겹겹의 의도 장 자끄 상뻬의 그림 이야기 1
장 자끄 상뻬 글 그림, 윤정임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집에 읽을 책이 많다보니 책들에게 무척 관대한 편이다. 한참 열을 올리고 읽던 작가도 어느 순간 내 눈에 들어오지 않으면 책장에 묵혀둔다. 그렇게 묵혀둔 책들이 꽤 되지만, 읽고 싶을 때 꺼내서 읽으면 그렇게 새로울 수가 없다. 상뻬 책도 그랬다. 한참 불이 붙었을 때는 전 작품을 탐독할 것처럼 구입해서 읽었는데, 어느 순간 시들해져서 책장에 꽂아두었었다. 그러다 순전히 내 기분 때문에 눈에 띄게 되었고, 따뜻한 난롯가에 앉아 책을 펼치니 푹 빠져들었다. 현재 내가 속해 있는 공간은 잊은 채, 상뻬가 그려 놓은 세상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 흐뭇한 미소가 나를 지배하고, 책장은 쉼 없이 넘어가는 그 평화로움. 그 기분이 내 몸과 마음을 순식간에 훑고 지나갔다.

 

  이 책이 오자마자 바로 펼쳐 들어 어떤 세계가 펼쳐질지 눈을 부릅뜨고 보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전처럼 상뻬의 글과 그림이 들어오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책들 덮고 다른 책을 읽다가 이제서야 내 눈에 다시 들어 온 것이다. 오히려 그런 묵혀둠이 더 좋은 결과를 낳아서 책을 읽고 난 지금, 무척 뿌듯한 기분이 든다. 책 제목처럼 <겹겹의 의도>가 곳곳에서 드러났고, 상뻬 특유의 유머와 풍자, 엉뚱함이 즐거움을 선사해 주었다. 크기가 무척 큰 덕분에 종이 가득 그려진 상뻬의 데셍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런 데셍 아래에는 글이 없거나, 아니면 몇 줄, 길어도 열 줄을 넘기지 않는 글이 실려 있었다. 그림을 보면서 느낀 것들을 상뻬의 글과 비교해 볼 수도 있었고, 글을 먼저 읽고 그림을 봄으로써 상뻬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는 착각에 빠질 수도 있었다. 그런 묘미는 책 구석구석에 퍼져 있었기에 기분 내키는대로 만끽하면 되었다.

 

  상뻬의 데셍도 그렇지만, 그는 짧은 글 속에서 많은 상상을 하게끔 해준다. 섬세한 데셍 속에서 말 하는 주인공을 찾기도 쉽지 않은데, 능청맞게 자신의 뜻을 전달하는 글을 읽다보면 어느새 그런 인물은 발견된다. 빽빽한 건물과 인파속에서 주인공을 찾는 재미도 쏠쏠했고, 배경과 상관이 없는 내용을 전달하고 있는 엉뚱함도 즐거웠다. 또한 단 한 줄의 글과 데셍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것들도 있었다. 가령 첫 작품에서는 출근하는 남편을 보며 잠옷바람인 부인은 마당에서 춤을 추며, 고독과 즐겁게 보낼 수 있다며 기뻐한다. 데셍의 배경은 어느 한 곳에 국한되지 않고, 여러 장소를 거치며 상뻬의 감각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마라톤 결승점에서 마지막에 달리고 있는 선수는 갑자기 이탈을 한다. 거기에는 단 한 줄이 씌여져 있을 뿐이다. '경승점에 가서 구경해야겠어'. 거대한 데셍 속에서 거의 보일듯 말듯한 한 선수의 이탈과 말 한마디는 데셍 전체를 아우르며 빛을 발한다. 선수의 한 마디 때문에 그려진 수많은 인파들이 헛되었다는 생각은 절대 들지 않는다. 그런 섬세한 배경이 존재하는 것이 상뻬의 데셍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뻬의 글이 있더라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들도 있었다. 데셍을 들여다보고 글을 읽어도 무슨 뜻인지, 어떤 의도인지 파악할 수 없을 때도 있었다. 그런 데셍을 만나도 꼭 의미를 파악하기 보다 그냥 스쳐지나가도 된다. 저마다 다른 방법으로 책을 즐길 수 있는 장점이 있는 것이 상뻬 책이므로, 곳곳에 있는 재미를 놓치려 한 곳에 머무를 필요가 없다. 글이 없이 그림만 펼쳐지는 것도 있었는데, 그야 말로 독자가 그 상황 속으로 들어가면 되었다. 간단한 데셍이 있을 뿐인데도, 웃기기도 하고 엉뚱하기도 하고, 발랄하기도 했다. 그런 다양한 묘미에 빠질 수 있어서 책을 보는 내내 입가에 미소가 가시지 않았다.

 

  이 책을 통해 다시 상뻬의 작품에 불을 붙일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집에 있는 상뻬 책을 본 다음에 없는 책들을 서서히 구해서 봐야 겠다. <겹겹의 의도>를 통해서 얼마나 많은 의도를 파악했는지는 몰라도, 보통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의도에서 많이 벗어난 것은 사실이다. 그런 저자의 의도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고, 독자에게 친절히 알려 주기도 해서 함께 즐거움을 나눌 수 있었다. 상뻬의 데셍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어떠한 상황이 펼쳐지더라도 그의 데셍을 보고 있으면 잔뜩 움츠렸던 마음이 스르르 풀린다. 단순함이 아닌 마법이 깃든 데셍을 그리는 상뻬의 작품들이 그래서 좋은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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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밥바라기별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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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가끔은 시류에 휩쓸린 독서를 할 때가 있다. 많은 독자들에게 회자되거나, 온라인 서점에서 베스트 셀러를 달리고 있는 책들이 그런 독서를 이끌어 낸다. 오히려 그런 책들을 만나면 너무 인기가 많아서 피해버리곤 하는데, 황석영님의 책은 좀 달랐다. 블로그 연재를 통해서 많은 독자들에게 호응을 얻었고, 책으로 엮어서 나왔을 때도 인기가 식을 줄을 몰랐다. 그런 인기를 달리지 않았더라면 가볍게 읽었을 책을 구입부터 망설이게 만들었다. 인기 많은 책에 대한 괜한 시기 질투인 것이다. 그런 내 모습을 어이없어 하면서도 지인이 이 책을 선물해 주었다. 서점에서 어떤 책을 살까 고민하고 있을 때, 이 책을 콕 찍더니 계산을 대신 했다. 그렇게 힘겹게 내 품으로 들어온 개밥바라기 별. 책을 선물 받은지 거의 두 달 만에 읽게 되었지만, 그동안 머뭇거린 시간이 억울할 정도로 순식간에 읽어 내려 갔다.

 

  내가 성장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는 나의 유년시절을 돌아보면서, 그때 받지 못했던 위로를 대리만족으로나마 받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떠한 주제가 주어지던지 나의 추억과 책 내용을 뒤범벅해 끈적끈적한 새로운 기억으로 탄생 시킨다. 그런 과정속에서 의문이 들었던 것은 국내 성장소설은 드물다는 점이었다. 국외 성장소설을 읽으면 문화가 다르고, 환경이 다르더라도 10대만의 비슷한 정서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런 국외 성장소설에 익숙해서인지 국내성장 소설을 만났을 때는 익숙한 정서임에도 낯설었다. 직접적으로 제시하지 못하고 빙빙 돌아서 오는 느낌이랄까. 많은 작품을 읽어보지 않았지만 드물게 만난 국내 성장소설에는 그런 터울이 존재했다.

 

  처음 이 책을 읽을 때, 성장소설이는 생각을 못했다. 성장소설이라는 기준에 부합하는 연령대를 어디에 두어야할지 모호하지만, 고등학교 생활과 졸업 이후를 다룬 내용에 성장소설이라는 명확함을 드러낼 수 없었다. 청소년이라기보다 이제 막 아저씨(?)가 되어가는 단계의 청년들이였기에 더욱 그러했다. 또한 저자의 자전적인 소설이었기에 배경이 60년대였다. 80년대 초반 태생인 내가 교감을 나눌 수 있는 것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외로움과 번뇌였을 것이다. 그 외에는 배경도, 개개인의 생각도, 사회 분위기도 달랐기에 온전한 흡수를 기대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루하기만 했던 나의 10대를 생각해보고, 20대 초반에 찾아온 사춘기를 떠올리면 그들의 방황과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무시할 수 없었다.

 

  내가 핸드폰을 쥐게 된 것은 20살 때 였으니, 고등학교 때 삐삐를 사용한 것 외에 모든 통신 수단은 집 전화와 편지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만으로도 친구들도 잘 만나고, 큰 불편함 없이 살았다. 친구들과의 아지트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친구와 연락이 되지 않더라도 물어물어 소식을 구하다 보면 대부분 행동반경이 드러났다. 그 안에서 웃고 떠들며, 고민거리를 나누던 시간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잊고 있었던 시간들과 친구들이 '개밥바라기 별'을 통해 새롭게 재조명 하게 되었다. 하지만 나의 추억은 그들에 비해 풋내기에 지나지 않았다. 남자와 여자라는 차이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과는 판이하게 다른 사회적 분위기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 고등학생인 그들에게 정의를 불어 넣고, 빨리 성숙하게 만든 그런 분위기를 나는 상상할 수 없었다. 수도권에서 생활했던 그들의 활동 배경을 차치하고서라도 그들과 내가 다를 수 밖에 없었던 것은 행동과 공상이라는 거대한 벽이었다.

 

  주인공 준이는 베트남으로 군복부를 위해 떠나는 시점부터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 놓았다. 유년시절을 함께 했던 친구들의 이야기가 대부분이었지만, 늘 독자를 괴롭히는(?) 것은 준이였다.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어울리며 그들과 동고동락했던 이야기를 풀어 놓았지만, 정작 책 속의 인물 중에서 가장 파악하기 힘들었던 사람이 준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각각의 친구들이 준이가 털어놓은 이야기를 자신의 입장에서 다시 얘기해 주어 이해와 다양한 시각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준이가 그토록 방황을 하고, 남들과 좀더 다른 뜨거운 사춘기를 보낸 이유는 잡히지 않았다. 그런 방황에 이유가 있을까마는, '그냥' 이라는 이유가 붙어도 열정과 무기력함으로 치부할 수 있는 시기가 자아를 찾기 위한 때가 아닐까. 거기에 열정이라는 단어를 덧붙이고 싶은 것은 그들이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학교를 관두고 싶으면 관뒀고, 대학의 입학 여부와 선택이 보류 되더라도 자신을 불태워 보았다. 전국 여행을 하고, 산에서 살고, 일용직을 하며 돌아다닌 것을 행동이라고 볼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그맘때 마음 속에 품었던 뜨거운 불덩이를 결코 그들처럼 꺼내보지 못했기에 그들의 방황을 '행동했다'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무언가 명확하지 않은, 모호하면서도 흐릿한 그들의 청춘을 성장소설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 나와는 상대적으로 거리감이 느껴지는 '행동'과 '공상' 사이의 벽을 깨트릴 수도 없었고, 벌어진 틈을 메울 수도 없었다. 내가 주로 좋아했던 성장소설은 10대 초반에서 중반까지의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소설이었기에 낯선 오빠(?)들이 아저씨가 되어 가는 과정을 어찌 성장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만 어른이라는 거창한 이름이 되어 가는 과정 속에서 느끼는 뜨거움을 외면 할 수가 없었다. 어른이 된 후에는 단지 그 이름을 얻기 위해서 세상과 맞섰다는 허무함이 밀려오지만 그들은 알 것이다. 어른이고 나발이고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 던져진 나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가 혼란스러웠을 뿐이였다는 것을. 그런 혼란스러움을 고스란히 담은 책이 개밥바라기 별이다. 금성이 저녁에 나타날 때에 '개밥바리 별'이라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알았다. 그 별을 바라볼 때에 자동적으로 나의 유년시절의 추억이 뜨겁게 지나갈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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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이 나를 부른다 - 과학과 인문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30편의 에세이 APCTP 크로스로드 1
APCTP 기획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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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과 절대 친하지 않지만, 책 표지에 새겨진 몇몇 이름들을 보고 홀랑 마음을 뺏겨 버리고 말았다. 일등 공신인 소설가 김연수, 번역가 정영목, 정재승 교수 정도가 내게 익숙한 이름이였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손에 책을 쥐고 보니 섣부르게 책을 고른 건 아닌가 하는 후회가 밀려 들었다. 운 좋게 정재승 교수님의 사인까지 떡하니 받아왔지만, 과학에 문외한임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이 책에 대한 걱정을 드러내자 30편의 단편을 순차적으로 읽지 말고, 랜덤으로 읽어보라는 지인의 충고가 따라왔다. 순차적인 얽매임에서 벗어나면 읽기에 좀 더 재미를 붙일 수 있을 거라면서 말이다. 지인의 말이 귀를 멤돌았지만, 지금껏 책을 읽어온 습관 때문에 쉽게 바꿀 수 없었다. 꾸역꾸역(?) 책을 읽어 나갔는데, 100페이지가 가까워지자 지인의 충고가 아니더라도 뒷 부분을 기웃거리게 되었다. 아닌게 아니라 과학에 문외한인 나는 종종 재미난 글을 만나기도 했지만 지루했다. 나의 관심사도 아니였고, 약간은 혹해서 읽게 된 책이였기에 졸린 눈으로 읽기만을 번복했다.

 

  책을 특성상 사색을 하면서 읽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쉽지 않았다. 나의 눈은 이미 다음 문장을 좇고 있었고, 머릿속에 멤도는 글자들은 저만치 앞에서 읽은 것들이었다. 일치되지 않는 이해와 읽기의 속도 때문에 잠시 멈칫거리다가 뒷 부분을 들춰보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내키는 대로 제목보다는 첫 문단의 끌림으로 단편들을 읽어 나갔다. 첫 문단이 끌리면 읽고, 끌리지 않으면 잠시 보류해 두는 식으로 읽어 나갔다. 그런데 왠걸, 그렇게 읽다보니 지인의 말대로 부담감도 덜어 졌고 훨씬 편안하게 읽혀졌다. 정말 재미난 글들을 심심치 않게 만났기 때문이다.

 

  이 책은 총 세 단락으로 구분되어 글이 묶여 있다. <과학 밖에서>,<과학의 변경 지대에서>,<과학 안에서> 이다. 얼핏 제목만 봐도 구미가 당기지 않았기에 처음에는 순서대로 읽었다. 내가 좋아하는 김연수님의 글이 있어서이기도 했지만, 서문을 경쾌하게 열어주었기에 나름 즐거웠다. 하지만 그 뒤에 나온 글들은 서서히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제목부터 생소했고, 첫 문단의 유혹에는 성공했지만 나의 이해를 백퍼센트 이끌어 주지는 못했다. 흥미롭게 다가갔다가 고개를 갸웃 거리며 결말을 만나게 되는 반복이었다. '과학'이라는 학문에 바탕을 두고 일상생활과 삶, 배움등 연결을 지어 나갔지만, 그 이상을 이해하거나 흥미를 유발시키기에는 무리였다. 제목만 봤을 때는 <과학 밖에서>의 소제목을 달고 있는 글들이 부담이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의외의 재미는 다른 곳에서 나타났다.

 

  두 번째 단락 또한 별 기대없이 지루한 시선으로 읽어 나갔다. 그러나 의외로 나의 관심을 끄는 글들이 많았고, '과학'과 연관되었다는 생각은 잊은 채 흥미롭게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부제목에서도 나와있듯이 <과학의 변경 지대에서>는 다양함을 맛볼 수 있었다. 첫 단락에서도 그런 다양함을 만날 수 있었지만 내게 생소했었다. 두 번째 단락에서는 '인문과 과학적인 주제의식을 담고 있는' 글이라고 했는데, 그런 거창한 설명보다는 실제로 읽으면서 느끼는 재미는 독서의 묘미를 끌어내기에 충분했다. 김연수님은 '소설을 쓰는 일이 과학적으로 사고하는 일'이라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했다. 그렇기에 과학자들이 글을 잘 쓸 수 밖에 없다고 했다. 두번 째 단락에서 그런 의견에 대해 수긍함과 동시에 의아함을 갖게 되었다. 어느 정도 문학과 인문학에 연관된 분들의 글이 정말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인체 실험과 과학 영웅담의 결탁'에 대해 얘기한 정영목님의 글도 인상 깊었고, '과학적 추론 방법의 비밀'은 거기에 나온 책들을 찾아서 읽고 싶을 정도로 흥미로웠다. '한국 과학'의 개념에 대한 김태호 님의 글은 재미와 현실을 직시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편안하고 재미있던 글을 꼽으라면 이정모님의 '과학 글쓰기'에 대한 글이었다. 너무 재미있어서 과학과 연관짓기를 잠시 잊을 정도였다. 글의 마지막에 저자의 사진과 약력이 나와 있었는데, 글을 통해 저자를 상상하면서 읽다가 막상 저자의 얼굴과 약력을 보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장난기 그득한 저자를 만날 줄 알았는데, 장길산(?) 같은 외모를 만났기 때문이다. 그런 에피소드 때문에 책을 읽고 난 후, 저자를 새롭게 만나는 계기를 만들어 가기도 했다.

 

  세번 째 단락은 <과학 안에서>라는 소제목을 달고 있다. 과학과 관련되어 있거나 파생되어 나온 분야에 몸담고 있는 저자들은(앞의 저자들도 대부분 그랬지만, 여기서는 범위가 좁아졌다.) 좀 더 생생한 현장의 에피소드와 자신의 생각들을 들려주었다. 역시나 어려운 글도 있었고, 재미난 글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조율은 앞에서 했던 것처럼 랜덤으로 읽었기에 좀 더 편안했다. 사인을 받았던 정재승님의 글도 좋았고, 중학교에서 과학을 가르치는 선생님의 이야기는 나의 유년시절을 생각나게 하기도 했다.

 

  이렇듯 처음에는 어렵게만 느껴졌던 책이 의외로 흥미롭고 뿌듯하게 다가왔다. 내가 관심을 갖지 않은 분야이지만, 이 책의 기획처럼 인문학과 과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글을 통해서 다양함을 맛보았다. 우선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것들만, 섭취할 수 있는 것들만을 끌어 모았지만 먼 훗날 과학과 좀 더 가까워진 후에 이 책을 다시 읽는다면 새로운 묘미를 맛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이 책을 통해서 내가 과학과 친해졌다고 장담은 할 수 없지만, 내게 낯선 분야라고 해서 두려움을 갖고 어렵다고 단정 짓지 않기로 했다. 그것이 이 책을 통해 내가 얻은 가장 큰 깨달음이었고, 그것이야말로 내가 어떤 길에서든 앞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발돋움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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툴루즈-로트렉 - 열화당미술문고 206
장소현 / 열화당 / 199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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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한 해가 마무리 되는 시점에서 나의 독서를 점검해 보니, 계획 없는 편중된 독서를 일삼은 사실이 드러났다. 편안한 독서를 하기로 했지만, 걸러서 책을 읽기보다 손에 쥐어지는 대로 읽은 책들이 많았다. 작년까지만 해도 다양한 장르를 읽기 위해 일부러 읽을 책을 정해 놓았는데, 올해는 그런 노력조차 없었다. 그렇다보니 올해의 독서에 아쉬운 면이 많다. 그 중에서도 미술에 관련된 책을 많이 읽기 못한 것이 아쉽다. 그림에 대해서 전혀 모르지만, 그림책 보는 것을 좋아하는 나로써는 괜시리 미안해지기까지 한다. 그런 미안함이 가득할 때, 운 좋게 온라인 서점에서 미술 관련 책을 저렴하게 구입하게 되었다. 자주 읽지 못한 책들을 잔뜩 구입하고 나니 어찌나 기분이 좋던지. 그 첫번째 타자로 '툴루즈-로트랙'을 읽었다.

 

  내게 툴루즈-로트랙은 이름만 들어보았을 뿐 생소한 화가였다. 이번 기회에 알아가자는 생각으로 책을 펼쳤지만, 의외로 낯설지 않았다. 19세기 중엽에 프랑스에서 활동을 해서인지, 다른 유명한 화가들도 많이 언급 되어 부담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작품만을 보고 그를 온전히 판단할 수는 없는 법. 그의 삶과 결부시켜 그의 작품을 알아가자는 의도는 저자의 의도이기도 했다. 일화나 에피소드에 너무 관심이 쏠려 작품에 대한 올바른 평가가 흐려지는 일은 경고되어야만 한다고 말이다. 툴루즈-로트랙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전무했기에 그의 삶이 어떠했는지 더욱 더 궁금해지고 있었다.

 

  그의 작품을 말하기 전에 육체적 불행에 대해서 언급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안 사실이지만, 그는 10대 때 두 다리의 성장이 멈춰 난쟁이가 되고 말았다. 명문 귀족의 외아들로 태어난 그는 두 번의 비극적 사고로 상체는 정상이고 하체만 기형적으로 짧았다. 사촌간에 결혼한 그의 부모님의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른다는 그의 다리의 결함은 가족간의 반응이 극적으로 갈라진다. 어머니는 그의 모든 것을 위로해주며 감싸고 돌지만, 그의 아버지는 외아들의 신체적 결함을 좋게 보지 않았다. 가정의 불화, 신체의 결함, 외부의 자극으로부터 그를 구해준 것은 그림이었다. 자신의 다리가 그렇게 되지 않았더라면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거라는 고백처럼, 그림은 그에게 삶의 전부였다. 그의 그림에서 같은 시대의 화가인 고갱과 고흐처럼 현실과 이상이 빚는 갈등이나 비극적 좌절감을 찾아 볼 수는 없다고 했다. '현실을 자기 세계 속으로 끌어들여 다시 엮는 처지가 아니라, 현실 속에 자기를 내던지는 성향의 작가라 할 수 있'었다.

 

  로트랙의 그림에는 창부娼婦들을 모델로 그린 그림이 많다. 그는 어떤 여성에게도 위안을 받지 못했지만, 창부들의 세계에서는 자유로웠다. 자신의 몸 때문에 일부러 추행을 찾고, 염세주의에 기울어져, 화려한 홍등의 거리에 출입하게 되었다고 했다. 오히려 그곳에서 그는 약간 다른 사람으로 보일 뿐, 인간적인 취급을 받았다고 했다. 그랬으니 그가 그런 생활에 젖어들었음은 물론이다. 그곳을 도피처로 삼아서 예리한 관찰을 한 것이다. 인생의 본질을 자연이 아닌 인간 속에서 찾은 것이다. 그래서 뛰어난 관찰 속에서 '느끼는 대로' 그린 그의 작품들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꾸밈없이 그렸다'는 말은 애매한 표현이라고 한다. 그가 개성을 표현하는 주무기가 과장이기에 그는 표현주의의 선구자였다.

 

  그의 인물 그림들의 얼굴을 보면 일그러져 있는 모습을 많이 발견하게 된다. 그는 일부러 인간의 얼굴을 보기 싫게 그리려 한 것이 아니라 좀더 표현력을 풍부하게, 독특하게 그리기 위해서 애썼을 뿐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색보다 선의 화가에 더 가까운 로트랙의 그림들은 그래서인지 그림 속의 형태는 생생히 살아 있는 느낌이 든다. 그는 알콜 중독으로 37세에 삶을 마감했다. 저자는 그가 만약 더 오래 살아서 그림을 그렸더라면 어떠한 화풍이 나올지 궁금해하는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저자의 애정이 듬뿍 들어간, 주관적인 생각이 많이 들어간 로트랙의 삶과 그림은 그 안에서 드러나는 감정이 그대로 전이되는 느낌이었다. 한 권의 책으로 한 화가를 이해하거나, 그림을 만끽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생소해 마지않았던 로트랙을 이보다 더 진실되게 만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저자는 '삶의 무게와 팽팽히 맞서다가 결국은 젊은 나이로 죽어간 한 예술가의 모습을 통해서 오늘의 나의 모습을 되새겨 보는 계기가 마련되기를 빌고 또 빈다'고 했다. 그런 저자의 바람이 많은 독자들에게 이루어졌으면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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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샤의 정원 - 버몬트 숲속에서 만난 비밀의 화원 타샤 튜더 캐주얼 에디션 2
타샤 튜더.토바 마틴 지음, 공경희 옮김 / 윌북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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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지방에는 폭설이 내려 휴교까지 한다는데, 내가 사는 동네는 눈이 내리는 것 조차 구경할 수 없다. 남부지방 이여서인지, 폭설이 내린 광경을 뉴스를 통해 보면 딴 세상을 보는 것 같다. 눈이 내리지 않았지만 갑자기 추워진 날씨 덕분에 모든게 움츠러 들었다. 몸도 마음도 움츠러 들고 행동반경도 짧아졌다. 그럴때는 방구석에서 뒹굴 거리며 책 읽는게 제격이다. 무슨 책을 읽을까 고민하는 것이야말로 그동안 책만 쌓아둔 게으름이 즐거워지는 시점이다. 날씨도 춥고, 마음도 스산해서인지 따뜻함을 전해줄 수 있는 책이 읽고 싶었다. 책장을 기웃거리다 타샤 할머니 책이 눈에 들어왔다. 한참 열을 올리고 보다가 잠시 시들해져서 읽지 못한 책이었다. 

 

  타샤 할머니의 책을 몇 권 읽다보니 어느정도 코기 코티지에 대해 익숙하다. 처음에는 낯선 집을 둘러보는 것 같았는데, 이제는 자유자재로 타샤의 집을 구경할 수 있다. 그래도 여전히 타샤의 집이 궁금하고, 타샤 할머니의 라이프 스타일을 알아가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그래서 읽을 책이 사라져감을 아쉬워하는 것이리라. 타샤 할머니의 책을 펼친다는 것은 이런 편안함이 묻어 났기에 마냥 즐겁다. 다른 책들과 반복되는 부분이 있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타샤 할머니의 정원은 사계절이 모두 아름다웠고, 볼거리가 그득했기에 언제 펼쳐도 현장감이 느껴진다. 사진만 봐도 황홀한 정원을 세세하게 글로 남겨 주는 타샤 할머니와 토바 마틴이 있었으니, 언제든지 현실을 뒤로 한 채 다른 공간으로 이동이 가능했다.

 

  정원 이야기는 어디에서 시작하든 늘 매혹적이다. 이 책에서는 '4월과 그전' 부터 시작한다. 한 겨울이 되어도 타샤 할머니는 결코 한가하지 않다. 타고난 부지런함을 가진 할머니지만, 겨울이 되어도 봄을 준비하는 타샤 할머니의 손길은 분주하다. 눈이 쌓여서 고립이 되어야지만 비로소 지켜보는 사람이 조금 여유로워 보일 뿐이다. 겨울이 되어 정원의 모든 생명이 잠시 활동을 멈춘 것 같지만, 타샤 할머니는 봄에 심을 씨앗을 준비한다. 땅속에서 식물들의 꿈틀거림을 미리 가늠하고, 봄이 오려면 아직 먼 것 같은 시기에도 먼저 싹을 틔우는 식물들을 맞이한다. 그렇게 타샤의 정원에 봄이 오면, 할머니는 무척 바빠진다. 꽃은 무리지어 피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할머니는 구근을 몇 천개씩 심는다. 구근을 파먹는 동물들에게 먹일 양까지 생각하면서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구근을 심어댄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은 타샤 할머니가 좋아서 하는 일이고, 그 구근들이 피어날 때는 할머니의 노고에 보답하듯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군락이라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로 화려하게 피어나는 정원의 꽃들은 겨울이 오기 전까지 쉴새 없이 피어났다 진다. 정원의 꽃과 나무는 계획없이 심어진 것이 아니기에 꽃들의 생명력은 오래 간다. 타샤 할머니의 취향이 드러나는 정원은 피어나는 꽃들도 계획성 있게 가꾸어 진다. 꽃을 기르는 사람의 취향이 들어가는 것이 당연한 만큼 애정을 듬뿍 쏟아주면 꽃들도 최선을 다해 자신의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그런 꽃들의 특징과 아름다움을 일일이 열거하는 타샤 할머니는 자신과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과는 금방 친구가 된다. 그런 타샤 할머니를 익히 알고 있는 토바 마틴이 타샤 할머니와 친구가 되기까지는 어렵지 않았다. 온실에서 일하기 전부터 타샤를 좋아했고, 타샤를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어 원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친해졌다고 했다. 그랬으니 책 안에 실려있는 글은 타샤가 설명하지 못한 부분들까지 섬세하게 써내려 갈 수 있었다. 타샤가 원예가로써 어떤지, 정원은 어쩐지, 그녀가 키워내는 꽃들이 어떤지 말이다.

 

  그렇지만 그런 느낌을 굳이 인식할 필요 없이 타샤의 정원에서 피어나는 꽃들을 구경하는 것은 정신을 뺏기기에 여념이 없다. 우리가 꽃집에서 보아온 혹은 인위적으로 가꾸어진 행사를 위한 꽃들과 비교할 수 없는 꽃들이 피어난다. 꽃을 피우기 까다로울수록 타샤 할머니의 관심을 듬뿍 받고 피어난 꽃들은 특히 아름다웠다. 지상의 낙원이라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로 정원의 모습은 황홀함 그 자체다. 타샤의 정원을 통해 이름을 알게 된 꽃들도 많고, 자태에 넋을 빼앗긴 것들도 많다. 생소한 것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내게 익숙한 꽃들도 타샤 할머니 정원에서는 훨씬 더 아름답게 피어난 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깊은 애정을 가지고 꽃들을 살핀 정성을 식물들도 아는 듯 했다.

 

  타샤 할머니의 정원을 구경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만큼 황홀했고 빠져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 여운은 오래 남아 추운 겨울 밤을 따뜻하게 데워주었다. 타샤 할머니의 책을 읽는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감사함이 느껴지는 밤이었다. 아름다운 정원을 구경할 수 있게 해준 타샤 할머니가 마냥 고마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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