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199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헌책방에 가면 책을 고르는 손길이 이상해진다. 평소에 내가 좋아하지 않는 작가의 책이 있어도 사오는 경우가 있다. <정체성>이 그랬다. 밀란 쿤데라 책 한 권을 읽고, 질려버려 애독하는 작가가 아님에도 이 책을 발견하자마다 구입해 버렸다. 다행히 책도 얇고 깨끗해서 데려왔지만, 수많은 책들이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생각하면 마음이 약해져 내가 발견한 책들에 한없는 사랑을 주고 싶어진다.
 

  이런 경험 때문에 평소에 즐겨 읽지 않은 밀란 쿤데라의 작품을 비교적 편하게 읽을 수 있었다. 책이 좀 더 두꺼웠더라면 분명 숨이 막혔을 테지만, 밀란 쿤데라 울렁증이 있는 나 같은 독자에게 적당한 두께였다. 게다가 후반부로 넘어갈수록 약간의 긴장감이 배가 되어 읽는 속도를 높여 주었다. 이 책의 줄거리를 간략하게 말하면 두 남녀의 사랑의 밀고 당김(?)에 정체성을 가미했다고나 할까. 그러나 그 정체성의 여부에 대해서는 결코 간략하게 말할 수 없는 소설이기도 하다. 정체성을 쉽게 잃어버리고 쉽게 되찾는 변덕이 사랑할 때의 모습만 할까. 이 책에는 두 사람의 내면에 자리한 사랑이라는 이름을 쓴 정체성을 발견하는 것부터, 뚜렷한 모습으로 정착시켜 가는 과정이 담겨 있다. 그러다 무언가가 일치되지 못하고 감정이 어긋나기 시작할 때, 개인의 정체성은 독자적인 모습으로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샹탈의 애인 장 마르크는 <남자들이 나를 돌아보지 않아요.> 라고 말하는 샹탈을 통해 그녀의 존재감과 더불어 자신이 샹탈에게 어떤 존재인지 의문을 가진다. 그 문장을 태연히 말하는 샹탈을 장 마르크는 어이없어 했다. 그렇지만 장 마르크도 그녀가 사람들과 섞일 때 혼동한다는 사실을 인지하며 자신은 무엇이며, 또 그녀는 자신에게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그러다 세월의 흐름에 안타까워하는 샹탈을 위해 그녀의 모습은 그 문장 안에 국한되지 않는다며 그녀를 위로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샹탈은 장 마르크보다 나이가 많지만 경제, 미모, 직업에 관해서 하등 부족할 것이 없기에 그녀의 고독은 오히려 매력적으로 보일 정도다. 아이를 잃고, 이혼을 하고 장 마르크와 동거를 하면서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는 샹탈. 그녀에게 부족함이란 자신이 인정하지 않는 매력과 진부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에 대한 기억과 현재의 만족감에 대등하는 진부함이 어우러지는 평범한 일상 가운데 한 가지 사건이 일어난다. 우편함에 그녀 앞으로 익명의 편지가 도착한 것이다. 그녀를 지켜보고 있다는 내용이 쓰인 연애편지는 갈수록 과감해지며 샹탈에 대한 찬사가 그득하다. 샹탈은 그 편지를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해 하지만, 그 편지를 장 마르크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숨기려는 것보다 자신에게 온 편지인 만큼 자신과 익명의 사람과의 문제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그들의 얘기는 특별한 사건 없이, 지지부진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었다. 내가 보내는 평범한 일상에 사색이 깃든 말들을 섞음으로서 느껴지는 무겁고 깊이 생각해 보고 싶지 않는 내용들이었다. 책을 읽어도 나를 울리는 깨달음이 없었고, 그들로 통해 내가 메시지를 발견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와 그의 삶에는 깊고도 이질적인 언어와 생각이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흐름에 긴장감을 갖게 한 것이 샹탈에게 도착한 편지였다. 샹탈은 자신에게 오는 편지로 인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지만, 곧 그 편지를 쓴 자가 누구인지 깨닫게 됨으로써 엉뚱한 오해를 하게 된다. 장 마르크 또한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익명의 편지를 썼건만, 급기야 자신의 편지에 자신이 질투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결국 샹탈은 곧 돌아온다는 말과 함께 런던으로 떠나고, 그녀를 따라 장 마르크도 같은 기차를 탔지만, 일은 꼬이고 꼬여 샹탈이 위험에 빠지고 만다. 그런 순간에도 진부한 대화와 생각은 그칠 줄 몰랐고, 다행히 위기의 절정에 그들은 서로의 품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바탕 꿈같기도 하고 어디서부터 잇고, 잘라야 할지 알 수 없는 가운데 서로의 사랑을 확인했다는 사실만 인지할 수 있었다.

 

  줄거리를 이렇게 건져 냈지만, 관계의 사이사이에 무수히 박힌 그들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기엔 역부족이다. 그들의 뇌리 속을 맴도는 생각들을 진부할 정도로 늘어놓고 마지막에 가서는 색다를 바 없는 결론을 드러냈다. 물론 그들이 다시 재회할 수 있기를, 두 개의 존재감이 하나로 결합할 수 있기를 바랐던 것도 사실이다. 그걸 바랐으면서도 그들의 결합으로 인해 되레 나의 정체성을 묻는 내 모습이 우스워 보였다. 그들은 사랑을 말하기위해 먼 길을 돌아왔겠지만, 내게는 안락함을 느낄 상대의 품도 다시 찾은 안정감도 없었다. 그들의 얘기를 통해 나야말로 무언가를 잃어버린 느낌에 사로잡혀 미처 스스로를 방어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샹탈이 느꼈던 이기적이고 히스테릭 했던 감정의 일부분에 동조하지 않을 수 없다. 나 또한 진부함을 내제한 채 삶을 살아가며 사랑을 하지 않을 뿐, 나 자신을 찾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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