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과 함께 : 저승편 세트 - 전3권
주호민 지음 / 애니북스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내 책장에 들어온 유일한 만화책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최초로 대여점에서 빌려 본 『꽃보다 남자』 마지막 권이 꽂혀있긴 하다. 그러나 온전한 형태로 내 책 꽂이에 자리한 책은 『신과 함께』가 유일하다. 주변에서 재밌다는 평 때문에 들인 책인데, 막상 읽으려고 펼치면서도 반신반의했다. 만화책도 정독하는 스타일이라서 읽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회피하고 있던 내게 과연 『신과 함께』는 어떻게 다가올 것인가. 걱정과는 달리 책을 펼치자마자 한 호흡에 마지막 권까지 다 읽고 말았다. 피곤함이 몰려옴에도 무엇에 홀린 듯 새벽 2시까지 쉼 없이 읽어댔다. 역시 정독하고 말았지만 그 시간이 아깝지 않았고, 무엇보다 눈물을 줄줄 흘러 이 기분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지 난감했다.
 

  처음에는 흡인력 있게 펼쳐지는 저승의 이야기가 흥미진진했다. 마흔도 안 돼 결혼도 못해 보고 술병으로 죽은 소시민 김자홍의 49일 동안 치러지는 저승재판에 마음을 홀딱 뺏겼다. 또한 저승삼차사 해원맥, 강림도령, 이덕춘과 김자홍의 변호를 맡게 될 염라국 국선 변호사 진기한의 활약이 돋보였다. 현대에 맞춰 저승차사들이 정장을 입고 다니는 것하며, 지하철을 타고 저승으로 가는 것, 저승에도 국선 변호사가 있다는 것, 그 이외의 저승의 다양한 모습들이 신선했다. 『신과 함께』는 크게 두 가지 이야기로 진행되고 있었다. 김자홍을 저승재판에서 무죄를 받게 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진기한 변호사와 이승을 떠돌고 있는 원귀를 쫓는 저승삼차사의 이야기였다. 즉 저승과 이승의 이야기를 동시에 보여주고 있었는데, 어떤 부분도 허투로 지나칠 수 없었다.

 

  저승의 이야기 속에는 이승에서 지었던 죄나 선한 일을 가지고 49일 동안 7번의 재판을 거쳐야 했다. 진기한의 목표는 49일 안에 재판을 끝내서 이후의 재판으로 넘어가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재판의 과정을 모두 알아야했고, 소시민 김자홍을 어떤 곳에서 어떻게 통과시키느냐가 관건이었다. 독특하면서도 무언가 믿음직스런 진기한을 따라 재판을 거치다 보면 어느새 나의 삶이 모두 적나라하게 드러난 기분이 들었다. 죽음이 임박해 오면 나타난다고 하는 삶의 파노라마가 7번의 재판 속에서 조목조목 짚어졌다. 재판의 한 과정을 거칠 때마다 김자홍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혹은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가 보였다. 김자홍은 특별히 나쁘게 살지도 않았고, 큰 잘못을 저지른 적도 없는 그야말로 평범하면서도 착한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그가 살아온 인생 구석구석을 보며 재판을 하기 때문에 위기로 몰고 갈 수 있는 요소는 어디든지 있었다. 그럴 때 진가를 발휘하는 것이 진기한이었다. 위기를 발판 삼아 극적인 승리로 끌어 올리는 능력과 인간미를 자극하는 매력이 그에겐 있었다.

 

  한편 이승에서는 녹색 판초를 뒤집어 쓴 원귀가 저승삼차사를 골치 아프게 했다. 우여곡절 끝에 그 원귀를 잡고 보니 역시나 억울한 죽음을 당해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원귀는 다름 아닌 군인이었고, 제대를 보름 앞둔 시점에서 총기 사고로 부상을 당하게 된다. 하지만 승진을 앞둔 소대장이 그 사건을 은폐하려 했고, 살아 있는 그를 발견하고도 땅에 묻어버려 하루 동안 살아 있다 죽음을 맞는다. 억울한 죽음 때문에, 자신만 기다리는 홀어머니 때문에 도저히 이승을 떠날 수 없는 그의 사연을 듣고 저승삼차사는 도움을 주기 시작한다. 어머니가 부대 앞에서 홀대를 받는 것을 본 원귀는 분노 때문에 악귀가 되고 마는데, 악귀가 된 그를 다시 원래대로 되돌려 주고, 어머니의 꿈속에 들어가 작별인사를 하게하고, 그 사건에 연루되어 있는 후임을 설득해 진실을 드러내게 하는 과정 모두에 저승삼차사가 없었더라면 불가능 했을 것이다.

 

  홀로 남겨진 어머니도 어머니지만 원귀가 군인인 점, 억울한 죽음을 당한 것에서 제대하지 못한 내 조카가 생각나 눈물이 흘렀다. 조카 역시 근무했던 곳이 파주였고, 조카의 죽음으로 언니와 형부를 비롯한 가족들이 많은 고통을 받았다. 그 허전함과 억울함을 무엇으로 풀 수 있을까. 벌써 3년 전 일이라고, 많이 편해졌다고 생각하고 있던 찰나에 만난 『신과 함께』속의 군인 이야기에 조카의 모습이 오버랩 되어 깊은 밤에 펑펑 울고 말았다. 가슴 속에 박혀 있을 조카로 인해 언니와 형부가 더 이상 고통 받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어디선가 마주치는 군인들을 보며 분노하거나 눈물 흘리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이 책을 읽은 다음 날 출근길에 본 군인을 보자 이제 내 마음 속에서도 분노가 일지 않음을 느꼈다. 조카가 그렇게 된 후 군복만 봐도 싫었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는 그들이 내 조카 같아서 마음 한 켠이 저릿해짐과 동시에 나 또한 조카를 아픔으로만 기억하지 않기를 바랐다.

 

  한편 저승의 김자홍은 진기한의 뛰어난 능력과 변호로 선하게 살아온 그의 인생이 드러나면서 그는 무사히 7개의 재판을 통과하게 된다. 그리고 환생의 문 앞에 서서 또 한 번의 선택을 한다. 진기한과 헤어질 때 나누었던 감격의 포옹과 뜨거운 눈물이 김자홍의 삶을 대변해 주는 듯 했다. 황량하고 두렵기만 할 것 같았던 죽음의 세계에서 변호사를 만난다는 설정 자체가 처음에는 웃겼으나 점점 드러나는 감동과 따뜻함으로 마음이 훈훈해졌다. 진기한은 첫 변호인인 김자홍의 재판을 무사히 마쳤고, 두 번째 의뢰인을 찾아 나서는 것으로 만화는 끝이 난다. 그는 바로 저승 삼차사로 인해 저승으로 무사히 들어온 원귀였고, 그가 텅 빈 정류장에서 변호사 없이 쓸쓸하게 서 있을 때 진기한이 짠 하고 나타나 주었다. 그의 운명이 자못 신경 쓰였는데, 진기한이 그를 맡는다면 안심할 수 있었다. 오히려 그를 더 좋은 곳으로, 이승에서의 억울함을 모두 풀어줄 곳으로 데려갈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재미있다는 말만 믿고 무심히 들여온 만화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만날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착하게 살아야겠다.'라는 생각이 든 것은 물론이고, 무엇보다 저승이건 이승이건 사람과 사람이 따뜻함을 잃지 않고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이 참 좋았다. 저승이라고 해서 마음이 차갑고 이승이라고 해서 따뜻하다는 틀에 박힌 설정이 아니라, 다양한 인간 군상을 보여 주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예습한 기분이다. 상상력과 재미로 덧대어진 저승 이야기에 인간미가 흘러넘치는 인물들이 등장해 중심을 잘 잡아 준 것 같다. 오로지 삶과 죽음만을 다뤘다면 웃고 떠들다 끝나 버렸을 만화를 이렇게 따뜻하게 그려낼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꼈다. 『신과 함께』저승편에 이어 올해는 이승편, 내년에는 신화편이 연재된다고 하는데, 그 감질맛 나는 기다림을 어째야 할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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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소녀의 짓궂음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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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개인 미니 홈페이지를 핑크색으로 꾸며 놓았더니, 혹시 연애중이냐는 물음이 들려온다. 연애를 하고 싶은 욕망에 그렇게 꾸며 놓았다고 대답하면서도 왜 이렇게 쓸쓸해지는 원. 잠시 신세한탄을 하다가도 새해 나의 목적은 연애가 아니라며(진짜 속내는 나도 모름.) 스스로를 다독여 본다. 그러다 『나쁜 소녀의 짓궂음』의 주인공을 생각하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이 소녀는 무슨 능력으로 사십년 동안 이어지는 한 남자의 순애보는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수 많은 남자들과 전 세계적인 사랑을 나눌 수 있단 말인가. 그녀의 연애 담이 부럽다기보다 새로운 사랑과 환경에 적응에 가는 능력에 경탄할 뿐이다.
 

  자칭 '나쁜 소녀'로 불리는 그녀는 '착한 소년' 리카르도에게 10대 때부터 사랑 고백을 받아왔다. 페루 중산층에서 자라 온 리카르도에게 유일한 꿈은 파리에 정착해 사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쁜 소녀' 릴리가 자신의 사랑을 받아주면 그것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사랑 고백을 받아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돈과 권력만이 삶을 풍요롭게 해준다고 믿는 독특하면서도 현실적인 소녀였다. 그런 그녀가 앞으로 사십년 동안 리카르도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음은 물론, 필요할 때마다 불쑥 불쑥 나타나 거짓말과 배신을 일삼으며 그를 괴롭힌다는 것을 어찌 알았겠는가. 리마, 파리, 런던, 도쿄, 마드리드에서 다양한 신분과 이름으로 리카르도 앞에 짓궂게 나타난 것처럼 그녀의 실체는 무엇인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다.

 

  그녀에게 과연 진짜 이름이라는 것이 있는 것일까? 어릴 적 가짜 칠레 소녀였음이 밝혀지면서 릴리는 리카르도 삶 속에서 사라진 이름인 듯 했다.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파리에서 통역 일을 하고 있던 리카르도 앞에 나타난 릴리는 리카르도의 순애보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서로를 위해 그녀를 게릴라로 떠난 보낸 그 순간부터 모든 것이 어긋났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원하던 소녀는 쿠바에서 프랑스 외교관과 결혼해 아르누 부인이 되어 리카르도 앞에 나타난다. 그것을 시작으로 수없이 이름과 신분을 바꾸며 리카르도의 삶을 종횡 무진한 그녀의 본명이 오틸리타라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된다. 하지만 그 이름은 '나쁜 소녀'를 전혀 다른 인물로 비추게 만들었고, 오히려 쉼 없이 이름을 바꿔 나가는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이름에 담긴 사람의 진실이 이렇게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느끼며 '나쁜 소녀'가 그녀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사십년 동안 이어져 오는 독특한 러브스토리는 때때로 답답하고 분노가 느껴졌다. 자신이 필요할 때만 나타나는 나쁜 소녀에게 늘 휘둘리고 배신당하면서도 그녀에 대한 마음을 잊지 못하는 리카르도. 그런 리카르도에게 유치한 속삭임을 통해 자신에 대한 마음을 확인하고 돈과 권력 있는 사람을 찾아 떠나는 그녀. 그것이 한 번이라면 족하련만 리카르도가 그녀를 잊고 새로운 도시에서 열심히 일을 하려고 할 때마다 그녀는 어김없이 나타났다. 마치 그 동안 자신이 어떤 사람과 살아왔는지를 밝히려는 듯이. 리카르도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와 권력을 추구하는 이 자그마한 페루 여자는 이미 내 인생을 너무 혼란스럽게' 만들었다고 하면서도 계속 이어지는 사랑놀이의 지침 속에서 '이번에는 정말 완전한 이별이고, 내 러브스토리가 끝난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중략) 이 우스꽝스러운 소극을 러브스토리라 부를 수 있을까?' 라며 한탄하면서도 그녀에게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 리카르도의 직업인 통역은 마치 나쁜 소녀와의 사랑을 말해주는 듯 때론 씁쓸함을 유발시키기도 한다. 다른 나라 언어를 익혀 수많은 도시에서 타인의 말을 전해야하는 일. '아무것도 없어.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단지 남을 위해 말했을 뿐이야.' 혹은 '우리 역관은 쓸모없는 존재일 뿐이야, 친구.'라는 말이 들려오는 직업이기도 했다. 오로지 파리에 정착하기 위해 시작한 일, 그리고 나쁜 소녀가 자신을 혼란스럽게 하고 배신할 때마다 매달렸던 일도 결국에는 리카르도의 존재를 밝혀주지는 못했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사랑을 얻지 못해 궁핍해지는 그의 마음처럼, 그 일은 리카르도를 안정시켜주고 자리를 잡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늘 어딘가 붕 떠있는 존재, 떠나야만 하는 직업으로 비춰지기 일쑤였다.

 

  그런 리카르도에 나쁜 소녀의 진실한 사랑이 있었다면, 분명 행복했다고 본다. 나쁜 소녀는 부와 권력을 위해 만난 사람들로부터 큰 해를 입고 올 때마다 리카르도 옆에 정착하려는 시도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갑갑함을 느끼고, 리카르도가 원하는 삶에 자신은 어울리지 않고 그렇게 해줄 수도 없다며 떠나버렸다. 늘 혼자 남겨진 리카르도가 그나마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고 하면 오히려 분노를 일으키며 나타나는 그녀를 어찌 미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결혼도 하지 않고 한 여자에게 휘둘리는 리카르도가 짠하면서도 답답하고, 늘 리카르도를 팽개쳐놓고 뻔뻔하게 돌아와 그를 다그치며 배신을 서슴지 않는 그녀가 얄미우면서도 공허한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쉰이 넘어가는 나이니 이제 그만 정착하면 좋으련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믿어볼까 하는 마음으로 나 역시 리카르도처럼 나쁜 소녀를 받아들이려는 찰나, 그녀와 오래 함께 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소설 재료를 남겨주었다는 말로 그 모든 것을 대신했다. 그녀에겐 이 이야기가 한 편의 소설일지는 몰라도, 리카르도에겐 자신의 삶 전체를 아우르는 순애보라고도 볼 수 있었다. 미련하고도 바보 같은 순애보. 결코 진정한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것은 리카르도를 비롯해 나쁜 소녀도 마찬가지였다. 늘 리카르도에게 진실한 사랑을 받고 있으면서도 그녀 스스로가 받기를 거부하고 있었기에 그녀에게 리카르도의 마음은 진정한 사랑이라고 보기 어렵다. 리카르도 입장에서는 진실할지 몰라도 나쁜 소녀에게 리카르도는 늘 변방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사랑한 유일한 사람은 리카르도 뿐이라는 것을. 그것을 인정할 수 없었기에 그녀는 그렇게 긴긴 세월을 돌아와 리카르도 옆에 겨우 도착한 것이다.

 

  이 독특한 사랑 얘기를 연애소설로 볼 수 있을지 고민 되었다. 하지만 세계 곳곳을 누비며 펼쳐지는 진기하기까지 한 두 사람의 이야기는 매우 흡인력 있게 재미를 안겨주었던 것은 사실이다. 2010년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라고 해서 이 작품이 어려울 거라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다. 오히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라는 타이틀에 더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는 독특하고도 재미난 소설을 들려주었고, 작품마다 새로움을 안겨주는 그의 행보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때론 유치하고도 우습게, 능글맞으면서도 진지하게 다가오는 그의 소설을 읽고 있노라면 이것이 다양한 문학을 읽는 즐거움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곤 한다. 정말 나쁜 소녀의 이야기지만 그 안에 담겨있는 진귀함 들을 발견하면서 읽어나간다면, 그녀의 짓궂음에 한번쯤은 당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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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소의 축제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1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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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대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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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기의 간주곡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윤미연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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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허기를 잘 알고 있다. 그걸 겪어보았기 때문이다.' 소설의 첫 문장과 함께 이어지는 전쟁 중에 겪은 허기의 이야기는 생생하다. 그러나 다음에 이어질 이야기는 그것과는 또 다른 허기에 관한 것이라고 했다. 전쟁 중에 겪을 수 있는 허기의 종류에 배고픔 이외에 다른 것이 있을까란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연보라색 집 앞에 마주한 에텔이라는 소녀와 그녀의 종조부 솔리망 씨를 만나게 되었다. 에텔은 솔리망 씨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소녀다. 솔리망 씨에게 에텔의 존재는 불가항력이었다. 중산층의 부유한 집안에서 온실의 화초처럼 자라나고 있는 에텔의 존재를 높여주는 것은 오직 솔리망 씨 뿐이었다. 그래서 에텔에게 연보라색 집을 지어주고 싶어 했지만 결국 그 꿈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 책의 끝에는 '스무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뜻하지 않게 억척스런 삶의 주인공이 되어야 했던 한 젊은 여인을 기리며 이 이야기를 썼다.'는 말이 있다. 바로 저자의 어머니이며 전쟁과 가정의 파산 위기와 함께 가장이 되어야 했던 에텔의 이야기였다. 그래서인지 에텔이 겪어내는 삶은 처절하고도 섬세했다. 종조부의 사랑을 담뿍 받으며, 유일한 친구였던 제니아의 가난을 부러워 할 정도로 철이 없었던 그녀가 변하기 시작했다. 솔리망 씨가 남겨 주었던 재산은 아버지가 모두 탕진해 버렸고, 어머니는 현실을 회피하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아버지의 불륜과 사업 실패로 원활한 관계를 맺지 못하는 부모님 사이에서 집이 파산하기 직전에 그녀가 나섰다.

 

  "유년기에서 벗어나 어른이 되어야 했다. 삶에 뛰어들어야 했다. 그 모든 것에."

 

  솔리망 씨로부터 '넌 내 행운의 부적, 내 작은 행운의 별이란다.'란 말을 들은 에텔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전혀 다른 삶 속으로 뛰어 들어야 했다. 먼저는 파산 위기에서 벗어나야 했고, 전쟁을 피해 피난을 가야했다. 세계 2차 대전이라는 역사의 큰 줄기를 경험하면서도 이후의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는 에텔에게 현 상황은 그다지 우호적이지 못했다. 그런 역사가 에텔의 삶 속에 깊이 파고들면서 어떻게 변화되어 가는지를 너무나 상세히 보여주었다. 그렇게 엉킨 역사와 개인의 삶은 맞물리면서도 서로 만나지 못하는 것 같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무심한 듯 흐르는 역사, 그 안에 소소히 움직이는 에텔이 거대한 힘에 파괴되어 가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에텔이 무너져 버린 삶 위에서 힘들어 하는 모습은 어떠한 위로도 그녀를 달래 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몸속을 관통하는 구덩이가 다음 날이면 사라질 거라 기대하며 잠들었지만, 눈을 뜨고 보면 상처는 여전히 커다랗기만 했다.' 라는 부분을 읽을 때 그녀가 얼마나 큰 위기 앞에서 혼자 서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또한 '사람들은 영국군과 미군의 포탄에 죽지 않았다. 대신 먹지 못해, 숨쉬지 못해, 자유롭지 못해, 꿈을 꾸지 못해 서서히,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라는 부분에서도 전쟁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이 부분에서 에텔의 허기가 배고픔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고, '그것과는 또 다른 허기'라는 도입부를 증명하고 있음을 알았다. 에텔의 허기에는 배고픔, 자유, 꿈, 생명, 사랑 등 인간의 욕구이자 당시에 그녀에게 필요했던 모든 것이 총 망라되어 있는 갈망이었다.

 

  그럼에도 점점 악화되어 가는 상황 속의 그녀에게 희망은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고, 세월이 흐른 뒤에 자신에게 고통을 주었던 곳을 둘러볼 수 있는, 역경을 이겨낸 보상이 있었다. 센 강을 보며 '강물은 역사를 씻어낸다.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강물은 육신들을 사라지게 하고, 강비탈에 있는 것들은 그 무엇도 아주 오래 머물지 못한다.' 라고 되뇔 수 있는 세월을 견뎌온 것이다. 온실 속의 화초로 머무르지 않고 유년기에서 벗어나 어른이 되어 삶에 뛰어들어야 했던 부딪힘으로 현재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 작품은 르 클레지오가 2008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이후에 한국에서 쓴 작품이라고 한다. 그래서 한국적인 무엇인가가 녹아있지 않을까 살짝 기대 했지만, 오히려 당시의 문화가 잘 녹아 있는 프랑스적인 면을 더 섬세하게 들여다 본 기분이다. 어휘라든가 당시의 살롱 문화, 전쟁, 문화를 저자의 펜 끝을 통해 과거로의 여행을 한 것 같다. 교차적으로 변화는 흐름 속에서 화려하진 않지만 수려한 문체의 매력을 만끽했다. <성스러운 세 도시>로 저자와 처음으로 만났지만 내게는 너무 어려워 조금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이 작품을 통해 왜 노벨문학상을 수상 할 수 있었는지 온전히 납득할 수 있었다. 허기를 바탕으로 이어진 이야기 속에는 삶을 충실히 살아내고자 했던 한 여인이,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초상이 되어주고 있었다. 그녀를 통해 삶에 대한 용기를 얻을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큰 선물은 없을 것이다. 솔리망 씨가 에텔에게 부어주었던 깊은 애정을, 어쩌면 저자는 독자 개개인에게 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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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짐승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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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하면 불편해지고, 말을 하면 우스워져"
 

  이 소설의 첫 문장과 끝 문장은 동일하다. 얼핏 들으면 소설 속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이 말은 어느 정도 적용되는 것 같다. 친구들을 만나 쉼 없이 재잘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머쓱해지던 내 모습을 떠올려보면 이해 못할 말도 아니다. 그러나 헤르타 뮐러가 말하는 '말'은 많은 것을 쏟아낸 뒤에 따라오는 허무한 '우스움'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살던 곳을 떠날 때 가져온 것들을 그들의 얼굴에 담는다.' 라고 쓰인 노트를 보는 '나'는 롤라를 추억한다. 그 노트는 롤라의 노트였고, 그녀가 어떻게 죽었으며 어떤 일을 당했는지가 적혀 있었다. 체육교사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나'의 트렁크 안에 있던 허리띠로 목을 맨 롤라. 그런 롤라는 당에서 제명당하고 학교에서는 그런 그녀를 수치스러워해 제적시킨다. 롤라의 죽음에 의문을 갖고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말을 못한 채 학교가 시키는 대로 이끌려가고 있었다. 그런 '나'에게 어느 날 구내식당에서 세 남학생이 말을 걸어온다. 똑같이 롤라의 죽음에 의문을 품고 있었다. 이 만남으로 그들의 인연은 훗날까지 이어지는데, 마치 롤라의 죽음이 암시를 하듯 그들도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나와 세 남학생인 에드가, 게오르크, 쿠르트는 정권에 비판적이었고 종종 독일에서 밀반입한 책을 보기도 했다. 비밀경찰의 감시자가 된 네 학생의 운명은 편치 않았다. 어디를 가든지 비밀경찰의 감시가 있었고, 친구마저도 감시자의 역할을 하는 끄나풀이 되어 있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들의 앞길을 막아 버리는 데에는 그들이 처한 정치적인 운명만큼이나 암울했다. 무슨 일을 하던지 정치적인 이유로 해고를 당했다. 하다못해 가정교사 일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게오르크는 의문의 폭행을 당한다. 경찰에 신고를 했지만 신고를 한 당사자를 더 비웃을 뿐이다. 그런 그는 출국허가를 받았음에도 한 건물의 옥상에서 떨어져 즉사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쿠르트도 집에서 목을 맸다. 롤라, 게으르크, 쿠르트의 죽음을 자살과 사고로 치부할 수 있을까. 그들 앞에 펼쳐진 암울한 상황만큼이나 어두운 죽음이 아닐 수 없었다.

 

  '오늘도 실컷 뛰어놀았으니, 이제 네 마음짐승을 쉬게 하려무나'

 

  할머니는 노래한다. 마음짐승을 쉬게 하라는 이유에는 '오늘도 실컷 뛰어놀았으니'라지만 이들에게 마음짐승의 의미는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방황하는 청춘이라고 하기엔 낭만적이지 못한 현실이 있다. 절망이라고 하기엔 일으켜 줄 희망이 없다. 구내식당에서 본 냉장고 속의 짐승의 내장에서 마음짐승을 보았다고 하는 '나'의 고백 속에도 '구부러지고 지쳐 있'는 짐승의 내장이자 마음짐승을 본 것이다. 또한 죽은 아버지의 마음짐승이 미친 할머니 안에 둥지를 틀었다고도 생각한다. 마음짐승의 정체는 무엇일까. 우리가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그런 존재일까. 아니면 단순한 단어의 조합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를 비롯한 네 명의 학생이 만나서 한 테이블에 앉아있을 때에 가져온 두려움이 그대로 각자의 머릿속에 머무르듯 그렇게 마음짐승은 각자의 마음속에도 둥지를 틀었으리라.

 

  『마음짐승』은 저자의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소설이라고 한다. 독재치하의 루마니에어서 청년기를 보낸 저자는 두 친구를 위해 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두 친구의 죽음은 이 작품속의 롤라, 게오르크, 쿠르트의 죽음과 닮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제대로 펼치지 못한 청춘, 시대의 암울함도 아마 저자의 경험에서 나온 생생함이었으리라. 독재치하를 벗어나도 자유롭게 살수 없는 그들을 바라보면 마음이 답답해진다. 인권이 보장되지 않은 곳에서 인간은 인간다운 모습을 드러낼 수 없다. 각자의 젊은이들이 가지고 있던 인간미를 볼 수 없고, 암울했던 시절을 살아했다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그런 그들을 그려내는 저자의 언어 또한 혼란스럽다. 한 문장씩 읽어 내려가면 수려한 문장인데도, 하나로 연결하려고 하면 혼선이 일고 어렵게 느껴졌다. 그런 언어의 혼잡함 속에서도 희망을 보길 바랐는데, 과거에 존재해왔고 현재도 존재하고 있는 가깝고도 어두운 세계를 실컷 맛본 기분이다. 하지만 그것을 기록해 나갈 수 있다는 것 자체에서 용기를 얻는다. 무언가를 개선하려는 의지, 인간의 모습을 간직하고 싶다는 욕망이 저자의 글 속에서 뚝뚝 흘러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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