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샤의 그림 (리커버)
타샤 튜더.해리 데이비스 지음, 공경희 옮김 / 윌북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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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샤 할머니 책을 여러 권 읽었지만, 이 책 만큼 가슴이 먹먹해지는 책은 없었다. 타샤 할머니를 동화작가가 아닌, 30만평의 정원을 일구는 정원사이자 독특한 라이프 스타일을 가지고 있는 분으로 만난던 이유도 있었다. 정원의 아름다움에 마음이 뺐겨, 타샤 할머니의 동화책이라던가 과거의 삶에 대해서는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었다. 타샤 할머니에 관해 읽을 책이 없어 그제서야 동화책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르겠다. 처음에는 타샤 할머니의 정원이 너무 좋아서 오로지 그에 관한 책만 읽고 싶었다. 이 책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타샤 할머니에 대해 지극히 일부분만 알고 지나쳐 버렸을 거라는 생각에 아찔해져 온다.

 

  부유하고 사교계에서 영향력을 끼쳤던 집안에서 태어났던 타샤 할머니는 부모의 이혼으로 첫 시련을 겪었다. 하지만 타샤 집안과 친분이 있던 미켈슨 가족에게 맡겨진 그녀는, 오히려 그곳에서 창의적인 활동을 통해 그림에 대한 열정을 키울 수 있었다. 그녀가 그림을 좋아하고, 삽화가를 꿈꾸었던 것은 어머니의 영향이 가장 컸지만 미켈슨 가족으로 인해 자신의 꿈을 활짝 펼칠 수 있었다. 그렇게 그림과 함께 유년시절을 보낸 그녀는 학교에서 그림을 배우기도 했지만, 그녀가 향한 삶의 방향을 보면 점점 그림과 멀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23살때 결혼을 하고, 첫 그림책을 펴내긴 했지만 남편과의 관계는 소원해져 갔다. 사랑해서 한 결혼이 아니었기에 남편은 그녀의 라이프 스타일에 동조해 주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헤어지고 타샤는 네명의 아이들을 기르며, 엄청난 집안일과 함께 그림 그리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이 타샤의 인생을 바꿔 주었다. 아이들은 타샤의 동화책 속의 훌륭한 모델이 되어 주었고, 그녀의 그림은 너무나 생생해서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이 책의 저자는 타샤의 남편이 타샤에게 끼쳤던 영향에 대해서 분개(?)했지만(타샤 할머니가 너무 고생했기에), 타샤에 대한 애정으로 보게 되었고, 소중한 아이들이 있었으니 남편에 대한 기억을 나 또한 가볍게 떨쳐 버렸다.

 

  타샤 할머니의 동화책은 지금 봐도 너무나 예쁘고, 생생한데 출간된 시기를 보면 내가 태어나기 전 것이 훨씬 더 많다. 그래서인지 타샤 할머니의 동화책은 많은 사람들에게 더 특별하다. 어렸을 때부터 보았던 타샤 할머니의 동화책을 커서도 보고, 몇 대가 걸쳐서 타샤 할머니의 동화책을 사랑하는 사람까지 있었으니 꾸준한 창작의 활동은 색다른 감동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부수적인 효과였다. 타샤 할머니의 그림은 보고만 있어도 동화책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착각이 일었고, 잊고 지냈던 동심을 떠올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어딘가에 존재할 것 같은 예쁜 세계가 대부분 보고 그린 것들이라는 사실은 환상과 현실 속을 오르내리게 해주기도 했다. 타샤 할머니는 많은 동화책을 그렸고, 그렇게 그린 동화책들은 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추억 속에 많은 것을 남겨 주었다. 이렇듯 타샤 할머니의 인생을 되짚어 보지 않고서는 맛볼 수 없는 감동이 책의 곳곳에 숨겨져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슴이 먹먹해 졌다고 서두에 밝혔던 것은, 타샤 할머니의 삶 속에 그림이 이렇게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할머니의 삶이 호락호락하지 않았음에도 언제나 즐겁게 많은 일들을 해 나가는 모습에 가슴이 아렸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온 결과가 큰 선물로 타샤 할머니에게 보답을 했을 때가 감격 그 자체였다. 타샤 할머니도 자신이 그림이 이렇게 대단하게 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고 했으니, 할머니의 삶이 얼마나 열심이었는지 얼마나 꾸준했는지 여실히 보여준 것은 그림이었다. 그림이 좋아서이기도 했지만, 생계를 위해,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그렸던 그림들이 타샤 할머니에게 많은 것을 안겨 주었다. 전시회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타샤 할머니를 알게 되었고, 그녀의 삶과 그녀의 그림 세계에 매료 되었다. 그녀야 말로 평범한 나 같은 사람에게 희망을 던져 줄 수 있는 예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타샤 할머니의 삶 자체가 특별했지만 말이다.

 

  이 책을 통해 내가 알고 있는 타샤 할머니가 아닌 좀더 진솔한 타샤 할머니를 만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할머니의 정원과 라이프 스타일은 이미 알고 있기에 잠시 제쳐두고, 또 다른 타샤 할머니를 만났다. 그런 할머니는 여전히 매력이 넘쳤고, 대단했고, 인간의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만큼 힘든 시기를 견뎌냈고, 노력했기에 가능했지만 타샤 할머니의 그림인생을 통해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일상이 언젠가 무언가를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게 되었다. 타샤 할머니의 힘들었을 삶에 가슴이 아파오기도 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타샤 할머니의 동화책을 알고 독특한 삶을 알아갔기에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할머니가 남겨 놓은 것은 이렇게 무궁무진하므로, 그녀의 죽음을 안타까워 하거나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할머니가 남겨 놓은 것을 즐기기에도 벅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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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난장이 미짓
팀 보울러 지음, 김은경 옮김 / 놀(다산북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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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팀 보울러의 책을 다 읽어서인지, 신간이 나올때마다 관심이 간다. 그의 소설을 특별히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책을 읽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다. 이 소설은 10년 동안 쓴 소설이라고 한다. 그때는 전업 작가가 아니라서 일과 병행해서 글을 써야 했기에 더뎠고, 많은 포기를 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의 첫 소설이기도 하고, 그런 면이 숨겨져 있어서인지 '미짓'을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 달라졌다. 저자가 공들여온 시간, 미짓을 바라보는 시선과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느정도 일치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미짓은 꼬마 난장이로, 못생긴 얼굴과 말도 제대로 못하는 사회의 약자 모습을 갖추고 있다. 처음엔 그런 미짓을 고운 시선으로 볼 수 없었지만, 책이 끝을 향할때 쯤 곱지 않은 시선이 나에게 꽂히는 것을 느꼈다. 내 안에, 혹은 누군가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또 따른 내가 미짓을 통해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와는 상관없는 인물이라고, 나와는 다른 삶을 살고 있는 불행한 인물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미짓의 겉모습과 미짓을 둘러싸고 있는 기묘한 힘이, 내 안에 꽁꽁 숨겨두었던 불결한 '나'라는 것을 부정하지 못했다.
 

  자신의 상태만 바라보기도 힘든 미짓은 아픈 상처를 안고 있다. 아빠는 자신에게 헌신하지만, 엄마는 자신을 낳다 돌아가셨고,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착하다고 여기는 형의 이중성에 고통 당하고 있었다. 스포츠 광이고, 모범적이고, 미짓 같은 동생에게도 친절하다 칭찬 받는 형 셉은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공간에서 미짓을 학대한다. 셉의 이중성은 너무 철저해서 다른 사람들은 미짓에게 어떤 행동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런 형을 증오할 수 밖에 없는 미짓. 자신의 처지와 형의 학대, 찾은 발작으로 인해 무척 고통 당하고 있었다. 말을 제대로 할 수 없기에 어느 누구에게도 전할 수 없었기에 답답할 때마다, 위로를 받고 싶을 때마다 집 근처의 조선소를 찾아가곤 했다.

 

  조선소에는 페인트칠이 덜 된 노란 요트가 한 대 있었다. 미짓은 그 요트를 가질수도, 탈 수도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 요트를 보러 자주 조선소를 찾았다. 왜 그 요트를 가질 수 없는지 아빠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이유를 들었지만, 상관 없었다. 그 요트만이 미짓의 희망이었고, 위로의 대상이었다. 형은 더 멋진 요트로 대회마다 우승을 하는 인기인 이었지만, 미짓은 요트조차 갖을 수 없는 현실이 늘 견딜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요트의 페인트 칠은 완성되고 요트를 판다는 안내문이 걸린다. 미짓의 마음이 혼라스러운 가운데, 요트를 완성했던 할아버지를 만나게 된다. 할아버지는 건강이 몹시 좋지 않았지만, 미짓에게 이상한 말을 한다. 미짓이 요트를 원한다는 것을 안 노인은, 기적을 좀 더 상세하게 그려보며 간절하게 믿으며 완전히 믿으라고 말한다. 그런 말을 해준 사람이 없었기에 미짓은 혼란스울 뿐이었다.

 

  하지만 노인의 말은 미짓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고, 자신을 치료해 주는 박사 앞에서 기적의 미미함을 발견한다. 즉, 자신이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면, 그 일이 실재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것을 기적으로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요트를 만들었던 노인은 죽고 조선소를 운영하는 켐프씨는 노인의 유언을 따라 미짓에게 요트를 준다. 자신의 내면에 이상한 힘이 생긴 것을 깨닫고, 요트에 대한 열망을 키울 때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 일로 인해 기적을 확신하게 된 미짓은 하나의 욕망에 사로잡힌다. 자신을 괴롭힌 형 셉에 대한 복수. 머리속에 그려지는 요트의 향방을 알고, 우승을 거머쥐며 셉을 난처하게 만들던 미짓은 점점 내면의 이상한 힘에 끌려 가게 된다.

 

  미짓이 두드러 질수록, 셉의 학대는 심해졌고 미짓은 셉에 대한 복수를 멈출 수가 없다. 조선소의 노인은 '나쁜 기적을 바라면 대가가, 악이 뒤따른다고' 말했지만, 미짓의 내면은 슬픔과 고통, 증오로 넘쳐날 뿐이었다. 자신의 목숨을 위협했던 셉의 목숨을 위태롭게 만든 미짓. 셉의 여자친구이기도 하고, 평소에 자신에게 잘해 주었던 제니는 셉이 평상시에 미짓을 괴롭했다는 것도, 셉을 위험하게 만든 것도 미짓이라는 것을 눈치챈다. 그런 셉을 용서하라고 말하는 제니 앞에서도 자신을 지배하는 어두운 그림자의 형상은 셉의 죽음을 그려내고 있었다. 미짓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셉을 살릴 수 있지만, 반드시 대가가 따른 다는 것을. 또한 그 대가가 자신이라는 사실을.

 

  미짓의 내면에 소용돌이쳤던 감정들은 내게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었는데, 미짓은 다른 세계로 가버렸다. 혼란스럽고, 아프고, 복잡미묘한 소설의 결말은 극단적이었다. 미짓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했다. 내면의 악을 이긴 것인지, 악에 대한 희생양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미짓같은 아이를 따스하게 대해 주지 못했다는 반성은 제쳐두고라도, '기적'이 기적이 되지 못하고, '희망'이 희망이 되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반대로 '이것이 지극한 현실이다' 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구경꾼의 입장 밖에 되지 못하는 내 마음이 많이 불편했다. 미짓을 지배했던 어두운 기적이 많은 사람들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악'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인정하기 싫었고, 자세히 들여다 보기도 싫었다. 미짓이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어 마냥 안타까웠다. 모든 것에 대가가 따른다는 사실과, 나쁜 기적에는 악이 따른 다는 사실만 처절하게 경험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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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르니에 선집 1
장 그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199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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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 그런 날이 있다.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읽을 책이 몇 권 쌓여 있는지, 지갑에 돈이 얼마나 있는지), 서점에 들어가서 맘에 드는 책을 사오고 싶은 날. 그날은 약속 시간이 남아서 서점에 들어갔었다. 시간을 때운답시고 들어갔는데, <섬>을 발견하고 '아차' 싶었다. 책이 눈에 들어왔음은 물론, 내 지갑엔 정확히 <섬> 책 값이 들어 있었다(약속하고 나와놓고 왜 책 값 정도 밖에 안 들고 왔을까). 집에 가는 버스비는 교통카드로 해결하면 된다 생각하고, 덜렁 책을 사버렸다. 책 값과 지갑 속 금액의 일치에 신기해 하면서. 그 날 친구와 만나 무엇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서점을 서성거리던 기억이며, 계산하고, 뿌듯한 마음으로 책을 들고 나오던 기억은 여전히 손에 잡힐 듯 생생하다.
 

  그렇게 뿌듯한 마음으로 책을 구입해 왔음에도, 초반을 넘기지 못하면 가차없이 책꽂이에 방치되고 만다. <섬>이 그랬다. 자신의 스승이었던 장 그르니에의 작품에 알베르 카뮈의 헌사 비슷한 서문이 있었는데, 그 서문을 넘기지 못하고 책을 덮어 버린 것이다. 알베르 카뮈가 <섬>을 읽을 당시의 흥분과 작품에 대한 찬사가 씌여져 있었는데, 서문부터 너무 사색이 깊어 부르르 몸을 떨며 책을 내려 놓았다. 서문부터 이런 식이라면 장 그르니에의 작품은 안봐도 뻔하다는 제 멋대로의 생각이 뻗쳐 진저리를 친 것이다. <어느 개의 죽음>은 짧막한 글이라 그럭저럭 읽을 수 있었지만, <섬>은 제목과 같이 가까이 할 수 없는 존재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언젠가 읽을 날이 올거라는 흐릿한 기대감으로 책장 속에 책을 묵혀 두었다.

 

  내 책장 속의 간택(?)되지 못한 수 많은 책들이 그렇듯, <섬>도 구입한지 8개월쯤 지나서 빛을 보게 되었다. 어느 밤, 책 사냥(책장에 꽂힌 책들 중에서 그날 기분에 따라 읽을 책을 찾는 것)에 나선 내 눈에 <섬>이 들어왔다. 서문을 보고 덮은 기억이 있었지만, 소설을 너무 많이 읽어 지친 내게 사색 거리가 필요했다. 그렇게 <섬>을 다시 펼쳐 들었는데, 묵혀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렵고 난해하던 서문부터 술술 읽히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여기저기 메모지가 덕지덕지 붙여지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기억하고 싶은 구절에 그냥 메모지를 붙이기도 하고, 나의 느낌을 적기도 했다. 그 집중력에 흥분해서 알베르 카뮈의 심정을 이해할 정도라고 혼자서 들떠 있었다. 카뮈가 이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싶단 욕망에 확신을 가진 것도, 우리들의 젊은 불안이 어디에서 오는지 설명해 주고, <섬>을 열어보게 되는 저 낯모르는 젊은 사람을 뜨거운 마음으로 부러워 한다는 말까지 모두 내 마음 밭에 뿌려지고 가꾸어졌다.

 

  첫 글 <공의 유혹>도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평상시 같았으면 아무 생각 없이 읽고만 지나쳤을 문장들에 나만의 생각들이 샘 솟듯 솟아났다. 나의 유년시절과 그때 갖었던 생각 사이를 오가기 바빴고, 간단하게나마 메모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단순한 생각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생각이 솟아나게 만들어 주는 글을 만난 것이 얼마만이던가. 장 그르니에의 글에 아주 특별한 것이 있는게 아니라 누구나 한번쯤 고민해본 것을 글로 표현해 내는 특별함이 있었다. 그르니에처럼 매끄럽고 자연스럽게 끌어내지 못하기에 그가 뱉어낸는 문장마다 메모를 달고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문장을 던져주기만 했을 뿐인데, 내 머릿속에 관념들이 생성되었다. 잠재되어 있던 생각들을 살짝 건드려 주기만 했을 뿐인데, 내 자신도 놀랄 정도로 많은 생각과 언어들이 내 안에 떠돌기 시작했다.

 

  그것은 너무나 평범해서 옮기기가 조촐할 정도다. 그르니에의 글을 통해서 내가 갖었던 생각, 장 그르니에의 평범한 문장들은 소소했다. 하지만 평범한 글로 얼마나 많은 가능성을 열어 주었던가. 그 가능성의 깊이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색다른 경험이 되어가고 있었다. 한 그루의 나무가 그르니에라면, 그의 글이 하나의 가지라면, 독자는 저자가 만들어 놓은 가지에 수많은 잔가지를 뻗으며 공중으로, 땅 아래로 향하고 있었다. 깊은 밤,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지닌 채 그의 책을 읽어나갔고, 감당하기 버거운 무게 때문에 잠시 책을 덮었다. 이대로 끝까지 읽다간 내 안의 무언가가 터져 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 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순간에는 차라리 무언가가 터져 버리도록 나두지 못했던 것을 다음 날 바로 후회하게 될 줄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벅찬 감정이 일었던 전날 밤의 기억을 부여안고, 책을 펼쳤지만 이미 글자들은 맴돌고 있을 뿐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잠시 책을 덮고 다음 날 읽은 것 뿐인데. 며칠을 책을 덮었다 펼쳤다를 반복하다, 여러 날 공백을 두고 꾸역꾸역 읽다 마무리 짓고 말았다. 처음에 느꼈던 희열과 뜻 모를 감정의 발산은 다시 재생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날에 느꼈던 것들이 이상할 정도로 지지부진하고 힘겹게 <섬>의 나머지를 읽어 나갔고, 책의 반토막은 살아서, 다른 반토막은 죽어서 내 안에 떠돌기도 하고 겉돌기도 했다. 무엇 때문일까. 이렇게 급격한 변화의 양상을 띄게 된 것은. 도무지 알 수 없는 혼란 속에서 책을 덮어야 했을 때는 무척 괴로웠다. 책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다는 죄책감 보다는 무언가가 잡힐 듯 하다가 사라져 버린 허망함 때문이었다. 그것이 끝까지 이어졌다면, 내가 어떠한 결심을 하게 되었을지 모른다는 안타까움도 내제되어 있었다. 내가 젊지 않아서일까. 잠재력이 바닥나 버린 것일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결국 찾아 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뜨거운 불덩이가 내 안을 잠시 훑었다 사라져 버린 느낌. 이 책을 읽는 다른 이들은 이런 불덩이가 일었다 싶음, 절대 놓지 말기를 바란다는 충고 밖에 할 수 없는 내 자신이 안쓰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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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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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문은 사실이었다. 독자들 사이에서 <고래>에 대해 심심찮게 들려오는 소문은 흡인력이 대단하다는 것이었다. 책장에 오롯히 꽂혀 있는 책을 보면서도 의심과 호기심이 일었지만, 두께 때문에 선뜻 읽을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들려오는 소문을 무시한 채 깊은 밤에 책을 꺼내 들었다. 조금만 읽어보자는 생각과 초반을 어떻게 그려내는지 지켜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늦은 밤 책을 꺼내든 것은 첫 번째 실수였고, 소문을 믿지 않았던 것이 두 번째 실수였다는 것을 깨닫는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책을 읽는 동안 허리 한 번 펴지 못했다. 5시간이 넘도록 꼼짝없이 누워 밤이 깊어가든 말든 책장을 쉴새없이 넘겼다. 중간중간 화장실을 다녀오는 것 외에 어떠한 것도 나의 관심을 끌지 못했고, 다 읽어야지만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책을 덮은 시각은 새벽 5시. 다음 날 회사에서 헤롱거릴 것이 뻔했지만, 마음만은 뿌듯했다. 다 읽었다는 희열감, 소문의 진실, 정신없이 빠져들었던 책 읽기. 이 모든 것이 뿌듯함으로 다가왔지만, 한편으로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였다는 생각도 들었다. 허구라는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자꾸만 의심의 눈길을 던졌던 책 속의 이야기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럽기만 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머리맡에 놓여진 <고래>를 보고 있자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과연 몇시간 전까지 내가 저 책을 읽었던가, 책 속의 인물과 이야기의 뒤엉킴은 꿈은 아니였을까 하는 생각으로 머리가 아파왔다.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한 것과 또 다시 스멀스멀 올라오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읽느라 날을 샜다'는 허무함 때문이었다. 머리속에 어지럽게 흩어지는 수 많은 잔상들이 계속 날 따라다녔다. 그 잔상은 몇일이 지나도 떠나지 않았고, 일상 생활에서도 문득 이야기의 한 귀퉁이 불쑥 떠오르기도 했다. 내가 읽은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한 때, 이 이야기를 정리해야 한다는 부담감까지 밀려왔다. 

 

  너무나 많은 이야기가 흘러나왔고 떠돌았기에, 어떤 것이 굵직한 것인지 추려내는 것도 쉽지 않았다. 여인들의 이야기였고, 오래된 과거로 흘러가지는 않지만, 낯설고 딴 세상 이야기로 생각되어지는 것들로 가득했다. 국밥집 노파, 금복, 춘희로 이어지는 흐름 속에는 수 많은 이야기의 강이 있었다. 그 강은 서로 만나기도 하고, 이어지기도 하면서 판이하게 다르기도 했고 너무 닮아 있기도 했다. '이 모든 이야기는 한 편의 복수극' 이라고 밝힌 것처럼 복수극이자 신파극처럼 보이기도 했다. 해학이 있는가 하면, 어둠이 있었고, 한恨이 서려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다양한 느낌을 나열할 수 밖에 없는 것은 한가지로 똑부러지게 말할 수 없는 내용의 특징 때문이다. 한 번도 쉬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를 읽어 나갔지만, 그 흐름가운데 어느 부분을 똑 분질러 꺼낼 수도 없다. 어떻게 보면 다양하고 제각각인 이야기가 서로를 촘촘이 옭아매고 있어 도저히 하나의 객체로 볼 수 없었다. 이야기는 실타래를 타고 엮어져 하나의 옷을 완성해 가고 있었다. 그 실과 실 사이를 모두 탐색했지만 일일이 드러낼 수 없는 이유는 너무 꼼꼼하게 짜여진 옷이였기 때문이었다.

 

  <고래>를 읽고 있노라면 세상의 구석구석을 여행하고, 온갖 것을 듣고 보고, 몇 십년의 세월을 살아 훌쩍 늙어버린 느낌이었다. 오히려 흘러온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펼쳐지는 이야기의 양상은 때와 장소를 잊을 정도였다. 국밥집 노파와 혈연관계는 아니었지만, 금복을 거쳐 춘희까지 거쳐오는 시간은 적지 않았다. 1, 2부가 평범한 소녀 금복이 소도시에서 성공하는 일대기를 그렸다면, 3부는 춘희에 관한 이야기다. 누명을 쓰고 감옥에서 출소한 춘희는 흥망성쇠를 누렸던 의붓아버지의 벽돌공장으로 돌아온다. 그곳에서 벽돌을 만들며,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길 기대하지만 세월은 이미 그곳을 비켜가 버렸다. 금복의 일대기와 춘희, 노파의 이야기는 판타지적인 요소가 가미되었다 말하고 싶은 소재들이었고, 신화적이고 기이하면서도 어디선가 본 듯한 내용들이었다. 개처럼 벌어 한푼도 쓰지 못하고 비참하게 죽어간 국밥집 노파, 여성 대장부를 떠오르게 만드는 기이한 힘을 가진 금복, 금복의 몸에서 나왔다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큰 등치의 말 못하는 춘희. 이 세 여인들에 얽혀있는 수 많은 사연들은 놀라울 그 자체다. 한결같이 비극적으로 죽음을 맞이한 주인공들과 죽은 사람의 혼과 함께 살아가는 현실과 비현실의 세계는 몽롱하기 그지 없었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일일이 드러낼 수 없는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한 모양이다. 제 10회 문학동네소설상을 받은 작품이기에 그에 관한 심사평이 들어 있었는데, 독특하면서도 기이한 이 소설에 찬사와 걱정이 깃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에 못지 않은 가능성 또한 내다보고 있었기에 <고래>에 대한 나의 느낌이 심사평에 의해 갈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시각을 볼 수 있어 즐거웠고, 기존의 틀과 형식을 깨면서도 과감했지만, 스토리텔링의 힘을 가지고 있어 구성력의 완성도가 돋보였다는 찬사에 동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전히 <고래>가 내게 남긴 것이 무엇인지, 한낱 소설 읽기에 불과했던 것인지 많은 의문이 남는다. 이야기의 조각은 내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고, 전체적으로 보려고 하면 더 흩어질 뿐이었다. '우리의 지난 세기를 세상에 떠도는 이야기로 채우고자 씌여진 것' 이라고 저자가 말했듯이 어딘가에서 흐리고 꾸려지는 다양한 사람들의 삶의 단상으로 보면 될까? 두고두고 곱씹어도 그 만한 세월의 흔적을 남길 수 없을 것 같은 길고도 다양한 이야기 <고래>. 하룻밤에 읽은 이야기지만 너무나 많은 것을 흩뿌려 주었기에 잠시 숨을 고르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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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쇼의 하이쿠 기행 2 - 산도화 흩날리는 삿갓은 누구인가 바쇼의 하이쿠 기행 2
마쓰오 바쇼 지음, 김정례 옮김 / 바다출판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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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권에 이어 바쇼의 하이쿠 기행 2번째 책을 읽었다. 1권 '오쿠로 가는 작은 길'은 1689년에 오쿠를 향해서 가는 여정을 기록했다면, 2권 '산도화 흩날리는 삿갓은 누구인가'는 1684~5년에 걸쳐 노자라시 기행을 담은 책이다. 기행을 떠나기 전, 4년 남짓의 은둔 생활을 하다 진정한 시인이 되기 위해 길을 나선 것이라고 한다. 한 해 전에 세상을 떠난 어머님께 성묘하고, 오가키의 하이쿠 시인 보쿠인을 방문하는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시작한 여행이기도 했다. 1권에서는 주석이 너무 많아 힘들었던 기억이 있었는데, 2권은 주석이 현저히 줄어들어 전체적인 흐름을 따라갈 수 있었다. 무엇보다 하이쿠와 기행이 어우러진 분위기를 좀더 만끽할 수 있어 편안했다.

 

  1권을 읽으면서 주석과 배경지식에 힘들었음에도, 하이쿠가 손에 잡힐듯 말듯한 미묘한 매력에 빠져 2권에도 선뜻 손이 갔다. 그러나 책이 얇다고, 주석이 적다고 좋아했던 마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의문과 모호함으로 바뀌고 말았다. 하이쿠 기행을 읽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으나 그 안에 내포된 의미들이 뒤엉키기 시작했다. 하이쿠의 특징상 설명이 없이도 즉각 짧은 시어에 어떠한 풍경이 그려지기도 하지만, 설명이 주어지지 않으면 애매모호한게 하이쿠다. 짧은 율격 때문에 쉽게 접할 수 있고, 쉽게 읽을 수 있지만 의미파악에는 어려움이 따르는 것이 하이쿠다. 짧은 글자 안에 어느 정도 정해진 시어들을 채워야 하는 어려움도 따르겠지만, 그래서 하이쿠의 의미는 철저히 주관적일 때가 더 많은 것 같다.

 

  바쇼의 하이쿠 기행 2권에서 봉착한 어려움이 그것이었다. 바쇼가 어떠한 심경으로 이 여행을 출발했는지 서문을 통해서 알게 되었지만, 나 같은 일반독자들이 깊은 의미를 헤어리기엔 어려움이 따랐다. 바쇼의 발자취를 따라 기행을 하며 하이쿠를 읊는 착각에 빠지기도 했지만, 그 안에 내포된 많은 것을 지나쳐 버린 느낌이었다. 지극히 주관적이고, 배경지식이 얕고, 시대적 교감이 많이 떨어졌기에 생긴 어려움이였으리라. 그러나 바쇼의 발자취를 따라 모든 것을 알려 했던 욕심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그런 어려움과 욕망을 잠시 눌러둔 채 하이쿠 기행에만 관심을 기울인다면, 왜 바쇼가 하이쿠의 유명한 시인인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돌아가신 어머님에 대한 애절한 시와 여행지에서 만난 하이쿠 시인과 교류하는 장면들은 그의 감성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했다.

 

  1권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바쇼의 하이쿠 기행을 더 풍요롭게 해주는 요소는 그림이었다. 바쇼가 직접 그린 그림과 시가 적혀 있는 것도 있었고, 바쇼가 여행한 곳을 보여주는 우타가와 히로시게의 그림들로 채워져 있다. 글로 상상하기에 부족한 부분을 한 점의 그림들이 희미하게나마 공간이동을 시켜주었다. 또한 2권에는 부록이 딸려 있었는데, '하이쿠의 세계'를 통해 하이쿠가 무엇인지 알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5.7.5를 기본으로 하는 짧은 율격을 지닌 시가 하이쿠라고 알고 있었지만, 하이쿠가 무엇인지 제대로 된 설명이 없어 아쉬워하던 참에 만난 부록은 나의 궁금증을 속 시원히 풀어 주었다.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하이쿠는 엄밀히 말하면 '하이카이 홋쿠'라고 한다. 하이카이란 단어가 '골계滑稽 '라는 뜻의 중국어에서 왔으며, 일본에서 이 단어가 처음으로 쓰인 것은 일본 최초로 공식적으로 편찬된 칙찬 와카집 [고킨와캬수(905)]에서라고 한다. 하이카이가 문예 형식의 하나로 성립하기 시작한 것은 15세기에 들어서의 일이니, 렌가 중 정통이 아닌 것을 하이카이의 렌가, 즉 하이카이라고 했다 한다. 이렇게 렌가의 여기餘技로 시작된 하이카이는 17세기에 이르러서 일본 운문 문학의 중심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하이쿠는 '홋쿠'와 같은 의미의 용어로, 1890년대에 마사오키 시키가 하이카이를 특히 홋쿠 중심으로 개혁한 이후의 것을 카리킨다. 그래서 작자와 독자가 동일한 그룹에 있어야 할 이유도 없고, '작자=독자'일 필요도 없단다. 바쇼는 단순한 언어유희를 벗어난 문학으로 끌어 올리고자 했으니 그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은 단순한 기행이 아니다.

 

  하이쿠는 5.7.5의 짧은 시지만, 직접 지어 보면 쉽지 않다. 일본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하이쿠를 즐기지만, 막상 율격과 형식에 따라 지어보려고 하면 텅빈 밑바닥을 그대로 드러냄을 느끼게 된다. 하이쿠랍시고 글자에 맞춰 몇 편 지어보기도 했지만, 유치하고 시시해서 조금 흥미를 갖다 말았다. 바쇼의 하이쿠를 통해 독자의 위치로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했다. 일본의 하이쿠 시인 이이다 류타는 뛰어난 작품이란 "의미 해석의 영역을 넘어서 읽는 사람의 가슴을 울리는 것' 이라고 말했다. 바쇼의 하이쿠는 의미를 알고 배경지식을 알면 더 큰 울림이 오지만, 그것이 없더라도 나의 감정을 이입시켜 주는 작품이 많았다. 단순히 하이쿠라 하면 바쇼가 떠올라서, 혹은 바쇼가 유명한 시인이기 때문에가 아닌 나의 가슴을 얼마나 울리는지를 살펴보며 바쇼를 접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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