도 색다른 느낌을 분출하고 있었다.

 

그녀의 아픈 과정, 야마자키의 절망, 요코의 슬픔등이 구구 절절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늘 충실했다.

그렇기에 요코가 죽고 싶다던 니스로 행할 수 있었고 야마자키는 요코를 위해 기꺼이 동행했다.

그녀는 행복했을까.....

행복했을 거라고 단정짓지 못하는 나는 섣불리 무어라 말할 수가 없다. 죽음을 맞이 하는게 병원의 시트가 아닌 그리워 하던 니스의 하날과 바다를 볼 수 있어서 다행이지만, 시리도록 아름다운 자연과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었지만 그녀는 행복했을까.....

 

추억은 사라지진 않지만 닳는다.

야마자키가 기억하는 요코, 사랑, 오랫동안 간직할 수 있겠지만 언젠가는 닳고 닳아 기억의 파편들만 남을지도모른다. 오히려 요코가 그렇게 찍어 댔던 웅덩이를 보았을때 요코가 생각날지도 모른다.

그런 요코를 기억하는게 야마자키만이 아닌 유카, 다카키, 미셸, 프레드릭 등등 그녀의 죽음을 위로해준 많은 사람들이 있기에 요코의 행복을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외롭지 않았을 거라는 건 단정할 수 있다.

야마자키는 요코의 죽음을 그렇게 받아들였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야마자키가 할 수 있었던 건 없었다고 본다.

그녀가 죽고 싶다던 니스로 데려다준 것 때문이 아니라 죽음을 대처하는 야마자키의 모습이 한결 같았기 때문이다.

절제였든 아니였든 야마자키와 요코의 모습은 죽음을 앞두었다는 사실이 덤덤할 정도였다.

 

그런 모습을 얼마나 많이 지킬 수 있을까...

세상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미안하다고 말하는 따스함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그게 바로 사랑이 아닐까....

사랑을 하면 죽음 앞에서 오히려 욕심이 많아지고 원망이 짙어질 것 같지만 오히려 아름다워 진다.

사람이 아름다워 지고 행위가 아름다워 진다.

그런 아름다움을 요코와 야마자키를 통해 볼 수 있었던,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였다.

요코는 니스의 하늘에서 야마자키는 도큐 백화점 옥상에서 서로를 바라볼 것이다.

늘 그렇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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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미래 - 앨빈 토플러 (양장)
앨빈 토플러 지음, 김중웅 옮김 / 청림출판 / 2006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이 내게 온 순간부터 과연 내가 이 책을 읽을 수 있을까 하고 의문을 가졌었다.

인문학에 약했고 두께도 만만치 않았고 거기다가 앨빈 토플러의 명성까지 나를 주눅들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겪어 보지도 않고 기가 죽는건 겉모습으로 본 시각이니 어쩔 수 없다 해도 내가 다 읽은 걸 보면 편견 속에서 얼마나 많은 것들을 가두고 있는지 또한번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책의 내용을 어찌 다 이해할 수 있겠냐 만은 그렇게 겁먹던 부의 미래를 다 읽었고 또 한번의 편견의 벽을 이 책을 통해 많이 부수게 되었으니 분명 책이 나를 짓누른것만은 아니였으리라 생각된다.

우선은 두꺼운 책을 다 읽었다는 해방감, 그리고 무언가 둥둥 떠다니는 것들을 정리해야 겠다라는 의무감이 뒤섞인 감정들이 일어나지만 그 감정들은 결코 무겁고 암울하지 않다. 앨빈 토플러의 긍정적인 사고를 받아들였는지도 모르겠다.

 

책이 두꺼운 이유가 있었다.

앨빈 토플러가 말하고 있는 부의 미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무척이나 광범위 했다.

12년의 집필 과정은 그렇다 치고 이 많은 분야를 속속들이 파 헤치고 연구하고 알려주고 피력하는 과정이 대단했다.

너무나 많은 것을 담고자 너무나 많은 것을 알려주고자 책이 두꺼워 지고 세세해 질수도 있겠지만 광범위함 속에서 멋대로 헤엄치고 다니는 것들이 아닌 축약된 느낌을 받았다.

앨빈 토플러가 말하고자 하는 것들은 무척 많았고 예시들도 엄청났지만 한번쯤은 들어봄직한 혹은 많이 들어왔던 것들이라 많이 낯설지는 않았다.

다만 내가 자주 생각해 보는 것들이 아니였고 관심이 있는 분야가 아니였기에 낯설었을뿐 부의 미래라는 제목하에 낯섬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얇은 나의 지식이 드러나더라도 부의 미래라고 했을때 단순히 물질적인 것들을 생각했고 미래라는 언어에서 풍기는 뉘앙스는 막연했다.

일상 생활속에서도 우리는 늘 미래를 막연하게 생각하고 두려워 하면서도 생각을 하고 준비를 하는 것처럼 부의 미래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라는 우물 안에 갇혀 타인을 보지 못했고 울타리를 보지 못했고 세계를 보지 못했기에 이 책을 읽는 내내 나의 존재가 무척 미미했다.

또한 앨빈 토플러가 말한 부는 유형적인 것뿐만이 아닌 무형적인 것 그리고 부가가치를 낼 수 있는 것들도 다루고 있어서 나의 존재감은 잠시 접어도 될듯했다.

그러나 이 책은 나의 생각의 많은 것들을 뛰어 넘는다.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를 판단하고 미래를 예견하고 있었다.

그게 미국이 되었든 우리나라가 되었든 무조건적인 부정은 삽입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앨빈 토플러는 껄끄러운 부분까지 거리낌 없이 말하였기에 책을 읽으면서 나의 감정도 이리 저리 치우쳤던것도 사실이였다.

내가 이해하는 부분이든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든 주제는 넘쳐났기에 부의 미래를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부분을 잊지 않으려고 했었다.

 

저자가 이토록 장황하게 말하고자 함은 무엇일까....

여기에서 무엇을 간추려야 하는 것일까....

그것들을 잊지 않으려고 했으나 저자의 글에 휩쓸리다 보면 망각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저자는 대미를 이렇게 장식하고 있다.

모든 상황을 고려했을 때, 이것도 한번 살아볼 가치가 있는 환상적인 순간이라고 말이다.

저자가 우리에게 보여주었던 미래지향적인 것들, 현재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 것들, 과거를 통해 배워야 하는 것들이 복잡 미묘하게 얽혀 우리의 머리를 혼란스럽게 만들지라도 저자는 그렇게 외치고 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부는 좀 더 나은 삶을 위해서라고 말이다.

얼핏 자기 계발서가 아닌가 결론만 보고 착각할 수 있겠으나 이 책에서는 결론을 보여주진 않는다. 과거지향적인 것들을 말할때에도 표면적인 결론은 드러났지만 정의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없다. 어떤 상황에 직면했을때 바뀌는 것이 상황이고 역사이기에 한번쯤 생각해 봐야 할 것들을 아낌없이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들 전부를 말한다는 게 효과적이지도 않겠지만 나의 능력 부족으로라도 무엇 무엇이다라고 명확히 선을 그어줄 순 없다.

번역자도 역주를 많이 달아 송구하다는 겸손까지 곁들인걸 보면 역시 읽고 부딪히는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잠시 내 자신을 잊고 유한함과 무한한 속으로 빠져 보는 건 어떨까..

책을 읽는 동안 내내 유쾌할순 없겠지만 저자의 대미를 장식한 말로써 앨빈 토플러는 긍정적이라다고 판단하는 나를 비웃을 수도 있겠지만 세상이 이렇게 굴러가는 구나를 한번쯤 느껴보았으면 한다. 내가 전혀 상상하지 않았던 관념의로의 접근이라 낯설고 어색하겠지만 암울하지만은 않다.

그래서 나 또한 넘어가는 페이지수가 신기했을 정도였다.

내 현실을 직시시켜 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무척 우울해 지는데 그 이상을 넘어 파헤치고 헤집어 놓음에도 생각보단 희망적이였다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그렇게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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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의 4분의 1
오사키 요시오 지음, 우은명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6년 9월
평점 :
품절


9월의 4분의 2쯤 지났을때 이 책을 받았다.

그러나 지금은 9월의 마지막 하루를 남겨둔 시점이다.

9월의 4분의 1이라는게 도대체 무엇일까.

무얼 의미하는지 내내 궁금했다.

그래서 9월의 4분의 1쯤 남겨두고 책을 읽었을땐 베시시 웃고 말았다.

9월의 기간을 두고 의미 부여에 총력을 기울인 나의 모습이 부질 없다는 사실과 사연을 알게 된 후련함. 단지 그뿐이였다.

 

문득 내가 이 책을 9월 4일날 읽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름이 오소소 돋았을까? 우연의 일치라며 한바탕 사랑을 꿈꾸어 보았을까?

주인공 나는 13년전 약속장소를 알아채지 못했던 파리의 9월 4일역에 서있다. 나오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또한 나오도 그러고 싶었지만 확신이 없었기에 텔레파시를 보낸다. '9월의 4일에 만나요' 라는 메세지를 알아차려 달라고. 그러나 나는 알아 차리지 못했다. 나오를 진정 사랑하지 않았던 것일까?

 

이렇듯 파리의 9월 4일역에는 나오를, 호수 앞에서 마미를, 영국에서 미나코를, 하코테 미술관에서 요리코를 그리워 하는 네명의 남자를 만난다.

제각각의 추억과 사랑과 고뇌를 간직한 이들은 현실을 직시하기도 하고 과거에 빠져 있기도 하지만 미래는 꾸리지 않는다. 그들이 이야기 하기 전에는 그들의 미래를 알아 차릴수가 없다. 참을성 없는 현대사회에 그들은 긴 시간을 넘나들며 태연히 말을 걸어 온다. 그래서 그들에게 미래를 감지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 나는 그들의 수십년전의 과거일수도 있다는 생각에 미래를 감히 꺼낼 수가 없다.

이러한 상황임에도 나는 안타까움이나 절망은 느끼지 않았다.

왜 과거를 그리는 현재를 보면 과거의 안타까움, 현재의 절망이 생각나는지 모르겠지만 시간과 공간의 넉넉한 틈 속에서도 그들의 덤덤함을 닮았다고나 할까...

 

늘 후회를 하면서 살기에 후회를 없애려 순간의 작는 감정이라도 하고 싶은대로 하려고 애쓴다. 늘 아둥 바둥 거리며 후회를 몰아내고 있는데 그들도 분명 후회를 할만한대도 무언가 할말이 있을텐데도 침묵한다.

그리고 비로소 오랜시간이 지난후에 꺼내어 본다.

후회를 안타까움으로 돌릴 수 없도록 가능성 부여를 최대한 낯춘 시점에서 말이다. 내 내면의 깊은 고뇌는 주욱 늘어 놓으면서 그녀들에겐 왜 그리움이란 여운을 남긴 것일까.

여기서 난 주춤거릴 수 밖에 없다. 범접할 수 없는 차분함이 나의 방종을 잠식시켰기 때문이다. 또한 뱅뱅 돌아서 안착하는 그들의 그리움과 추억이 그녀들이 들러리가 아닌 주연임을 인정하기에.

단지 그들은 그 사실을 쉽게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렇게 세세한 복선을 깔았는지도 모른다.

 

얼핏 보면 그들의 이야기는 사랑이 중심이 아닌 것 같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뱅뱅 도는 듯한 느낌, 그리고 쉽게 인정하지 않고 헷갈리게 하는 그들의 심중을 알아채기 전까지 나도 사랑이 아니라 생각했다.

나는 사랑얘기라 말하고 싶다. 상대를 두고 하는 사랑이 아닌 현재 그 사랑을 지켜가고 느껴가는 현재 진행형인, 그녀들의 존재 여부와는 상관없는 나만의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래서 시간과 공간은 그다지 중요치 않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그것이 무슨 사랑이냐고 추억으로 분류해 버릴 수 있겠지만 온전히 전해지지 못했을 뿐 그런 사랑이였다.

삶 곳곳에 깃든 사랑. 너와 함께한 시간 속에서 나누었던 모든 것이 떠오른 만큼 소중하다고 느끼는 사랑.

 

그래서 저자는 추억을 곳곳에 뿌려 놓는다. 그러나 배경은 비슷하다.

가장 눈에 띄는 배경은 직업과 음악이였다.

한결같이 주인공들은 출판계에 몸담고 있다. 철자 교정 아르바이트였든, 잡지사를 그만 두었든, 작가였든 말이다.(9월의 4분의 1에서 주인공 나는 글을 쓴다. 그래서인지 그가 했던 아르바이트는 밥통 판매원이였다. 독특함을 주려 했을까?)

그 사실이 억지인 것 같으면서도 이젠 자연스러워진건 오사키 요시오의 작품을 세권째 읽어서라는게 먹힐까?

여튼 그런 직업과 마찬가지로 따라다니는 것이 있다면 음악이였다.

왠지 음악이라고 하면 클래식, 재즈 이런 음악과의 연관성이 있어 보이는데 과거의 대중 음악이 주류다. 전작의 폴리스 음악이라든가 '슬퍼서 날개 없어서'의 레드 제플린이라든가 그런 음악의 등장이 의외였다.

그러나 이것 역시 세삼한 짜임이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 클래식이였다면 고전이라는 전제하에 시간의 뛰어넘음을 무의미하게 했을 테고 재즈였다면 그것 역시 음악의 깊이로 인해 헷갈렸을 테니까. 추억으로의 여행에서 그 시절을 회상시켜 주는게 대중음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느낌으로 이루어진 총 4편의 단편은 마치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골라먹듯한 느낌이였다. 비슷하면서도 분명 다른 맛과 느낌. 4가지의 독특한 맛과 함께한 추억 속으로 쉽게 빨려들었다.

9월이기에. 여름과 가을을 넘나드는 그 경계선에서 마치 환절기 감기를 앓듯 쓸쓸함에 몸무림 쳤기에.

이런 나를 달래주는건 추억으로의 회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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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휘소 - 못다 핀 천재 물리학자 청소년인물박물관 3
이용포 지음 / 작은씨앗 / 2006년 8월
평점 :
절판


중학교때 이휘소를 알았다.

책을 무척 좋아하던 동네 오빠에게서 빌려본 <이휘소>의 강렬함은 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독후감 노트에 이휘소를 잊지 않겠노라고 가슴 속에 묻어 두겠노라고 다짐했었는데 기억의 언저리에나 묻혀 있을 뿐 표면으로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의 강렬함도 그의 일생을 소설화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의 충격도 어느새 나는 잊고 있었다. 이휘소에게 내가 했던 약속은 무엇이였을까?

한낱 중얼거림에 지나지 않았던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로 이휘소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나는 그 소설이 나오기전에 공석하님의 이휘소를 먼저 읽어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에서의 이휘소는 많은 부분이 와닿지 않았다. 소설화한 작가의 능력이 놀라웠을 뿐이다.(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그 소설을 만나고 난 후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 이휘소의 삶이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휘소 평전이 나왔고 이 책 <이휘소-못다 핀 천재 물리학자>가 나왔다.

무척 반가웠다. 잊고 있었던 이휘소를 다시 떠오르게 해주었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 무척 기뻤다. 그래서 단숨에 읽어 버렸다.

책을 다 읽고 보니 새벽 3시. 잠깐 읽는다는게 끝까지 일어 버려서 어리둥절 했지만 그만큼 이휘소 생애 대한 나의 갈망은 컸다. 처음엔 이 책이 성인대상으로 나온거라 생각했다.

책을 마주하고 보니 글씨도 크고 부드러운 말투(?)여서 청소년이 읽으면 더 좋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내가 알고 있던 이휘소를 청소년판으로 어떻게 엮어갈까 궁금했었는데 여러가지의 느낌들이 있었다.

 

물리학에는 까막눈이지만 그 부분을 조금은 쉽게 분류하고 설명해 줄거라 생각했었는데 미국 생활의 이휘소를 보여줄때 분류를 하며 설명을 해 준 것이 아니라 중간 중간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그 부분은 난해했다.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하자는 의도 였을지는 몰라도 읽고 있어도 무슨 말인지 몰라 그의 능력을 많은 부분 알아 챌 수 없어서 안타까웠다.

또 청소년들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해 보자면 이휘소의 업적 보다는 그가 어떠한 사람이였는지를 많은 부분 강조해야 겠지만 내가 알고 있던 정치적인 부분은 전혀 나오지 않아 처음엔 의아해했었다.

정치적인 면을 떠나더라도 좀 더 많은 사람들과 관계된 넓은 이휘소의 삶이 아닌 이휘소만의 중점적 삶이여서(당연 이휘소의 이야기니까.) 그의 죽음도 안타까움이 아닌 허망함의 느낌이 짙었다.

가족을 비롯해 그가 주변 사람들에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였는지 끈끈한 사랑과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관계였는지 그 부분들이 강조되지 못해 조금은 아쉬웠다.

깊이 있게 들어가지 못하고 겉도는 느낌이였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그거면 됐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의 삶을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가 어떠한 사람이였는지 어느 정도 알린셈이였으니까.

나도 이휘소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지 못하지만 그의 자랑이 아닌 삶에 중점을 두었기에 처음에 들었던 생각은 어느 정도 수그러져 있었다.

그가 노력하는 사람이였다는(그것도 엄청나게) 것만 알려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천재라고 불렀지만 그가 이룬 업적들을 보면 그렇게 밖에 납득할 수 없지만 나는 그를 노력자라고 기억하고 싶다.

뼈를 깍는 노력, 피나는 노력이라는 진부한 표현이 그에겐 너무나 잘 어울리기에 그를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기억하고 싶다. 어느 정도 기본 바탕이 있어야 노력의 성과가 더 눈부신 법이겠지만 그는 너무나 강렬한 빛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였다.

그 빛이 너무 강렬해 눈이 멀어 버렸을 정도였다.

 

어디 태생이든 어떠한 업적을 남기었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 이휘소, 그의 눈부심이 다 퍼지지 못해 안타까움이 드는 사람, 그런 모습이 아련히 젖어 들었다. 그런 이휘소를 보면서 내가 포기해 버리는 것들 지나쳐 버리는 것들을 돌아볼때 가능성을 심어주지 못해 미안했다.

노력하고 노력하고 또 노력한 이휘소.

그런 그가 너무 안타까워서 가슴아파서 사람들이 그를 기억하려 하는 것일 테다.

그의 업적의 자랑스러움보다 인간대 인간으로 마주했을때 느껴지는 희열감. 그 마음을 전해 주려는 마음일테다.

그런 연유로 나도 이휘소를 기억하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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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의 개
캐롤린 파크허스트 지음, 공경희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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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죽었다.

그녀의 죽음을 보았던 증인은 개 로렐라이 뿐이다.

말이 안된다는 건 알지만 로렐라이에게 말을 가르쳐 보기로 한다.

그녀의 죽음이 석연치 않다. 분명.

로렐라이는 그녀의 죽음에 대해서 말해줄 수 있을까?

지금은 로렐라이에게 말이라도 시키지 않으면 그녀를 잃어버린 슬픔을 가눌 수 없을 것 같다. 그녀와의 추억이 사라져 버릴 것 같다.

그렇게 그녀 렉시와의 시간 속으로, 로렐라이에게 말을 가르쳐 보려는 노력 속으로 들어 가려는 한 남자 폴이 있다.

 

그가 느끼는 렉시의 죽음에 관한 의문, 그리고 그를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그녀의 빈자리를 이해한다 치더라도 개에게 말을 가르친다?

공상 소설이 아니고는 현실을 비추는 모습에서 그건 솔직히 허무맹랑했다. 그리움의 흔적을 잔뜩 머금고 있어 서정적인 소설이라 생각했는데 그녀와의 추억이 짙어 갈수록 로렐라이에게 말을 시키기 위한 과정이 현실화 되어 갈수록 '이건 아니다'라는 느낌이 들었다. 처음 갖었던 그 분위기는 서서히 변화하고 있었다.

폴의 이야기 같지만 결국은 우리 앞에 한번도 드러난 적이 없는 렉시, 그녀의 이야기였다. 로렐라이도 렉시가 먼저 키우고 있던 개였고 폴이 살고 있는 집은 렉시의 집이였다. 이야기는 흘러 갈수록 렉시와 폴이 함께가 아닌 렉시, 폴 각각의 형상으로 그리고 렉시가 더 짙게 그려지고 있었다.

 

그녀의 일, 우울증, 그리고 죽음의 의문까지 폴이 아는 한 전부를 털어 놓는다. 물론 그 안에는 폴과 렉시가 함께였던 그들의 소중한 추억이 포함되어 있다. 그 추억을 알아가면 갈수록 렉시를 느껴가고 렉시의 죽음에 관한 의문을 조금씩 풀어나간다.

그녀가 죽던 날 왜 서재 정리를 한 것인지, 스테이크는 구워졌지만 접시와 포크, 나이프는 왜 없는지, 그녀가 왜 사과나무에 올라갔는지 말이다.

다른 사람들은 폴이 찾아낸 것들을 가지고 자살로 단정 지을 수 없겠지만 렉시는 폴에게 메세지를 남겼다. 폴은 그것을 알아 차린 것이다.

 

폴의 이야기가 중점이 아니고 더군다나 로렐라이에게 말을 시킨다는 사실이 중점도 아닌, 폴은 렉시와의 짧지만 행복한 순간을 정리해 놓은 것이다.

그녀는 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일까.

처음부터 그녀의 죽음이 나왔지만 만약 폴이 '그녀는 자살했다'라고 말했다면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폴이 그런 결론에 다다르기까지 그녀의 자살가능성의 복선으로 두가지를 말하고 싶다.

우울증, 그리고 가면을 만드는 그녀의 일.

내 나름대로의 생각이지만 이것들을 뚫고 나오지 못한 렉시는 결국 자살을 택하지 않았을까 하는 결론에 이른다.

가면을 만드는 그녀의 일은 처음에는 단순히 독특해 보였다.

예술성을 지니고 있는 그녀는 충분히 고독할 수 있다고 외로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가면이라는 그 자체만으로 그녀는 자신으로부터 많은 것을 숨기고 있었다. 오히려 그 숨김을 가면 제작으로 표출하는게 아닌가 생각했지만 그녀는 갇혀 있었다.

자신 속에 그리고 그녀가 만드는 가면 속에 동봉한채 그렇게 자꾸 오그라 들어 갓다.

그런 슬픔,분노,우울은 가끔 표출하기도 했다. 폴은 그럭 저럭 받아줬다고 생각하는데 폴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다. 그녀의 밑바닥의 고통까지 감싸주지 못했다는 것을.

그건 곁에서 위로는 해줄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이 뿌리 뽑아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걸 안다. 나도 그걸 겪어 봤기 때문에 온전히는 아니더라도 어느정도는 이해한다.

그러나 렉시의 선택은 폴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주었다. 더군다나 그 사실을 폴이 찾아 나서야 했을땐 어땠을까.

분명 고통스러운 시간이였지만 그 시간 속에서 폴이 꼭 잃는 것만 있는 건 아니였다. 그녀의 메세지를 찾아가는 과정 동안 폴은 그녀를 온전히 다시 볼 수 있었다. 기억속이 아닌 가슴 속에 있다는 것을.

그녀와 오랫동안 함께 할 순 없었지만 그녀와 함께한 시간은 정말 행복하고 소중했다는 것을.

그녀에게 향하던 분노가 서서히 용서와 사랑이 되어 간다는 것을 깨달아가고 있었다.

켤코 쉽지 않은 과정이였다.

 

그런 생각을 해본다.

사랑하는 사람을 남겨두는 것과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가는 것.

어떤게 과연 더 힘들까 하는 생각.

머리가 아파온다.

가능하면 함께 하는 것이 제일 좋은게 아닐까 생각된다.

그 사람에게 말을 걸 수 없을때 후회하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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