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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인생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4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6년 11월
평점 :
장님이 된 기분이다.
책을 읽고 있었음에도 책을 읽지 못하는 상황에 처해 있었고, 읽지 않고 낭독을 들었다고 해도 책을 이해하지 못한 느낌.
<새로운 인생>은 그렇게 내게 익숙하지만 드물지 않은 낯섬과 난해함으로 다가왔다.
<당신이 지금 손에 들고 있는 책의 모든 구석 구석을 충분히 주의하면서 지능적으로 보았는가?>
이 부분에서 나는 할 말을 잃고 6시간동안 대화한 상대가 장님인줄을 몰랐던 주인공 오스만을 어떠한 말로도 비난할 수 없었다.
되려 내가 그의 비난을 받아 마땅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난해하지만 열심히 읽어가고 있었던 나의 맥을 탁 풀어버린 한마디의 비유는 그렇게 내 마음속에 비수로 꽂혀가고 있었다.
두툼한 책을 마주 하면서 녹록치 않음을 어느 정도 예상했었지만 쏟아지는 혼란속에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느날 읽은 책 한권의 여행속으로, 현실속의 버스 여행속으로 그를 따라가고 있었지만 그의 행로를 예측할 수 없었고 마지막 부분에선 어렴풋이 그의 죽음을 예상했을 뿐이였다.
일출의 그 찬란함과 경이로움을 본 적이 있기에 그가 마지막으로 느꼈을 빛을 어렴풋이 추측할 수 있을 뿐, 그리고 그가 읽은 책에서의 광채와 비슷했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을 뿐 나는 눈뜬 장님에 불과했다.
어느날 읽게 된 책 <새로운 인생>을 통해 새로운 인생을 맞이할 수 있을 거라며 마음속의 방황을 실제로 행하고 있었음에도 그 자신도 어디로 흘러갈지 알 수 없었던 그 버스여행들은 그에게 과거가 되어 있었고 그 여행으로 인한 족쇄는 그를 결국 붙들고 말았다.
사랑하는 자난과 그의 연인 메흐메트를 통해 그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꿈꾸게 되었음에도 그가 만난 것은 혼란스럽고 소란스러운 지극히 현실적인 세계일 뿐이였다.
그러한 현실성을 느끼며 돌아오기를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오스만이 읽게 된 책으로 인해 진즉 자신의 삶의 방향을 바꿔버린 메흐메트의 아버지를 만나고부터 오스만은 영화에서나 만날 수 있을 법한 삶을 잠시 만끽하게 된다.
나름대로의 길을 걷고 있던 아들이 어느날 책 한권으로 인해 변해버렸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힘든 메흐메트 아버지는 사람을 고용해 아들을 감시하고 심지어 그 책의 작가, 그 책을 읽은 사람들까지 소멸시켜 간다.
결국 오스만은 메흐메트를 만나 그에게 세 방의 실탄을 쏘며 '내가 방금 사람을 죽였소' 라고 말하며 그 자리를 피하지만, 결국 죽은것은 오스만 자신이다.
오스만 자신의 이름을 쓰고 있던 메흐메트가 아닌 그 살인의 괴로움에서 그는 늘 자신을 죽여가고 결국은 죽음의 희열(?)을 맛보며 사라져간다. 그는 그 죽음이 달갑지 않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함에도......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눈에 띄였던 것은 버스였다.
오스만이 죽어간 곳도 버스요, 그가 여행의 수단으로 삼은 것도 버스며, 메흐메트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가족들 역시 버스사고라고 오해하고 있었다.
또한 메트메트의 아버지 나린 박사는 아들을 망쳐버린 그 책을 읽는 사람들을 없애기 위해 버스사고를 일으키기도 한다.
오스만 뿐만이 아닌 터키인들에게 버스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 같은 착각을 만들 정도로 버스의 등장은 흔하다.
결국 그 버스의 의미는 떠날 수 있지만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동시다발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 느낌은 상이하기에 한꺼번에 묶을 수 없는 즉, 오스만의 경험, 인생처럼 언제든 갈아탈 수 있으며 언제든 나아갈 방향을 정할 수 없는 복잡미묘하면서도 꼭 필요한 존재로써의 등장이 아닐까?
그랬기에 <새로운 인생>이라는 책을 읽고 새로운 삶을 찾을 수단을 맞이한 것도 버스였고 자난과 메흐메트를 각각 다른 장소에서 만난 것도 버스였기에 어느새 자연스러움으로 자리잡고 있게 된다.
그러나 그 버스의 낡음은 오스만의 추억속에서처럼 익숙했지만 바뀌어 버린 버스,길,운전사들의 복장과 행동은 새로운 인생을 맞이하고 있는 현재의 오스만처럼 낯설었다.
자난이 사랑하는 메흐메트에게 질투심을 느껴 그를 살해하기도 했던 오스만이였지만 그 후 아무렇지도 않게 평범한 가정을 일구며 살아가는 오스만은 변해버린 버스와 같았다.
그랬기에 그 평안함은 불안했다. 그가 다시 옛 추억을 되살려 캐러멜을 만든 사람을 찾아가기 위해 다시 떠나는 버스 여행에서 그의 죽음을 예상할 수 있었듯이 새로운 인생이 아닌 이름이 같은 캐러멜을 찾아가는 모습은 그의 종점이였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단순하게 한권의 책으로 인해 태연히 살인을 저지르고도 아무렇지 않은 듯(죄와 벌의 라스꼴리니꼬프처럼) 살아가는 행위의 결과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가져오는 것은 당연함이였다.
그가 죄를 저질렀기에 괴로워 했기에 겪게 되는 당연함이 아닌 책 속에서 만난 <새로운 인생>은 오스만에서 죽음으로써 만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린 박사가 요즘에도 책 한권이 그렇게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냐고 말했던 것처럼 그것은 흔한 경험이 아니기에 내가 보기에도 현실성이 떨어진다. 죽음을 겪어보지 않았기에 그의 찬란한 죽음 앞에서 그가 갈망했던 새로운 인생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정도지만 그의 죽음은 새로운 인생을 간직하였기에(어떤 식으로든..) 그의 죽음은 담담함으로 다가왔다.
그의 죽음은 짧았고 그의 여행은 길었지만 왜 나는 그의 죽음만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그가 겪은 여행은 안개에 쌓인듯 희미하며 앞을 볼 수 없었고 그의 죽음은 확실한 결과를 보여주었기 때문일까?
아마 <새로운 인생>을 찾아가는 오스만의 여정에 동조할 수 없었고 저자의 난해함을 파헤칠 수 없었고 <새로운 인생>이라는 것이 내게 와 닿지 않음을 그의 죽음을 통해 묻어가길 원했는지도 모른다.
혹은 그의 죽음으로 인해 더이상 <새로운 인생>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고 내 손에서 내 머리에서 놔버릴 수 있는 후련함을 기대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스만이 보았던 강렬한 빛을 잊을 수 없는건 왜일까.
자꾸 내게 질문이 많아지는 건 왜일까.
그건 아마도 그 빛에 반사되는 나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휘적 휘적 어디인지 모를 곳을 걷고 있는 오스만이 아닌 바로 내 자신의 환영을 만났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