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에, 마음을 놓다 - 다정하게 안아주는 심리치유에세이
이주은 지음 / 앨리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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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하루 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은, 식구들이 모두 잠든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다. 그때쯤이면 노곤해지는 몸을 붙잡고 이대로 꿈나라로 직행하기엔 뭔가 아쉽다고 토로하기도 한다. 그럴 때면 으레 한쪽 벽을 꽉 채운, 읽어야 할 책들을 보면서 마치 서점에 온 듯이 뒤적거리며 읽을 책을 찾아낸다. 그렇게 책 사냥에 걸려든 책들은 어떠한 규칙이 있다기보다, 그날의 기분과 취향에 따라서 결정되므로 늘 어떠한 책이 손에 쥐어질지 나조차도 알 수 없다.
 

  어제 밤의 책 사냥에서 내게 선택되어진 책은 <그림에, 마음을 놓다>였다. 작년에 지인으로부터 선물을 받은 책인데, 저자의 두 번째 책이 나올 때까지도 읽지 못하고 있었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그제야 읽고 싶어져 꺼내들었는데, 의외로 흡인력 있게 다가와 아쉬운 밤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졸려서 책을 읽을 수 없을 때까지 책을 읽고, 사무실에서 틈틈이 남은 부분을 읽어 나갔다. 두 편의 그림과 함께 실린 글의 단락이 읽기 쉽게 나뉘어 있어, 아무 때나 펼쳐도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었다. 너무 빨리 읽어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림과 일상이 뒤섞인 세계는 그렇게 내게 성큼 다가왔다.

 

  내가 타인과 대화 할 때 주로 책 이야기가 대부분인 것처럼(책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무척 지루해 하지만), 저자는 모든 이야기의 주제를 그림과 결부시킨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을 보는 것만' 좋아한다고 종종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는 이유는, 저자처럼 통찰력을 발휘해서 그림을 해석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몇 줄 안 되는 느낌을 남길라치면, 그것이 얼마나 힘에 부치는 일인지 뼈저리게 느꼈기에 이렇듯 그림에 대한 느낌과 일상을 자유자재로 버무려 놓은 사람들을 보면 신기하다. 이렇게 되기까지 오랜 기간 공부하고 땀 흘려 온 과정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라봐 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래서 평소에 내게 부족했던 것들을 채워나가 듯, 저자의 글과 일상이 연결 된 그림들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은 당연했다.

 

  분명 똑같은 그림을 보고 있음에도 보는 사람의 시선에 따라 달리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나 보다. 그림을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서 전혀 다른 해석을 드러내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는 터라, 그림을 먼저 보고 글을 읽었음에도 저자의 시선에 많은 부분을 동조할 수밖에 없었다. 뭐든지 대충대충 보는 성격인지라, 그림의 두루뭉술한 느낌만 기억한 채 저자의 해석을 대입해보면 내가 놓쳐 버린 것이 수두룩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거기다 내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사람들과 세상의 많은 것들을 연결시키고 있어, 그림이 우리의 일상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저자 주변의 소소한 일상, 타인을 통해 전해져 오는 이야기들,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불러내는 그림과의 연결은 인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러웠다.

 

  저자는 그림을 놓고 대상을 풀어나가거나, 처해진 상황에 따라 그림을 합쳐서 펼쳐놓기도 했다. 그런 서술방식은 평소에 그림이 어렵다고 느껴지는 사람들에게 편안하게 다가가기에 적합했다. '사랑, 타인, 나' 라는 주제로 분류해 그림을 흡수하고 있었으므로 특별한 거부감이 없지 않는 한, 누구든지 편하게 읽을 수 있다. 그림에 중점을 두고 있긴 하지만, 그림과 연결되는 삶의 잔상은 내 마음을 훑고 지나가는 말들이 많았다. 어쩜 나의 마음을 저렇게 똑 같게 표현할까 의문이 들 정도로, 내면의 드러냄은 그림 이상의 위로를 던져 주고 있었다. 그건 아마도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주어진 '삶'이라는 길을 제각각 만들어가고 있기 때문에,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아서인지도 모르겠다. 

 

  일상으로 끌어내는 힘, 그림에 흥미를 끌게 만드는 유도, 누구나 편하게 다가갈 수 있는 글을 써내고 있는 것만도 대단하다는 느낌을 받으면서도, 좀 더 깊이 있는 사유를 드러냈으면 하는 바람이 일었다. '심리 치유 에세이' 라는 것을 알면서도 많은 부분이 그림에 할애되어 있어 약간의 아쉬움을 토로해 보는 것이리라. 그림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여러 권의 관련 서적을 읽어서인지 눈만 높아져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에 대한 해석에 감탄하면서도 더 깊이 있는 글을 바라는 것은 모순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더욱 더 저자의 두 번째 책이 궁금해진다. 내가 아쉬워하는 깊이의 사유가 두 번째 책에서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 또한 저자의 시선을 따라가며 독자의 시선이 얼마나 더 발전할 수 있는지를 가늠하고 싶다. 저자가 봤을 때 읽기만 하면서 요구하는 것이 많다고 투덜거릴 수도 있겠으나, 언제나 게으른 독자는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더 많이 채워주기를 바라는 욕심쟁이라는 것을 얼른 간파했으면 좋겠다. 그런 저자를 지켜보며 대리만족을 하는 것이 독자라고 해도, 넓은 아량을 베풀어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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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어린이들 - 이기웅 사진집
이기웅 / 열화당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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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동안 힘겹게 쥐고 있던 책을 다 읽고 나면, 나에 대한 보답을 해주고 싶어진다. 그 보답이라는 것이 책장에서 읽고 싶은 책을 아무거나 꺼내서 읽는 것인데, 내 눈에 들어온 책은 이기웅의 사진집이었다. 사진 보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없지만, 전문 작가들의 사진을 볼 때면 움츠러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내가 보지 못한 것을 드러내 보였을까봐,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할까봐(수많은 문학 작품을 읽으면서 마찬가지만 익숙하다는 이유만으로 걱정을 무시하고 있다.) 망설여졌다. 막상 사진집의 사진들을 보고 나니, 나의 염려가 헛된 걱정이었다는 것이 드러나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같은 시선으로 보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의 기본은 보이기 마련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사진집이기 때문에 글로 인한 소통은 기대할 수 없었다. 다행히 소설가 조세희님의 머리말이 실려 있어, 이 사진을 찍은 시점의 사회적인 상황과 그들의 내면을 아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사진의 시대적 배경에 그런 모습이 숨어 있다는 것이 개탄스러워, 사진 속의 비춰진 아이들의 천진난만함과 무척 대조되기도 했다. 80년대 초반에 태어난 나에게 그 시대의 배경을 상상하는 것은 힘들겠지만, 짧은 글 속에는 당시의 각박했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그래서 여행을 하면서 찍은 사진으로 인해서 내면의 무언가를 드러내고자 했던 당시의 상황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내게는 벅찬 일이다.

 

  무거운 마음은 잠시 밀쳐둔 채, 사진 속의 아이들이 어떤 모습인지 만나러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글로 인해서 마음이 무겁다고 사진을 보는 마음까지 무거워 지라는 법이 없었으므로, 편하게 사진집을 열었는데 초반부터 궁금증을 불러 일으켰다. 80년대 초반에 태어난 내가 보기에도 나의 어릴 적 모습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정도의 사진들이 실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진이 찍힌 시기와 장소를 책 뒤편에서 찾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당시의 내 또래의 아이들의 모습이었다. 지역은 달랐지만, 나의 성장과 무척 비슷한 배경하며 모습에 마냥 신기할 뿐이었다. 사진을 넘기다 보니 내가 성장했던 지역의 근처에서 찍은 사진도 있어 어린 시절의 추억에 파묻히기도 했다.

 

  그 어린 시절 추억이라는 것은 촌스럽고, 지저분하고, 순수하다는 이름으로 가려진 또 다른 모습이었다. 멈춰진 사진을 통해 내면을 속속들이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 하지만, 순간의 표정과 같이 비춰진 배경으로 인해 아이들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었다. 거의 나의 어린 시절을 제멋대로 대입해 짐작하는 것에 불과하더라도, 사진을 통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감이 나쁘지 않았다. 국내에서 찍은 아이들의 사진을 보면서, 현재의 내 또래이거나 비슷한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일 터인데 현재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을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아이일 때의 저 모습을 간직하며 살고 있을까, 아니면 빛바랜 사진처럼 과거의 모습은 묵혀두고 현실에 찌들어 살아가고 있을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넘겨지는 사진은 사진 자체만으로 삶의 연속성을 거쳐 오는 것 같았다.

 

  국내의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느꼈던 동질감이 가장 많았기에, 타국의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느껴지는 낯선 감이 없지 않았다. 같은 동양권 아이들의 사진을 보면서 이질감이 덜했지만, 생김새가 완전히 다른 이국의 아이들은 그들의 과거를 추측하기란 쉽지 않았다. 나와 비슷한 배경을 가진 아이들을 멋대로 상상하는 것은 쉬웠으나, 전혀 다른 문화권의 아이들은 그 모습만으로도 신기할 따름이었다. 아마도 생활반경에 따른 문화와 다른 배경 때문이리라. 그래서 그 아이들의 사진을 볼 때는 사진에 찍힌 그대로의 모습을 보며 그 순간의 존재를 느껴갔다.

 

  그 아이들의 사진을 보면서 과거와 미래를 추측하는 것이 어떻든 간에, 사진 속에 담긴 아이들을 보며 나의 삶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 아이들의 삶을 되돌아보거나 미리 엿볼 수 없으니, 나의 삶을 회상하는 것에 불과했지만 그 회상으로 인해 현재의 나의 존재감을 되찾을 수 있었다. 사진에 대한 글을 남기는 것이 애초부터 나의 능력 밖의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뜻밖의 새로운 면을 찾을 수 있어 새로운 경험이 되었다. 아무래도 꾸밈없는 사진을 찍은 작가의 시각과 사진속의 주인공이 순수함의 상징인 아이들이라는 것 때문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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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 2 - 7月-9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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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람을 끄고 몸을 뒤척여도 도무지 일어날 기력이 생기지 않는다. 왜 이렇게 몸이 무겁기만 한 건지, 어젯밤의 일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 무언가 거창한 꿈을 꾼 것 같은데, 몽롱함에 취해 현실의 나를 분간할 기운조차 얻을 수 없다. 10분쯤 이불 속에서 웅크리다 벌떡 일어나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화장실로 향했고, 반쯤 정신을 잃은 채 양치질을 하다 보니 그제야 어젯밤의 일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5시간이 넘도록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리뷰를 쓰고, 그것만도 피곤해 쓰러질 법 한데 다른 책을 꺼내 새벽 1시를 넘기며 읽었다. 그랬으니 이렇게 나른하고, 몽롱한 기운이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잠들기 전에 읽은 하루키 소설이 피곤함과 마구 뒤섞이면서, 도대체 어떤 내용을 읽은 것인지 한참을 떠올려도 공허만이 뇌리를 채우고 있을 뿐이었다.
 

  분명 꿈에 아오마메와 덴고가 나온 것 같다. 그것이 소설의 내용인지 꿈의 내용인지 확실치 않아도, 그 둘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어떻게 등장해 어떤 이야기를 흘리고 갔는지 기억이 날 리 만무하지만, 내 머릿속에 그 둘의 존재가 들어찬 것은 확실했다. 잠들기 직전에 읽은 책의 내용이 꿈에 그대로 드러나는 나(我)여도, 이처럼 강렬하게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이야기는 실로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아오마메와 덴고의 이야기를 이어가야 할지, 그 둘의 진전된 만남을 어떻게 그려야 할지 망설여진다. 1권에 이어 2권을 읽고, 책 내용이 내 몸 구석구석을 훑고 지나갔음에도 그 둘에 대해 할 이야기는 그리 많지 않다.

 

  어쩌면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 몸을 들인 그들을 따라가느라 힘에 겨웠는지도 모를 일이다. 1권에서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던 1Q84의 세계는 아오마메와 덴고에게 서슴없이 다가왔고, 그 세계를 알고 있는 인물의 등장과 기이한 현상들로 인해 독자인 나도 그 세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오마메와 덴고가 만나는 것에 좀 복잡한 사연이 깔려 있을 거라 짐작할 뿐이었는데, 의문의 1Q84 세계가 존재하고 그 안에서 둘의 공존은 이어질 수 없다고 하니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하다. 두 개의 달이 떠 1Q84의 세계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다 해도, 1984년과 넘나드는 상황에서 어느 선까지 현실로 인정하고 어디를 1Q84로 생각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후카에리가 쓴 <공기 번데기>는 정말로 존재하는 것이었고, 그 사실을 후카에리와 덴고가 세상에 드러냈기 때문에 리틀 피플은 점점 그들을 좁혀오고 있었다.

 

  많은 궁금증이 '선구'의 리더를 통해서 어느 정도 해소 되지만, 아오마메가 리더를 만나 그 이야기를 듣기 전에도 리틀 피플의 조임을 어느 정도 눈치 챌 수 있었다. 아오마메와 덴고의 주변 인물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갑자기 사라져 버린 것에 대해 어느 정도의 복선을 감지한 것이다. 우연을 가장하고 있지만 누군가 보낸 경고의 메시지라는 것을 알아차리기에는 충분했다. 하지만 과연 누가 그런 짓을 한 것인지, 또한 무슨 목적으로 그런 짓을 저지른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알려주는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고, 덴고 곁의 후카에리는 애매모호한 말만 들려 줄 뿐이다. 아오마메도 마찬가지였다. '선구'의 리더를 살해하기 위해 주변 정리를 하면서, 더 이상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말하면서도 잠시 우정을 나누었던 아유미가 죽자 번민을 느낀다. 겨우겨우 덴고의 존재만 남겨놓은 채 그 일(리더를 죽이는 것)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칠 각오를 하며, 자신을 잊기 바빴다.

 

  분명 아오마메와 덴고가 만날 거라는 확신은 들었지만, 20년 동안 서로를 보지 못했던 그들이 서로를 그렇게 갈구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아오마메는 덴고를 마음 깊숙이 사랑하고 있었지만 덴고는 띄엄띄엄 기억했을 뿐이었고, 2권에서 갑자기 아오마메에게 마음을 많이 내어주는 것에 약간의 의문을 품었다. 하지만 내가 갖았던 의문과 많은 궁금증은 선구의 '리더'를 통해 설명 되었고, 왜 그들이 만나야 하고 이어져야 하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아오마메는 리더를 죽이러 간 자리에서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된다. 리더는 이미 자신을 죽이러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아오마메에게 조건을 내걸어 자신의 목숨을 빼앗아 달라고 부탁까지 한다. 자신은 리틀 피플의 목소리를 듣는 자이며,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아오메마와 덴고는 이미 특별한 존재가 되었으며 1Q84의 시간성 속에 들어왔다고 말한다. 1984년에 살았다면 절대 만나지 못했을 두 사람이 1Q84의 세계에 들어 왔기 때문에 만나야 하지만, 자신이 살아있다면 덴고는 목숨을 잃는다고 말한다. 후카에리와 덴고가 <공기 번데기>에 리틀 피플의 이야기를 썼고, 그들은 리더가 여전히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리더의 몸은 이미 죽음을 향하고 있었지만, 아오마메가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덴고를 살릴 수 있다면(더구나 리더도 죽음을 원하고 있었으니), 거래는 이미 성사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 놀라운 이야기를 모두 들려준 리더에게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죽음을 연기(延期)하고 싶은 연민이 아니라, 그의 운명이 좌지우지 되는 삶이라는 것이 기이하게 느껴졌다. 그것은 아오마메와 덴고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다 1Q84년의 시간성 안에 들어와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고 갈구하게 되었지만, 그 안에서 결코 행복할 수 없다니. 그 사실을 부정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공기 번데기의 모습이 그들에게 보이기 시작하고, 리틀 피플의 존재가 점점 가까이 다가옴을 느낄 때마다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그들과 마찬가지로 독자도). 그들이 이야기의 중심에 떠 오른 이상 어떤 전개가 이어질지 관심이 가면서도, 여전히 리틀 피플의 존재와 풀리지 않는 의미는 수두룩했다. 그들이 직접적으로 아오마메와 덴고에게 해를 가할 수 없다 해도, 이미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그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1Q84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지 여전히 궁금증은 많이 남아있다.

 

  후카에리를 통해 아오마메가 덴고를 찾아 낼 것이라고 했고, 또 아오마메가 숨어 있는 빌라의 놀이터에서 두 개의 달을 보고 있는 덴고를 봤기 때문에 둘의 만남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두 사람의 만남이 순조롭게 이뤄질 것 같지 않고, 그들을 둘러싼 너무나 광활한 세계에 어떻게 손을 뻗어야 할지 혼란스럽다. 왜 그렇게밖에 만날 수 없는지 안타까운 마음보다, 그 모든 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이 답답할 뿐이다. 둘의 존재가 조금씩 가까워진다 해도,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것 투성이고, 평이한 결말로 이끌어 가지 않을 거라는 느낌에 한숨만 나올 뿐이다. 소설 속에서가 아니라 현실 어딘가에 존재할 것 같은 그들과 또 다른 세계는 그렇게 흘러가고 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지켜보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에 자괴감만 들 뿐이다. 하지만 아오마메와 덴고는 서로를 강하게 끌어당기고 있고, 만나기를 갈망하고 있으니 그 이외의 복잡한 것은 잠시 접어두고 둘의 행보에 주목하려 한다. 3권이 내년에 나온다는 말에 기다리기 싫어 불만을 토로했건만. 그 시간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내 안에서 아오마메와 덴고, 1Q84의 세계가 아주 오래 머무를 것 같은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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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민음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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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번쯤 들어본 적이 있는 작가의 작품을 읽어보고 싶다는 갈망이 일어도, 기회가 오지 않으면 좀처럼 읽기가 쉽지 않은 어려움을 안고 있다. 그런 작가가 한두 명이겠냐 만은, 그 안에 J.M.쿳시도 그 안에 포함된 작가였다. 그의 작품을 마주하고 보니, 독자들 사이에서 회자되어 익숙한 작가가 아니라, 어디선가 낯이 익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의 프로필을 보면서 화려한 수상경력에도 여전히 낯설었던 반면, <포>라는 작품을 썼다는 사실에 그제야 잊혔던 기억이 떠올랐다. 2003년에 <TV, 책을 말하다>란 프로그램에서 로빈슨 크루소에 관한 작품을 소개해 주었는데, 그 가운데 <포>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낯이 익었던 것이고, 저자의 이름이 가물가물 해질 때쯤 끊어질 뻔 한 인연의 실을 잇게 되어 신기할 따름이었다.
 

  J.M.쿳시의 작품을 만난 적이 없기 때문에, 첫 작품을 마주하고 나서 약간의 긴장이 일었다. 화려한 경력을 지닌 작품도 아니고, 실험적인 작품이라고 하니 새롭게 만난(작품이 아닌, 개인적인 정보로) 저자와의 인연을 놓쳐 버릴까봐 걱정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책 소개를 통해서 세 개의 단락으로 각각 다른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과연 내가 잘 소화해 낼 수 있을지, J.M.쿳시라는 작가와의 만남을 잘 이뤄낼 수 있을지 염려가 되었다. 거기다 독특한 구성만큼이나 책의 판형이 커(A5), 다른 책들과 어울리지 않는 크기에 잠시 어리둥절하면서도, 책을 읽다 보니 크기에 대해 아무런 생각을 갖지 않게 되었다. 세 단락으로 이루어진 이야기를 싣자면 세로로 책이 긴 것이 적절하다는 느낌을 받아 크기의 독특함을 잊어 버렸다.

 

  책의 독특한 구성 때문에 처음에 이 책을 도대체 어떤 식으로 읽어야 하는지 무척 고민이 되었다. 세 개의 이야기가 페이지마다 끊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대부분 뒤 페이지와 연결이 되었기 때문에 흐름을 적당히 나누기가 무척 곤란했다. 각자 나름대로 읽는 방법을 고수해 나갔겠지만, 철저하게 순차적으로 읽는 성향을 지니고 있는 터라 에세이를 먼저 읽고, 두 개의 이야기를 역시 차례차례 읽어 나갔다. 그런 방식이 처음에는 적응이 되지 않아, 무슨 이야기를 읽고 있는지 파악할 수 없어 지극히 혼란스러웠다. 비교적 딱딱한 에세이와, 일흔이 넘은 작가가 아파트의 세탁실에서 아름다운 여인 안야를 만난 이야기, 그리고 안야의 이야기까지 곁들어 있어서 이야기가 섞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보통 이런 구성을 지닌 책을 만나면 읽기가 번거로워 짜증이 나기 십상인데, 오히려 J.M.쿳시의 책은 읽어나갈수록 안정감이 생기고, 특유의 리듬감을 만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정치적인 이슈와 철학적 담론들에 관한 에세이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해, 두 단락의 이야기에 치중했던 게 사실이다. 내가 잘 알지 못한 분야의 이야기에 냉소적인 반응이 드러나는 것은 당연했고, 그나마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에 마음이 쏠렸다. 일흔이 넘은 작가 세뇨르 C가 안야와 만나면서 점차적으로 발전해 가는 이야기, 안야 또한 세뇨르 C를 만남으로써 변화되어가는 모습이 딱딱한 에세이보다 훨씬 더 흥미로웠다. 내가 수용할 수 없는 딱딱한 에세이를 읽으면서, 수없이 얽히고설켜 읽기에 혼란을 주고 가는 구성에 내내 잡혀 있다 보니 세 가지의 이야기가 온전히 내 안에 들어왔다고 자신 있게 말하진 못하겠다. 그러나 인내를 가지고 끝까지 읽어나가다 보면, 작가의 역량이 드러나기 마련이고, 그것을 발견할 때의 그 짜릿한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신선했다.

 

  옮긴이는 J.M.쿳시의 소설이 바흐의 음악처럼 대위법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고 했다. 대위법은 둘 이상의 독립된 선율이나 성부를 동시에 결합시켜 대화 상태를 구축하는 걸 의미한다고 했다. 대위법이 어떠한 것인지 자세히 모르는 나에게 옮긴이의 설명은 정확한 정보가 되어 주기도 했지만, 이미 소설을 읽으면서 그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책을 읽다 말고 메모지를 꺼내 '서로 다른 변주처럼 흘러가는 글. 만나기도 하고, 갈라지기도 하는 음악.'이라고 휘갈겨 써 놓았다. 그 메모를 보고 옮긴이의 설명을 들으니, 정확한 용어를 모르더라도 그 느낌을 독자에게 전달해주는 독자의 역량에 놀란 것이다. 옮긴이는 음악과는 달리 세 개의 글을 동시에 읽을 수 없으므로 읽는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고 했는데, 세 개의 글이 마구 뒤섞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읽어보려 애를 썼다. 아마도 내가 휘갈겨 썼던 메모처럼 세 개의 글이 어떤 음악을 만들어 주기를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세 개의 이야기가 온전히 내 안에 안착하지 못했다고 해도, 저자가 흩뿌려놓은 메시지를 종종 발견할 수 있어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내가 즐겁게 읽지 못한 딱딱한 에세이에서도 나름대로 사유를 들을 수 있었고(그것의 사실 여부를 떠나), 세뇨르 C가 안야를 타이피스트로 고용하면서 그녀에 대한 건전한(?) 감정의 변화, 안야 또한 세뇨르 C를 통해 자신을 새롭게 바라보는 시각을 발견하는 모습을 보면서 흐름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흐름을 타고 가는 것이 꼭 즐거웠던 것만은 아니었다. 앞에서 지적한대로 이 책의 구성은 읽기 사나웠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전개되는 이야기도 그다지 유쾌하다고 할 수 없다. 세뇨르 C는 늙고 병들어 가고 있는 작가에 불과했고, 안야는 자신을 성적인 대상으로 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의 시선을 거부하지 않았으며, 안야의 애인은 세뇨르 C의 내면을 제멋대로 추악하게 비난할 뿐이었다.

 

  그 사실을 전혀 알 길이 없는 세뇨르 C(안야의 기록으로 인해 독자는 세뇨르 C가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 앎에도)의 안야에 대한 생각은 천진난만하게 펼쳐질 뿐이다. 안야의 애인이 세뇨르 C의 재산을 노리는 장면이나, 그를 추악한 노인네로 몰아붙이는 상황에서도 세뇨르 C의 에세이와 안야에 대한 글은 담담하게 흘러갈 뿐이다. 정치적 이슈들로 가득한 글 가운데 격정인 감정이 치우친 글이 드러나도, 그것은 안야와 애인사이에 드러나는 일과는 무관했으며, 세뇨르 C는 여전히 세월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늙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세뇨르 C의 에세이는 안야가 타이핑 한 내용들이었고, 안야의 생각에는 종종 그 에세이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논쟁이 담겨 있기도 했다. 그랬기에 세 개의 글은 다른 색깔을 지니면서도 하나의 틀에서 나왔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고, 복잡하지만 따로 따로 읽어갈 수 없었다. 내 머릿속을 제 멋대로 휘저어 놓더라도, 이 독특한 구성의 이야기의 매력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이유였다.

 

  담담하게 이어가는 에세이 아래는(글의 구성 상) 그것과 무관해 보이는 또 다른 사랑이야기가 펼쳐지고 있었고, 그것은 새로운 양상으로 흘러갔다. 세 권의 책을 읽는 것 같은 착각이 일면서도, 읽기가 좀 복잡했을 뿐,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단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읽기의 불편함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될지, 어느 정도 감이 잡히면서도 나의 생각대로 흘러가 주는 것도 마음에 들었고, 뒤엉킴 속에서 다시 차분하게 만들어 준 이야기의 힘에 놀라울 따름이었다. 나름대로 저자와의 첫 만남을 어느 정도 잘 치러낸 것 같아, 얼른 다른 작품을 찾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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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도끼를 든 아이 독깨비 (책콩 어린이) 4
데이비드 알몬드 지음, 데이브 맥킨 그림, 김민석 옮김 / 책과콩나무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청소년 책을 좋아해서 무조건 읽는 편임에도, 책 제목과 겉표지 때문에 잠시 망설여졌다. 책 제목도 무시무시한데, 겉표지의 소년이 무언가에 포효하는 모습이 나를 더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이 책을 읽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하다가 전에 같은 출판사의 다른 시리즈가 괜찮았던 기억이 나 읽어 보기로 했다. 그렇게 약간의 고민을 하고 집어든 책에서는 나의 망설임이 그럴 만도 했다는 수긍이 들었다. 책 속의 일러스트레이션은 겉표지보다 무시무시(?) 했고, 내용 또한 쉽게 읽고 지나칠 수 없는 여운을 남겼기 때문이다.
 

  이 책에 나오는 '손도끼를 든 아이'는 그 이야기를 쓴 소년 블루이기도 했고, 누구나의 마음속에 살고 있는 또 다른 자신이기도 했다. 그 아이가 내 안에 살고 있는 아이가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나 또한 블루처럼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손도끼를 든 아이'가 스멀스멀 올라온다는 사실을 부정할 길이 없었다. 내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면서도 그것을 분출할 줄 몰라 내면에 꽁꽁 가둬두다 보면, 어느새 '손도끼를 든 아이'는 나도 인식하지 못하게 크게 자라기 마련이다. '손도끼를 든 아이'가 책 속에서처럼 더 이상 야만인으로 살지 않기를 원한다면, 그 아이가 삐뚤어지지 않게 성장하도록 잘 다독여야 하며, 그것이 자신의 모습이라고 인정하고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블루는 갑자기 아빠를 잃고, 내면 가득한 슬픔과 분노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랐다. 아빠가 세상에 없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들고 괴로운데, 친구의 괴롭힘까지 당해내야 했으니 블루의 내면에는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존재가 점점 커가는 것 같았다. 블루는 선생님의 조언을 팽개치고 <손도끼를 쓴 아이>를 쓰기 시작한다. 지금보다 어릴 때 쓴 글이라 맞춤법이 틀린 곳이 많았지만, 그 이야기 속에는 한 야만스러운 소년이 등장한다. 그 소년은 숲 속에서 생활하며 무기를 들고 다니는 소년이었다. 소년은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몰랐으며, 자신을 본 사람을 잡아먹기도 했고 무척 난폭했다. 그러나 손도끼를 든 아이의 이야기는 거기서 계속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블루가 처한 상황에 따라 이야기가 전개됐다. 이를테면 자신을 괴롭히는 호퍼를 이야기에 등장시켜 호퍼가 어떤 아이인지, 어떻게 복수를 하는지가 그려졌다.

 

  블루는 손도끼를 든 아이의 이야기를 엄마와 동생에게 들려주기도 했다. 그 이야기를 전개시킬 수 있는 아이는 블루였고, 이야기 속의 소년은 블루 자신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는 사실을 점차 알아갔기 때문에 고통을 자연스레 드러낼 수 있었다. 이야기 속에 자신과 여동생을 등장시켜 소년의 마음을 흥미롭게 하기도 하고, 호퍼를 등장시켜 분노하게 하기도 하지만, 호퍼를 미워한다고 아이를 통해 살인을 할 순 없었다. 누구나 한번쯤 자신을 괴롭히는 아이에게 찾아가 복수하는 것을 상상하기도 하는데, 블루는 손도끼를 든 아이를 통해 호퍼에게 해코지를 한 번 했을 뿐이다. 그것이 이야기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호퍼가 그 뒤로 얌전해지고 블루가 그 일을 호퍼에게 발설함으로써 잠시 이야기속의 세계와 블루의 세계가 혼동되기도 했다.

 

  손도끼를 들고, 포악하고 말이라곤 제대로 할 줄 모르며, 누군가와 관계를 맺을 줄 모르는 난폭한 아이가 점차 블루와 일치되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마 자신이 인정하기 싫은 내면 속의 또 다른 자아가 똬리를 틀고 어딘가에 손도끼를 든 소년처럼 자라나며, 맘껏 횡포를 부리고 있다는 사실을 들켜서가 아니었을까? 생생한 일러스트레이션을 통해 소년이 얼마나 난폭한지, 그리고 소년의 눈에 비친 호퍼와 블루 자신과 여동생, 그 밖의 사물들이 어떻게 비추는지 상상력을 덧대어 주기도 했다. 과연 이 이야기가 어린이들에게 어떠한 느낌을 줄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로, 거친 이야기와 삽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블루는 자신이 만든 이야기를 통해 현실의 고통을 치유하고 있었다. 그 이야기가 끝날 즈음에는 아빠를 잃은 슬픔, 자신의 가족에게 처한 상황을 조금씩 받아들이고, 현재를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키워가고 있었다.

 

  고통을 당해본 자만이 그 고통을 이해할 수 있다고 했던가. 책 제목에 겁먹고, 삽화의 거친 면을 염려했던 것은 블루의 고통을 지켜보는 구경꾼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다지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블루가 만들어낸 이야기와 블루의 현실을 통해서 조금씩 블루를 이해하게 되었고, 블루 안에 자리한 고통을 이렇게라도 표현하지 않으면 많은 상처를 안고 삐뚤게 자랄 거라는 걱정이 들었다. 그래서 이런 드러냄이 오히려 건강해 보였고, 구경꾼에 지나지 않으면서도 블루의 내면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내 자신이 조금은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블루가 성장함에 따라 손도끼를 든 소년의 모습은 바뀌어 갈 것이다. 손도끼를 든 소년이 블루라고 생각하는 것은 독자의 생각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그 소년은 블루의 곁에 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소년과 블루는 함께 성장해 갈 것이고, 그 둘의 만남이 잦고, 서로를 보는 시선에 벽이 사라질 때쯤 완벽한 재회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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