닌자걸스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37
김혜정 지음 / 비룡소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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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청소년 문학이 너무 좋다. 청소년에 관한 책을 보면서 마치 내가 다시 유년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깔깔거리며 재미있어 한다. 그래서인지 '청소년' 이란 단어가 들어간 책만 보면 눈에 불을 켜고 읽게 된다. 이 책도 나오자마자 관심이 갔다. 청소년 문학을 좋아한다고 하지만 국외문학에 치우쳤던게 사실이었고, 이번 계기로 읽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거기다 제목까지 궁금증을 불러 일으켰으니 즐거운 마음으로 책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청소년 문학을 좋아하는 이유중 하나는 나의 유년시절을 떠올리며 비교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라고 한다면, 아마 쉽게 수긍하지 못할 것이다. 남들처럼 심하게 공부에 치여 학창시절을 보낸 것은 아니지만 스트레스의 양이 다를 뿐, 분명 나를 괴롭히는 요인 중의 하나였고 내면으로 치열함을 달고 살았던 시기였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 나오는 아이들의 고뇌를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거기다 성적에만 열을 올리고, 자신이 정해놓은 길로 자녀가 가야만 안심이 되는 부모는 우리가 흔하게 만날 수 있는 모습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책 속의 아이들은 천진난만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먹는 것을 좋아하는 고뚱땡 은비, 꽃미남에 사족을 못 쓰는 지형, 꼬마라고 하면 까칠함이 극에 달하는 소울, 예쁘고 착하지만 머리가 텅 빈 혜지까지 네 소녀가 만들어가는 이야기는 발랄하면서도 처절했다.

 

  은비는 의대에 가라는 엄마의 성화를 견뎌내고 있었다. 공부를 잘해 '모란반'에 속해 있지만 은비가 하고 싶은 것은 연기였다. 살이 찌기 전에 연기 학원을 다녔고 재능도 있었다. 그러나 살이 찌고 부터는 그 꿈을 접어야 했고, 은비 엄마도 의사를 시킴으로써 그에 대한 보상을 받으려는 것 같았다. 지형이도 '모란반' 이었다가 성적이 떨어져 짤렸다. 작가가 되고 싶어 하는 지형이를 부모가 반대하는 것은 당연했다. 지형은 그야말로 꽃미남만 봤다 하면 사족을 못쓰고, 근처의 남고의 얼짱 팬클럽에 가입해서 활약을 할 정도다. 10년만에 소울을 얻었다는 부모는 소울을 아기 취급 했고, 키가 작아 '꼬마'라고 놀리면 은비에게 뚱뚱하고 못생겼다는 말도 서슴치 않는 까칠하고 정의에 불타는 아이다. 혜지는 성격도 좋고, 얼굴도 이쁘고, 몸매도 좋고, 집도 부자인데 반에서 꼴지다. 각각 다른 이 네 아이들은 학교 생활과 자신들의 고민, 그리고 세상과 어우러져 가는 모습을 은비의 시선을 통해 그려 나간다.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고민과 일상은 어쩌면 여고생들이 만들어내는 평범한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아이들을 보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의 인격체로 대하고, 그 아이들을 존중해 주는 것이다. 물론 자녀가 잘못 되라고 나무라는 부모는 없겠지만,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틀에 가두기에는 아이들에겐 각자의 꿈이 있었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희망차야 했다. 그랬기에 연기자를 꿈꾸는 은비를 힘껏 도와주는 다른 친구들은 그런 은비만큼이나 자신들이 존재감을 알리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늘 외모 때문에 힘들어 하고, 성적에 민감한 엄마와 맞서야 하는 은비에게 드디어 기회가 왔다. 혜지네 외삼촌이 영화감독이었고, 혜지와 친해지면 자연스레 만날 수 있다고 친구들이 설득한 것이다. 혜지의 부모는 혜지가 반에서 30등을 못하면 미국으로 보내버린다고 협박했고, 혜지의 공부를 도와주며 외삼촌을 만나려는 은비, 혜지의 꽃미남 동생 영민을 보려는 지형, 혜지네에 구비된 영화 DVD를 보려는 소울까지 각자의 목적은 충분했다.

 

  외삼촌의 도움으로 연극 오디션을 보고 온 은비는 남들이 비판하던 외모에도 불구하고 당당히 합격한다. 그런데 공연과 '모란반' 수업이 겹쳐서 어쩔 줄 모르는 상황에 처했다. 그런 은비를 돕기 위해 아이들이 마련한 방법이란, 바로 모란반을 없애 버리는 것이다. 네 명의 아이들이 처음 간구한 방법은 귀신소문을 내서 아이들을 해체시키는 것이었는데 그마저 실패하고 마지막으로 닌자 모습으로 분장하고 옥상에 오른다. 학교 선생님들에게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려던 그들은 경찰과 부모까지 출동하는 사태에 맞서면서도 당당히 자신들의 요구를 말한다. 그 뒷일은 감당하기 힘들지라도.

 

  네 명의 아이들이 자신들이 하고 싶은 것, 혹은 자기가 하기 싫은 것을 부인하며 존재감을 드러내는 이야기는 무척 재미있었다. 아이들과 함께 생활한 것처럼 내면 묘사가 좋았고, 거기에 재미를 가미했다. 각자의 개성을 부여하고, 그들이 세상과 맞서기 위해 준비를 하는 것처럼 아이들의 시선에서 비춰지는 모습을 잘 표현해 냈다. 성장소설에서 어떠한 결론을 이끌어 낸다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계속 성장중이므로 어느 정도 모습을 비춰줄 수는 있어도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에서(내면과 외적인 면이든) 결론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였을까. 재미 위주로만 치우지는 모습에 조금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책에서 충분히 아이들의 고민과 그들 눈에 비춰지는 학교와 세상의 모습을 잘 그려넣었지만, 조금 더 무게있고 여운을 남겨주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발랄함이 아이들에게 부족한 요소라고 생각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공부에 억압되는 삶을 살고 있는 아이들이지만, 청소년들이 동화될 수 있는 모습을 그려 넣었다면 더 좋았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이미 유년시절을 넘겨버린,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나의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고 이 또래의 아이들이 읽으면 어떨까 하는 궁금증이 일기도 한다. 비슷한 또래의 내면을 그려내는 책들보다 시험 문제에 나오는 책들을 읽어야만 하는 아이들에게 그들의 내면을 대신할 수 있는 청소년 문학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책으로나마 자신들의 모습을 고민하고, 힘을 얻을 수 있는 이런 책들이 많이 발간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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쉿, 조용히! - 풋내기 사서의 좌충우돌 도서관 일기
스콧 더글러스 지음, 박수연 옮김 / 부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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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주 잠시, 꿈이라고 말하기도 뭣할 정도로 '사서'라는 직업을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문헌정보학과를 나와야 하고, 일자리가 별로 없고, 우리나라의 사서는 바코드 맨과 바코드 걸로 불린다는 편견을 집어넣어 생각에서 밀어 내 버렸다. 그러나 종종 도서관을 갈 때마다 마주하게 되는 사서들을 보면서 내가 저 자리에 앉아 있다면 어떨지 상상해 보곤 한다. 상상을 해 봐도 전혀 감이 오지 않은 가운데 한 사서가 쓴 책이 내게로 왔다. 이 책을 통해서 사서란 직업이 어떨지, 도서관에서 생활이 어떨지 들여다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조금 마음에 설랬다.
 

  그러나 그런 기대감은 잠시, 뭐든지 너무 적나라하게 알게 되면 역효과가 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실감하는 계기가 되어 버렸다. 저자는 그야말로 있는 그대로의 도서관 생활을 내 보였다. 아르바이트로 시작해 정식 사서가 되기까지의 과정부터, 도서관에서 겪는 모든 일들이 얽혀있었다. 내게 익숙한 공간이기도 한 도서관의 이야기가 이렇게 색다르게 다가올 수 있다는 사실에 처음에는 무척 즐거웠다. 내가 도서관을 이용할 때는 이용자의 입장에서 바라봤기에 사서가 어떠한 시선으로 보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사서의 입장에서 바라본 도서관과 이용자, 그리고 도서관 안에서의 자신의 역할은 생각했던 것보다 광범위했다. 잘못된 정보라고 확인할 길이 없는 한 가지 소문은 '우리나라 사서는 바코드만 찍어대고, 외국의 사서는 굉장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사서가 된다.'였다. 그래서 저자는 어떻게 사서가 되었으며, 다른 사서들의 모습이나 사서로써의 사명감 등이 어떨지 많은 관심이 갔다.

 

  사서하면 책에 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당연히 책을 좋아하며, 책을 많이 읽고, 책에 관해서 직장동료들과도 많은 대화를 나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저자가 출근해서 쉬는 시간에 책을 읽고 있자 다른 직원들이 보인 반응을 보며 기겁을 하고 말았다. 사서니까 책을 많이 읽고, 출판계의 흐름을 알아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책을 읽지 않으며 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다는 사실은 환상을 깨기 충분했다. 그 단편적인 이야기로 모든 사서들이 그렇다고 단정 짓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지만, 저자만큼이나 사서에 대한 환상이 깨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개인적으로 책을 좋아하지만 책에 관련된 직업을 갖게 된다면 즐겁게 독서를 하지 못할거라는 확신은 늘 있었다. 그러나 이정도 일 줄이야. 그냥 평범한 독자로써 책 읽기를 즐긴다는 사실이 순간적으로나마 감사했다.

 

  저자가 도서관에서 생활하고, 사람들과 부딪히며 삶을 살아가는 모습은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대부분 도서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중심으로 자신의 생각을 드러냈으며, 그러다보니 그곳이 도서관이라는 사실을 종종 잊을 정도였다. 그만큼 내가 생각하는 도서관은 도서관 내에서 작은 일부분에 불과했고, 내가 이용하는 동선 안에서 존재했던 도서관이었다. 저자는 사서로써, 사서보조로써 바라본 도서관의 풍경을 담아냈기에 내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를 아주 거대하게 되살려낸 느낌이었다. 그렇기에 더 이상 도서관에 대한 환상이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겪고 있는 모든 일들이 도서관 안에서도 일어났고, 이용자라는 특수한 사람들이 존재했기에 그들이 빚어내는 이야깃거리 또한 무척 다양했다. 사서라는 자리가 차지하는 위치가 어디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옮긴이는 저자가 '사회복지사' 비슷한 일들이었다고 말했다. 그 말에 전적으로 공감할 수밖에 없는 것은 도서관을 이용하는 다양한 사람들과 연령층, 사서들은 공무원이라는 위치까지 겹쳐 애매모호한 상황들을 많이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나야 책 빌리러 가거나, 공부하러 가는 것이 전부고 내가 이용하는 공간도 무척 협소했기에 이렇게 방대한 이야기가 펼쳐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십대, 노인, 노숙자들의 활약상을 제대로 들어보지 않아도 먼저 한숨이 내 쉬어진다. 그런데 그들뿐만이 아니라 세상에서 소외된, 조금 부족한 사람들이나 미친 사람들까지 상대해야 했으니 사서라는 위치가 무엇인지 되뇌어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종종 저자가 그런 고뇌를 하는 것이 보였는데, 그가 풀어 놓은 이야기를 읽다 보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어느 일에 어려움이 없겠냐만, 도서관에는 사회의 구성원을 축약해 놓은 듯 한 사람들이 끊임없이 방문했기에 더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상황이라면 사서가 하는 역할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저자 또한 자신의 일이기에 앞으로 계속 일 할 거라면 사서라는 직업에 대한 사명감 비슷한 것이라도 있어야 했다. 그런 생각은 처음부터 형성되지 않았다. 저자가 도서관에서 생활하고 정식 사서가 되며, 타인과 얽히며 살아가는 동안 경험으로 쌓이게 되었다. 그 경험들을 통해 저자가 얻게 된 것이 바로 사서로써 할 역할들이었다. 구체적으로 그것들이 무엇이라고 똑 부러지게 말할 수 없지만, 저자의 일상 속에 녹아든 생각을 엿보다 보면 그다지 어려운 것이 아님을, 그러나 쉬운 것도 아님을 알게 된다. 책을 다 읽어갈 즘에는 이 책이 도서관과 얽힌 에피소드라고 봐도 무관하겠지만, 그보다 저자의 어른 성장기(?)로 봐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도서관이 배경이고, 그 안에 수많은 요소들이 존재하는 가운데 저자도 함께 그들과 살아갔기 때문이다. 그런 성장을 유감없이, 때로는 너무 솔직하게 드러내기도 했다. 그런 감정을 드러내는 것에 어떤 가려짐을 느끼지 못해 때로는 감정이 바닥까지 내려간 느낌이라 마음이 헛헛해졌다.

 

  저자는 이 책에 도서관에 얽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 놓는 중간 중간 '소곤소곤'이라는 코너를 만들어 쉬어가는 식으로 짧은 정보를 제공한다. 도서관에 파묻혀 그들의 일상을 지켜보는 것이 지쳐올 때쯤 쉬어가는 코너는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었다. 거침없이 드러내는 저자의 내면과 도서관의 일상 속에서 뭔지 모를 기운 빠짐을 느낄 때, 이 코너로 인해 개인적으로 위로를 받았다. 그 위로라는 것이 책을 좋아하고, 도서관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으며(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오던지), 책과 관련된 일은 그래도 할 만 하다라는 아주 협소한 것들에 지나지 않지만. 그러나 이 책에 실린 내용으로 모든 도서관을 같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각 나라마다, 동네마다 도서관이란 형태는 다른 모습으로 자리하기 충분하기에 그냥 미국의 한 동네의 도서관을 살펴보았다는 범위 축소를 해야 한다. 도서관을 훑어 본 것이 다른 도서관을 상상하는 데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되겠지만, 이 책에 실린 도서관의 모습은 저자가 겪고, 생각하는 독자적인 도서관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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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니 - 공지영 장편소설
공지영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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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그녀의 글을 좋아하지 않지만, 신간이 나올 때마다 지나칠 수 없는 작가 공지영. 블로그에 연재 됐을 때도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다가 책으로 출간되자 그제야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약간의 책 소개만 접하고 책을 손에 쥐었지만, 쉽게 읽히지 않았다. 불편한 책 내용과 저자의 문체에 대한 기억이 얽혀 기분 좋은 출발을 주지 않았다. 그렇게 보름을 방치하다 더 이상 피할 수 없어 정면으로 마주했다. 책을 꺼낸 시각은 밤 12시가 넘은 시각이었고, 책을 덮었을 때는 새벽 3시가 막 지나고 있었다.
 

  책을 읽는 동안, 그리고 책에서 손을 떼는 순간 역시나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는 데서 오는 이상야릇한 안도감마저 들기 시작했다. 여전히 좋아할 수 없는 작가라는 데는 변함이 없었고, 우울의 '도가니'로 몰고 가는 것에 성공했다는 안도감이라고 하면 이상할까. 불편한 내용을 불편하게 풀어냈다는 데서 오는 불편함과 답답함은 새벽의 고요 속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휘감았다. 불쾌한 감정을 떼어 놓으려 했지만, 결국 꿈자리까지 어지럽게 만들었고 차라리 한바탕 꿈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까지 일었다. 그러나 머리맡에 놓인 흔적으로 남겨진 책을 보니, 아무런 해결책 없이 모든 것을 독자에게 떠넘겼다는 또 다른 불쾌감(저자에 대한 억지스런 불쾌감)은 여전히 나를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불편한 감정의 원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해결책을 모색할 수 없다는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그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감에서 오는 약자의 본성일지도 모르겠다. 농아들이, 그것도 어린 아이들이 학교에서 성폭행을 당하는 사건의 전말을 보면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의 인권을 부르짖고, 잘못됨을 알고 공공연히 떠들어 봤자 권력과 돈 앞에 진실이 무너진 과정만 보아왔는데. 그 사건을 지켜봐야 하는 것이 고통스러운 것도 있었지만, 마주치고 싶지 않은 어둠의 세계와 예고 없이 맞닥트려 버린 불편함도 한 몫 했다. 그러므로 어린 아이들이 학교에서 겪었을 성폭력과 자신들만의 세계에 갇혀 받은 고통을 눈곱만큼도 이해할 수 없을 거라(그런 자격도 없음을) 확신했다.

 

  책의 시작은 안개와 한 남자가 등장한다. 생계를 위해 가족은 서울에 두고 홀로 무진 시에 내려온 남자 강인호. 실직상태를 보다 못한 부인의 주선으로 특수학교 기간제교사로 일하기 위해 내려오는 길이었다. 거리는 안개로 가득 차 있었고, 강인호가 무진에서 겪게 될 일의 전말을 알리기라도 하듯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암담함이 서려 있었다. 그 안개 속에서 만나게 되는 아이들과 자애학원. 결국은 첫 날 만나게 되는 안개의 여운을 떨쳐내지 못하고 안개 속만 거닐다 그는 서울로 떠난다. 책의 시작에서 나타난 안개, 중간 중간 무진의 특징을 제시하듯 등장하는 안개. 그 안개의 숨은 의미는 뚜렷하게 드러나지 못한 진실의 감추어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에서 만큼은 안개의 두터움을 느낄 새도 없이 한 가닥의 엷은 안개만으로도 충분히 진실이 가려지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당당하게 드러내고 감추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고 해야 하는 것이 옳을지도 몰랐다.

 

  강인호는 자애학원에서 고통 받는 아이들이 세상에 드러나기 위한 매체 물로 등장한다. 출근 첫 날부터 모욕적이고 이상한 분위기를 풍기는 학교에서, 그야말로 아무것도 모르기에 아이들을 믿고 아이들의 말을 믿어 주었다. 그로 인해 무진에서 인권 센터 간사로 있는 서유진과 함께 자애학원의 문제를 언론에 폭로한다. 그러나 그 일로 인해 진실이 드러나는 것 같아 보이지만, 바로 수그려 들것이라는 예감을 만들어 주는 과정에 불과했다. 뒤로 드러나는 학교 교장과 행정실장, 또 다른 선생의 말로 표현하기 힘든 아이들에게 가한 성폭력의 진실은 그들이 가진 세상의 권력과 물질 앞에 나뒹굴 뿐이라는 것을 누구나 실감하게 했다. 그들의 뒷수습도 영향이 있었지만, 뻔 한 상식 앞에서도 상식을 뒤엎는 그들의 행태가 묵과되는 것을 지켜보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아이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인간 말증의 사람들에게 비난을 퍼붓다가도 멈칫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나 또한 그들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는데 그다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성폭력을 당하고, 자살하고, 세상을 향한 두려움에 쌓여있어도 도와주는 사람보다 거부하는 사람이 많았다. 아이들이 고백한 사실 앞에 분노를 터트리며 앞장을 서려다가도 조금씩 뒷걸음질이 쳐지고 말았다. 홀연히 서울로 떠나버린 강인호는 소설 속에 등장한 나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닮아 있었다. 무엇인가 끓어오를 듯 치솟다가도, 삶의 권태를 느끼며, 현실에 순응해 가는 인물. 어쩌면 상식 이하의 행동을 한 사람들보다 과감하게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고, 속내를 확실히 드러내지 않은 강인호에게(또 다른 나에게) 실망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그에게 도피자라고 외칠 수 있을까. 지금껏 고통당한 아이들의 입장보다 지켜보는 내 입장만을 밝힌 것만 보더라도 내 위치도 그렇게 떳떳하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이미 가해자의 편으로 돌아선 세상은 피해학생과 그들을 도왔던 몇몇 인물들만 덩그러니 놓아둔 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돌아가고 있다.

 

  그렇더라도 희망을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는 진부한 표현이 나를 일으켜 세워 줄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온통 우울하고 어두운 책 내용 앞에 저자도, 그 일이 실화에서 모티브를 얻었다는 것도, 뒷걸음질 쳐버린 강인호란 인물에게 비난의 화살을 쏘았었다. 그러나 진정한 가해자들이 비난의 화살 밖에 서 있는 것에 놀랐고, 쉽게 잊혀 버렸다는 사실 앞에 당황할 뿐이었다. 진실이 드러나도 진실을 들으려고 하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싸잡아 몰아 붙여 버렸지만, 아이들의 고통을 십분 이해하고 도우며 가해자들을 묵과하지 않으려는 소소한 세력이 있다. 서유진, 최목사, 연두엄마, 통역청년. 서유진의 편지로 소식을 접하게 된 강인호도 어쩌면 그들에게 일말의 희망을 걸고 있는지도 몰랐다. 자신은 이렇게 다시 현실로 돌아왔지만, 그들만큼은 무진에서 아이들의 편에 서서 함께 싸워주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진실은 몹시 게으르다'고 했던 저자의 말처럼, 그 진실이 언제 제 모습을 드러낼지 아무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진실이 결국을 이길 거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내가 견딜 수 없을 것 같다. 또한 진실의 드러남을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피해 아이들이 이 세상에서 귀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는 과정이 없다면 이 소설을 쉽게 떨쳐버리지 못할 것이므로(알 수 없는 권태와 죄책감에 시달릴게 뻔하다.), 되레 그들에게 내가 위로 받고 있음을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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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쇼의 하이쿠 기행 3 - 보이는 것 모두가 꽃이요 바쇼의 하이쿠 기행 3
마쓰오 바쇼 지음, 김정례 옮김 / 바다출판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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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계절 여름에는 많은 것들이 나를 현혹한다. 여행 책에서부터 쇼핑, 휴가 계획, 마음을 설레게 하는 로맨스까지 그야말로 한 없이 들뜨는 계절이다. 그러나 이미 휴가는 수련회로 정해져 버렸고, 읽을 책은 책장에 가득이며, 쇼핑도 오래전에 다 한터라 무엇 하나 기댈 것이 없는 요즘이다. 여행 책을 읽어봤자 마음만 들뜰 테고, 여름이 얼른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이제 여름의 한창을 지나고 있는데 마음이 이유 없이 들뜬다면 차분히 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대리만족이나 하자 싶어 좀 특별한 여행 책을 읽어보고 싶어 바쇼의 하이쿠 기행을 펼쳤다. 1, 2권은 읽고 3권을 읽지 않아 늘 마음에 걸렸는데, 충분한 계기가 되어 주니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제목에도 나와 있듯이 처음에는 이 책을 하이쿠 시집으로만 생각했다가 점차 하이쿠가 가미된 기행문으로 시선을 넓혀갔다. 1권에서는 낯섦과 주석 때문에 힘들어 했고, 2권에서도 1권의 행보를 이어가느라 제대로 만끽하지 못했던 게 사실이었다. 3권을 읽을 시점이 되자 그제야 다른 것에 얽매이지 않고 바쇼의 내면으로 들어가 그의 여행길을 따라갈 수 있었다. 바쇼가 하이쿠 기행을 하게 된 목적과 여행한 장소들도 꼼꼼히 살피며 읽어도 좋지만, 말 그대로 '하이쿠 기행'에 중점을 두며 읽는 것이 가장 좋다. 바쇼는 기행을 하면서 하이쿠와 간단한 글로 기록을 남겼지만, 스스로도 기행문을 왜 써야 하는지 생각하며 여행을 했다. 평범한 글은 누구나 쓸 수 있다며, '저 중국의 시인 황산곡이나 소동파의 시에서 볼 수 있는 진기함과 새로움이 없다면 기행문은 쓰지 말아야 하리.'라며 스스로를 다독이며 새로운 다짐을 하기도 한다. 평범해 보이는 그의 글과 하이쿠에 딸린 주석을 보며 그의 내면에 얼마나 많은 뜻이 내포되어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말이었다.

 

  빈 몸으로 나서 긴 여행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이쿠에 기초를 둔 여행이라고 해도 여러 가지 조건들이 따라줘야 한다. 건강부터 여행의 여정 과정에 담긴 많은 것들을 생각하기도 바쁠 터인데, 하이쿠 시인으로써 근본정신도 잃지 않으려 애썼다. 바쇼의 하이쿠를 살펴보면 계절에 민감하고, 자연과 어우러지는 인간의 삶의 모습이 많이 내포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바쇼는 '하이쿠에 몸을 두는 사람은 자연의 조화에 순응하고 사계절의 변화를 친구 삼아, 그것을 시로 표현해 간다.' 라고 말했듯이 여행을 하는 동안 하이쿠 시인으로써 사명을 잊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래서일까. 바쇼의 하이쿠를 살펴보면 그런 의미가 들어간 하이쿠를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짧은 시 안에 아름다움은 물론, 지역의 특색을 살리고 또 다른 의를 가미하는 것에 감탄할 뿐이었다. 1, 2권에서 그렇게 힘들어했던 주석이 3권에서는 큰 도움이 되어 바쇼의 기행을 편히 따라가도록 이끌어 주었다.

 

  이 기행문은 바쇼가 1687년 음력 10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6개월 정도의 여행을 소재로 쓴 하이쿠 여행기라고 한다. 그가 아끼던 제자 중의 한 명이었던 도코쿠를 위로 차 방문하는 목적을 가지고 떠났다고 한다. 막상 제자를 찾아가서 여행의 쓸쓸함을 달래고, 만남의 기쁨을 나누는 인간미가 넘쳐나는 모습을 보니 혼자 하는 여행의 쓸쓸함이 잠시 느껴지기도 했다. 그는 기꺼운 마음으로 즐겁게 여행을 다녔지만, 종종 밀려오는 자질구레한 걱정들과 고독감을 밀어내지도 않았다. '그저 그날그날의 소운 두 가지가 있을 뿐. 오늘 밤 좋은 숙소를 빌릴 수 있었으면, 그리고 짚신이 발에 맞았으면 하는 것.' 이라고 말하며 소박한 여행을 하는 그를 보며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일 년에 한 번뿐이라는 생각에 고생해서 일했음에도 호화 여름휴가를 꿈꾸는 요즘 시대에, 이런 두 가지만 바라며 여행하는 바쇼가 훨씬 더 편안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랬으니 한없이 들떴던 마음은 바쇼 따라 나선 기행으로 인해 많은 위로와 대리만족을 경험하게 되었다. 차분한 여행도 독자에게 충분한 즐거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하이쿠와 어우러진 기행문은 문학적인 매력도 잃지 않았다. 너무나 생생하고 구구절절한 기행문이었기에 바쇼가 머무르는 곳마다 기록을 남겼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여행이 끝난 후 4년이 지난 1691년쯤 집필 한 것으로 추정한다고 한다. 이 원고도 미완성으로 남겨놓고 제자 오토쿠니에게 맡기고 에도로 돌아갔지만, 1694년 바쇼가 죽은 후에도 미완성으로 남아 있던 것을 1709년 오토쿠니가 간행하여 완성하였다고 한다. 그 사실을 알고 나자 더욱더 애절하게 다가오는 바쇼의 하이쿠 기행은 덧없이 왔다 나에게 긴 여운을 남겨 주었다. 신분을 뛰어넘어 하이쿠를 나누는 모습에서 훨씬 더 많은 의의를 둔 하이쿠 기행이었다.

 

  거기다 부록까지 꼼꼼하게 챙겨준 옮긴이에게도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사명이 없이는 옮기기 힘든 책이었다는 생각과 함께 바쇼에 대한 애정이 그대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우연히 책에서 바쇼의 하이쿠 기행을 알고 나서 읽어보려 했지만, 절판이 된 상태였는데 다시 재출간 되어서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이제 3권을 모두 읽음으로써 마치 내가 하이쿠 기행을 마친 기분이다. 그가 남겨준 하이쿠가 내 마음 속에 남아, 에도시대를 살았던 바쇼와 나를 엮어 주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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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199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헌책방에 가면 책을 고르는 손길이 이상해진다. 평소에 내가 좋아하지 않는 작가의 책이 있어도 사오는 경우가 있다. <정체성>이 그랬다. 밀란 쿤데라 책 한 권을 읽고, 질려버려 애독하는 작가가 아님에도 이 책을 발견하자마다 구입해 버렸다. 다행히 책도 얇고 깨끗해서 데려왔지만, 수많은 책들이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생각하면 마음이 약해져 내가 발견한 책들에 한없는 사랑을 주고 싶어진다.
 

  이런 경험 때문에 평소에 즐겨 읽지 않은 밀란 쿤데라의 작품을 비교적 편하게 읽을 수 있었다. 책이 좀 더 두꺼웠더라면 분명 숨이 막혔을 테지만, 밀란 쿤데라 울렁증이 있는 나 같은 독자에게 적당한 두께였다. 게다가 후반부로 넘어갈수록 약간의 긴장감이 배가 되어 읽는 속도를 높여 주었다. 이 책의 줄거리를 간략하게 말하면 두 남녀의 사랑의 밀고 당김(?)에 정체성을 가미했다고나 할까. 그러나 그 정체성의 여부에 대해서는 결코 간략하게 말할 수 없는 소설이기도 하다. 정체성을 쉽게 잃어버리고 쉽게 되찾는 변덕이 사랑할 때의 모습만 할까. 이 책에는 두 사람의 내면에 자리한 사랑이라는 이름을 쓴 정체성을 발견하는 것부터, 뚜렷한 모습으로 정착시켜 가는 과정이 담겨 있다. 그러다 무언가가 일치되지 못하고 감정이 어긋나기 시작할 때, 개인의 정체성은 독자적인 모습으로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샹탈의 애인 장 마르크는 <남자들이 나를 돌아보지 않아요.> 라고 말하는 샹탈을 통해 그녀의 존재감과 더불어 자신이 샹탈에게 어떤 존재인지 의문을 가진다. 그 문장을 태연히 말하는 샹탈을 장 마르크는 어이없어 했다. 그렇지만 장 마르크도 그녀가 사람들과 섞일 때 혼동한다는 사실을 인지하며 자신은 무엇이며, 또 그녀는 자신에게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그러다 세월의 흐름에 안타까워하는 샹탈을 위해 그녀의 모습은 그 문장 안에 국한되지 않는다며 그녀를 위로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샹탈은 장 마르크보다 나이가 많지만 경제, 미모, 직업에 관해서 하등 부족할 것이 없기에 그녀의 고독은 오히려 매력적으로 보일 정도다. 아이를 잃고, 이혼을 하고 장 마르크와 동거를 하면서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는 샹탈. 그녀에게 부족함이란 자신이 인정하지 않는 매력과 진부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에 대한 기억과 현재의 만족감에 대등하는 진부함이 어우러지는 평범한 일상 가운데 한 가지 사건이 일어난다. 우편함에 그녀 앞으로 익명의 편지가 도착한 것이다. 그녀를 지켜보고 있다는 내용이 쓰인 연애편지는 갈수록 과감해지며 샹탈에 대한 찬사가 그득하다. 샹탈은 그 편지를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해 하지만, 그 편지를 장 마르크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숨기려는 것보다 자신에게 온 편지인 만큼 자신과 익명의 사람과의 문제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그들의 얘기는 특별한 사건 없이, 지지부진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었다. 내가 보내는 평범한 일상에 사색이 깃든 말들을 섞음으로서 느껴지는 무겁고 깊이 생각해 보고 싶지 않는 내용들이었다. 책을 읽어도 나를 울리는 깨달음이 없었고, 그들로 통해 내가 메시지를 발견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와 그의 삶에는 깊고도 이질적인 언어와 생각이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흐름에 긴장감을 갖게 한 것이 샹탈에게 도착한 편지였다. 샹탈은 자신에게 오는 편지로 인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지만, 곧 그 편지를 쓴 자가 누구인지 깨닫게 됨으로써 엉뚱한 오해를 하게 된다. 장 마르크 또한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익명의 편지를 썼건만, 급기야 자신의 편지에 자신이 질투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결국 샹탈은 곧 돌아온다는 말과 함께 런던으로 떠나고, 그녀를 따라 장 마르크도 같은 기차를 탔지만, 일은 꼬이고 꼬여 샹탈이 위험에 빠지고 만다. 그런 순간에도 진부한 대화와 생각은 그칠 줄 몰랐고, 다행히 위기의 절정에 그들은 서로의 품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바탕 꿈같기도 하고 어디서부터 잇고, 잘라야 할지 알 수 없는 가운데 서로의 사랑을 확인했다는 사실만 인지할 수 있었다.

 

  줄거리를 이렇게 건져 냈지만, 관계의 사이사이에 무수히 박힌 그들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기엔 역부족이다. 그들의 뇌리 속을 맴도는 생각들을 진부할 정도로 늘어놓고 마지막에 가서는 색다를 바 없는 결론을 드러냈다. 물론 그들이 다시 재회할 수 있기를, 두 개의 존재감이 하나로 결합할 수 있기를 바랐던 것도 사실이다. 그걸 바랐으면서도 그들의 결합으로 인해 되레 나의 정체성을 묻는 내 모습이 우스워 보였다. 그들은 사랑을 말하기위해 먼 길을 돌아왔겠지만, 내게는 안락함을 느낄 상대의 품도 다시 찾은 안정감도 없었다. 그들의 얘기를 통해 나야말로 무언가를 잃어버린 느낌에 사로잡혀 미처 스스로를 방어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샹탈이 느꼈던 이기적이고 히스테릭 했던 감정의 일부분에 동조하지 않을 수 없다. 나 또한 진부함을 내제한 채 삶을 살아가며 사랑을 하지 않을 뿐, 나 자신을 찾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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