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만나는 스무살 철학 - 혼돈과 불안의 길목을 지나는 20대를 위한 철학 카운슬링
김보일 지음 / 예담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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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자를 둘러쓰고, 편안한 옷차림에 운동화를 꿰어 신고 집을 나섰다. 잔잔하면서도 밝은 분위기의 피아노 음악이 나의 발걸음을 가볍게 해주었고, 오랜만에 산책을 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약간 들떴다. 바람이 좀 차긴 했지만 이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집에만 틀어박혀 있던 내가 집 근처일지언정 산책을 나가게 된 것은 <나를 만나는 스무살 철학> 때문이었다. 책 가운데서도 '가까운 교외를 도보로 걸으며 청량한 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시며 "나는 현재를 살아가노라." 라고 읊조릴 수 있는 지혜는 어떨까?' 란 구절을 읽고 나서였다. 안 그래도 몸도 마음도 답답하던 차에 잘 됐다 싶어 큰 맘 먹고 길을 나선 것이다. 장소는 얕은 바다가 보이는 집 근처로 정하고, 그곳에서 한 시간 가량 앉아서 바다를 보고 돌아왔다.

 

  바람이 세게 불어 머리가 좀 아파오긴 했어도, 잔디밭에 앉아 햇볕을 쬐며 감미로운 음악을 듣고 있으니 평온함이 밀려왔다. 그렇게 앉아 있다 나를 이곳으로 인도한 <나를 만나는 스무살 철학>을 꺼내 메모지를 붙여놓은 곳만 훑어보았다. 이미 읽은 뒤라 수십 장의 메모지가 붙어 있어 그곳만 읽는데도 시간이 꽤 걸렸는데 급할 것은 없었다. 남아도는 게 시간이었고, 산책도 할 겸 책 내용을 정리도 할 겸, 또 내 마음의 어지러움을 털어 버릴 겸 옮긴 걸음이라 느긋하게 앉아 있었다. 책장을 넘기다가 나의 마음에 가장 와 닿는 부분을 펼쳐놓고 여러 번 반복해 읽기도 하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기도 했다. 나를 가장 오랫동안 붙들었던 구절은 팡세가 <파스칼>에서 언급 한 "진정한 만족은 원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란 부분이었다. 그 구절을 수도 없이 보면서 원하는 것을 비워내지 못하고 벗어나지 못하는 내 자신이 한심하고 서러워 눈물을 조금 흘리기도 했다.

 

  그 구절을 벗어나지 못해 한참이 지나서야 다른 페이지로 넘어갈 수 있었는데, 내게 와 닿는 구절들은 죄다 마음을 아프게 하는 말들뿐이었다. 아무래도 이별의 아픔이 가시질 않아서인지 사랑에 관한 부분을 읽을 때는 통곡을 하고 싶을 정도였다. '스무 살의 사랑'이라는 부제목을 달고 있었지만, 그 부분을 읽으면서 서른 살의 나는 얼마나 잘못 된 사랑의 과오를 저질렀는지를 알려 주는 것밖에 없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뒤늦은 후회가 무슨 소용이 있겠냐만은 나를 아프게 찌르는 구절들을 보며 내 자신과의 대면을 피하지 않았다. 그것이 큰 맘 먹고 산책을 나온 이유였고, 읽은 책을 들고 나온 이유였으며, 다시 새롭게 나를 다듬어가고 싶은 욕망이었다. 나와 대면해야 하는 순간은 무척 두려웠지만, 자리를 털고 일어났을 때는 많은 위로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집에 돌아와 오랫동안 참았던 눈물을 터트렸고, 더 이상 나와의 대면을 두려워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한 권의 책을 읽어낸다는 것은 쉬울 때도 있고, 어려울 때도 있다. 읽기에 익숙해지다 보면 이런 스타일의 책들은 비교적 빠르게 읽고 지나가기 마련이다. 중심 메시지만 잊어먹지 않으면 흐름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인데, 아무런 기대 없이 펼친 이 책에서 이렇게 많은 것들을 얻고 문제제기를 할 줄은 몰랐다. 정독하며 읽은 것은 물론이고, 기억하고 싶은 구절에 메모지를 붙이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 구절들을 보며 나를 대입하며 오랜 생각에 빠져 있다 보니 읽기는 자꾸 더뎌졌다. 샅샅이 읽었다는 후련함보다는 책을 읽으면서 발견된 나의 고민과 문제점들에 대한 해결책을 어떻게 찾아야 할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머릿속이 뒤죽박죽되어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몰라 하던 차에 책 구절이 떠올라 산책을 나간 것이다. 저자의 충고대로 따라해 보니 확실히 기분 전환이 되었고, 아직도 이 책을 들여다보며 실천해야 할 부분이 더 많음에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했다.

 

  어쩌면 나는 이 책 내용을 전하려는 것이 아니라, 책을 읽으면서 발견된 내 마음을 토로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과 동떨어진 얘기일지라도, 이 기회를 통해 갇혀 있던 내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낸다면 책 내용을 전하는 것보다 훨씬 값진 시간이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어차피 책 속에서 들은 수많은 이야기들을 정리한다는 것도 불가능하고, 내가 느낀 대로 드러내기만 해도 실천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 비친 셈이 될 터였다. 그러나 스무 살을 겨냥해 철학과 접목시켜 자신과 만나기를 권하고 있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책 제목이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쉬웠다. 서른 살의 내가 읽어도 뒤통수를 치는 듯한 격렬함이 많았는데, 스무 살에 국한시켜 그들의 시선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부분 때문이었다. '나를 만나는 젊음의 철학'이나 '나를 만나는 철학'이라고 지었다면, 좀 더 포괄적인 독자들을 끌어 들일 수 있겠다란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저자가 스무 살을 겨냥한 것은 방황하고 불안한 청춘인 만큼 도움을 주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스무 살의 방황과 서른 살의 방황은 가능성부터 다르기 때문에(서른 살의 방황을 방관하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스무살 때의 방황에 가능성의 농도가 더 짙다는 것이다.) 저자만의 깨달음으로 충고를 해 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저자는 여러 책들의 문구를 언급하면서도 가볍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흡인력 있는 글을 써 내려갔다. 무엇보다 저자의 독서가 밑바탕이 되어 주는 다양한 책들의 삽입이 자연스러운 것이 인상 깊었고, 그에 따르는 현실의 적절함을 드러내는 것이 도움이 되었다. 자신의 생각을 소신껏 드러내면서도 메시지를 확실히 전달하고 있었으며, 인생을 전반적으로 두고 봤을 때 한번쯤 돌아봐야 할 것들에 대한 격려와 충고를 잊지 않았다. 그랬기에 스무살 뿐만이 아닌 다양한 연령층을 포섭할 수 있는 가능성이 보였고, 수많은 지혜와 경험들이 넘쳐 남을 볼 수 있었다. 많은 페이지를 할애해 다양한 장르의 책을 통해 많은 언급을 하고 있었으나, 자신의 생각을 적절히 섞었기에 교통정리를 잘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인용과 경험을 통한 문제제기를 해주었지만 그에 따른 이면의 세계를 펼쳐 보여 양면성의 해결방안 안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이 내 상황에 맞고 옳으며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는 전적으로 나의 몫이었다.

 

  내가 가진 고민들을 대입하며 읽다가 '이런 것이 문제였구나!'하고 뒷장을 넘기면, 반대의 상황을 말하고 있어 어떤 것이 현명한 판단인지 섣불리 가를 수 없었다. 책 제목에 '철학'이 들어간 만큼, 독자들이 철학적 사유를 할 수 있게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걸으면서 철학적 사유를 시작해 소요학파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하니, 현재의 나는 책을 읽으면서 철학적 사유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란 의문을 갖게 되었다. 철학적 사유라고 해서 나와 동떨어진 세계를 놓고 생각에 생각만을 거듭한 것이 아니라, 내게 당면해 있는 현실적인 문제를 어김없이 건드려 주었다. 드러남에 상처를 받는 것이 아닌, 진지하게 나의 문제점을 생각해 보게 되었으며 어떻게 하면 빠져나올 수 있는지에 대한 여부도 간과하지 않았다. 그런 부분이 너무 많아 일일이 언급하긴 힘들지만, 이 책을 통해 내 몸 구석구석이 뒤집어지고 엎어져 새로운 싹을 틔우기 위한 준비과정이 된 것 같아 뿌듯하면서도 혼란스럽다.

 

  내게 들어온 많은 것들을 정리하고 싶은 욕망만 앞서 두서없이 풀어놓긴 했으나 여전히 내 안에 남아있는 응어리는 많은 것 같다. 그것이 책 내용을 정리하는 데 별 도움을 주지 않았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기에, 얼마 동안은 혼란스러움을 간직한 채 책의 도움을 받아보려 한다. 책만 들여다본다고 해서, 생각만 하고 있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없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책의 도움은 받되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분 지으며, 현실에 적절히 대입해 보는 것이 최선책일 것이다. 더 이상 방에만 갇혀 은둔하지 않을 생각이고, 책 속으로 도피하지 않을 것이다. 하염없이 바다만 바라보고 오더라도 산책을 자주하며, 날이 더 따뜻해지면 달리기라도 해보자고 다짐했다. 이 책을 통해 나에게 열려진 바깥세상이 얼마나 넓고 무한한지를 깨달았다. 이제 한 발짝 내디뎠을 뿐이다. 이 발걸음이 중간에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져 내 자신에게 당당하고 타인에게 마음을 나눠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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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향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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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품절 된 <귀향>을 2년 전 한 서점 구석에서 구입했을 때만해도 무척 흥분했었다. 시중에서 구할 수 없는 책을 손에 쥐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무언가 굉장한 것을 얻은 기분이었다. 흥분이 가라앉을 새도 없이 책을 펼쳤건만 중간도 못 읽고 책을 덮어버렸다. 최근 들어서야 루이스 세풀베다 작품을 꺼내 읽게 되었고 <귀향>도 처음부터 다시 읽게 되었다. 읽어온 부분이 아깝긴 했으나 한 호흡에 읽지 않으면 뚝뚝 끊겨 버리는 느낌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아니다 다를까 두꺼운 편이 아닌 <귀향>을 밤늦도록 읽으면서, 이 책을 끊어서 읽었다면 아찔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가벼운 내용이 아니었고, 술술 읽혔지만 쉽게 넘어갈 수 없는 소재들로 채워져 있었다.

 

  이 책의 줄거리를 간단하게 추려내자면,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경찰 두 명이 빼돌린 금화 63개를 독특한 이력을 가진 사람들이 찾아내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내용만 보고 장르소설로 단정 지을 수 없는 것은 저자가 써 내려간 기법을 떠나, 곳곳에 드러나 있는 정치적인 요소를 배제할 수 없어서였다. 당시 친구였던 한스 힐러만과 울리히 헬름은 <불의 땅> 티에라 델 푸에고로 떠날 것을 약속하고 금화를 훔쳐낸다. 그러나 한스 힐러만은 친구를 배신해 혼자 남미로 떠나고, 울리히 헬름은 모진 고문으로 불구자가 되고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금화를 찾을 방법을 모색한다. 자신이 직접 움직일 수 없어 적절한 인물을 물색하다, 칠레에서 게릴라로 활동하고 망명중인 후안 벨몬테를 찾아간다. 클럽의 문지기로 지내고 있던 그에게 제안을 거절할 수 없게 만든 다음, 칠레로 떠나게 하는데 금화를 찾아 나선 것은 후안 벨몬테 뿐만이 아니었다.

 

  구동독의 정보 부대 실무자였던 중령은 실직자가 된 정보부 장교인 갈린스키를 찾아가 금화를 찾아올 것을 명령한다. 누구의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금화를 과연 누가 찾아낼 것인가에 흥미를 더했으나, 후안 벨몬테에게 유리하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울리히 헬름이 후안 벨몬테를 선택했던 것은 게릴라로 활동했던 그의 경험이었고, 오랜 세월 칠레 땅을 밟지 못했지만 그 경험은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한다. 후안 벨몬테를 도와 줄 친구들이 있었고, 금화를 꼭 찾아야 할 동기부여(사랑하는 베로니카를 구하는 일)가 충분했기에 이미 게임의 결과는 드러났다. 그렇더라도 그가 금화를 찾아내는 과정과 갈린스키와의 대결이 어떻게 전개될지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급한 나의 마음과는 달리 저자는 감질맛 날 정도로 더디게 전개시켜 갔고, 그 과정에 수많은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한스 힐러만과 울리히 헬름의 이야기, 대령과 갈린스키, 무엇보다 후안 벨몬테의 이야기가 많았다. 조각조각 펼쳐지는 과거부터 베로니카에 대한 애정, 칠레로 향하는 마음가짐, 그곳에서의 사건들이 마구 뒤섞였다. 가볍게 넘길 수 없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들은 책을 놓을 수 없게 만들었고, 책들 다 읽은 후에는 묵직함이 나를 짓눌렀다. 책 내용이 주는 무게는 제각각이지만, 이렇게 무게감 있는 책들을 만날 때마다 숨을 깊이 들이쉬지 않으면 답답함에 잠을 설치게 된다. 그럼에도 무언가 후련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고, 세상에는 나와 거리가 먼 이야기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새삼스레 되새겨 보았다.

 

  독일과 남아메리카의 혼란스러웠던 정치 상황들과 함께 인물들의 행보가 그려졌기에, 그들이 겪어온 일들은 퇴색된 이야기로 치부해 버리기엔 석연치 않은 점들이 많았다. 후안 벨몬테가 칠레를 다시 찾았을 때,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인 나라를 자랑스럽게 생각했지만 여전히 껍데기를 둘러쓰고 있다고 생각했다. 과도기를 직접 겪은 장본인이었고, 당시의 상처는 수습되지 않은 채 방치되는 것들이 너무 많았으며(베로니카도 당시의 피해자였다.), 나치시대에 활동했던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곳이었다. 그런 감회를 뒤로한 채 후안 벨몬테는 울리히 헬름이 제안했던 금화를 찾기 위해 행동에 나서야 했다. 이미 갈린스키가 도착해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보다 먼저 금화를 찾기 위해선 친구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미 울리히 헬름이 보낸 편지로 금화를 찾으러 그들이 왔다는 사실을 알고 한스 힐러만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였다. 이젠 갈린스키와 후안 벨몬테의 대결만이 남아 있었다.

 

  갈린스키가 금화를 찾지 못할 거라 단정 지을 수밖에 없던 이유는 그의 전력으로 인한 잔인함과 솔직하지 못한 것, 궁지에 몰린 그의 처지였다. 그런 정황으로 갈린스키의 승리를 확신하기 힘들었고, 궁지에 몰린 처지는 비슷하더라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고 솔직해야 할 때를 가려내는 후안 벨몬테가 금화를 찾아낼 거라 확신했다. 갈린스키는 한스 힐러만의 집에 접근하는 것부터, 애먼 사람을 고문한 일, 너무 자신만 믿은 것으로 인해 죽임을 당했다. 후안 벨몬테를 비롯한 한스 힐러만의 주변 사람들에게나 금화는 쓰레기일 뿐이었고, 그것이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금화를 찾는 것이 중요한 사건이 되긴 했으나, 그것은 숨겨진 금화만큼이나 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끌어내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귀향>을 통해 유럽과 남미를 오가며, 어느 곳에도 소속되지 못한 소외된 사람들을 만난 것 같다. 밝은 빛을 품어내지 못한 어두운 역사를 더듬는 기분이었고, 그것을 안은 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그런 이야기에 추리적 요소를 가미해서 자칭 누아르 소설, 흑색 소설이라 칭하며, 다양한 소설기법을 선보인 저자의 역량에 감탄할 뿐이다. 쉽게 읽을 수 있지만, 읽고 나면 소설의 무게감에 휘청거릴지도 모르는 <귀향>은 동떨어진 느낌을 주는 동시에 지난 역사의 과오를 씻어내지 못함을 느끼게 된다. 후안 벨몬테가 분신으로 생각될 만큼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저자이기에, 행동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준 그의 행보에 주목하게 된다. 앞으로도 저자의 다양한 작품을 꾸준히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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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을 만드는 소년 - 바람개비가 전하는 치유의 메시지 새로고침 (책콩 청소년)
폴 플라이쉬만 지음, 천미나 옮김 / 책과콩나무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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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유난히 책이 읽어지지 않는 날이면, 읽던 책을 잠시 덮고 책 사냥에 나선다. 책장에 꽂힌 700여권의 책을 보면서 그 날의 기분에 따라 책을 골라내는 것이다. 읽어야 할 책이 700권이 넘는데도 책장을 둘러보면서 한다는 말이 "읽을 책이 없네."였다. 과연 이 말을 다른 사람이 들으면 뭐라고 생각할까 싶다가도, 정말 그렇게 느껴지는 기분을 어째야 할지 몰랐다. 읽을 만한 책을 서너 권 골라낸 다음에 몇 페이지씩 훑어보며 그 날에 읽을 책을 추려낸다. 그 과정에서 당첨된(?) 책은 <바람을 만드는 소년>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선택된 책도 내 마음을 채우지 못했고, 50페이지 정도 읽다 책을 덮고 잠을 청했다.

 

  출근길에 어떤 책을 가져갈까 잠시 고민하다 어제 읽다 만 <바람을 만드는 소년>을 집어 들었다. 강한 흡인력은 없었지만 그 이후의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했다. 잔잔하다 못해 심심한 이야기로 비춰질 정도였는데 왜 그 책을 놓지 못했는지 모르겠다. 책을 다 읽고 나서야 한 소년이 속죄 여행을 통해서 치유되는 과정을 보며 간접으로나마 치유할 거리를 찾았었던 같다. 책을 읽는 내내 주인공 브렌트처럼 혼자서 여행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짧게라도 걷기 여행을 해보고 싶었고, 여행을 통해 내 마음 속의 고통을 모두 게워내고 싶었다. 브렌트처럼 교통사고를 일으켜 사람을 죽게 만든 큰일을 저지르지 않았더라도, 비워내야 할 번뇌가 너무나 많다는 사실이 나를 짓눌렀다.

 

  고등학교 2학년인 브렌트는 아버지의 승진으로 이사도 오고, 사립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나름대로 자신만만하던 브렌트의 인생이 달라진 것은 파티에서의 모욕 때문이었다. 부자친구들이 여는 파티에 따라 갔다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애에게 모욕을 당했다. 그 길로 운전대를 잡고 집으로 돌아오던 중, 너무 괴로운 나머지 자살을 시도했지만 정작 애먼 사람만 죽게 만들고 말았다. 음주운전에다 사고로 사람까지 죽게 했으니, 브렌트는 하룻저녁에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진 셈이었다. 자신 때문에 죽게 된 소녀 또한 자기 또래였고, 모범생에다 다재다능한 유망주였다. 집에서 칩거만 하고 있던 그에게 내려진 처벌은 감옥행이 아니라 속죄 여행이었다. 피해자 측 어머니는 버스표를 주면서 평소에 소녀가 좋아했던 바람개비를 만들어 미국의 네 귀퉁이에 세워달라는 부탁을 했다. 브렌트도 현재 상태로는 생활을 이어갈 수 없었기에 그 제안에 흔쾌히 동의하고 버스 여행을 떠난다.

 

  손재주라곤 없는 브렌트가 어떻게 바람개비를 만들 것이며, 혼자서 여행을 해 본적도 없는데 어떻게 그 일을 마무리 지을 것인지 걱정이 앞섰다. 그러나 죄책감과 절망감에 깊은 상실을 한 브렌트에게는 오히려 그 여행이 숨통을 틔워주는 일이기도 했다. 여행에 필요한 도구대신 바람개비 만드는 방법이 담긴 책 한 권과 다양한 연장을 가방에 담고 길을 떠났다. 시카고에서 출발한 브렌트는 미국 지도로 봤을 때 정말 네 귀퉁이라 생각될 장소에 바람개비를 만들어 세웠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쩌다 보니 바다가 보이는 곳으로 다니게 되었고, 내륙에 살고 있던 그에게 바다는 세상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렇게 시작된 여행에서 브렌트는 때와 장소에 따라 자신을 속이기도 하고, 감추기도 하면서 바람개비를 만들었다. 한 개씩 만들어 갈 때마다 요령이 생기기 시작했고, 자신 때문에 죽은 소녀의 형상은 바람개비 위에서 점점 비슷해져 갔다. 분명 속죄하기 위해 만들기 시작한 바람개비였는데, 브렌트의 그런 행위로 인해서 또 다른 사람들은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브렌트가 바람개비를 한 개씩 만들고 지나갈 때마다 그 바람개비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특별한 사연이 펼쳐졌다. 얼핏 브렌트와 상관없어 보이는 이야기 인 것 같아 살짝 지루해지곤 했는데, 그들의 삶 속에서 바람개비를 바라보는 것이 큰 힘이 되어 주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네 명의 특별한 사람이 비춰졌는데, 모두 팍팍한 현실에서 바람개비로 인해 힘을 얻고 희망을 갖고 있었다. 어떤 소녀에게는 사랑을 만들어 주기도 하고, 방황하는 청소부 아저씨에게는 안식을, 부모의 기대에 버거워하는 입양아에게는 또 다른 길을, 생의 마지막을 향해가는 할머니와 손녀에게는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 주었다. 그 일이 브렌트가 만든 바람개비를 통해서 일어났고, 브렌트는 그 일을 알지 못했다. 오로지 자신 때문에 죽은 소녀를 위한 행위였고, 죄책감이 사라질 리 만무하지만 조금이나마 마음의 짐을 덜고 싶었다. 그랬기에 그가 남긴 바람개비가 타인에게 어떻게 보일지 생각할 틈이 없었다.

 

  브렌트에게는 바람개비의 완성도 중요했지만, 여행을 통해 만난 사람들과 사색으로 인해 삶의 깨달음이 그의 마음속으로 쑥 들어왔다. 여행 목적을 숨기기도 했으나, 여행지에서 만난 화가의 집에 바람개비를 달고 나오면서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았던 사연을 이야기한다. 왜 바람개비를 만들고, 소녀의 형상을 집어넣고, 이름을 새기는지에 대해 얘기를 하면서 브렌트는 편안함을 느낀다. 비로소 네 개의 바람개비를 완성했다는 후련함과 죽은 소녀에 대한 죄스러움이 조금씩 사그라들면서, 속죄 여행의 끝을 보았다. 또한 이전의 삶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욕망이 사라졌고, 세상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여행을 통해서 좀 더 성숙한 자신을 바라보게 되었으며, '우리가 행한 모든 일은-선하든, 악하든, 무심하든-보이지 않는 곳으로 물결치듯 퍼져나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브렌트에겐 그 행함이 어쩌다 악함으로 시작되었지만, 결국에는 선한 모습으로 낯모르는 사람들에게 퍼져 나간 것이다.

 

  브렌트가 속죄 여행을 떠나게 된 사실을 알고 책을 대했기 때문에 우울한 분위기의 연속일거라 생각했다. 사고의 순간을 부축이지도 않았으며, 죄책감으로 물든 브렌트의 내면을 드러내지도 않았고, 오히려 너무 잔잔하다 싶을 정도로 이야기가 전개 되었다. 네 사람의 이야기가 드러났을 때는 흐름이 끊기는 것 같아 낯설었고, 전개가 뒤죽박죽인 것 같아 아쉬움이 남기도 했다. 브렌트가 여행 경로를 따라 바람개비를 만들어 가는 과정은 특별함이 없었지만 오히려 세세한 묘사로 브렌트가 '나'이게 했다. 마치 내가 브렌트가 된 양 여행하며 바람개비를 만든다 착각하고, 그의 여행이 끝났을 때는 많이 달라져 있는 그를 보며 뿌듯해 했다. 누구나 예기치 못한 실수를 하고, 고난 앞에 닥치기 마련이다. 브렌트가 그랬고, 그것을 어떻게 이겨냈는지를 보았다. 그럴 때 여행을 떠난 것이 다행이다 싶었고, 어떻게라고 올해는 짬을 내어 혼자만의 여행을 해보마 하고 다짐했다. 나에게 지금껏 그럴 용기는 잠재하지 않았지만 브렌트를 통해 약간의 자신감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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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나는 바깥으로 들어갔다 - 스물여섯의 사람, 사물 그리고 풍경에 대한 인터뷰
최윤필 지음 / 글항아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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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제목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편은 아니지만, <어느 날 나는 바깥으로 들어갔다>의 제목엔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바깥으로 들어가다'라는 의미 자체가 모순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바깥의 뜻은 '밖이 되는 곳(네이버 국어사전)'인데, 밖이 되는 곳을 '들어갔다'고 해도 되나 싶었다. 바깥을 다른 세상으로 치부하자면 굳이 안 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더 깊이 생각하려 하니 자꾸 헷갈리기만 했다. 무엇이 저자를 바깥으로 인도했는지 궁금증을 풀어야만 책들 제대로 읽을 수 있을 것 같아 오랜만에 책 제목을 음미하게 된 것이다. 책머리를 열자마자 저자의 '바깥'의 의미가 순식간에 내 안으로 들어왔다. '바깥은 안과 맞버텨야만 서는 단어다. 그래서 경계가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경계는 '아주 허술하고 느슨할 것이다.'라며 긴장을 풀어주고 있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바깥'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물들에 대한 인터뷰가 어떤 식으로 펼쳐질지 알 수 없으나, 분명 익숙하고 무덤덤한 만남은 아닐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분명 '스물여섯의 사람, 사물 그리고 풍경에 대한 인터뷰'라고 나와 있는데도, '인터뷰'에만 집중한 나머지 정작 사물과 풍경이 등장했을 때는 당황하고 말았다. 사물과 풍경에 대한 인터뷰가 가능하냐는 초보적인 견해부터 이 책에 담긴 '바깥'의 의미를 여전히 파악하지 못한 결과였다. 정신을 수습하고 인터뷰를 꼼꼼히 읽어나가다 보니, 그제야 책 속에 담긴 숨은 의미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자는 나름대로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마이너리티를 만났고, 그런 풍경을 보여줬으며, 사물을 통해 메이저를 넘어선 세계를 만끽하게 했다. 속된 말로 2인자에도 끼지 못하고 잊힌 존재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내 자신은 그 축에도 못 낀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루이스 세풀베다의 <소외>를 떠올렸다. 저자가 나치 수용소 돌멩이에서 보았던 <나는 여기에 있었고, 아무도 내 이야기를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쓰인 글처럼 소외 된 것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강렬한 책이었다. 이 책에 소개된 것들의 의미가 나치 수용소의 글만큼은 아니더라도, 존재 자체를 잊혀가는 사람과 사물, 풍경에 대한 인터뷰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아차린 것이다.

 

  그런 인터뷰로 채워진 글이라면, 그다지 유쾌한 분위기는 아닐 거라 생각했다. 1등만 나열되어 있어도 심드렁한 반응을 보이는 것처럼,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세세함에는 더 관심이 없었다. 분명 이런 분위기를 견디지 못해 한 호흡에 읽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저녁 내내 책을 놓지 못해 다 읽어 버리고 가중된 무게감을 이기지 못해 한참을 침대에서 뒤척였다. 분명 주변의 이야기인데도 딴 세상을 만나는 것 같았고, 수많은 사연의 본질이 내 안으로 몽땅 들어온 기분이었다. 그로인해 어두워져 버린 마음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하면서도, 머릿속은 책 내용들로 마구 뒤섞이고 있었다. 관심도 없고, 궁금하지도 않았던 것들에 관한 이야기가 이토록 나를 혼란스럽게 할 줄 몰랐다. "절망은 감정의 거스러미이고, 세상 어디에도 논리적 절망이란 없다. 그리고 우스운 절망, 우스워할 만한 타인의 절망도 없다.(159쪽)" 이 말이 내 마음을 위로해 주었다. 하지만 파쇄 되는 책들이 떠오르는가 하면, 택배기사가 된 연극배우가 생각나고, 풀피리도 어엿한 전통 악기라는 사실을 일깨워준 한 인생이 스쳐가 혼란스럽기만 했다.

 

  흑백사진으로 점철된 바깥사람들과 사람들을 만나니, 마치 색깔이라곤 지녀 본적 없는 세계를 통과한 기분이 들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나는 바깥이 아닌 안에 살고 있다고 착각하며 살아온 삶이 와르르 무너지는 경험을 하면서도 혼자라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바깥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훨씬 더 자유롭고, 즐거우며, 만족해하는 모습을 보며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였다. 그렇다고 그들 모두가 자신의 의지대로 바깥세상을 만끽하며 살아가는 것은 아니었다. 어쩌다 보니, 시류를 잘 못 타서, 노력해도 되지 않아서 바깥에 머무르는 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불평불만으로 과거를 되짚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펼쳐질 미지의 삶을 향해 가는 모습을 보며 숙연해지곤 했다.

 

  그러나 기억되지 못하고, 잊혀진 것들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은 여전히 불편했다. 무언가 거슬리고 아류로 전략하는 기분은 나를 떠나지 않아, 바깥세상을 맘껏 둘러보고 있으면서도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마음이 꾸역꾸역 들어왔다. 이 인터뷰는 단순하지 않았다. 정상의 자리에 선 사람들을 찾아 나서는 식상함이 없었으나, 빛바랜 사진을 들여다보는 회한이 자리했다. 또한 글이 가볍지 않아 생각할 거리를 만들어 주었고, 바깥과 어우러진 저자의 시선은 녹록치 않게 다가올 때도 많았지만 바깥의 의미를 더 담근질했다. 내가 속한 곳이 어디인지를 끊임없이 생각하게 되었고, 안과 바깥의 경계가 필요하다는 저자의 말을 조금씩 이해해 갔다. 각자의 처소에서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며 큰 변화 없는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기도 했다. 

 

  스물여섯의 사연과 만나면서 주어진 것에 순응하며 살아가고 있는 많은 것을 봐왔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풍경이든 집약되어 지나온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바깥세상일지라도 결코 쉽게 넘볼 수 없는 것들이었다. 유명 산악인에 가려 주목 받지 못한 산악인이나, 돈만 보며 책을 만들지 않겠다는 출판사 사장이나, 달리지 않는 퇴역마나, 나름대로 삶의 의미, 더불어 바깥세상의 의미를 느끼며 살고 있었다. 인터뷰 하면서 '꿈'이라는 단어를 만지작거리며, 꿈꾸는 이들을 만나, 멋대로 해몽이란 걸 한 셈이라고 말한 저자처럼, 그들은 자기들만의 작은 꿈을 다져간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남들에게 비춰지지 않는 소소한 꿈일지라도, 자신 안에서는 얼마나 크게 부풀려지는지를 알게 되는 사람들이 그렇듯, 자기와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면 부풀린 꿈을 축소하는 것이 아닌 더 빵빵하게 채워 버린다. 부디 부풀려진 꿈이 허황되게 '뻥'하고 터지지 않길 바라며, 이들처럼 바깥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라도 서성이다 마주치면 반갑게 인사를 건네고 싶다. '아직 포기하지 않으셨군요!'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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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스케치 장 자끄 상뻬의 그림 이야기 4
장 자크 상뻬 지음 / 열린책들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무기력감에 정신을 놓고 있을 때, 존재감의 상실에 몸부림을 칠 때 힘이 되는 한 마디는 "책 사줄까?"다. 그 말을 들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눈이 반짝 빛나며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된다. 요즘 내가 그런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친구가 그 말을 건넸다. 친구도 내가 책이라면 거절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물었단다. 그 마음 씀씀이에 고마움을 느끼면서 갖고 싶은 책 중에서 최근에 구입하려고 마음먹은 <파리 스케치>를 골랐다. 상뻬의 책은 모두 소장하고 있는데, 어쩌다 이 책을 놓쳐 버렸다. 책을 주문했다며 힘내라는 친구의 말에 기분이 한껏 고조 되었다. 책이 언제 오나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다 도착하자마자 바로 책을 펼쳐 들었다. 상뻬 책은 언제 봐도 기분이 좋아져 사무실임에도 불구하고 혼자서 실없는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큼지막한 책에 펼쳐진 상뻬의 데생이 마음을 넉넉하게 해 주었다. 움츠러들고 강퍅해진 나의 마음을 위로하고 있어, 상뻬의 매력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를 하나하나 찾아갔다. 상뻬의 데생을 보고 있노라면 주변의 것들은 다 잊고, 오로지 책 속에 펼쳐진 세계만 쳐다보게 된다. 니콜라 시리즈만 보다가 오랜만에 데생 집을 봐서인지 더 여유롭고 자유로운 세계를 만끽한 기분이다. 더군다나 <프랑스 스케치>에서는 고층 건물이 빽빽이 들어찬 도시를 표현하기보다 시골의 풍경이 더 많아서 나의 기분과 잘 맞아 떨어졌는지도 모르겠다. 시골이라고 해서 데생의 공간이 남아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 편의 그림처럼 펼쳐진 자연이 보기 좋았다. 드넓게 펼쳐진 밭과 우거진 나무, 그 사이에 자리한 집과 사람들은 보기만 해도 푸근해지는 기분이었다.

 

  상뻬의 데생집이라고 해도 짤막한 글이나 대화가 있기 마련인데, <프랑스 스케치>는 글이 하나도 없었다. 오로지 상뻬가 그려낸 세계를 독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느껴야 했다. 글 보다 한 편의 그림이 더 많은 메시지를 전해 준다는 것을 알기에 맘껏 상상하며 즐거움을 만끽했다. 상뻬가 어느 배경을 그리던지 특유의 익살이 들어 있었고, 글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을 맘껏 표현하고 있었다. 드넓게 펼쳐진 시골 풍경에 수영장에 들어가 있는 젖소나, 마담 보바리를 읽고 있는 암탉은 익살을 자아냈고, 깜깜한 밤길을 라이트를 켜고 달리는 자전거, 들을 헤집고 와서 지나가는 기차에 손을 흔드는 모습은 흐뭇하게 만들었다. 간간히 끼어있는 도시 사람들의 모습이 대조를 이루면서도 많은 사람들의 일상을 지켜보는 것은 퍽 유쾌했다.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내서 그런지 상뻬의 데생 집 중에서도 유난히 <프랑스 스케치>는 내 마음을 사로잡는 것 같다. 실제의 시골은 푸근하거나 평화롭기보다, 지루하고 단순한 삶 속으로 빠지기 쉬운데 <프랑스 스케치>를 보면서는 동경에 눈빛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지금이라도 저런 곳에 살게 되면 내 삶이 좀 더 풍요로워 질 것 같다는 생각이 나는 사로잡았다. 자연 안에서의 고독도, 자잘한 불편함도, 여유와 평온함으로 모두 덮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느낌으로 드리워진 데생 때문에 동경의 눈빛을 보냈는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상뻬가 그려 낸 삶은 특이할 것이 없는 행복을 바라볼 수 있었다.

 

  <프랑스 스케치>를 보게 됨으로 상뻬의 데생 집을 모두 모으게 되었다. 상뻬의 책을 처음 볼 때만 해도 그의 작품을 모두 모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는데, 막상 이렇게 한권씩 모아 주르륵 꽂고 보니 예상외로 뿌듯했다. 기분이 울적할 때, 다른 세계로의 여행을 꿈꿀 때 꺼내면 언제나 나를 위로해 주는 상뻬의 데셍 집이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웃음과 해학과 유머가 늘 잠재해 있어 언제라도 부담 없이 볼 수 있다. 그래서 더 그의 작품을 사랑할 수밖에 없고 기다리게 되는 것 같다. 마음이 좀 힘들 때 선물 받은 책이어서인지, 유독 내 마음에 와 닿았던 <프랑스 스케치>. 봄바람이 더 따스하게 살랑 거리면 자주 꺼내서 보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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