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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범 1 ㅣ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30
미야베 미유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미야베 미유키란 작가가 독자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을 때도, 그녀의 작품 중에서도 <모방범>이 많이 읽힐 때도 그녀와 그녀의 작품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내가 좋아하지 않은 장르를 써낸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고, 그녀를 알게 된 첫 작품으로 <브레이브 스토리>를 만난 탓이었다. 게임을 알아야만 즐겁게 읽을 수 있어서인지 4권짜리 책임에도 강한 인상을 주지 못했다. 그렇게 미야베 미유키란 작가는 내게서 묻힌다 생각했는데, 내 손에 들어 온 한 권의 책으로 다시 한 번 그녀를 각인시키게 되었다. 그녀의 첫 장편소설이라는 <퍼펙트 블루>. 그 작품을 읽고 나니 그제야 미야베 미유키란 작가도, 그녀의 다른 작품도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다른 작품을 읽고 싶어 먼저 선택한 것은 <모방범>이었다. 워낙 유명한 작품이기도 하거니와 이제껏 악평을 한 독자를 만나보지 못했다. 두꺼운 페이지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세트로 주문한 다음 시간을 넉넉히 잡고 책을 펼쳤다. 다른 독자들 말마따나 페이지를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순식간에 빠져 들었고, 드디어 이 작품을 읽는다는 흥분을 느낄 새도 없이 책 속의 분위기에 몰입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 읽기를 종종 멈출 수밖에 없었다. 잠시 책을 덮고 심호흡을 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나를 통째로 삼켜 버렸다. 범인이 행하는 모든 행동에 촉각을 곤두세우면서도 그의 마음가짐이 온전히 내게로 전해져 왔기 때문이다. 전례에 없는 지능범이라는 칭찬은 나의 두려움을 배가 시켜 주었고, 어딘가에 그런 범죄가 일어나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자 오싹해져 버렸다. 더군다나 밤에 읽어서인지 가족들이 모두 있음에도 바람이 통하라고 열어놓은 현관문을 닫고 싶어 안달이 날 정도였다. 평상시에 아무렇지 않게 닫아대던 현관문을 큰 용기를 내어 닫으러 갈 정도로 두려움을 현실로 끌어 내 버린 내가 심약한 마음을 가졌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500페이지가 넘는 세권의 책. 이제 1권을 읽었을 뿐인데도 온갖 궂은일을 당한 것처럼 지쳐 버린 기분이다. 그래서인지 남은 두 권의 책을 바라보는 시선은 두려움에 차 있다. 보통 이런 추리소설을 만나면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서 숨 쉴 겨를 없이 읽어 젖히기 바쁜데, 한 권씩 손에 쥘 때마다 굳은 각오를 해야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책을 읽은 느낌이 사라질까 두려워 쉽게 리뷰를 쓸 수도 없었고, 다음 권으로 손을 뻗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먼저는 남의 이야기인양 즐거움을 위해 책을 읽을 수 없음이다.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다고, 나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에게도 일어나지 말란 법이 없다는 불안감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수 없이 펼쳐지는 이야기와 사건을 구체화 시켜가는 저자의 능력보다 인간의 본성을 이토록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거침없음에 겁이 났다. 그런 인간에게 해코지를 당할까 겁이 나고, 그런 사람들을 방치하고 양성해가는 사회의 일원이라는 사실에, 버젓이 현재에도 일어나는 이해할 수 없는 비인간적인 사건들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리라.
사건은 공원에 발견된 여자의 오른 팔로 시작된다. 쓰레기통에서 발견된 젊은 여자의 오른 팔. 그리고 실종된 가족의 팔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인 사람들. 누구의 팔인지, 누가 그 팔을 공원에 버렸는지 알 수 없는 가운데 악질적인 사건으로 폄하되는 듯 했다. 그러나 사건의 끔찍함보다 더 두려운 것이 있었으니, 바로 자신을 버젓이 드러내는 범인의 행각이다. 목소리 변조를 하긴 했지만, 방송국에 자신의 범죄를 태연히 알려오고, 범죄자의 가족을 유린시키고, 살인을 일삼는 범인. 그에게 분노를 드러내기에 앞서 두려운 감정이 먼저 든 것은 인간의 나약함을 정곡으로 찔러대는 범인의 날카로움 때문이었다. 범죄의 목적을 밝히지 않은 채, 자신의 행동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며 경찰과 언론을 농락하는 그 행위 앞에 평범하기 그지없는 보통사람들은 혼란스러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앞으로 할 행동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오고 그들을 비웃듯 하나씩 되갚아 주는 범인의 지능은 보통을 넘어섰다. 범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기에 밀려오는 공포와 어떠한 행동으로 사람들을 기겁시킬지 모르기에 초조해지는 불안감을 무엇으로 막을 수 있단 말인가.
범인에 의해 피해 여성의 신분은 밝혀졌다. 3개월 전에 실종된 마리코라는 여성이 피해자였지만, 공원에서 발견된 팔은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팔 이외에 따로 발견된 핸드백이 마리코의 것이었는데, 범인은 오른 팔의 주인을 밝히지 않고 끝내 마리코를 유해로 돌려보낸다. 마리코의 엄마는 정신을 놓아 버린 상태고, 마리코의 외할아버지인 요시오만이 힘겨운 싸움을 해가고 있었다. 경찰이 특별수사본부를 차려 사건을 맡고 있었지만, 그 사이 피해자는 더 늘어났고 범인의 행각을 추적할 수 없었다. 아주 조금씩 그의 목소리를 녹취한 테이프에서 범인을 형상화 하지만 여전히 미미한 것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런 가운데 이야기는 잠시 다른 분위기로 넘어간다. 분위기 전환이 되기 전에도 사건은 또 다른 사건을 낳고, 수없이 얽혀가고 있었다. 마리코가 유해로 돌아오긴 했지만 아직 범인이 밝혀지지 않았기에 그를 쫓는 무리, 그 사건과는 곁길에서 일어났다 하더라도 마리코와 미미하게 연결되는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가 펼쳐졌다. 그러나 2부에서는 마리코의 살해사건과 관련이 없는 듯 한 또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나를 가장 우울하게 만든 것은 2부에 드러난 이야기였다. 1부의 내용도 결코 가볍고 밝은 내용이라 할 수 없지만, 2부에서 등장한 구리하시 히로미란 인물은 인간의 악함을 어릴 때부터 드러낸 인물이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유년시절은 희화화시킨 시절로 추억하기 바빠진다. 그렇기에 오히려 더 애틋하게 간직되는 시절이기도 한데, 히로미는 내가 환상을 덧입혀 추억하기 바쁜 유년시절에 이미 악함이 마음속에 가득 자리하고 있었다. 그의 성장과정과 내면을 알아 가면 갈수록 치가 떨려와 그런 인간 자체를 부정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어른이 되어 내면에 자리한 악에 지배당해 결국 두 명의 여성을 살해한다. 그 상세한 배경과 적나라함 때문에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지 않았다. 그 여성들의 죽음이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 그 이후로 히로미는 어떻게 될지, 이미 시신으로 발견된 그의 이야기를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었다.
줄거리를 요약한다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방대하게 펼쳐지고 있는 모방범은 이제 첫 발을 내디뎠을 뿐인데도 나의 마음을 어지럽게 할퀴고 갔다. 책 내용 때문에 우울하고 영(靈)이 흔들리는 감정이 일어 며칠 동안 힘들어 하기도 했다. 책 속의 내용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고, 어둠이 내려앉은 시각에 책을 펼치면 나를 엄습하는 두려움을 떨쳐내기가 힘들었다. 이토록 나약하고 심약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이용당하고 목숨을 잃는다고 생각하면 인간의 내면이 과연 무엇으로 채워져 있는지 끊임없이 질문하게 된다. 나의 내면을 차지하고 있는 다양한 감정과 생각들이 타인에 의해 한순간 묵살당하고 제지당할 수 있다는 사실이 이토록 두렵게 다가온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단순하게 몰입을 이끌어 낸다고 저자를 칭찬할 수 없다. 저자가 그려내 인간의 내면의 바닥을 아직 보지 못했고, 본연의 모습 또한 근처도 가지 못했다. 그 모습이 다음 권에서 펼쳐질 걸 알기에 나약한 인간에 불과한 나는 이렇게 덜덜 떨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