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네가 남긴 것 사계절 1318 문고 25
지그프리트 렌츠 지음, 박종대 옮김 / 사계절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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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덮고 나니 가슴 속에 밀려 드는 먹먹함에 어찌 할 바를 모르겠다. 마음이 저릿저릿 아파온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한 이 느낌을 어찌해야 하는 걸까. 아, 아르네! 책을 읽는 내내 이 탄식이 터져 나왔지만, 책을 읽고 나서도 아르네의 이름을 부를 뿐 내가 할 수 있는게 없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옮긴이 박종대님도 저며 오는 슬픔을 달랠길이 없다고 했다. 우리들의 편견과 아집 속에 스러져간 소년 아르네 때문이라고 했다. 도대체 아르네에게 우리는 무슨 짓을 한 걸까.

 

  이 책은 아르네의 유품을 정리하는 모습부터 시작된다. 유품을 정리한다는 것은 아르네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뜻인데, 책을 읽을 수록 아르네의 죽음에 대한 복선은 깔리지 않고, 아르네와의 추억을 더듬어가는 한스의 시각을 비춰 줄 뿐이다. 직접적인 아르네의 죽음의 언급은 피한 채, 유품을 정리하는 현재와 유품을 통한 아르네의 추억이 얽혀 12살 소년 아르네를 드러 낸다. 아르네는 여리고 상처가 있는 소년이다. 가족이 빚 때문에 자살을 시도했고, 그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은 아르네 뿐이다. 아르네와 친구였던 한스의 아빠가 아르네의 양육을 맡게 되어 한스네 집으로 오게 된 것이다. 한스는 그런 아르네를 따뜻하게 보살펴 주며, 늘 아르네의 편이 되어 주었다. 아르네가 고통의 기억에서 몸을 떨 때도, 친구들이 아르네를 따돌릴 때도 말이다.

 

  아르네는 뛰어난 아이였다. 공부를 잘 했고, 글도 잘 썼으며 월반을 할 정도로 비범한 재능을 가진 학생이였다. 그러나 아르네가 어떻게 해서 한스네 집으로 오게 되었는지 알게 된 친구들은 아르네를 받아 들이지 않았다. 단지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아르네가 어떻게 살아났는지에 대한 이유를 내세워서가 아니라, 자신 보다 뛰어난 아르네에 대한 열등감이라고 차마 말하지 못한 다름의 이유였다. 한스의 동생 라르스와 비프케 조차도 아르네에게 살갑게 굴지 않았고, 비프케에게 남다른 애정을 품었던 아르네의 마음을 알면서도 비프케는 아르네를 받아주지 않았다. 학교 선생님들에게 아르네는 뛰어난 학생이였기에 특별한 관심을 받았을지는 몰라도 아이들의 세계에서 벗어난 다는 사실이 아르네에게 깊은 상처가 되었다. 스스로의 의지가 아닌 타인에 의한 따돌림은 아르네의 마음을 더욱더 아프게 했을 것이다. 가족들의 생사 속에서 살아난 것도 아르네의 의지가 아니였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괴로운데 또래의 친구들에게 환영받지 못한 다는 것은 12살의 아르네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버리기 충분했다.

 

  아르네가 살던 곳은 폐선 처리장이였으므로 사내 아이들에게는 호기심과 놀이거리가 제공 되는 장소였다. 실로 책 속에 등장하는 모험과 놀이는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를 쏟아내기에 충분할 정도로 매혹적인 것이였다. 아르네 또한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보아왔던 바다의 풍경과 배에 관한 지식들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 갔지만, 새로운 곳에서는 철저히 배척 당하고 만다. 오히려 자신의 뛰어남 때문에 또래의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 생각했으니 아르네의 고충은 켜켜이 쌓여 갈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아르네에게 한스 외에는 친구가 없었다. 그래서 주변 친구들이 자신을 놀이에 끼워 줄 틈이 보이면 언제든지 후원을 아끼지 않았고, 철석같이 그 아이들을 믿었다. 늘 혼자 생활 하는 칼룩씨와 친구가 되는 것보다 또래의 친구들과 어울리며 그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모르고 아이들은 아르네를 이용했다. 여행을 핑계로 도둑질을 했고, 나쁜 일에 아르네를 포함 시켰기에 칼룩씨가 다쳤고, 물건들이 사라졌다. 아르네는 많은 이들에게 신뢰를 잃어 버렸지만, 그 일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일을 공모했던 아이들은 오히려 아르네를 모른체 한다. 괴로움에서 더이상 견딜 수 없었던 아르네는 배를 타고 강으로 나간다. 그리고 아르네는 돌아오지 않는다.

 

  이 모든 이야기는 아르네와 같은 방을 썼던 한스가 아르네의 물건을 하나하나 정리하면서 그 물건에 대한 추억과 함께 그려진다. 한스는 그 추억들을 떠올리면서 아르네의 표정, 몸짓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르네가 그런 결정을 할 수 밖에 없었던 대에 대한 아픔과 슬픔이 얽혀 애절함을 더해 갔다. 한스도 아르네의 가족들도 아르네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지만 아르네의 마음 속에 깊이 새겨진 상처는 아물지 않은 채 책은 끝이 난다. 이러한 결말에서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아르네를 따돌린 아이들을 과연 내가 비난 할 수 있을까. 그런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아르네를 다그칠 수 있을까. 학창 시절을 떠올려 보면 아르네 같은 아이를 쉽게 발견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르네와 닮았던 아이들을 따돌렸던 내 자신도. 아르네의 스러짐 앞에서 깊이 반성해 본다. 내가 아르네를 그렇게 만든 것이고, 우리가 아르네를 그렇게 만든 것이다. 더 이상 아르네 같은 아이들이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와 조금 다르다고 다른 세상으로 밀어 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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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놀이
크리스토프 하인 지음, 박종대 옮김 / 작가정신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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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월요일 아침은 정말 눈을 뜨기 싫다. 한주의 시작에 대한 부담감이 꿈틀거리며 나를 삼켜 버리기 때문이다. 막상 출근 해서 이것저것 하다보니 안도의 한숨이 쉬어지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월요일을 한주의 통과의례로 보내야 하는 것인지 한숨이 나온다. 월요일이든 한주든 모든 날들을 좀 더 즐겁게 보낼 수는 없는 걸까? 내가 만족스러워 하는 무언가를 할 때 처럼 일상이, 삶이 즐거울 수는 없는 걸까? 그다지 팍팍하지도 않는 일상을 가지고 너무 요란을 떨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이 책의 주인공 뵈를레 씨를 보고 있자니 그가 느끼는 재미가 왜 나에겐 없는지 의구심이 든다. 그러나 그의 재미를 온전히 닮고 싶다는 뜻은 아니다. 그는 모든 것을 놀이로 봤고, 그가 놀이를 위해 행했던 모든 것들 속에는 잘못된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책의 시작은 뵈를뢰 씨의 편지로 시작 된다. 그리고 그 편지는 책이 끝날 때까지 이어진다. 그러한 구성이 숨 쉴틈 없이 옥죄어 오는 느낌에 조금은 답답했지만, 그의 이야기가 흥미롭게 다가왔다. 무언지는 모르지만 자신이 저지른 사건 때문에 담당 변호사에게 보내는 편지였기 때문이다. 그 사건이 무엇인지 몰라 궁금증을 가지고 읽어 나갔던 것인데, 그의 편지는 점점 더 장황해 지고 있었다. 사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배제한 채 자신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 부터 모든 것을 통달한 듯한 시각으로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사건의 경황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은 흐려져 버렸고 뵈를뢰 씨의 언변에 끌려 다닐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언변 속에서 내가 길을 헤메고, 혼란스러워 했음은 자명하다. 그가 우아한 척 하며 독설을 뱉어내는 모습에 아직 밝혀지지 않은 사건에 흥미를 잃은 것 또한 말이다.

 

   그의 이야기는 허무와 권태가 밀려왔다. 그가 진부한 말들을 늘어 놓았다는 것에서 느껴진 감정들이 아닌 그가 행한 놀이 속에서 이미 감지해 버린 것들이었다. 그가 아무리 신랄한 말투로 자신의 놀이를 설명하며, 돈, 권력, 청치에 대해서 논해도 그의 의견에 공감할 수 없었다. 내가 보기엔 스스로를 합리화 시키려는 행위로만 보였고, 무언가를 감추기에 급급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이 저지른 살인과 세상 살이에서의 놀이를 아무렇지 않은듯 거리낌 없이 드러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런 그가 위대해 보이지 않았다. 변호사라는 직업 외에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함구한 채 머릿속을 스쳐가는 생각들을 뱉어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권태로움을 숨기지 않았지만, 그 권태에 내가 빠져 버렸다. 그래서 그가 읊어대는 모든 것을 다 아는 듯한 신랄한 비판들이 진부했다. 또한 그에게 살인은 양심의 가책을 느낄 만한 것이 못 된다는 것을 쉽게 간파할 수 있었다.

 

  그렇더라도 그의 언변에 속아 그가 저지른 살인이 불가피한 것이라는 생각과 놀이의 일환으로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을 쉽게 인정해 줘서는 안된다. 그는 자신의 합리화는 물론 타인을 끌어 들이려 했고 그의 의도는 결말 부분에서 여실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불가피한 살인이였다는 것을 피력하는 것도 모자라 담당 변호사를 놀이에 끌여 들이려고 했다.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흥미로울 거라는 말까지 덧붙여서 말이다. 그는 자신이 감옥에 있다는 사실은 개의치 않아 했고 놀이 또한 끝내려 하지 않았다. 돈과 권력, 정치를 떠나 이젠 타인의 파멸을 노리는 것이다. 그가 담당 변호사에게 보낸 편지는 그렇게 끝이 났지만, 장황스럽고 온갖 얘기가 섞인 그의 이야기를 온전히 받아들이긴 힘들었다.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 혹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이 무엇인지 혼란스럽기 그지 없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죽인 것이 타당하는 말을 장황스럽게 늘어 놓았다는 것밖으로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틀린 목적으로 돈, 권력, 정치를 수단으로 이용했다고 하더라도 그가 바라본 사회의 병폐를 간과할 수는 없었다. 마치 자신은 세상의 어둠 속에서 일부만을 드러낸 것이라고 자신 하는 것 같았다. 그랬기에 자신의 잘못을 드러내기도 전에 그는 타인과 세상에 대한 비판을 서슴치 않았다. 자신은 나폴레옹이 정복전쟁을 했던 것에 빗대어 인생 놀이를 감행한 것 뿐이라고 떳떳해 했다. 그 안에서 그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곱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그를 안쓰럽게 생각하기 이전에 내 안에 멤도는 이 씁쓸함은 무엇일까. 살인의 정황을 알겠다고 펼쳐 든 책 속에서 온갖 씁쓸한 맛을 다 맛본 기분이다. 그래서 그의 행위를 탓하고자 하는 마음도 들지 않는다. 그의 놀이에 많은 사람들이 유혹을 받지 않기를 바랄 뿐, 좀 더 밝은 세상의 빛이 그가 드러낸 어둠을 걷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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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바다 바다 올 에이지 클래식
샤론 크리치 지음, 황윤영 옮김 / 보물창고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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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나의 상처를 숨기고 싶어, 거짓말을 했던 적을 떠올려 본다. 처음엔 가슴이 두근거리고 상대방이 눈치 채지 않을까 두려움이 앞섰지만, 차츰 익숙해 지다 보니 거짓을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왜 나를 감추려 거짓말을 했을까. 다른 사람에게 밑보이기 싫어서, 동정의 대상이 되기 싫어서 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요즘에는 내가 약해 보이지 않으려 거짓말을 한다는 생각이 든다. 기정 사실에 과장을 보태 나에게 유리한 쪽으로 발설을 하며, 상대방은 싸그리 무시해 버리기 일쑤였고, 내 마음을 감추기에 급급했다. 그렇게 하면 다른 사람들 앞에 약해 보이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이미 약해진 나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 약함을 진정으로 위로해 주는 사람들이 내 곁에 있다는 사실도 말이다.

 

  소피도 그런 아이였다. 자신의 과거를 숨기기 위해 자신의 상처와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스스로에게 마법을 건다. 나는 현재의 가족 안에서 무척 행복하며, 가족들이 내가 없이 살 수 없을 거라고 스스로에게 체면을 걸고 있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체면을 건 만큼 다른 가족들도 그렇게 생각할거라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소피는 외삼촌과 사촌들의 여행에 기꺼이 동행했다. 동행이라기 보다는 졸라서 하게 된 여행이지만, 소피에게는 이 여행이 무척 중요했다. 여름 방학을 맞아서 큰 외삼촌의 배를 타고 아일랜드에 있는 봄피 할아버지를 뵈러 가는 여정이였기 때문이다. 외삼촌 세명과 남자 사촌 두명 사이에 소피가 동행하려 하니, 소피의 부모님도, 삼촌과 사촌들도 모두 반대했다. 그러나 소피는 강력하게 자신의 의지를 굳혔고, 항해에 필요한 기초 지식들을 습득했다. 그리고 마침내 방랑자 호를 타고 녹록치 않은 항해를 시작하게 된다.

 

  삼촌의 배는 호화롭거나 편리하지 않았다. 출발 전에 많은 수리가 필요했고, 배에서 생활해야 한다는 것은 생각처럼 간단치가 않았다. 기본적인 의식주 생활도 제대로 하기 힘들었고, 무엇보다 돛을 달고 가는 배라서 항해 기술이 필요했던 것도 사실이였다. 그렇지만 소피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기꺼이 방랑자 호에 올랐고, 틈틈히 일지를 쓰기 시작한다. 내가 읽게 된 이야기는 대부분 소피의 일지였고, 소피를 통해서 여행 과정은 물론 소피의 내면에 대해서도 알게 될거라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나의 이런 안심을 뒤로 한채 소피의 일지에 이어 사촌 코디의 일지가 등장한다. 사촌 코디의 일지는 소피의 일지를 통한 익숙함에서 분위기의 쇄신을 유도했으며 소피의 일지와 일치하지 않음에 의아함을 갖게 되었다. 엎치락 뒤치락 등장하는 소피와 코디의 일지를 통해 누구의 이야기가 사실인지 혼란스럽기 그지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와중에도 항해는 계속 되었고, 순탄함과 순찬치 않는 여정이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배를 타고 아일랜드로 가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간의 트러블이 있든 불만이 있든 방랑자 호에서 모두 생활을 해야 했다. 싫든 좋든 자기가 맡은 일을 해야 했고, 정해 놓은 규칙대로 움직여야 하는 것도 항해에 필요한 조건이였다. 그런 식으로 움직이다 보니 처음에는 서로가 서로에게 마음을 열지 못하고 각자의 습관대로 생활해 갔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에게 익숙해 졌고 항해를 하게 되면서 여러가지의 에피소드를 통해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하게 된다. 그 가운데서도 소피가 유독 눈에 띄었다. 그들이 만나러 가는 봄피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 놓는 소피는 가족들에게 외면과 동정을 동시에 받고 있었으니, 항해하는 가운데 소피가 깨트려야 할 것은 삼촌과 사촌들간의 벽이 아니라 자신 안에 세워진 벽이였다. 소피의 이야기를 통해서 혼란스러운 마음를 코디가 비교적 객관적으로 말해줌으로써 소피를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었고, 나름의 판단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소피의 입을 통해 나오는 이야기들은 자신의 추억과 두려움, 그리고 사실이 덧대어져 마구 얽혀 있기에 그 안에서의 혼란스러움은 잠잠해 지지 않았다.

 

  항해를 마칠 때쯤, 소피는 처음 방랑자 호를 탔을 때의 소피가 아니였다. 자신의 상처를 드러냄으로써 가족들에게 위로를 받았고 스스로도 깨달음을 더해 갔다. 그리고 기정 사실과 자신이 건 체면 상태를 구분해 낼 줄 알게 되었다. 그러한 여정이 없었다면 소피는 자신의 과거와 상처의 아픔을 덜어내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또한 처음엔 자신에게 껄끄럽게 대했던 삼촌과 사촌들과 봄피 할아버지가 없었다면 소피의 모습은 달라지지 못했을 것이다. 바다를 항해하는 배가 파도에서 벗어날 수 없듯이 소피가 존재하는 곳에서는 자신을 져 버릴 수가 없었다. 늘 혼자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소피의 곁에는 새로운 가족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가족들도 소피를 새로운 구성원으로 맞이 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는 여행이 있었다. 여행을 통해 부딪히고, 위로하고, 보듬어 주는 사이 소피의 마음이 그리고 가족들의 마음이 열린 것이다. 비단 그 여행은 소피에게만 도움이 된 것이 아니라 모든 가족들에게도 자신을 새로이 바라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거라 생각한다. 바다 바다 바다. 바다가 굽이치고 넘실대며 소피를 불렀듯이 그 바다를 두려워 하지 않는 소피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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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시멜로 이야기 2 - 변화의 힘 마시멜로 이야기 2
호아킴 데 포사다.엘렌 싱어 지음, 공경희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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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 며칠 동안 퇴근하고 집에 가면 엉뚱한 짓으로 시간을 떼우는 나를 발견 할 수 있다. 집에 오자 마자 컴퓨터를 켜서 게임을 하고, 그 게임이 지겨우면 핸드폰 게임을 하고, 그러다 밥을 먹고 또 게임과 컴퓨터를 하다 잠이 든다. 늦은 시각에 잠이 드니 아침에 상쾌하게 일어날 수도 없었다. 내가 왜 이러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지만, 무엇보다 내 자신이 답을 알고 있었다. 무언가를 피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피하는 방법으로 평소에 하지 않는 것들에 관심 귀울이는 척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피하면서도 마음이 편했을까? 그 반대였다. 불편한 마음은 더 심했고, 시간이 지날 수록 두려움이 켜켜이 쌓여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에게 두려움의 대상이란 바로 공부였다. 대학에 가겠노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큰소리 뻥뻥 쳐놓고 4월 중순을 향해 감에도 공부는 시작도 안하고 있었다. 이런 내 자신이 부끄럽다는 생각 보다는 도무지 마음을 잡지 못하는 내가 한심해 보인다. 도대체 왜 이러는 것일까.

 

  오늘에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내 자신이 답을 알고 있다고는 했지만,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생각을 해 봤자 뻔한 결론 밖에 나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였다. 그러나 나의 상태는 그것 보다 더 심각했다. 별거 있겠어 라고 집어 든 <마시멜로 두 번째 이야기>를 읽고 보니 나의 현재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이러한 자계서들은 며칠 있다가 식상해 지기 마련이라고, 늘 똑같은 말만 읊어 댄다고 치부해 버리던 내가 이 책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것이다. 그것은 나의 현실과 맞아 떨어졌다는 사실도 있지만, 무엇보다 근본은 내 마음 속의 오래된 병폐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목표 설정은 커녕 현실에 안주해 버리는 나. 그런 내 모습이 주인공 찰리의 모습보다 찰리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스쳐 지나가는 사소한 말들에서 드러났다. 늘 그렇듯 이런 책을 읽고 며칠이면 아무렇지 않게 평상시의 나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마음이 오기 전에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이 마음을 새겨 보려 한다.

 

  마시멜로 첫 번째 이야기를 읽어 보진 않았지만, 두 번째 이야기는 전편의 내용이 없더라도 나를 가꿔가기엔 충분했다. 찰리의 이야기를 통해서 내게 와 닿는 감흥을 느끼지 못했지만, 시간이 흐를 수록 나의 마음 속에 파고드는 무언가가 나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두려움을 깨트리라는 소리였다. 지금 나의 모습에서 안주 하지 말고 네가 하고자 했던 것들을 꺼내 보라는 속삭임이였다.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일까, 나를 두렵게 만드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기 전에 왜 내가 이런 모습으로 하루하루를 죽이고 있는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순간을 소비해 버리기 바쁜 내 자신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소비해 버리는 마시멜로는 달콤하지 않았다. 달콤하지도 않은 마시멜로를 나는 꿀꺽꿀꺽 삼키고만 있었던 것이다. 바로 채워지지 않는 내 마음의 공허 때문이었다. 그 공허는 내 인생을 보람차고 활기차게 살아 보자는 희망을 묵살해 버렸기 때문에 생긴 것이였다.  가끔 가다 그러한 희망이 내 비치더라도 인내하기 보다는 포기해 버리고 씁쓸한 마시멜로를 삼켜 버리고 말았다.

 

  찰리가 다시 마시멜로의 법칙을 지켜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러한 나를 발견하고 있었다. 나도 찰리처럼 무언가를 지켜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 아니라 찰리가 마시멜로의 달콤함을 참아갈 때 쯤, 나의 문제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찰리의 결말은 뻔했지만, 그 과정 속에서 독자에게 던져지는 것은 무궁했다. 찰리가 숙지했던 것보다 자신에게 맞는 깨달음을 찾아 갈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겐 자유스러웠고, 편하게 내 문제를 짚어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 찰리가 성공을 위한 과정을 그려 냈다면,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성공한 다음 다시 마시멜로의 인내를 참지 못하는 찰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 위기에서 자신을 구해 준것은 멘토 역활을 해 준 조언자 조나단, 제니퍼 그리고 자신의 문제를 깨닫게 해주었던 직장 상사의 가족이었다. 거기에 찰리의 행동이 있었지만, 무엇보다 좋은 친구들이 있었기에 마시멜로의 달콤한 유혹을 뿌리칠 수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누구나 자신의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바꿔 간다고 다짐을 했을 때, 혼자서 해결해 보려는 마음을 먹고 쉽게 포기해 버렸던 자신을 만나 봤을 것이다. 지금껏 그래왔다면 이번에는 주변 사람에게 도움을 청해 보라고 말하고 싶다. 나 또한 그런 경험이 많기에 이번에는 우선 내가 하고 싶은 것들, 내가 하고자 하는 것들을 적으며 주변인들과 이야기 해 보고 싶다. 그리고 내 책상 앞에 그러한 다짐을 붙여 놓고 저 글을 썼을 때의 마음을 늘 상기시키며, 그 계획이 내 안에 들어왔을 때 진지한 계획을 세워 보려고 한다. 찰리처럼 5년 계획을 세워보겠다는 자신감은 없지만, 우선 내 자신과 대화를 해본다면 현재에 대한 두려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깨트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하루를 살아 갈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서다. 분명 지금 나의 마음은 이렇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난관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난관에 부딪힐 때, 내가 꾸려놓은 미래의 모습을 기억해 보려고 한다. 쉽진 않겠지만 누군가에게 이 책을 읽어 보며 변화를 해보라는 충고보다 내 자신이 먼저 변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을 바꾸기 보다 내 자신을 먼저 바꾸는게 쉽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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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득이
김려령 지음 / 창비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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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성장소설에 푹 빠져 있는게 사실이다. 읽어도 읽어도 너무 재미나서 그 매력에 쉽게 빠져 나올 수가 없다. 그러나 유독 국내 성장소설에는 인색한게 사실이다. 국내 성장소설은 아는 작품도 없었고, 있더라도 조금은 꺼려졌다. 왜 꺼려졌을까를 생각해 보니 국외 성장소설은 다른 문화권이라는 생소함에 호기심이 있었던 반면에 국내 성장소설은 왠지 나의 유년 시절이 그대로 드러날 것 같은 불안감에 휩싸였던 것 같다.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나의 유년 시절 보다 나와는 상관 없다고 생각해 버리는 국외 성장 소설이 그래서 편했는지도 모르겠다. 얼토당토 않은 이유를 들어가며 그동안 국내 성장소설을 피해 왔지만(국내 문학도 그런 연유가 어느 정도는 있는 것 같다.) 한참 성장소설에 푹 빠져 있어 무조건 읽어 댔기에 <완득이>를 보고 마음을 좀 더 편히 열 수 있었던게 아닌가 싶다. 그러나 완득이를 읽고 나니 국외건 국내건 문화와 배경이 좀 다를 뿐이지, 청소년들의 마음은 비슷비슷 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특히 무언가에 혼란스러워 하면서도 자신을 찾아가는 모습이 말이다.

 

  국내 성장 소설을 읽으면 나의 모습이 드러날 것 같아 불안 했다는 고백을 했었다. 그러나 완득이를 읽고 보니, 역시 소설은 소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소설을 소설로 보지 못하고 내가 찜찜했던 부분이 드러날까 노심초사 했던 모습이 조금은 부끄러웠다. 그만큼 나의 성장 과정에서도 많은 혼란과 고민들이 있었다는 뜻이겠지만, 그 혼란과 고민이 같을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 각자가 다르듯이 마음 속에 품고 있는 것들도 각자 다르 다는 것. 하지만 그 마음의 혼란을 공감할 수 있도록 끄집어 내어 보는 것. 그것이 성장소설이 말하는 공통점이 아닌가 싶다. 완득이도 그런면에서 뒤쳐지지 않는다. 담임 선생님을 죽도록 미워하고, 난쟁이인 아버지를 놀리면 주먹을 휘둘러 대며, 친구 없이 늘 혼자인 완득이는 집과 학교를 오가며 삶의 빛깔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생활을 하고 있는 아이였다. 고등학교 1학년이면 진로문제, 이성문제 등으로 한참 고민도 많고 스트레스도 많을 나이지만, 완득이에겐 그 모든 것이 부질 없었다. 남들과 다른 성장 과정이 있었다는 열등감이 어느 정도 내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완득이는 엄마가 없다. 가족이라곤 한달에 두어번 보게 되는 아버지와 아버지를 따라다니는 삼촌이 전부다. 아버지는 카바레에서 춤을 추는 사람이였고 그런 아버지에게 춤을 배워 춤 상대를 해주는 사람이 민구 삼촌이였다. 난쟁이와 말더듬이라는 타이틀로 카바레를 전전했지만, 늘 시원찮은 벌이였고 무대에서도 물러나기 일쑤였다. 그런 완득이가 어렸을 때 부터 무엇을 보고 자랐을 지는 훤하다. 카바레에서 조폭들과 단정치 못한 누나들만 보아왔으니 제대로 된 마음이 박혀 있을 리가 없다. 그리고 늘 가난했고 혼자였다. 그런 속도 모르고 아버지는 자신처럼 살지 말라고만 하니 늘 트러블이 있기 마련이였다. 그러나 그런 아버지라도 늘 곁에 있어 주는 것이 아니였기에 완득이는 마음 둘 곳이 없었다. 그러다 아버지가 마련해 준 새로운 거처로 이사를 왔는데, 하필이면 담임 선생님의 앞집이다. 담탱이 똥주는 늘 재수없게 완득이를 못 살게 군다. 욕설은 기본이고, 학생들에게 공부를 하지 말라는 둥, 이상한 체벌을 내리고, 완득이를 기초 수급 대상자로 지정해 놓고 완득이에게 나오는 밥을 뺏아먹기 일쑤였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완득이는 담탱이의 주변을 벗어날 수 없었고 왠지 자신이 도와줘야 할 사람들이 많다는 생각에 빠지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의 밥을 뺏아 먹는 담탱이, 담탱이를 없애 달라고 찾아간 교회에서 만난 사람들, 거기다 반에서 1등인 윤하까지 죄다 자신에게 들러 붙어 무언가를 바라는 것 같다. 그러던 중 우연히 킥복싱 체육관에 다니게 되고, 지금껏 킥복싱처럼 마음에 드는 것을 만나본 적이 없다며 열심히 운동을 하게 된다. 자신에게 붙어 다녀던 가난, 장애인 아버지, 엄마의 빈자리, 주먹을 휘둘려서 감추려고 했던 열등감. 이런 것들을 많이 털어 내지는 못했지만 조금씩 마음의 중심을 찾으려고 애쓴다. 그러던 어느날 완득이네 통신원이 되어 버린 담탱이는 엄마의 소식을 물어다 준다. 엄마는 베트남 사람인데 자신을 낳고 떠났다고 한다. 결국 완득이는 엄마와 만나게 되지만 서먹할 뿐이였다. 그러면서 엄마와 만나게 해준 담탱이의 모습에서 조금씩 다른 면을 발견해 가기도 한다. 늘 말은 거칠게 하고 못살게 굴지만 완득이를 신경 써주는 모습에 미운 정이 들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완득이의 마음은 늘 편할 날이 없었다. 불쑥 이성으로 다가온 정윤하, 자신의 생명력을 느끼게 하는 킥복싱, 늘 빈 자리라 생각했던 어머니의 존재, 그리고 완득이 주변을 떠나지 않는 담탱이까지 혼란 속에서도 인간과 얽혀가는 정을 느껴가고 있었다.

 

  그렇더라도 완득이가 펼쳐놓은 세계에 결말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킥복싱은 어떻게 될 것이며, 정윤하와의 관계, 어머니와의 사이도 궁금했다. 그러나 완득이의 성장을 그리고 있듯이 이 책은 계속 성장 중이다. 그랬기에 결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과 과정이 중요한 책이며, 그러한 과정 속에서 울고 웃을 수 있는 공감이 서려 있었다. 그러한 이야기 속에는 욕설이 난무하고 거친 면들이 눈살을 찌뿌리게 하기도 했지만, 그런 것을 싹 무시할 수는 없었을 거라는 마음으로 이해하려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청소년들이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무엇을 생각하는지가 아니겠는가. 완득이의 모습이 현재의 청소년들 모습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의 분위기를 파악하는 데는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내가 성장했던 시절과 비교해 보니 여전히 그 공통점은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ㄷ. 관심. 아이들이 관심에 대해서 귀찮아 할 수도 있지만, 늘 관심 속에서 자라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완득이도 주변의 관심이 있었기에 서서히 마음의 문을 열어 간게 아니였겠는가. 완득이의 그러한 과정을 보면서 씁쓸함 보다 유쾌한 희망이 더 돋보여서 마음이 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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