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도끼를 든 아이 독깨비 (책콩 어린이) 4
데이비드 알몬드 지음, 데이브 맥킨 그림, 김민석 옮김 / 책과콩나무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청소년 책을 좋아해서 무조건 읽는 편임에도, 책 제목과 겉표지 때문에 잠시 망설여졌다. 책 제목도 무시무시한데, 겉표지의 소년이 무언가에 포효하는 모습이 나를 더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이 책을 읽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하다가 전에 같은 출판사의 다른 시리즈가 괜찮았던 기억이 나 읽어 보기로 했다. 그렇게 약간의 고민을 하고 집어든 책에서는 나의 망설임이 그럴 만도 했다는 수긍이 들었다. 책 속의 일러스트레이션은 겉표지보다 무시무시(?) 했고, 내용 또한 쉽게 읽고 지나칠 수 없는 여운을 남겼기 때문이다.
 

  이 책에 나오는 '손도끼를 든 아이'는 그 이야기를 쓴 소년 블루이기도 했고, 누구나의 마음속에 살고 있는 또 다른 자신이기도 했다. 그 아이가 내 안에 살고 있는 아이가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나 또한 블루처럼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손도끼를 든 아이'가 스멀스멀 올라온다는 사실을 부정할 길이 없었다. 내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면서도 그것을 분출할 줄 몰라 내면에 꽁꽁 가둬두다 보면, 어느새 '손도끼를 든 아이'는 나도 인식하지 못하게 크게 자라기 마련이다. '손도끼를 든 아이'가 책 속에서처럼 더 이상 야만인으로 살지 않기를 원한다면, 그 아이가 삐뚤어지지 않게 성장하도록 잘 다독여야 하며, 그것이 자신의 모습이라고 인정하고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블루는 갑자기 아빠를 잃고, 내면 가득한 슬픔과 분노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랐다. 아빠가 세상에 없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들고 괴로운데, 친구의 괴롭힘까지 당해내야 했으니 블루의 내면에는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존재가 점점 커가는 것 같았다. 블루는 선생님의 조언을 팽개치고 <손도끼를 쓴 아이>를 쓰기 시작한다. 지금보다 어릴 때 쓴 글이라 맞춤법이 틀린 곳이 많았지만, 그 이야기 속에는 한 야만스러운 소년이 등장한다. 그 소년은 숲 속에서 생활하며 무기를 들고 다니는 소년이었다. 소년은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몰랐으며, 자신을 본 사람을 잡아먹기도 했고 무척 난폭했다. 그러나 손도끼를 든 아이의 이야기는 거기서 계속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블루가 처한 상황에 따라 이야기가 전개됐다. 이를테면 자신을 괴롭히는 호퍼를 이야기에 등장시켜 호퍼가 어떤 아이인지, 어떻게 복수를 하는지가 그려졌다.

 

  블루는 손도끼를 든 아이의 이야기를 엄마와 동생에게 들려주기도 했다. 그 이야기를 전개시킬 수 있는 아이는 블루였고, 이야기 속의 소년은 블루 자신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는 사실을 점차 알아갔기 때문에 고통을 자연스레 드러낼 수 있었다. 이야기 속에 자신과 여동생을 등장시켜 소년의 마음을 흥미롭게 하기도 하고, 호퍼를 등장시켜 분노하게 하기도 하지만, 호퍼를 미워한다고 아이를 통해 살인을 할 순 없었다. 누구나 한번쯤 자신을 괴롭히는 아이에게 찾아가 복수하는 것을 상상하기도 하는데, 블루는 손도끼를 든 아이를 통해 호퍼에게 해코지를 한 번 했을 뿐이다. 그것이 이야기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호퍼가 그 뒤로 얌전해지고 블루가 그 일을 호퍼에게 발설함으로써 잠시 이야기속의 세계와 블루의 세계가 혼동되기도 했다.

 

  손도끼를 들고, 포악하고 말이라곤 제대로 할 줄 모르며, 누군가와 관계를 맺을 줄 모르는 난폭한 아이가 점차 블루와 일치되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마 자신이 인정하기 싫은 내면 속의 또 다른 자아가 똬리를 틀고 어딘가에 손도끼를 든 소년처럼 자라나며, 맘껏 횡포를 부리고 있다는 사실을 들켜서가 아니었을까? 생생한 일러스트레이션을 통해 소년이 얼마나 난폭한지, 그리고 소년의 눈에 비친 호퍼와 블루 자신과 여동생, 그 밖의 사물들이 어떻게 비추는지 상상력을 덧대어 주기도 했다. 과연 이 이야기가 어린이들에게 어떠한 느낌을 줄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로, 거친 이야기와 삽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블루는 자신이 만든 이야기를 통해 현실의 고통을 치유하고 있었다. 그 이야기가 끝날 즈음에는 아빠를 잃은 슬픔, 자신의 가족에게 처한 상황을 조금씩 받아들이고, 현재를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키워가고 있었다.

 

  고통을 당해본 자만이 그 고통을 이해할 수 있다고 했던가. 책 제목에 겁먹고, 삽화의 거친 면을 염려했던 것은 블루의 고통을 지켜보는 구경꾼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다지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블루가 만들어낸 이야기와 블루의 현실을 통해서 조금씩 블루를 이해하게 되었고, 블루 안에 자리한 고통을 이렇게라도 표현하지 않으면 많은 상처를 안고 삐뚤게 자랄 거라는 걱정이 들었다. 그래서 이런 드러냄이 오히려 건강해 보였고, 구경꾼에 지나지 않으면서도 블루의 내면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내 자신이 조금은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블루가 성장함에 따라 손도끼를 든 소년의 모습은 바뀌어 갈 것이다. 손도끼를 든 소년이 블루라고 생각하는 것은 독자의 생각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그 소년은 블루의 곁에 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소년과 블루는 함께 성장해 갈 것이고, 그 둘의 만남이 잦고, 서로를 보는 시선에 벽이 사라질 때쯤 완벽한 재회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