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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평 도서의 좋은(추천할 만한) 점

- 잊고 살아가는, 혹은 이미 잊어 버린 엄마를 떠 올릴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 과정은 너무나 마음이 아파서 눈물을 흘리지 않고는 읽을 수가 없습니다.


•  서평 도서와 맥락을 같이 하는 '한핏줄 도서'

-<참 다사로운 어머니께>, 마루오카 마을 편

 


•  서평 도서와 동일한 분야에서 강력 추천하는 도서

김정현의 <아버지>, <어머니>


•  서평 도서를 권하고 싶은 대상

- 엄마를 가진 모든 이들, 혹은 엄마를 잃어버린 모들 이들.


•  마음에 남는 '책속에서' 한 구절

- 엄마라는 말에는 친근감만이 아니라 나 좀 돌봐줘,라는 호소가 배어 있다. 혼만 내지 말고 머리를 쓰다듬어줘, 옳고 그름을 떠나 내 편이 되어줘,라는. -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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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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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이 떠지지 않는다. 거울을 보니 눈이 심하게 부어 있다. 이럴줄 알았으면 조금만 우는건데 하는 후회도 잠시, 허둥지둥 세수를 한다.잠깐 본다는 것이 새벽 4시까지 책을 읽다 늦잠을 자버린 것이다. 아뿔사! 마음이 아프다고 울때는 언제고 어느새 현실 앞에 내던져진 나를 보고 있자니 짧은 한숨이 나온다. 하지만 나의 의지대로 읽기를 조절할 수 없었다. 쉼없이 흘러나오는 눈물을 닦느라 책 읽기를 멈췄을 뿐, 꼼짝할 수 없었다. 무엇이 나를 깊은 새벽까지 헤어나올 수 없게 만들었을까. 무엇이 나를 그토록 울렸던 것일까. 마음속을 훑고간 감정의 흔적들은 고스란히 남아있는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1장을 읽을 때, 딸의 고백으로 이어지는 글들은 지난했다. '나'라고 하지 않고 '너'라고 자신을 드러내며, 인칭대명사가 아닌 지시대명사처럼 언급하는 것이 낯설어 어려움을 느끼게 만들었다. 온통 지칭하는 것에 신경을 쓰다 보니 짜증스럽기까지 해서, 엄마를 잃어 버렸다는 딸의 고백에도 시큰둥 했다. 책을 덮을 수 없는 흡인력은 있었지만, 1장을 읽다말고 지인에게 지루하다고 푸념을 했다. 그랬더니 지인은 절대 지루하지 않다고, 그 소설은 최고라고 했다. 정말? 그럼 나만 이렇게 지루하게 느껴진다는 말인가. 다시 책을 펼쳐들었을 때는 밤 12시가 지나 있었다. 조금만 읽다 자려 했는데, 어느새 새벽 4시가 넘어 있었고 눈물 콧물을 잔뜩 흘리며 저며오는 가슴을 부여안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책 읽기가 더뎌 진 것은 중간 중간 우느라, 아픈 가슴을 내리 치느라, 엄마 생각을 하느라 멍했기 때문이다.

 

  1장을 뚫고 나오지 못하면, 초반은 지루하다고 단정해 버릴 수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지하철 역에서 엄마를 잃어 버린 내용으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아들네 집에 가기위해 지하철을 탄 노부부는 '엄마'가 타기 전에 닫혀 버린 문 사이로 엄마를 잃어 버렸다. 엄마를 놓친 것이 아니라, 잃어 버렸다라고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엄마의 뇌를 갉아 먹고 있는 병 때문이었다. 아들네 집에 전화 한통만 했더라면 에피소드로 끝났겠지만, 단순한 행동조차 버거운 엄마였고 그 사실을 가족들이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엄마를 찾으려는 노력과 딸의 고백이 범벅이 된 1장을 쉽게 못 뚫었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는 비난과 함께 엄마를 찾기 위한 갈등이 우울하게 비춰질 거라는 엇나간 추측 때문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소설 속의 '엄마'를 바라보는 그들의 구경꾼에 불과했다. 엄마를 잃어 버렸기에 엄마에 대한 추억들이 쏟아내는 것은 당연하다면서. 그러나 딸(1장)-큰아들(2장)-아버지.남편(3장)-어머니.아내(4장)-딸(에필로그)로 이어지는 일련의 고백 앞에 흡수될 수 밖에 없었다. 내 엄마의 입장에서 보자면, '딸'의 위치밖에 안되는 나이지만 그것만으로도 벅찬 가슴을 누를 길이 없었다. 그들이 잃어버린 '엄마'는 시골에서 오남매를 낳고 키운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 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보편적인 엄마의 모습이었다. 자꾸 나의 엄마와 소설 속의 '엄마'가 겹쳐지는 것은 그런 공통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10남매를 낳아 자식 한 명을 잃고,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한 나의 엄마. 한글도 독학으로 깨쳐 나에게 틀린 맞춤법을 가르쳐 주던 나의 엄마가 떠오르는 것은 당연했다.

 

  책을 읽는 동안 '나의 엄마'에 대한 추억은 쉴새 없이 밀려왔다. 내가 잊어 버린 엄마였고, 잊고 있었던 엄마의 모습이 그러할진대 엄마를 잃어 버린 그들은 오죽했을까. 당장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오래 살라고 아프지 말라는 말을 건네고 싶을 정도였는데, 그럴 수 없는 그들의 마음은 어떠 했을까. 힘든 시절, 자신들을 키워내고 아내의 역할을 다하고, 인심人心 한번 독하게 드러내놓고 살아본 적이 없는 엄마를 그제서야 허겁지겁 떠올리고 추억하기 바빴다. 그 모든 아픔과 절망을 감당할 이는 그들이라고 꾸짖던 내가 어느새 자리바꿈을 하여, 그들과 함께 통탄하며 아픈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내가 도시에서 자랐다면 적정선을 유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던 그들의 엄마는, 나의 엄마와 닮아도 너무나 닮아 있었다.

 

  9남매의 막내인 내가 엄마의 삶을 깊이 보아온 것은 아니다. 서열이 빠른 언니 오빠들과 살아온 시대가 다를 정도니, 엄마의 삶이 어떠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9남매를 키워내면서 엄마가 감당해야 할 일은 한 두가지가 아니였다. 한량인 아버지, 벌여놓은 농사, 자꾸만 커가는 자식들 모두를 엄마 혼자서 감당해야 했다. 내가 초등학교는 물론 중.고등학교때까지 수없이 내야 했던 돈을 늘 동네사람에게 빌려야 했으니, 내 위의 언니 오빠들은 어떻게 그 많은 돈을 감당해야 했는지 알 수 없다. 엄마가 늦은 오후에 버스를 타고 가는 것만 바라봐도 어디로 가버릴까봐 철렁했던 그 마음, 중학교 때 부터 자취를 해서 일요일마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을 떠나올 때의 그 불안감.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엄마가 종교를 갖게 되면서 그 마음이 어떤 것인지 조금은 알게 되었지만 그런 아픔들을 모조리 끄집어 내어준 책이 바로 이 책이었다. 그런 기억 때문에 책 읽기를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딸과 아들, 남편에게 한 여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어떠한 가치로도 비교할 수 없었다. 통한의 눈물을 흘리고, 미안함에 가슴을 치고, 제발 돌아만 와달라고 외쳐 보아도 그 여인을 잃어 버린 것은 그들이었다. 그런 가족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엄마는 한 마리의 새가 되어 딸의 집을 지켜본다. 그러면서 자신이 살아온 삶과, 지금껏 숨겨야 했던 또 다른 사랑을 고백했지만 늘 미안해 하는 엄마의 모습은 내 마음을 더 아프게 했다. 그 고백들을 끝으로 잃어 버린 엄마를 영영 잊어 버릴까봐 덜컥 겁이 났다. 소설 속의 엄마, 나의 엄마 모두 내 곁을 떠나버릴까봐 두려웠다. 가족들이 마음 깊이 품으면서 드러내지 못한 감정이 그런 두려움일 거라 생각하자 눈 앞이 흐려졌다. 두 엄마에게 할 수 있는 일이 눈물을 흘리는 것 뿐일지도 모른다는데서 오는 깊은 회한이었다.

 

  엄마는 그렇게 정말 가족들의 곁을 떠나 버린 것일까. 엄마를 잃어 버린지 9개월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다. 엄마를 잃어 버린지 얼마 되지 않아서 목격한 사람들에 따르면, 엄마는 큰 아들을 찾아 처음 서울로 올 때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발견되는 장소는 아들이 이사를 거듭해 온 집들이었다. 그리고 더 이상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다. 여름에 잃어 버린 엄마를 몇 계절이 지나가도 찾지 못했다. 그런 상태에서 큰 딸은 이탈리아로 간다.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에 그려진 천지창조를 보고, 기념품 가게에서 장미 묵주를 산다. 언젠가 가장 작은 나라에 가게 되거든 장미 묵주를 사달라고 했던 엄마. 바티칸 시국에 와 있는 딸은 무엇엔가 이끌리듯 성 베드로 성당을 향해 걸어간다. 그리고 죽은 아들을 안고 있는 피에타 상을 보게 된다. 그 앞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엄마를 찾게 해달라고 한다. 자신이 이탈리아로 온 것은 엄마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고. 엄마를, 엄마를 부탁한다고. 도대체 '엄마'는 어디 있는 것일까. 나를 낳아주고 희생해준 '나의 엄마' 또한 어디에 있는 것일까. 엄마의 삶이 나로 인해 부서져 버린 것을 모르고, 마음 밖에 엄마를 두고 살아오지는 않았을까. 모든 자식들이 그런 엄마를 포기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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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스크
퍼시 캉프 지음, 용경식 옮김 / 끌레마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며칠 전 지인과 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진정한 이야기 꾼은 누구인가에 대해 잠시 얘기를 나누었다. 화두는 공부를 해서 글을 쓰는 작가와 허구를 사실로 만들어 버리는 작가였다. 몇몇 작가를 언급하면서 그래도 허구를 진짜인 것 처럼 만들어 버리는 작가야 말로 탁월한 이야기 꾼이 아닌가 하는 결론을 내렸다. 모든 작가의 성향을 알고 있는 것도 아니고, 각자의 취향이 다르기에 공감하는 이야기를 편하게 나눈 것이다. 그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최근에 내가 읽은 그런 소설은 어떠한 것이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한치의 망설임 없이 <머스크>가 떠올랐다. 탁월한 이야기 꾼을 가리기에 앞서, 허구를 사실인냥 독자를 끌어당기는 마력을 뿜어냈다는데에 의심할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참 책에 빠져서 소설을 읽어가던 시절, 나를 혼란스럽게 한 이야기들이 참 많았다. 그때는 지금처럼 온라인에서 같은 책을 읽은 독자들과 소통하는 일도 거의 없었고, 온라인 서점에서 서평을 보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오로지 혼자서 상상의 나래를 폈다가 접었다를 반복할 수 밖에 없었는데, 도무지 이게 사실인지 허구인지 구분이 안가는 작품들이 많았다. 책을 읽고 나서도 계속해서 책 내용을 떠올리며, 사실과 허구 사이에서 헤메곤 했었다.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사실인 것도 있지만 소설적인 요소가 가미되고 대부분은 허구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무척 허무해 했다. 약간 바보스럽긴 했지만, 그때는 있는 그대로를 받아 들이는 순진한 구석이 있었다. 요즘도 종종 책을 읽고 나면 시도때도 없이 책의 일부분이 떠오르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수없이 쏟아지는 책들 속에서 며칠 동안의 기억이 사로잡고 있는 책은 내게 색다를 수 밖에 없다.

 

  <머스크>가 그랬다. 그 책 내용이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것에는 의문이 더 많았다. 과연 향수로 인해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인간의 광기와 집착은 어느 정도일까를 자주 생각하게 되었다. 향수하면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가 떠오르지만, 그 책보다는 좀 더 현실적인 광기를 담고 있다고나 할까. 일흔을 앞둔 아르망 엠므의 행동을 인정할 수 없으면서도, 그럴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을 품는  나를 보게 된다. 분명 내가 이 책의 줄거리를 풀어내면 단박에 '허구잖아'를 외치겠지만, 퍼시 캉프가 풀어낸 내용은 진실의 가능성을 담고 있다.

 

  69세의 아르망은 프랑스 정보부에서 스파이로 활동했다. 자신의 직업 때문인지 그는 매사에 꼼꼼했고, 특히나 자기 관리 능력이 뛰어났다. 그의 나이만 보면 할아버지로 분류하며 별관심을 두지 않겠지만, 유부녀와 밀회를 즐기며, 외출하기 전에 꼼꼼하게 옷을 입는 것을 즐겨하는 노신사였다. 경제적인 어려움도 없었고, 독신으로 살아온 그는 걸리적 거릴것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애인이 던진 한마디에 그의 인생은 뒤죽박죽이 된다. 그가 옷을 꼼꼼하게 입고 난 후에 하는 마무리 작업은 향수를 뿌리는 일이다. 그는 늘 써왔던 향수 '머스크'가 새로운 용기容器에 담겨있는 것을 발랐다. 그러나 그의 애인은 평소와는 다른 냄새가 난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에게 머스크는 다른 향기를 내어도 될 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40년간 머스크를 써왔고, 머스크가 자신의 삶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상상을 초월했다. 여인들과 관계를 맺을때도, 여자를 유혹할때도 머스크의 영향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체취와 비슷하면서도 야릇한 머스크를 오랜 세월 동안 이용해 온 이유였다. 그런데 머스크가 리뉴얼 되면서 무언가가 바뀐 것이다. 그는 그런 변화를 원치 않았다. 꼭 이전에 썼던 것과 같은 머스크를 사용해야만 했다. 그는 행동파였다. 바로 향이 바뀐 이유가 무엇인지, 제조회사에 문의 편지를 띄운다. 사연인즉 지금껏 머스크를 생산해왔던 회사가 다른 곳으로 인수되면서, 더이상 천연 머스크를 생산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머스크의 원료는 사향노루 분비물이었는데, 새로운 회사의 이미지와 맞지 않아 인공 첨가물을 써서 기존의 향수와 완벽하게 일치하니 걱정을 붙들어 매라는 것이다. 하지만 애인이 느낄 정도로 냄새가 다른 향수를 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머스크는 단순한 향수가 아닌, 지금껏 살아온 아르망 엠므 그 자체였기에 어떻해서든지 기존의 향수를 구해야만 했다.

 

  그가 향수를 구하는 방법은 철저했다. 신문광고는 물론이며, 공동품점을 찾고, 제조회사를 찾아가 또 다른 물류망을 탐색해서 머스크를 구했다. 하지만 그가 필요로 하는 양은 앞으로 그가 살 날에 비례 할만한 양이여야 했다. 그는 희망 연령을 82세로 잡고, 13년 동안 쓸 양을 필요로 했다. 한 달에 125밀리리터짜리 한 병을 소비하므로, 156병이 필요했다. 그는 종조부의 말년을 떠 올리고 희망 연령에 8년을 더해 90세로 다시 잡고, 어림짐작 260병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 많은 양의 향수를 어떻게 구할 것인가. 그가 애쓴 방법으로는 3년치도 안되는 양을 모았을 뿐인데. 직접 향수제조를 해보려고도 했지만, 그마저도 어려움이 많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방법은 단 하나, 향수를 아껴쓰되 그가 보유한 양 만큼만 생을 이어가야 했다.

 

  하지만, 그가 정해진 양의 머스크를 쓰지 못한 것은 치욕이었다. 그동안 머스크에게 애착을 갖을 수 없었던 이유를 원료를 통해 알게 되었지만, 그에게 남겨진 양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는 머스크 없이 생을 이어가느니, 재고가 바닥이 날 때쯤 여유있는 죽음을 선택하기로 했다. 자살. 그에게는 그 방법 밖에 없었다. 자신이 예측한 82세까지 살더라도 머스크가 없다면, 그것은 죽음보다 못한 삶이었다. 그는 철저히 죽음을 준비한다. 집을 팔고, 유서를 작성하고, 관을 만들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시체를 처리해줄 장의사도 구했다. 잠시 자신이 꾸민 일에 대한 회의가 들긴 했지만, 그는 결단력 있는 사람이므로 자살을 선택한다. 깨끗한 죽음을 원했던 그는(겉모습이든, 자신의 삶에서든) 장의사가 자신을 처리하기 편하게 최선을 다해 죽는다. 이제 그의 마지막을 장식해 줄 것은 장의사에게 특별히 남겨 놓았던 머스크일 것이다.

 

  그의 죽음은 머스크가 쓸 수 없는 노인네의 결말이었다. 그것은 허영과 기만이었지만, 오히려 자신의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그에겐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인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죽음을 택했지만, 인간의 집착이 죽음 앞에서 얼마나 무모하고 허무한 것인지를 여실히 드러내는 이야기였다. 한 순간에 자신을 무너뜨릴 수 있으며, 정체성을 잃어 버리고 향수에 집착하는 엠므씨야 말로 현대인의 나약함을 비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불가능해 보이는 소재를 가능해 보이도록 착각하게 만드는 작가가 만들어 놓은 치밀한 그물에 그대로 걸려든 느낌이다. 작가가 독자에게 던져주는 감정의 소용돌이에는 여러가지가 있었지만, 엠므씨의 행보와 선택에 웃을을 던질 수는 없었다. 좀 더 현실을 직시하고 자신을 추스려주기를 현대인들에게 고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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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평 도서의 좋은(추천할 만한) 점

- 저자의 삶이 엿보인다. 아버지, 어머니의 이야기를 통해 그의 내면이 좀 더 드러난다.


•  서평 도서와 맥락을 같이 하는 '한핏줄 도서'

- 미셀 투르니에의 '외면일기'


•  서평 도서와 동일한 분야에서 강력 추천하는 도서

- 장 그르니에의 '어느 개의 죽음'


•  서평 도서를 권하고 싶은 대상

- 연말의 기운이 스산하게 느껴지는 이들에게


•  마음에 남는 '책속에서' 한 구절

- 글을 쓸 때 나는 작곡을 생각한다. 글은 몸속의 리듬을 언어로 표현해내는 악보이다.(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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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기별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갑작스런 추위로 온 몸이 움츠러든다. 두꺼운 점퍼를 걸치고, 무릎 담요를 덮고, 뜨거운 차를 마셔도 추위를 이겨낼 재간이 없다. 여전히 발이 시리고, 몸이 덜덜 떨려 오는 것은 비단 나 뿐인가. 난롯가에 앉아 책을 읽고 싶은 욕망은 끝이 없지만, 분명 책을 읽다 말고 꾸벅꾸벅 졸 것이기에 추위를 견디며 끄적일 수 밖에 없다. 갑작스런 추위라고 했지만, 겨울이니까 추운거고 이제서야 계절다운 맛이 나기도 한다. 하지만 꽁꽁 얼어 버린 내 마음은 무엇으로 녹여 줘야 할까. 봄이 오려면 아직도 멀었고, 자꾸만 움츠러드는 내 마음을 돌보아 주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때 김훈의 책을 만났다. 오랜만에 나온 신간이라 예약판매까지 했으면서, 정작 책에는 손을 못대고 있었다. 편하게 하는 독서에 익숙해진 터라 쉽게 마음을 터놓지 못했다.

 

  처음 그의 문체를 대하던 낯섬을 기억한다. 단어와 단어 사이에 펼쳐진 수 많은 섬들의 존재에 한참을 헤메면서도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을 연달아 6권을 읽어 내려가다 보니, 그의 문체가 식상해졌다. 익숙한 단어를 낯설게 배치해 놓은 그의 글은 무미건조했고 답답했다. 그래서 한 동안 그의 글을 읽지 않았는데, 답답함이 조금은 가셨을거라는 생각에 다시 그의 책을 집어 들었다. 소설이 아닌 에세이였기에 좀 더 편하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글은 가뭄에 논바닥이 쩍쩍 갈라지듯 팍팍한 내 마음을 더 옥죄고 들어왔다. 추운 겨울날이었고, 내 마음도 스산했고, 무엇보다도 그의 녹록치 않았던 삶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별빛처럼 흩뿌려지던 첫 글, <바다의 기별>이 지나가고 아버지에 관한 글이 나왔다. 첫 시작은 '아버지를 묻던 겨울은 몹시 추웠다' 였다. 그 문장에서 앞에서 멈출 수 밖에 없던 이유는 9년 전, 나의 아버지도 11월의 차가운 땅 속으로 묻혔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어떻게 묻혔는지 장지까지 따라가지는 못했지만(집 근처였음에도 어른들은 따라오지 못하게 했다.), 그 문장만으로도 그때의 분위기가 그대로 젖어오는 듯 했다(저자에게도 나에게도). 무덤앞에서 아버지의 죽음과 부재를 인정해야 했던 저자는 자상하지도 않고 가정적이지도 않은 또 다른 아버지를 떠올렸다. '한국 현대사의 황무지에 맨몸을 갈았'던 아버지와 함께 한 시간은 많지 않았다. 늘 바깥으로 돌던 아버지였지만, 늘 아버지 편을 들었다고 했다. '30년이 지난 무덤가에서' 풍화 되어 버린 슬픔은 '울 수 있는 슬픔이 아니다' 라고 말하는 저자. '슬픔도 시간 속에서 풍화' 된다는 것이 가슴 시리게 다가왔다.

 

  아버지의 죽음, 장모의 죽음, 딸아이의 취직, 어머니에 대한 추억등으로 채워진 글들은 그동안 저자가 드러내지 않았던 사적인 내면의 세계였다. 담담하면서도 고루하게 써 내려간 글들을 읽노라면, 나와는 다른 업겁의 세월을 지나온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인생의 희비애락이 조금씩 쌓여간다고는 하지만, 저자와의 공간을 메꾸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겪은 일들이 저자의 글 속에서 새롭게 재조명 되기도 했지만, 아직 내겐 풍화를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했다. 특히 슬픔을 말할 때는 진하게 배어나오는 아픔 앞에서 당황하고 말았다. 작은 바늘로 찌른 살갗에서 얘기치 못한 양의 혈액이 흘러나오는 것처럼, 내 아픔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저자는 담담했다. 세월의 깊이를 말하지 않는다면 언제 일어난 일인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무뎌 보였다.

 

  동병상련인지, 마음의 착찹함 때문인지 구별하기 힘들었지만 그의 글 속에 깊이 파묻힌 것만은 사실이다. 책을 읽는 동안 내 세계에서 벗어났다는 생각이 들었고, 저자의 내면 세계를 탐색하느라 바빴다. 특별한 얘기라기 보다 삶에 녹아드는 일상을 얘기해서인지도 모르겠다. 사람과의 추억에서 벗어나 시와 음악, 기행, 그림에 관한 글들은 또다른 매력으로 다가왔다. 저자에게 어떠한 소재가 주어지든지 저자의 문체로 녹여 버리는 다양함을 맛본 것이다. 눈을 부릅뜨고 읽지 않으면, 보석 같은 문장들을 지나치기 일쑤였다. 그런 문장에 찬사와 의문을 던지기도 하고, 질투섞인 야유를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기억하고 싶고 간직하고 싶은 문장들은 쉽게 내 마음에 박히지 않았다. 저자의 특징이기도 한 애매모호를 가장하여 정곡을 찌르는 문장을 되풀이해서 읽을 수 밖에 없는 이유였다. 특히 그가 <말과 사물>에 대해 강연한 내용은 덕지덕지 붙여놓은 메모지로 가득했다. 모든 것을 흡수하고 싶어 붙은 메모지는 정작 내 마음속을 겉돌았지만 말이다.

 

  그렇게 그의 글을 다 읽었다고 마음을 놓는 순간 좀 특별한 부록이 펼쳐진다. 분명 그의 작품을 읽으면서 만났던 서문들과 수상소감이 실려 있었는데, 무척이나 생소하게 다가왔다. 나를 훑고만 지나가는 그의 문체가 낯설어, 직접 책을 찾아 대조해 보는 미련한 행동까지 할 정도였다. 미련한 행동이 끝나자 펼쳐진 것은 화가 오치균의 작품들이었다. 화가와의 대화를 통해 그의 작품이 궁금했지만, 상상만으로 만족해야 하는 독자의 마음을 알고 살짝 실어준 것이다. 그래서인지 저자와 긴 여정을 함께 한 기분이다. 하룻저녁에 읽어버린 책에서 마주한 저자는 카멜레온처럼 시시각각 새로운 옷을 갈아 입고 다가왔다. 그만큼 다양한 그를 만나본 적이 없었다는 말이다. 비교적 많은 작품을 통해 그와 소통해 왔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통해서 좀 더 가까워진 느낌이 든다. 어느 위치에서 있던지 이런 소통을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다. 그때마다 토를 달고, 감격하고, 냉소적이라고 무언의 암시를 나도 보낼 수 있게 말이다.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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