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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향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3월
평점 :
품절
품절 된 <귀향>을 2년 전 한 서점 구석에서 구입했을 때만해도 무척 흥분했었다. 시중에서 구할 수 없는 책을 손에 쥐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무언가 굉장한 것을 얻은 기분이었다. 흥분이 가라앉을 새도 없이 책을 펼쳤건만 중간도 못 읽고 책을 덮어버렸다. 최근 들어서야 루이스 세풀베다 작품을 꺼내 읽게 되었고 <귀향>도 처음부터 다시 읽게 되었다. 읽어온 부분이 아깝긴 했으나 한 호흡에 읽지 않으면 뚝뚝 끊겨 버리는 느낌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아니다 다를까 두꺼운 편이 아닌 <귀향>을 밤늦도록 읽으면서, 이 책을 끊어서 읽었다면 아찔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가벼운 내용이 아니었고, 술술 읽혔지만 쉽게 넘어갈 수 없는 소재들로 채워져 있었다.
이 책의 줄거리를 간단하게 추려내자면,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경찰 두 명이 빼돌린 금화 63개를 독특한 이력을 가진 사람들이 찾아내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내용만 보고 장르소설로 단정 지을 수 없는 것은 저자가 써 내려간 기법을 떠나, 곳곳에 드러나 있는 정치적인 요소를 배제할 수 없어서였다. 당시 친구였던 한스 힐러만과 울리히 헬름은 <불의 땅> 티에라 델 푸에고로 떠날 것을 약속하고 금화를 훔쳐낸다. 그러나 한스 힐러만은 친구를 배신해 혼자 남미로 떠나고, 울리히 헬름은 모진 고문으로 불구자가 되고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금화를 찾을 방법을 모색한다. 자신이 직접 움직일 수 없어 적절한 인물을 물색하다, 칠레에서 게릴라로 활동하고 망명중인 후안 벨몬테를 찾아간다. 클럽의 문지기로 지내고 있던 그에게 제안을 거절할 수 없게 만든 다음, 칠레로 떠나게 하는데 금화를 찾아 나선 것은 후안 벨몬테 뿐만이 아니었다.
구동독의 정보 부대 실무자였던 중령은 실직자가 된 정보부 장교인 갈린스키를 찾아가 금화를 찾아올 것을 명령한다. 누구의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금화를 과연 누가 찾아낼 것인가에 흥미를 더했으나, 후안 벨몬테에게 유리하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울리히 헬름이 후안 벨몬테를 선택했던 것은 게릴라로 활동했던 그의 경험이었고, 오랜 세월 칠레 땅을 밟지 못했지만 그 경험은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한다. 후안 벨몬테를 도와 줄 친구들이 있었고, 금화를 꼭 찾아야 할 동기부여(사랑하는 베로니카를 구하는 일)가 충분했기에 이미 게임의 결과는 드러났다. 그렇더라도 그가 금화를 찾아내는 과정과 갈린스키와의 대결이 어떻게 전개될지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급한 나의 마음과는 달리 저자는 감질맛 날 정도로 더디게 전개시켜 갔고, 그 과정에 수많은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한스 힐러만과 울리히 헬름의 이야기, 대령과 갈린스키, 무엇보다 후안 벨몬테의 이야기가 많았다. 조각조각 펼쳐지는 과거부터 베로니카에 대한 애정, 칠레로 향하는 마음가짐, 그곳에서의 사건들이 마구 뒤섞였다. 가볍게 넘길 수 없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들은 책을 놓을 수 없게 만들었고, 책들 다 읽은 후에는 묵직함이 나를 짓눌렀다. 책 내용이 주는 무게는 제각각이지만, 이렇게 무게감 있는 책들을 만날 때마다 숨을 깊이 들이쉬지 않으면 답답함에 잠을 설치게 된다. 그럼에도 무언가 후련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고, 세상에는 나와 거리가 먼 이야기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새삼스레 되새겨 보았다.
독일과 남아메리카의 혼란스러웠던 정치 상황들과 함께 인물들의 행보가 그려졌기에, 그들이 겪어온 일들은 퇴색된 이야기로 치부해 버리기엔 석연치 않은 점들이 많았다. 후안 벨몬테가 칠레를 다시 찾았을 때,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인 나라를 자랑스럽게 생각했지만 여전히 껍데기를 둘러쓰고 있다고 생각했다. 과도기를 직접 겪은 장본인이었고, 당시의 상처는 수습되지 않은 채 방치되는 것들이 너무 많았으며(베로니카도 당시의 피해자였다.), 나치시대에 활동했던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곳이었다. 그런 감회를 뒤로한 채 후안 벨몬테는 울리히 헬름이 제안했던 금화를 찾기 위해 행동에 나서야 했다. 이미 갈린스키가 도착해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보다 먼저 금화를 찾기 위해선 친구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미 울리히 헬름이 보낸 편지로 금화를 찾으러 그들이 왔다는 사실을 알고 한스 힐러만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였다. 이젠 갈린스키와 후안 벨몬테의 대결만이 남아 있었다.
갈린스키가 금화를 찾지 못할 거라 단정 지을 수밖에 없던 이유는 그의 전력으로 인한 잔인함과 솔직하지 못한 것, 궁지에 몰린 그의 처지였다. 그런 정황으로 갈린스키의 승리를 확신하기 힘들었고, 궁지에 몰린 처지는 비슷하더라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고 솔직해야 할 때를 가려내는 후안 벨몬테가 금화를 찾아낼 거라 확신했다. 갈린스키는 한스 힐러만의 집에 접근하는 것부터, 애먼 사람을 고문한 일, 너무 자신만 믿은 것으로 인해 죽임을 당했다. 후안 벨몬테를 비롯한 한스 힐러만의 주변 사람들에게나 금화는 쓰레기일 뿐이었고, 그것이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금화를 찾는 것이 중요한 사건이 되긴 했으나, 그것은 숨겨진 금화만큼이나 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끌어내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귀향>을 통해 유럽과 남미를 오가며, 어느 곳에도 소속되지 못한 소외된 사람들을 만난 것 같다. 밝은 빛을 품어내지 못한 어두운 역사를 더듬는 기분이었고, 그것을 안은 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그런 이야기에 추리적 요소를 가미해서 자칭 누아르 소설, 흑색 소설이라 칭하며, 다양한 소설기법을 선보인 저자의 역량에 감탄할 뿐이다. 쉽게 읽을 수 있지만, 읽고 나면 소설의 무게감에 휘청거릴지도 모르는 <귀향>은 동떨어진 느낌을 주는 동시에 지난 역사의 과오를 씻어내지 못함을 느끼게 된다. 후안 벨몬테가 분신으로 생각될 만큼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저자이기에, 행동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준 그의 행보에 주목하게 된다. 앞으로도 저자의 다양한 작품을 꾸준히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