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르니에 선집 1
장 그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199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가끔 그런 날이 있다.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읽을 책이 몇 권 쌓여 있는지, 지갑에 돈이 얼마나 있는지), 서점에 들어가서 맘에 드는 책을 사오고 싶은 날. 그날은 약속 시간이 남아서 서점에 들어갔었다. 시간을 때운답시고 들어갔는데, <섬>을 발견하고 '아차' 싶었다. 책이 눈에 들어왔음은 물론, 내 지갑엔 정확히 <섬> 책 값이 들어 있었다(약속하고 나와놓고 왜 책 값 정도 밖에 안 들고 왔을까). 집에 가는 버스비는 교통카드로 해결하면 된다 생각하고, 덜렁 책을 사버렸다. 책 값과 지갑 속 금액의 일치에 신기해 하면서. 그 날 친구와 만나 무엇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서점을 서성거리던 기억이며, 계산하고, 뿌듯한 마음으로 책을 들고 나오던 기억은 여전히 손에 잡힐 듯 생생하다.
 

  그렇게 뿌듯한 마음으로 책을 구입해 왔음에도, 초반을 넘기지 못하면 가차없이 책꽂이에 방치되고 만다. <섬>이 그랬다. 자신의 스승이었던 장 그르니에의 작품에 알베르 카뮈의 헌사 비슷한 서문이 있었는데, 그 서문을 넘기지 못하고 책을 덮어 버린 것이다. 알베르 카뮈가 <섬>을 읽을 당시의 흥분과 작품에 대한 찬사가 씌여져 있었는데, 서문부터 너무 사색이 깊어 부르르 몸을 떨며 책을 내려 놓았다. 서문부터 이런 식이라면 장 그르니에의 작품은 안봐도 뻔하다는 제 멋대로의 생각이 뻗쳐 진저리를 친 것이다. <어느 개의 죽음>은 짧막한 글이라 그럭저럭 읽을 수 있었지만, <섬>은 제목과 같이 가까이 할 수 없는 존재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언젠가 읽을 날이 올거라는 흐릿한 기대감으로 책장 속에 책을 묵혀 두었다.

 

  내 책장 속의 간택(?)되지 못한 수 많은 책들이 그렇듯, <섬>도 구입한지 8개월쯤 지나서 빛을 보게 되었다. 어느 밤, 책 사냥(책장에 꽂힌 책들 중에서 그날 기분에 따라 읽을 책을 찾는 것)에 나선 내 눈에 <섬>이 들어왔다. 서문을 보고 덮은 기억이 있었지만, 소설을 너무 많이 읽어 지친 내게 사색 거리가 필요했다. 그렇게 <섬>을 다시 펼쳐 들었는데, 묵혀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렵고 난해하던 서문부터 술술 읽히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여기저기 메모지가 덕지덕지 붙여지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기억하고 싶은 구절에 그냥 메모지를 붙이기도 하고, 나의 느낌을 적기도 했다. 그 집중력에 흥분해서 알베르 카뮈의 심정을 이해할 정도라고 혼자서 들떠 있었다. 카뮈가 이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싶단 욕망에 확신을 가진 것도, 우리들의 젊은 불안이 어디에서 오는지 설명해 주고, <섬>을 열어보게 되는 저 낯모르는 젊은 사람을 뜨거운 마음으로 부러워 한다는 말까지 모두 내 마음 밭에 뿌려지고 가꾸어졌다.

 

  첫 글 <공의 유혹>도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평상시 같았으면 아무 생각 없이 읽고만 지나쳤을 문장들에 나만의 생각들이 샘 솟듯 솟아났다. 나의 유년시절과 그때 갖었던 생각 사이를 오가기 바빴고, 간단하게나마 메모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단순한 생각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생각이 솟아나게 만들어 주는 글을 만난 것이 얼마만이던가. 장 그르니에의 글에 아주 특별한 것이 있는게 아니라 누구나 한번쯤 고민해본 것을 글로 표현해 내는 특별함이 있었다. 그르니에처럼 매끄럽고 자연스럽게 끌어내지 못하기에 그가 뱉어낸는 문장마다 메모를 달고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문장을 던져주기만 했을 뿐인데, 내 머릿속에 관념들이 생성되었다. 잠재되어 있던 생각들을 살짝 건드려 주기만 했을 뿐인데, 내 자신도 놀랄 정도로 많은 생각과 언어들이 내 안에 떠돌기 시작했다.

 

  그것은 너무나 평범해서 옮기기가 조촐할 정도다. 그르니에의 글을 통해서 내가 갖었던 생각, 장 그르니에의 평범한 문장들은 소소했다. 하지만 평범한 글로 얼마나 많은 가능성을 열어 주었던가. 그 가능성의 깊이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색다른 경험이 되어가고 있었다. 한 그루의 나무가 그르니에라면, 그의 글이 하나의 가지라면, 독자는 저자가 만들어 놓은 가지에 수많은 잔가지를 뻗으며 공중으로, 땅 아래로 향하고 있었다. 깊은 밤,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지닌 채 그의 책을 읽어나갔고, 감당하기 버거운 무게 때문에 잠시 책을 덮었다. 이대로 끝까지 읽다간 내 안의 무언가가 터져 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 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순간에는 차라리 무언가가 터져 버리도록 나두지 못했던 것을 다음 날 바로 후회하게 될 줄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벅찬 감정이 일었던 전날 밤의 기억을 부여안고, 책을 펼쳤지만 이미 글자들은 맴돌고 있을 뿐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잠시 책을 덮고 다음 날 읽은 것 뿐인데. 며칠을 책을 덮었다 펼쳤다를 반복하다, 여러 날 공백을 두고 꾸역꾸역 읽다 마무리 짓고 말았다. 처음에 느꼈던 희열과 뜻 모를 감정의 발산은 다시 재생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날에 느꼈던 것들이 이상할 정도로 지지부진하고 힘겹게 <섬>의 나머지를 읽어 나갔고, 책의 반토막은 살아서, 다른 반토막은 죽어서 내 안에 떠돌기도 하고 겉돌기도 했다. 무엇 때문일까. 이렇게 급격한 변화의 양상을 띄게 된 것은. 도무지 알 수 없는 혼란 속에서 책을 덮어야 했을 때는 무척 괴로웠다. 책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다는 죄책감 보다는 무언가가 잡힐 듯 하다가 사라져 버린 허망함 때문이었다. 그것이 끝까지 이어졌다면, 내가 어떠한 결심을 하게 되었을지 모른다는 안타까움도 내제되어 있었다. 내가 젊지 않아서일까. 잠재력이 바닥나 버린 것일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결국 찾아 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뜨거운 불덩이가 내 안을 잠시 훑었다 사라져 버린 느낌. 이 책을 읽는 다른 이들은 이런 불덩이가 일었다 싶음, 절대 놓지 말기를 바란다는 충고 밖에 할 수 없는 내 자신이 안쓰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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