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소녀의 짓궂음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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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미니 홈페이지를 핑크색으로 꾸며 놓았더니, 혹시 연애중이냐는 물음이 들려온다. 연애를 하고 싶은 욕망에 그렇게 꾸며 놓았다고 대답하면서도 왜 이렇게 쓸쓸해지는 원. 잠시 신세한탄을 하다가도 새해 나의 목적은 연애가 아니라며(진짜 속내는 나도 모름.) 스스로를 다독여 본다. 그러다 『나쁜 소녀의 짓궂음』의 주인공을 생각하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이 소녀는 무슨 능력으로 사십년 동안 이어지는 한 남자의 순애보는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수 많은 남자들과 전 세계적인 사랑을 나눌 수 있단 말인가. 그녀의 연애 담이 부럽다기보다 새로운 사랑과 환경에 적응에 가는 능력에 경탄할 뿐이다.
 

  자칭 '나쁜 소녀'로 불리는 그녀는 '착한 소년' 리카르도에게 10대 때부터 사랑 고백을 받아왔다. 페루 중산층에서 자라 온 리카르도에게 유일한 꿈은 파리에 정착해 사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쁜 소녀' 릴리가 자신의 사랑을 받아주면 그것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사랑 고백을 받아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돈과 권력만이 삶을 풍요롭게 해준다고 믿는 독특하면서도 현실적인 소녀였다. 그런 그녀가 앞으로 사십년 동안 리카르도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음은 물론, 필요할 때마다 불쑥 불쑥 나타나 거짓말과 배신을 일삼으며 그를 괴롭힌다는 것을 어찌 알았겠는가. 리마, 파리, 런던, 도쿄, 마드리드에서 다양한 신분과 이름으로 리카르도 앞에 짓궂게 나타난 것처럼 그녀의 실체는 무엇인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다.

 

  그녀에게 과연 진짜 이름이라는 것이 있는 것일까? 어릴 적 가짜 칠레 소녀였음이 밝혀지면서 릴리는 리카르도 삶 속에서 사라진 이름인 듯 했다.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파리에서 통역 일을 하고 있던 리카르도 앞에 나타난 릴리는 리카르도의 순애보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서로를 위해 그녀를 게릴라로 떠난 보낸 그 순간부터 모든 것이 어긋났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원하던 소녀는 쿠바에서 프랑스 외교관과 결혼해 아르누 부인이 되어 리카르도 앞에 나타난다. 그것을 시작으로 수없이 이름과 신분을 바꾸며 리카르도의 삶을 종횡 무진한 그녀의 본명이 오틸리타라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된다. 하지만 그 이름은 '나쁜 소녀'를 전혀 다른 인물로 비추게 만들었고, 오히려 쉼 없이 이름을 바꿔 나가는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이름에 담긴 사람의 진실이 이렇게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느끼며 '나쁜 소녀'가 그녀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사십년 동안 이어져 오는 독특한 러브스토리는 때때로 답답하고 분노가 느껴졌다. 자신이 필요할 때만 나타나는 나쁜 소녀에게 늘 휘둘리고 배신당하면서도 그녀에 대한 마음을 잊지 못하는 리카르도. 그런 리카르도에게 유치한 속삭임을 통해 자신에 대한 마음을 확인하고 돈과 권력 있는 사람을 찾아 떠나는 그녀. 그것이 한 번이라면 족하련만 리카르도가 그녀를 잊고 새로운 도시에서 열심히 일을 하려고 할 때마다 그녀는 어김없이 나타났다. 마치 그 동안 자신이 어떤 사람과 살아왔는지를 밝히려는 듯이. 리카르도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와 권력을 추구하는 이 자그마한 페루 여자는 이미 내 인생을 너무 혼란스럽게' 만들었다고 하면서도 계속 이어지는 사랑놀이의 지침 속에서 '이번에는 정말 완전한 이별이고, 내 러브스토리가 끝난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중략) 이 우스꽝스러운 소극을 러브스토리라 부를 수 있을까?' 라며 한탄하면서도 그녀에게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 리카르도의 직업인 통역은 마치 나쁜 소녀와의 사랑을 말해주는 듯 때론 씁쓸함을 유발시키기도 한다. 다른 나라 언어를 익혀 수많은 도시에서 타인의 말을 전해야하는 일. '아무것도 없어.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단지 남을 위해 말했을 뿐이야.' 혹은 '우리 역관은 쓸모없는 존재일 뿐이야, 친구.'라는 말이 들려오는 직업이기도 했다. 오로지 파리에 정착하기 위해 시작한 일, 그리고 나쁜 소녀가 자신을 혼란스럽게 하고 배신할 때마다 매달렸던 일도 결국에는 리카르도의 존재를 밝혀주지는 못했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사랑을 얻지 못해 궁핍해지는 그의 마음처럼, 그 일은 리카르도를 안정시켜주고 자리를 잡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늘 어딘가 붕 떠있는 존재, 떠나야만 하는 직업으로 비춰지기 일쑤였다.

 

  그런 리카르도에 나쁜 소녀의 진실한 사랑이 있었다면, 분명 행복했다고 본다. 나쁜 소녀는 부와 권력을 위해 만난 사람들로부터 큰 해를 입고 올 때마다 리카르도 옆에 정착하려는 시도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갑갑함을 느끼고, 리카르도가 원하는 삶에 자신은 어울리지 않고 그렇게 해줄 수도 없다며 떠나버렸다. 늘 혼자 남겨진 리카르도가 그나마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고 하면 오히려 분노를 일으키며 나타나는 그녀를 어찌 미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결혼도 하지 않고 한 여자에게 휘둘리는 리카르도가 짠하면서도 답답하고, 늘 리카르도를 팽개쳐놓고 뻔뻔하게 돌아와 그를 다그치며 배신을 서슴지 않는 그녀가 얄미우면서도 공허한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쉰이 넘어가는 나이니 이제 그만 정착하면 좋으련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믿어볼까 하는 마음으로 나 역시 리카르도처럼 나쁜 소녀를 받아들이려는 찰나, 그녀와 오래 함께 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소설 재료를 남겨주었다는 말로 그 모든 것을 대신했다. 그녀에겐 이 이야기가 한 편의 소설일지는 몰라도, 리카르도에겐 자신의 삶 전체를 아우르는 순애보라고도 볼 수 있었다. 미련하고도 바보 같은 순애보. 결코 진정한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것은 리카르도를 비롯해 나쁜 소녀도 마찬가지였다. 늘 리카르도에게 진실한 사랑을 받고 있으면서도 그녀 스스로가 받기를 거부하고 있었기에 그녀에게 리카르도의 마음은 진정한 사랑이라고 보기 어렵다. 리카르도 입장에서는 진실할지 몰라도 나쁜 소녀에게 리카르도는 늘 변방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사랑한 유일한 사람은 리카르도 뿐이라는 것을. 그것을 인정할 수 없었기에 그녀는 그렇게 긴긴 세월을 돌아와 리카르도 옆에 겨우 도착한 것이다.

 

  이 독특한 사랑 얘기를 연애소설로 볼 수 있을지 고민 되었다. 하지만 세계 곳곳을 누비며 펼쳐지는 진기하기까지 한 두 사람의 이야기는 매우 흡인력 있게 재미를 안겨주었던 것은 사실이다. 2010년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라고 해서 이 작품이 어려울 거라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다. 오히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라는 타이틀에 더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는 독특하고도 재미난 소설을 들려주었고, 작품마다 새로움을 안겨주는 그의 행보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때론 유치하고도 우습게, 능글맞으면서도 진지하게 다가오는 그의 소설을 읽고 있노라면 이것이 다양한 문학을 읽는 즐거움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곤 한다. 정말 나쁜 소녀의 이야기지만 그 안에 담겨있는 진귀함 들을 발견하면서 읽어나간다면, 그녀의 짓궂음에 한번쯤은 당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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