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사람, 타샤 튜더 타샤 튜더 캐주얼 에디션 2
타샤 튜더 지음, 공경희 옮김 / 윌북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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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많은 사람들이 어떤 책을 즐겨 읽으면, 그 책이 궁금하면서도 살짝 질투가 나 구입하지 못한 책들이 있다. 그렇다고 빌려 볼 수도 없고, 다른 사람에게 사달라고 조를 수도 없는 조금은 애매한 책. 타샤튜더 할머니 책이 그랬다. 책도 여러 권 나와 있고, 여기 저기서 소문도 들리는데도 강 건너 불구경 하듯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온라인 서점에서 반값 행사를 하길래 냉큼 구입 했다. 이번 기회에 이 책을 읽은 사람들 틈에 살짝 끼어 보고 싶었다. 이 책들이 어떤 내용인지 대충은 들었기에 편안한 마음으로 책을 읽었다. 글 반, 사진 반이라서 금새 읽을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 하면서 말이다.

 

  타샤튜더 할머니가 30만 평이라는 대지에 정원을 일군다는 사실이 상상이 되지 않았지만, 대단하다는 생각보다 왜 그렇게 고생을 하는지(난 정원을 일군다는 것이 고생이라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타샤 할머니가 즐거워서 하는 일이라는 건 알지만 과연 혼자서 그게 가능한가 하는 의문도 들었다. 정원을 보기 전에는. 아니 할머니의 일상을 보기 전에는 믿기보다 의심만 해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타샤 할머니가 그렇게 즐거워 하며, 만끽하며 삶을 살아간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19세기 분위기를 좋아해서 온통 옛 것에 취해 사는 할머니, 거대한 정원을 일궈내는 할머니는 흔치 않기 때문이다. 타샤 할머니의 글을 보면 일관성 있게 써내려 간다거나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글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수 있다. 정원을 꾸미기 위해 책을 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정원에 대한 사랑이 넘쳐났고, 가식이 없었다. 자신의 정원에 대해서만큼은 겸손해 질 수 없다던 타샤 할머니를 보고 있으면, 어떻게 오랫동안 열정을 지킬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열정을 지켰다기 보다는 타샤 할머니는 따로 노력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냥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했고, 자신만의 방식 대로 살아온 것 뿐이라고 했다. 타샤 할머니의 정원을 따라서 일 년을 겪다 보면 하루하루가 너무 빨리 가고, 삶이 즐거울 거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정원에서는 혼자 보고 있기 아까울 정도의 아름다운 광경이 많았다. 스스로 일궈 낸 정원에서 그런 광경을 보기만 해도 감사함이 절로 나올 것 같은 자연의 경이로움이었다. 타샤 할머니의 정원, 집, 할머니가 사랑하는 여러 가지를 구경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넋을 빼고 보게 된다. 그런데 이 할머니. 은근히 감성도 풍부하고, 유머도 있고, 엽기적인 면(부엌에 돌아다니는 쥐를 장작불에 화장했다나 어쨌다나.)도 있다. 그래서 타샤 할머니에게 더 빠져 들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의 직업을 늘 가정주부라고 말한다는 타샤 할머니는 재주가 많은 분이다. 그림도 잘 그리고, 인형도 만들고, 집안 일은 물론 정원 가꾸기에는 달인이 되어 있다. 거기다 책도 많이 읽어서 일상 속에서 문인들의 명언을 실천하며 느끼고 살고 있었다. 가정주부라고 하면 고달픈 집안일에 삶이 찌들거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당당히 외치지 않았던가. '가정주부라서 무식한 게 아닌데. 잼을 저으면서도 셰익스피어를 읽을 수 있는 것을'이라고. 그 글귀아래 포스트 잇을 붙여서 '명언이다'라고 써 놓을 정도로 타샤 할머니 만의 명쾌한 사고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중간중간 얼마나 많은 작가의 말을 인용하던지 살짝 주눅이 들 정도였지만, 그러라고 한 말들이 아닌 걸 알기에 즐거운 마음으로 타샤 할머니의 삶을 엿볼 수 있었다. 집안 곳곳은 할머니의 터전이었다. 넓든, 좁든 맘껏 공간을 누리며 그 공간 안에서는 할머니가 주인이다. 무언가를 다스리려는 것이 아니라 순리에 따르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다. 

 

  타샤 할머니를 보고 있으면 많은 사람들이 갈망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즐거워 하는 일을 하며, 자연과 동물들이 어우러진 공간에 살고, 좋아하는 삶의 방식대로(19세기 생활방식) 살아가는 모습. 티 타임을 즐기며 새 들의 노랫소리를 듣는 것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타샤 할머니. 정원을 꾸미는 일에는 어느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 거라 생각하지만, 너무나 닮고 싶은 삶이었다. 무언가를 이룩해야 겠다 라고 강요되는 것이 아닌, 하고 싶은 것을 하다보니 어느새 그럴듯 하게 만들어진 자신을 내려다 보는 것. 그것 만큼 보람되고 뿌듯한 것이 있을까. 사시사철로 아름다움을 선사해 주는 정원처럼, 타샤 할머니의 삶도 지켜보는 이로 하여금 탄성을 내지르게 된다. 너무 아름다워서, 너무 벅차서, 또한 너무 즐거워서 말이다. 정말 독특한 할머니지만 우리 할머니였으면 좋겠다고 생각될 정도로 사랑스러운 할머니다. 당분간은 타샤 할머니의 정원에서, 삶에서 헤어나올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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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트린 이야기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199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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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원한 바람을 쐬며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걷는 산책길이 참으로 신선한 요즘이다. 시간이 조금 흐르면 낙엽이 떨어지고 스산한 바람이 불텐데, 내 마음도 허해지지 않을까 벌써부터 걱정이 된다. 조그마한 일에도 감상에 빠지고, 많이 외로워 하는 계절이 가을이기에 쓸떼없는 걱정이 일고 있는 것이다. 가을이 오면 꼭 무언가를 추억하게 된다. 나의 미래를 추측해 보는 것보다 지나온 과거에 대한 회한이 더 큰게 사실이다. 회한의 시간을 딛고 서서 나의 미래를 비춰볼 수 있다면 좋으련만. 어쩔 땐 너무 깊은 과거여행에 빠져 허우적 댈 때가 있다. 그러나 너무 빨리 돌아가는 세상속에 살기에 추억도 희미해져 가고 있는 느낌이 든다. 문득, 까트린 처럼 나에게 남아 있는 추억을 기록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 내리는 겨울의 뉴욕에서 아빠와의 추억을 꺼낸 까트린. 그녀의 추억을 여행하다 보니 나에게 남은 추억이 무엇인지 되돌아 보는 시간이 되었기 때문이리라.

 

  지금은 뉴욕에서 발레를 가르치고 있는 까트린은 아빠와의 파리 생활을 추억한다. 발레리나인 엄마를 만나 결혼을 하고 자신을 낳았지만, 자국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던 엄마가 먼저 미국으로 떠나버려 아빠와 생활했던 어린 시절 이야기였다. 아빠는 까스트라드 씨와 동업으로 가게를 하고 있었다. 여러가지 물건들을 사들였다가 다시 다른 사람에게 파는, 아빠의 말을 빌리자면 '꾸러미들 속에서 일을 하는 셈'이었다. 엄마가 미국에 계셨기 때문에 까트린과 아빠는 늘 함께 했다. 아빠의 가게의 저울에 올라가 몸무게를 쟀던 일, 안경을 벗고 희미한 세상을 바라보던 일, 까스트라드 씨의 받아쓰기를 싫어했던 일들은 아빠와 함께 한 추억이었다. 특히나 까탈스러웠던 까스트라드 씨에 대한 여러가지 에피소드에 대한 추억은 아빠와 딸이라는 관계가 수직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친구처럼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어서 더욱더 즐거워 보였다.

 

  까트린의 아빠는 일에서나 인간관계에서나 조금은 어수룩한데가 있었다. 하지만 까트린의 아빠로써는 언제나 다정다감 했기에 까뜨린의 기억 속에서도 아빠가 푸근한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미국으로 건너와 지금껏 어떻게 생활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보다, 엄마와의 추억보다, 파리에서 아빠와 살았던 어린 시절이 대부분이였기 때문이다. 자신을 발레 학원에 데려다 주고 데려온 일. 발레학원에서 사귄 친구의 집에 초대받지 않은 상태로 아빠와 갔던 일. 그곳에서 환영받지 못했던 이야기들은 아빠라는 존재에 대한 벅참으로 다가왔다. 나열한 추억들이 보통 아빠들이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소소한 에피소드임에도 가슴을 찌릿하게 만드는 것은 까트린과 아빠 사이에 보이지 않았던 사랑 때문이었다.

 

  까트린은 여전히 자기가 살았던 빠리 10구의 거리에는 아버지와 산보하는 소녀가 늘 있을 거라고 말했다. 기억을 떠오리면 떠올릴 수록 아빠의 말이 생생히 들리는 것 같다고. 그만큼 강렬하게 남아있는 빠리에서의 아빠와의 추억이 지금의 까트린을 만드는데 밑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엄마가 발레리나였기에 자연스레 발레를 하게 되었고, 자신의 딸도 발레를 하는 내림 가운데 아빠와의 추억이 영향을 끼쳤을 지도 모른다. 여전히 어수룩한 아빠 곁에는, 떠나겠다고 으름장을 자주 놓는 엄마가 계신다. 어린 시절 까트린을 바라보았던 것처럼 이제는 까트린이 그런 아빠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상뻬의 그림에 반해 헌책방에서 데려온 책이었다. 낯선 프랑스 말들에 겉돌기도 했고, 중간 중간 매끄럽지 않은 어휘들에 고개를 갸웃 거리기도 했다. 그렇지만 까트린과 아빠와의 빠리 생활을 들춰보고 나니 괜시리 마음이 흐뭇해졌다. 세월이 흘러서도 그런 추억을 간직할 수 있다는 것이 부럽기도 했고, 마치 나의 어린시절인냥 즐거워졌기 때문이다. 아이의 시선에서 바라본 듯한 단편적인 기억들이었지만, 그래서 더 공감이 가는 추억들이었다. 아침 저녁으로 바람이 차지자 마음이 허해질까 걱정 되었던 요즘, 까트린 이야기를 통해 스산한 마음을 달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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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의 가족
아모스 오즈 지음, 박미영 옮김 / 창비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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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부하러 간 독서실에 책을 들고 간 것 부터가 잘못이지만, 쉬는 시간에 짬짬히 읽고 싶었다. 잠깐 본다는 것이 그만 다 읽어 버리고 말았지만, 컴컴한 독서실에서 이 책을 읽고 나왔을 때는 동굴에서 나온 기분이었다. 실제로 책에서 동굴이 나오기도 했지만, 환상적인 요소가 가미된 책을 고요한 장소에서 읽고 나니 책 속으로 빨려 들었다가 헤어 나온 기분이었다. 저자가 밑바탕을 그려준 세계에 나의 상상력을 덧대어 맘껏 뛰놀다온 그런 느낌. 그런 느낌이라면 너무 뛰어 놀아 조금은 몸이 피곤한 기분까지 든다.

 

  가끔 소설을 왜 읽냐는 질문을 받는다. 당연히 재미 있어서라고 대답하지만, 좀 더 공감을 주기 위해서 내가 소설을 좋아하는 예를 말해준다. 소설을 읽다보면 내 머리 위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 펼쳐진다. 책을 읽어 나가면서 그 공간 안에 저자의 글을 바탕으로 나만의 세계를 만들어 나간다. 오로지 상상력으로 만들어가며, 그 세계는 저자가 그려내는 것과 다른 세계일지라도 내가 만든 독창적인 세계이므로 어느 누구도 손댈 수 없는 재미라 할 수 있다. 책에 따라 화려하고 빽빽한 세계가 그려지기도 하고, 단순하면서도 일상적인 세계가 그려지기도 한다. 그 재미에 한번 빠지다 보면 소설을 읽는 묘미에서 헤어나올 수 없다. 이 책은 어둠이 주로 존재하는 세계였지만, 상상력을 맘껏 발휘하며 공간을 채워가는 재미에 푹 빠져 즐겁게 읽은 책에 속했다.

 

  머릿속에 한 마을을 그려 보길 바란다. 마을 주변에는 산과 숲, 바람과 구름 뿐이다. 근처에 다른 마을은 없고, 깊은 계곡에 자리한 마을에는 강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릴 뿐이다. 고요하면서도 평화로울 것 같은 분위기지만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동물들의 소리가 없었다. 흔히 볼 수 있는 동물들을 비롯해서, 작은 벌레가 나무를 갉아 먹는 소리조차 나지 않은 이상한 마을이었다. 그래서 아이들은 동물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소리를 내는지 눈으로 볼 수 없었다. 학교에서 선생님의 가르침이나 동네 할아버지가 만들어준 조각으로 유추할 뿐이었다. 어른들에게 동물에 대한 이야기나, 왜 마을에서 동물들이 사라졌는지에 대해 얘기를 꺼내면 모두들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리곤 마을 근처의 숲으로 가지 말라고 했다. 밤의 귀신 네히가 숲을 지나 마을까지 내려오기 때문이라고 했다. 밤이면 마을은 색깔을 잃어 갔다. 네히가 동물들을 잡아 갔다 생각한 어른들은 동물들이 사라진 날을 잊고 싶었고, 잊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몇몇 아이들은 숲으로 가서 동물들을 찾아 오고 싶었다. 어른들이 감추려 하면 할수록 아이들의 호기심은 팽배해 갈 수 밖에 없었다.

 

  마티와 마야는 숲의 궁금증을 품은 아이들이었다. 어른들이 말해주지 않았기에 직접 숲으로 가서 어른들이 감추려 하는 것을 알려고 했다. 숲으로 들어간 사람들이 있긴 했지만, 모두들 숲에 대해 말하지 않았고, 이상하게 변해갔다. 같은 반 친구인 니미가 그랬고, 재봉사 솔리나의 남편 기놈이 그랬다. 숲을 다녀 온 후 이상한 행동을 하고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어울리지 않았다기 보다는 사람들이 그들을 자동적으로 피했다. 마티와 마야는 궁금증을 이기지 못해 숲에 가기로 한다. 두려움과 호기심이 엎치락 뒤치락 하는 상황에서 그들은 모험을 강행한다. 숲은 어두웠다. 정적이 감돌았고, 빽빽히 들어찬 나무들이 걸림돌이 되기도 했다. 누구도 말해주지 않은 숲은 아이들에게 태고의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게 숲을 헤메다 아이들은 정원을 발견한다. 그 정원에는 온갖 동물들이 있었고, 모두 순했다. 처음으로 동물을 보게 된 아이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한 남자를 만나게 된다. 그 남자가 밤마다 어둠을 내리는 네히였고, 동물들이 이 곳에 모여 있는 이유와 자신이 숲에서 살게 된 이유를 아이들에게 털어 놓는다.

 

  네히는 보통 사람하고 다르다고 사람들에게 외면을 당해 동물들의 언어를 배웠다고 했다. 숲으로 들어올 때 동물들을 억지로 데려온 것이 아니라 동물들이 따라온 것이라고 했다. 자신이 받은 학대만큼 동물들이 인간들에게 받은 학대에 대해서도 불신하고 있었다. 아이들에겐 네히와 비슷한 사람이 니미였다. 니미는 숲을 다녀온 후에 소리지르는 병에 걸려 사람들이 모두 피했다. 마티와 마야는 그런 니미를 숲의 동굴에서 만났고, 일부러 그런 행동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니미는 숲보다 자신을 미워하는 아이들 속에 있을 때, 어른들이 손가락질 할때가 더 무섭다고 했다. 네히가 숲으로 들어간 근본적인 이유도 사람들 틈 속에서 살아갈 수 없었기에 동물들과 숲으로 가버린 것이다. 어른들은 그런 사정을 알지 못한 채 아이들에게 숨기려고 했고, 무엇이 잘못 됐는지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옮긴이도 말했지만, 이 책에서 독자에게 던져주는 메세지가 많다. 니미의 경우만 보더라도 자신과 다르다고 외면해 버린 사람들 때문에 상처를 받고 있었다. 네히 또한 자신을 놀리는 아이들이 있으면 괴롭히지 말라고, 그건 좋은 일이 아니라고, 싫다고 계속해서 이야기 하고 또 이야기 하라고 말할 정도로 깊은 상처를 안고 있었다. 서로간의 막힘 때문에 네히와 마을 사람들은 서로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 사정을 마티와 마야가 알았기에 막혀있던 세계의 소통의 역할을 해 줄 것이라는 암시를 하며 책은 끝을 맺는다. 

 

  아모스 오즈의 책을 몇 권 접해 본 사람이라면, <숲의 가족>이 조금 낯설 수도 있겠다. 이스라엘을 배경으로 써내려간 기존의 소설들과는 달리 환상적인 요소가 가미된 우화이기 때문이다. 묘사가 뛰어난 문장들도 색달랐다. 머리속에 상상의 나래를 충분히 펼칠 수 있었던 잔잔한 문체는 아름다웠다. 책을 읽으면서도 몇 번이나 겉표지를 살피며 '아모스 오즈 책 맞나'를 연발 할 만큼 색다른 책이었다. 나름대로 구축해 놓은 아모스 오즈의 작품 스타일을 깨기에 충분한 작품이었다. 이 짧은 우화를 통해 자신에게 맞는 메세지를 찾아 나서길 바란다. 매개자를 통해서라도 막혀 있던 곳에서 빠져나와 어울릴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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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뛰는 삶 - 간절히 원하는 그 모습으로 살아라
강헌구 지음 / 쌤앤파커스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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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는 꿈을 찾아 도전하라는, 혹은 일상의 변화를 꿈꿔 보라는 자계서는 식상하다. 몇 권만 읽어봐도 비슷비슷한 내용을 말하고 있는 사실을 알아 챌 수 있다. 무엇보다 내가 실천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자계서가 식상한 이유가 많을 것이다. 읽기만 하고, 몇 번의 찔림을 받고, 조금 더 정성이 들어가면 책장에 밑줄을 그어 보기도 하지만 다시 덮어 버리기 일쑤다. 지금껏 그렇게 반복해 왔기에 자계서를 손에 쥐고 있어도 설레지 않았다. 이 책도 그랬다. 비전에 대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가슴을 콩당 거리며 저자는 말하고 있었지만, 나에겐 타인의 외침으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푸념을 하면서도 책 구절에 열심히 포스트 잇을 붙였다. 메모도 남기고, 생각도 하며 저자가 목이 터져라 외치는 비전이 과연 나에게도 존재하는가 따져보았다. 나와는 멀리 떨어진 비현실의 세계에서 나의 잠재력을 끌어 오는 행위가 아니라 현실에서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 그것을 발견하고 싶었다. 나의 사정은 알지 못한채 나와 동떨어진 세계를 꿈꾸라는 말들은 더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개개인에게 충고해 줄 수 없는 어려움이 있지만, 여전히 무언가를 쥐고 싶은 욕망. 노력하지 않고 무언가를 쉽게 얻으려는 얇팍함에서 오는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들에 휩싸여 포스트 잇을 붙이면서 과연 이 문구들을 다시 들춰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크게 통찰, 작심, 돌파, 질주 4장으로 나뉘어 있는 책을 읽으면서도 전체적인 맥락을 보는 것이 아니라 달콤한 문구에 휩쓸렸기 때문이다. 저자가 바라는 건 이런게 아닐텐데, 왜 나는 글귀에만 집착했던 것일까.

 

   책을 읽으면서도 내용과 나를 접목 시키지 않고 외따로이 관찰만 했다. 그렇다보니 나를 자극하는 글귀는 많아도 나를 움직이는 글귀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았다. 비슷비슷한 강도의 글귀에 익숙해져 있는 터라 왠만한 자극적인 글귀로 나를 사로잡기 힘들다는 어리석은 자만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자만을 할때 하더라도 저자가 한 권의 책 속에 명시해 놓은 구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자신과 100퍼센트 혼연일치 시키지는 못할지라도 어떠한 단계를 거쳐 실행할 수 있을지 최소한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해야 했다. 1장 통찰에서는 나의 꿈, 비전, 목표를 확실히 정하고 하나의 주제를 끌어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 주제가 어떠하든 지금부터 나의 비전이 되고 꿈이 되는 것이다. 그런 과정 속에서 한 가지의 목표를 끌어 내면 절반 정도는 성공한 거라고 본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도 찾지 못해서 방황하고 있는 나 같은 독자도 많기 때문이다.

 

  2장에서는 끌어낸 목표에 대해 <작심>할 수 있는 용기를 부어 주었다. 작은 가능성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행동하게 만들었다. 그 중에 눈에 띄는 예 가운데 하나가 <사명선언문 작성하기>였다. '쓰는 것 자체가 생각하는 한 가지 방식'이라며 하고 싶은 일을 매일매일 적어 보는 것이었다. 사명선언문을 작성한다고 무슨 효과가 나타날까 생각했지만, 중학교 때부터 읽은 책의 흔적을 남기는 나로써는 쓰기의 힘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그래서 가장 큰 유혹을 받았던 부분도 사명선언문 작성하기였다. 쓰다 보면 목표가 설정되고, 현실화 되며, 더 커져갈거라는 가능성이 머리속에 그려졌다. 그런식으로 집중해 나가다 보면 한가지의 목표가 뚜렷이 설정된다고 했다. 그건 바로 내가 그렇게 갈망하던 '꿈'이었다. 그런 꿈을 발견했다면, 이제 <돌파>해야 한다. 꿈을 발견하고 시작은 했지만, 어느 정도의 한계에 이르면  포기해 버리고, 다시 현실에 안주해 버리기 쉽기 때문이다. 도약하라고 했다. 시간이 걸리고, 도전 방법을 바꾸더라도 목표를 잃지 말라고 했다. 그것은 곧, 내가 너무나 즐거워 하는 일이 될 것이기에.

 

  <돌파>의 과정을 거치고 나면 이제 남은건 <질주>다.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최고의 정점에 이르는 시기. 목표를 돌파하고 질주하는 순간에 찾아오는 경지의 순간이다. 충분히 인간이 오를 수 있는 경지이고, 즐길 수 있는 과정이다. 그때가 되면 즐기는 자가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있다고 했다. 문득, 떠오르는 목표를 하나 설정하고 그런 과정까지 상상을 해보니 즐거워졌다. 그런 목표를 끌어내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들기는 했지만, 저자가 권유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현재 나는 어느 과정에 속해 있을까 생각해 보는 것만으로도 뿌듯했다. 나의 생각을 드러내는 이런 글쓰기를 할때에 비로소 살아 있음을 느끼기도 했다. 쓰는 것으로 나의 꿈을 실현시키는 것. 어쩌면 나에게 하나의 목표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설레임으로, 나의 비전이 짙어지기를 갈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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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로콩밭에서 붙잡아서 - 제10회 소설 스바루 신인상 수상작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15
오기와라 히로시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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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실을 잊고 싶을 때 하는 독서가 있다. 도피성 독서다. 나의 머리속은 어지러우니 그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을 만큼 재미나고 유쾌한 책을 찾아서 읽는 것. 그것이 내가 자주 행하는 도피성 독서다. 이번에 선택된 책은 일본소설이었다. 가독성이 높고 가볍게 읽을 수 있어, 내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수 많은 책들 중에서 지인의 추천을 받아 읽게 된 책이다. 말은 현실 도피를 위해 읽게 된 책이라고 했지만, 큰 기대는 없었다. 나름 일본 현대소설을 많이 접했기에 어느 정도의 분위기는 간파하고 있다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이런 책을 만나면 기분이 좋다. 나의 예상을 여지없이 깨주는 책. 깊은 밤 혼자서 미친 사람처럼 키득거려도 마냥 즐거운 책. 이 책이 바로 그런 책이었다.

 

  책의 배경이 되는 곳은 일본의 깡촌 중의 깡촌, 우시아나 마을이었다. 일본 사람들도 잘 모르는 강촌마을에서 '마을 맹글기' 프로젝트(?)가 진행된다. 도쿄에서 대학을 나온 마을 최고의 앨리트 청년회장 신이치가 뱉은 한마디 때문이었다. 인구가 300명 밖에 안되는 도시에서, 그것도 젊은 사람들은 야구팀도 안되는 인원으로 어떻게 '마을 맹글기'를 감행 한다는 것일까. 신이치는 마을 청년들에게 도쿄에서 광고대리점을 하는 대학친구에게 일을 부탁해 보기로 한다. 그렇게 그들은 도쿄로 향한다. 하지만 그들에게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으니 바로 언어였다. 

 

  이 책에서 가장 먼저 나를 웃겼던 것도 그들의 사투리였다. 지역상으로 구분해서인지 이 책에는 충청도 사투리가 실려 있었다. 충청도에 살지는 않지만 억양과 말투가 익숙하기에 나도 모르게 그런 뉘양스로 책 속의 사투리를 읽어 나갔다. 그러다 보니 인물들의 개성이 톡톡 살아나며, 마치 내가 그 말투를 쓰고 있는 것 같아 책 속 배경으로 빨려 들어갔다. 하지만 오지 마을 중에서도 오지 마을이라 통역이 없으면 그들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나마 도쿄에서 학교를 나온 신이치가 있었기에 '마을 맹글기' 프로젝트가 나왔던 것이고, 도쿄 말을 엇비슷하게 할 수 있었기에 도쿄로 일을 의뢰하러 간 것이다. 신이치가 없다면 같이 간 사토루나 우시아나 마을의 말은 외국말이 되어 버릴 정도로 독창적인(?) 사투리였다. 다행히 신이치 덕에 대학친구의 회사로 찾아가지만, 그들의 행색과 취지를 들어본 친구는 무시할 뿐이었다. 그대로 고향에 돌아갈 수 없어 다른 회사를 찾던 중 도산 위기 직전의 '유니버설 광고사'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대망의 '마을 맹글기' 프로젝트가 시작된다.

 

  책 읽기에 즐거움을 더해 주었던 것은 광고캠페인 제작 경로 순으로 스토리가 전개 된다는 점이었다. 간략한 설명이 곁들어진 소제목은 이야기의 흐름에 재미를 더해 주었고, 정말 그들이 하는 일이 제대로 된 광고캠페인을 벌이는 것 같은 착각까지 하도록 만들었다. 도산 위기의 '유니버설 광고사' 사람들이 우시아나 마을을 방문하고, 말도 안되는 기획안을 내놓는 과정도 제작 순서대로 소제목을 달아놓으니 제법 그럴듯 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읽는 재미에만 매달릴 수는 없는 법. 도대체 우시아나 마을을 무엇을 통해 알릴 것인가. 아무리 이리 뒤지고 저리 뒤져도 광고로 앞세울 만한 것이 없었다. 그래서 급기야 마을에서 가장 그럴듯해 보이는 마을 호수에 공룡을 띄우기로 한다. 조잡하게 만든 공룡 속에 광고사 사장이 들어가고, 그 모습을 멀리에서 사진을 찍었다. 호수 근처에 살고 있는 자칭 아마추어 사진작가 사토루가 우연히 발견한 척 꾸며서 언론에 흘렸다. 우시아나사우루스의 출현이었다. 그런데 그 방법이 효과가 있었다. 그 후로 우시아나 마을은 전국에서 온 취재진도 모자라 해외에서 온 취재진까지 북새통을 이룬다. 그리고 취재를 나왔던 일본 최고의 미인 아나운서가 사토루에게 시집을 오는 일까지 생긴다.

 

  하지만 가짜 공룡 사건은 오래가지 못했다. 공룡사건의 거짓을 추궁하기도 전에 아나운서와 사토루의 결혼이 이슈가 되어서 어영부영 넘어가 버린다. 유명 아나운서의 농촌 다이어리가 도시 여성들에게 붐을 일으키기도 하면서 우시아나 마을은 여전히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우시아나 마을이 그렇게 묻혀 버리면 재미 없다는 듯이 오래전에 멸종된 도도새를 우시아나 마을에서 발견한다는 복선을 깔아놓은 채, 책은 그렇게 끝이 난다. 깡촌의 사투리와 어처구니 없는 공룡사건을 통해서 낄낄 거렸지만, 그렇게라도 도시 사람들에게 우시아나 마을을 알리고 싶었던 사람들의 모습에 한편으로는 측은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우시아나 마을 같은 곳은 이제는 너무 흔하다. 순박함으로는 마을을 지켜갈 수가 없고, 생계의 위협까지 받는다. 그래서인지 공룡을 출현 시키자는 생각은 황당하면서도 치열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이제는 친근한 곳으로 변해 버린 우시아나 마을. 오늘은 어떤 모습일까 상상하면서, 내 생활에서의 이슈거리는 없는지 돌아보며 하루를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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