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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트린 이야기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199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시원한 바람을 쐬며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걷는 산책길이 참으로 신선한 요즘이다. 시간이 조금 흐르면 낙엽이 떨어지고 스산한 바람이 불텐데, 내 마음도 허해지지 않을까 벌써부터 걱정이 된다. 조그마한 일에도 감상에 빠지고, 많이 외로워 하는 계절이 가을이기에 쓸떼없는 걱정이 일고 있는 것이다. 가을이 오면 꼭 무언가를 추억하게 된다. 나의 미래를 추측해 보는 것보다 지나온 과거에 대한 회한이 더 큰게 사실이다. 회한의 시간을 딛고 서서 나의 미래를 비춰볼 수 있다면 좋으련만. 어쩔 땐 너무 깊은 과거여행에 빠져 허우적 댈 때가 있다. 그러나 너무 빨리 돌아가는 세상속에 살기에 추억도 희미해져 가고 있는 느낌이 든다. 문득, 까트린 처럼 나에게 남아 있는 추억을 기록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 내리는 겨울의 뉴욕에서 아빠와의 추억을 꺼낸 까트린. 그녀의 추억을 여행하다 보니 나에게 남은 추억이 무엇인지 되돌아 보는 시간이 되었기 때문이리라.
지금은 뉴욕에서 발레를 가르치고 있는 까트린은 아빠와의 파리 생활을 추억한다. 발레리나인 엄마를 만나 결혼을 하고 자신을 낳았지만, 자국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던 엄마가 먼저 미국으로 떠나버려 아빠와 생활했던 어린 시절 이야기였다. 아빠는 까스트라드 씨와 동업으로 가게를 하고 있었다. 여러가지 물건들을 사들였다가 다시 다른 사람에게 파는, 아빠의 말을 빌리자면 '꾸러미들 속에서 일을 하는 셈'이었다. 엄마가 미국에 계셨기 때문에 까트린과 아빠는 늘 함께 했다. 아빠의 가게의 저울에 올라가 몸무게를 쟀던 일, 안경을 벗고 희미한 세상을 바라보던 일, 까스트라드 씨의 받아쓰기를 싫어했던 일들은 아빠와 함께 한 추억이었다. 특히나 까탈스러웠던 까스트라드 씨에 대한 여러가지 에피소드에 대한 추억은 아빠와 딸이라는 관계가 수직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친구처럼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어서 더욱더 즐거워 보였다.
까트린의 아빠는 일에서나 인간관계에서나 조금은 어수룩한데가 있었다. 하지만 까트린의 아빠로써는 언제나 다정다감 했기에 까뜨린의 기억 속에서도 아빠가 푸근한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미국으로 건너와 지금껏 어떻게 생활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보다, 엄마와의 추억보다, 파리에서 아빠와 살았던 어린 시절이 대부분이였기 때문이다. 자신을 발레 학원에 데려다 주고 데려온 일. 발레학원에서 사귄 친구의 집에 초대받지 않은 상태로 아빠와 갔던 일. 그곳에서 환영받지 못했던 이야기들은 아빠라는 존재에 대한 벅참으로 다가왔다. 나열한 추억들이 보통 아빠들이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소소한 에피소드임에도 가슴을 찌릿하게 만드는 것은 까트린과 아빠 사이에 보이지 않았던 사랑 때문이었다.
까트린은 여전히 자기가 살았던 빠리 10구의 거리에는 아버지와 산보하는 소녀가 늘 있을 거라고 말했다. 기억을 떠오리면 떠올릴 수록 아빠의 말이 생생히 들리는 것 같다고. 그만큼 강렬하게 남아있는 빠리에서의 아빠와의 추억이 지금의 까트린을 만드는데 밑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엄마가 발레리나였기에 자연스레 발레를 하게 되었고, 자신의 딸도 발레를 하는 내림 가운데 아빠와의 추억이 영향을 끼쳤을 지도 모른다. 여전히 어수룩한 아빠 곁에는, 떠나겠다고 으름장을 자주 놓는 엄마가 계신다. 어린 시절 까트린을 바라보았던 것처럼 이제는 까트린이 그런 아빠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상뻬의 그림에 반해 헌책방에서 데려온 책이었다. 낯선 프랑스 말들에 겉돌기도 했고, 중간 중간 매끄럽지 않은 어휘들에 고개를 갸웃 거리기도 했다. 그렇지만 까트린과 아빠와의 빠리 생활을 들춰보고 나니 괜시리 마음이 흐뭇해졌다. 세월이 흘러서도 그런 추억을 간직할 수 있다는 것이 부럽기도 했고, 마치 나의 어린시절인냥 즐거워졌기 때문이다. 아이의 시선에서 바라본 듯한 단편적인 기억들이었지만, 그래서 더 공감이 가는 추억들이었다. 아침 저녁으로 바람이 차지자 마음이 허해질까 걱정 되었던 요즘, 까트린 이야기를 통해 스산한 마음을 달래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