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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의 품격 - 조선의 문장가에게 배우는 치밀하고 섬세하게 일상을 쓰는 법
안대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6년 5월
평점 :
아직도 비가 오거나 날씨가 흐려 집 안으로 빛이 들어오지 않는 날이면 이덕무가 생각난다. 집 안에서 책 읽기밖에 할 수 없었던 시절, 빛을 따라 자리를 바꿔가며 책을 봤을 그가 이런 날이면 의기소침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전혀 연결고리가 없었던 18세기의 문인 이덕무와 백탑파를 알게 되었고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도 문학이 폭발하던 시기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자 뭔가 가슴이 북받쳐 올랐다. 한동안 18세기 문학을 찾아 읽다 어느 순간 잊고 있었는데 이 책으로 인해 그때의 열망을 잠시나마 다시 떠올릴 수 있어서 좋았다.
허균이 시인으로 탁월했다는 사실을 얼마 전에 알고 나서인지 이 책의 첫머리에 만난 허균의 산문은 반가웠다. 지금 읽어도 어색함이 없을 정도로 자신만의 색깔을 담았다는 생각은 이 책에 실린 일곱 명의 문인을 만나는 시간 내내 들었다. 시대적 상황과 배경을 제쳐두더라도 막힘없이 읽히는 흡인력과 그 안에 담긴 메시지, 익살, 문학에 대한 애정 등등 다양한 감정을 느낄 수 있어서 마치 그들을 직접 지켜보고 있는 듯한 기분까지 들었다.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글을 남기고 비판을 받을지라도 새로운 글쓰기를 하고 일상의 평범함과 내면의 이야기도 은근하게 녹여낸 노력이 고마울 정도였다.
문인으로서의 열정, 학자로서의 의무, 부조리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 들을 찾는 일보다 글에서 드러나는 있는 그대로의 느낌을 바라보려 했다. 비슷한 시대 혹은 다른 시대에 살았던 문인들의 글을 읽으며 다양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경이로울 정도였다. 이미 익숙한 백탑파를 재조명해보고 새로움을 만끽할 수 있었고, 잘 알지 못했던 문인의 글을 보는 재미 또한 쏠쏠했다.
나를 찾았다고 해서 물리적 이득이 오는 것도 아니고, 신기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누리며 살 수 있다. 그는 외물의 욕망에 흔들려 자기 정체성을 잃지 말고 자신을 지키며 살자고 다짐하는 것으로 글을 맺었다. (66쪽)
개인적으로 18세기의 대표 문인 이용휴의 글이 인상적이었다. 굉장히 짧은 글임에도 그 안에 담고 있는 은유와 메시지, 파격적인 시도들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벼슬의 길을 포기하고 전업 작가로 한평생을 보냈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문학에 대한 애정과 깊이, 새로움을 추구하는 다양한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읽어도 어색함이 없는 새로움이 이용휴란 사람을 더 알고 싶게 만들었다.
장인에게 쓰는 박제가의 제문, 이상적인 생활공간을 글로 옮긴 정약용, 한가함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보인 허균의 글처럼, 정보로 넘쳐나는 피로한 현대사회에서 단연 돋보이면서도 이런 게 문장이라는 사실을 깊이 공감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오래된 글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이 무척 고마웠다. 이러한 글을 쓰면서 이렇게 오랜 뒤에 남겨질 걸 알았을까? 후세에 남기겠다는 생각보다 현재 안고 있던 고뇌와 시대의 흐름, 자아성찰 등 글로 남길 수 있는 것들에 관심을 기울이고 쓰는데 더 열중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랬기에 그런 글들이 오래도록 살아남았고 현재의 나도 읽고 있다. 그런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렇기에 글을 쓰는 그 행위 자체만으로도 뭔가 뭉클해지는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