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나는 바깥으로 들어갔다 - 스물여섯의 사람, 사물 그리고 풍경에 대한 인터뷰
최윤필 지음 / 글항아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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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제목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편은 아니지만, <어느 날 나는 바깥으로 들어갔다>의 제목엔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바깥으로 들어가다'라는 의미 자체가 모순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바깥의 뜻은 '밖이 되는 곳(네이버 국어사전)'인데, 밖이 되는 곳을 '들어갔다'고 해도 되나 싶었다. 바깥을 다른 세상으로 치부하자면 굳이 안 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더 깊이 생각하려 하니 자꾸 헷갈리기만 했다. 무엇이 저자를 바깥으로 인도했는지 궁금증을 풀어야만 책들 제대로 읽을 수 있을 것 같아 오랜만에 책 제목을 음미하게 된 것이다. 책머리를 열자마자 저자의 '바깥'의 의미가 순식간에 내 안으로 들어왔다. '바깥은 안과 맞버텨야만 서는 단어다. 그래서 경계가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경계는 '아주 허술하고 느슨할 것이다.'라며 긴장을 풀어주고 있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바깥'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물들에 대한 인터뷰가 어떤 식으로 펼쳐질지 알 수 없으나, 분명 익숙하고 무덤덤한 만남은 아닐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분명 '스물여섯의 사람, 사물 그리고 풍경에 대한 인터뷰'라고 나와 있는데도, '인터뷰'에만 집중한 나머지 정작 사물과 풍경이 등장했을 때는 당황하고 말았다. 사물과 풍경에 대한 인터뷰가 가능하냐는 초보적인 견해부터 이 책에 담긴 '바깥'의 의미를 여전히 파악하지 못한 결과였다. 정신을 수습하고 인터뷰를 꼼꼼히 읽어나가다 보니, 그제야 책 속에 담긴 숨은 의미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자는 나름대로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마이너리티를 만났고, 그런 풍경을 보여줬으며, 사물을 통해 메이저를 넘어선 세계를 만끽하게 했다. 속된 말로 2인자에도 끼지 못하고 잊힌 존재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내 자신은 그 축에도 못 낀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루이스 세풀베다의 <소외>를 떠올렸다. 저자가 나치 수용소 돌멩이에서 보았던 <나는 여기에 있었고, 아무도 내 이야기를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쓰인 글처럼 소외 된 것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강렬한 책이었다. 이 책에 소개된 것들의 의미가 나치 수용소의 글만큼은 아니더라도, 존재 자체를 잊혀가는 사람과 사물, 풍경에 대한 인터뷰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아차린 것이다.

 

  그런 인터뷰로 채워진 글이라면, 그다지 유쾌한 분위기는 아닐 거라 생각했다. 1등만 나열되어 있어도 심드렁한 반응을 보이는 것처럼,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세세함에는 더 관심이 없었다. 분명 이런 분위기를 견디지 못해 한 호흡에 읽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저녁 내내 책을 놓지 못해 다 읽어 버리고 가중된 무게감을 이기지 못해 한참을 침대에서 뒤척였다. 분명 주변의 이야기인데도 딴 세상을 만나는 것 같았고, 수많은 사연의 본질이 내 안으로 몽땅 들어온 기분이었다. 그로인해 어두워져 버린 마음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하면서도, 머릿속은 책 내용들로 마구 뒤섞이고 있었다. 관심도 없고, 궁금하지도 않았던 것들에 관한 이야기가 이토록 나를 혼란스럽게 할 줄 몰랐다. "절망은 감정의 거스러미이고, 세상 어디에도 논리적 절망이란 없다. 그리고 우스운 절망, 우스워할 만한 타인의 절망도 없다.(159쪽)" 이 말이 내 마음을 위로해 주었다. 하지만 파쇄 되는 책들이 떠오르는가 하면, 택배기사가 된 연극배우가 생각나고, 풀피리도 어엿한 전통 악기라는 사실을 일깨워준 한 인생이 스쳐가 혼란스럽기만 했다.

 

  흑백사진으로 점철된 바깥사람들과 사람들을 만나니, 마치 색깔이라곤 지녀 본적 없는 세계를 통과한 기분이 들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나는 바깥이 아닌 안에 살고 있다고 착각하며 살아온 삶이 와르르 무너지는 경험을 하면서도 혼자라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바깥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훨씬 더 자유롭고, 즐거우며, 만족해하는 모습을 보며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였다. 그렇다고 그들 모두가 자신의 의지대로 바깥세상을 만끽하며 살아가는 것은 아니었다. 어쩌다 보니, 시류를 잘 못 타서, 노력해도 되지 않아서 바깥에 머무르는 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불평불만으로 과거를 되짚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펼쳐질 미지의 삶을 향해 가는 모습을 보며 숙연해지곤 했다.

 

  그러나 기억되지 못하고, 잊혀진 것들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은 여전히 불편했다. 무언가 거슬리고 아류로 전략하는 기분은 나를 떠나지 않아, 바깥세상을 맘껏 둘러보고 있으면서도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마음이 꾸역꾸역 들어왔다. 이 인터뷰는 단순하지 않았다. 정상의 자리에 선 사람들을 찾아 나서는 식상함이 없었으나, 빛바랜 사진을 들여다보는 회한이 자리했다. 또한 글이 가볍지 않아 생각할 거리를 만들어 주었고, 바깥과 어우러진 저자의 시선은 녹록치 않게 다가올 때도 많았지만 바깥의 의미를 더 담근질했다. 내가 속한 곳이 어디인지를 끊임없이 생각하게 되었고, 안과 바깥의 경계가 필요하다는 저자의 말을 조금씩 이해해 갔다. 각자의 처소에서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며 큰 변화 없는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기도 했다. 

 

  스물여섯의 사연과 만나면서 주어진 것에 순응하며 살아가고 있는 많은 것을 봐왔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풍경이든 집약되어 지나온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바깥세상일지라도 결코 쉽게 넘볼 수 없는 것들이었다. 유명 산악인에 가려 주목 받지 못한 산악인이나, 돈만 보며 책을 만들지 않겠다는 출판사 사장이나, 달리지 않는 퇴역마나, 나름대로 삶의 의미, 더불어 바깥세상의 의미를 느끼며 살고 있었다. 인터뷰 하면서 '꿈'이라는 단어를 만지작거리며, 꿈꾸는 이들을 만나, 멋대로 해몽이란 걸 한 셈이라고 말한 저자처럼, 그들은 자기들만의 작은 꿈을 다져간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남들에게 비춰지지 않는 소소한 꿈일지라도, 자신 안에서는 얼마나 크게 부풀려지는지를 알게 되는 사람들이 그렇듯, 자기와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면 부풀린 꿈을 축소하는 것이 아닌 더 빵빵하게 채워 버린다. 부디 부풀려진 꿈이 허황되게 '뻥'하고 터지지 않길 바라며, 이들처럼 바깥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라도 서성이다 마주치면 반갑게 인사를 건네고 싶다. '아직 포기하지 않으셨군요!'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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