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8 제너시스 내인생의책 푸른봄 문학 (돌멩이 문고) 7
버나드 베켓 지음, 김현우 옮김 / 내인생의책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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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장을 펼친 지 얼마 되지 않아 나의 취향과 한참 색깔이 다른 책이라는 걸 감지했다. 이 책에 대한 찬사를 보고 나름대로 기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취향을 충족시키지 못한 데서 오는 실망감이었다. 그렇더라도 무조건 책을 덮어 버릴 수 없는 노릇이라 나름 정독하면서 완독을 했는데, 충격적인 결말이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 나를 휘감고 돈다. 책을 읽는 동안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결말이라는 데서 오는 충격이기도 했고, 꼭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하는 안타까움이기도 했다. 독특한 구성과 소재에 호기심이 일었으나, 내가 소화할 수 없는 내용이라는 것을 알고 풀이 죽었음에도 끝까지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 책을 읽는 과정은 힘이 들었을지 모르나 결말 앞에서 망연자실한 내 모습이 수습이 되지 않았다. 힘겨웠던 과정은 일순간 사라지고 결말 앞에서 오롯이 나를 마주하고 있는 기분이다. 책을 읽는 내내 이 책에 대한 느낌을 남길 자신이 없다는 생각이 강렬했음에도 결말을 알고 난 후에는 나름대로 할 말이 많게 느껴졌다. 그것은 상실감 때문이 아닌가 싶다. 책 속의 배경이 미래의 모습이라 생각해 본적은 없었지만 그렇게 허무하게 의식이 사라져 버리도록 내버려두면 안 될 것 같았다. 인간미를 잃어버리고, 인간화 되지 못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기분이 어떨지 주인공 아낙시맨더를 통해 충분히 경험했기 때문이다.

 

  저자의 독특한 이력만큼이나 책 속에 내포된 의미는 많은 나라에서도 화제가 되었나 보다. 띠지만 살펴보아도 인지과학, 분자생물학, 진화론, 플라톤 철학을 한 권에 담아냈다고 했으니, 나와 거리가 먼 소설이라고 생각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다만 이런 주제를 어떻게 섞었을지, 그런 분야에 문외한인 내가 어떻게 읽어 나갈 수 있을지 궁금했지만 드문드문 이해를 하다가도 대부분 헤매기 일쑤였다. 철학자들이 통치하는 공화국의 최고기관인 학술원에 들어가려는 아낙시맨더(아낙스)와 시험관의 대화로 이루어진 소설은 소크라테스의 문답 형식을 빌리고 있었다. 총 네 시간동안 구술로 시험을 보는 아낙스와 시험관의 대화의 주제는 아담 포드라는 인물에 관한 이야기였다. 인간으로써 공화국에 나름대로 맞선 인물인 그를 연구한 아낙스는 시험관과의 대화를 통한 시험으로 학술원의 합격여부를 가르게 되어 있었다.

 

  네 시간동안 시험이 치러지고 잠깐의 쉬는 시간이 있는 가운데 아담 포드의 삶, 아낙스가 아담 포드에 갖고 있는 생각을 뛰어넘은 논리와 이상, 시험관들은 아담 포드의 삶을 통해 아낙스가 품고 있는 생각을 엿보려 했다. 시험 시간 동안 단순히 아담 포드의 삶만으로 채워진 것이 아니라 때로는 아담 포드가 한 작은 행위의 이면까지 간파하며 추론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 안에는 미래의 모습에 대한 변화와 공화국의 배경, 인간으로서 가지는 가지와 의식, 인간미까지 모두 드러나 있었다. 아담 포드가 인간이었던 것은 분명하나 아낙스가 아담 포드의 삶을 연구하고, 그 안에 숨은 뜻을 시험을 통해 드러내는 것을 보면서 아낙스가 인간이라 단정 지을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은 대전쟁 이후 오랑우탄을 본떠서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과 아낙스도 시험관들도, 자신이 학술원에 지원할 수 있도록 지도해준 펠리클레스 선생님도 모두 인간이 아닌 오랑우탄과 가까운 기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진실이 밝혀지는 한 시간을 제외한 3시간 동안 인간의 감성을 내세워 자유를 갈망했다는 아담 포드의 삶에 대해 왜 저렇게 파고드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때론 따분했고 지난했으며 아무리 학술원에 들어갈 수 있는 과정이라고 해도 왜 그렇게 집착하는지 알 수 없었다. 시험을 통해 아담 포드의 짧은 생애가 낱낱이 밝혀지다 기계인 아트와의 생활과 대화가 주된 주제로 떠올랐다. 기계는 기계에 지나지 않는지, 아니면 인간과 같이 사고할 수 있고 행동할 수 있는지에 대해 끝없는 갈등과 신뢰를 낳다 아담 포드와 아트가 동시에 탈출하는 것에서 소설은 일단락되어지는 듯 했다. 그러나 시험관들은 술수까지 동원해 그런 아담 포드의 행동과 사고 속에서 아낙스가 갖고 있는 생각을 도출해 내려 애썼고, 아낙스 또한 자신의 생각을 뚜렷이 드러내야만 학술원에서 역사학자의 길을 펼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은 함정에 지나지 않았고, 생각지도 못한 반전 앞에서 아연실색한 것은 비단 아낙스 뿐만이 아니었다.

 

  빈틈을 허용하지 않는 시험이 끝날 때마다 휴식 시간이 주어졌는데, 그때마다 아낙스는 페리클레스 선생님을 만난 것부터 지금 이 자리에 온 것까지 모든 것을 떠올렸다. 그랬기에 독자인 나도 온전히 학술원에 들어가기 위한 과정이라 생각했고, 독특한 구성으로 소설이 씌였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낙스가 아담 포드의 삶을 보면서 느끼는 모든 감정과 의식 속에 잠재해 있는 위험(아담 포드의 삶을 옹호하는)이 감지되자 시험관과 학술원, 페리클레스 선생님의 정체까지 모두 드러난다. 철저하게 기계로 살아가야 하는 공화국에서 아담 포드와 같은 의식을 가진 오랑우탄은 허용할 수 없었다. 그 시험은 학술원으로 가장해 그런 의식을 가진 자들을 걸러내는 장치에 지나지 않았고, 4시간의 시험은 그런 자들을 분별해내는 과정이었다. 페리클레스 선생은 아담 포드와 같은 의식이 농후한 자들을 골라 학술원 시험을 준비시켰고, 판단은 시험을 보는 동안 가려졌으며 지원자의 최후 또한 결정되었다.

 

  '다른 방법이 있을 거'라는 아낙스의 마지막 말은 감정을 가진 모든 생명체의 최후를 보는 듯 했다. 미래의 세계가 그렇게 메말라가고 획일화 되어 간다 생각하니 끔찍하면서도 잠자코 지켜볼 수밖에 없는 내가 무척 미미한 존재로 느껴졌다. 아낙스와 시험관이 아담 포드의 삶에 빗대어 드러낸 모든 논쟁 속에 많은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해도, 그 모든 것을 간파할 능력도 없거니와 아낙스의 최후 앞에 덩그러니 놓여진 '인간의 의미'만이 나를 뜨겁게 만들었다. 하잘것없는 내 모습이라고 해도 이런 모습을 잃어버린다면, 살아가는 의미를 잃어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세계를 통째로 잃어버리고, 감정을 가진 인물이 바이러스처럼 퍼질 것을 우려해 철저히 제어를 가하는 공화국의 모습은 상상하기 싫은 세계다. 그런 모습이 현재에 이미 잠재해 있다 해도, 인간의 본연의 모습을 잃어버리는 것이야말로 종말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꽤나 묵직한 주제를 담고 있는 소설 속에서 내가 찾은 것은 겨우 이것뿐임에도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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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제임스 설터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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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권의 책을 읽어낸 느낌치고는 너무나 생경해 당황스럽다. 언뜻 에드워드 호퍼를 떠올리게 만드는 겉표지에 친근감이 갔지만 다른 화가의 작품이라는 사실과 낯선 저자의 이름이 긴장감을 주었다. 책을 펼쳐보고 싶은 마음을 강렬하게 만들면서도, 책장을 여는 순간 현재의 나로 다시 되돌아올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겉표지, 저자, 제목만으로 이토록 긴장하기는 오랜만이었고 그 기억을 상기시키듯 책을 읽는 내내, 책장을 덮고 난 뒤까지 끈적끈적하게 달라붙는 느낌은 상실과 환희라곤 맛볼 수 없는 지지부진함이었다.

 

  단편을 읽으면서 이렇게 길을 잃어 본 것은 처음이다. 이야기의 시작과 끝은 물론이고 책 속에 들어와 있는 도중에도 길을 잃기 일쑤였다. 등장인물의 이름을 잃고, 이야기의 흐름을 잃었으며, 그들의 의식가운데 담겨있는 고뇌를 잃었다. 그래서인지 10편의 단편을 읽었음에도 어떤 한 인물이 뚜렷이 기억나지 않았고, 각자의 색깔을 까지고 있음에도 하나의 덩어리로 뭉뚱그려진 느낌이 들었다. 분명 그들을 좇고 있었는데 왜 그렇게 헤맸으며 걸핏하면 길을 잃었던 것일까. 삶에서 마주치기 싫었던 것들을 그들 가운데 마주하고 말아 도망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나름대로의 색깔을 지녔다고는 해도 비슷한 느낌으로 기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공통된 소재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결혼, 사랑, 불륜, 배신으로 점철된 사람들의 이야기는 도피하고 싶은 인생의 단면이었다. 행복한 삶을 향해가도 독자들의 마음을 움직일까 말까인데 이런 주제들로 채워진 단편들 속에서 무엇을 갈망해야 하고, 무엇을 나누어야 하는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절망과 극단의 끝에서 범희망적인 가치를 꿈꿀 수 있다 해도 나의 내면은 온통 기억하고 싶지 않은 얼룩들로 채워진 것 같다. 아내의 귀걸이를 정부에게 선물로 주고 쾌락에 몰두하는 남자, 자신의 집에 머물러 있는 시인과의 관계를 눈치 챈 부인, 젊은 시절의 사랑을 다시 만났지만 겁이 나 도망치는 남자, 사랑의 실패와 성적 욕망이 뒤범벅된 여자들의 이야기 등 어느 하나 유쾌한 축에 못 드는 이야기들뿐이다.

 

  그런 이야기를 피하고 싶으면서도 간과할 수 없었던 것은 인간 내부에 깊이 포진되어 있는 뒤틀린 욕망과 어긋나고 싶지 않은 삶에 대한 반듯한 잣대 때문이 아니었을 까란 생각이 들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꼭꼭 감추어둘 욕망을 서슴없이 드러내고, 행동하며, 거리낌 없이 삶을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 적어도 이 책 속의 인물들은 내 눈에 그렇게 보였다. 그렇다고 그들이 상실감에 겨워 불행하다는 느낌이 든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본능에 충실하며, 있는 그대로 삶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저자 또한 뚜렷한 결말을 내어주거나 인물들의 감정을 드러내기보다, 옆에서 지켜보며 담담히 그려내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 모든 이야기를 창조한 것이(많은 소재를 실재에서 재구성했다하더라도) 저자라고 해도 타인의 인생의 단면을 기록한 듯 어떠한 감정이입이 없어 보일 정도였다. 다만 '행복은 다른 걸 갖는 게 아니라 언제나 똑같은 걸 갖는 데 있다는 걸 난 몰랐어.' 라고 말한 <방콕>의 여인처럼 삶의 진리가 책 속에 듬성듬성 박혀 나를 한없이 찔러대고 있었다.

 

  이 책의 제목인 <어젯밤>은 가장 마지막에 실려 있어 그런 분위기를 고조시켜 주었다. 병든 아내의 자살은 도운 남편은 애인과 함께 뜨거운 밤을 보내지만, 다음 날 아침 침실에서 걸어 나오는 아내를 보고 경악하고 만다. 애인과의 관계는 그렇게 끝이 났고, '그냥 그게 전부였다.'라고 끝맺음을 한 부분에서 이 책의 독특한 분위기를 완벽하게 마무리 짓고 있는 것 같았다. 단편집이기에 꼭 순서를 지킬 필요는 없으나 순차적으로 읽어나간 뒤 만난 <어젯밤>은 마지막에 실려 있는 것이 유종의 미를 거두려 거드름을 피웠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나와는 거리가 먼, 혹은 내가 살고 싶지 않은 삶을 살아낸 사람들을 지켜보면서 불쾌감이 일었지만 비난할 여지는 충분하지 않았다. 길을 헤맸을지언정 그들의 인생을 지켜본것 뿐이고,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내고 있는 삶의 일부분을 본 것뿐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무어라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단지 나와는 다른 삶이라는 차이를 둘 밖에는.

 

  대화체 옆에 연결된 문장 때문에 읽기에 헷갈렸던 나만큼이나 옮긴이는 번역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고 한다. 너무나 유명한 작가이고 문장에 들어있는 엄청난 의미를 온전하게 옮긴다는 것은 어쩜 불가능 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 또한 어색한 번역체를 읽다 단아한 우리 문장을 읽을 때의 차이를 알기에 옮긴이의 고역과 내가 느낀 낯섦을 이해하는 바이다. 하지만 모두가 찬사하는 작품이더라도 나와 맞는다는 보장은 없다. 그런 면에서 <어젯밤>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고 싶고 제임스 설터라는 작가에 대해 조심스러워 진다. 먼 훗날 원서로 그의 책을 읽을 때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경험을 하게 되는 날이 오더라도, 현재 나에게 제임스 설터는 미지의 세계에서 온 작가다. 앞으로 그의 행보를 지켜봐야겠지만 낯설고 당황스러운 첫 만남으로 그를 판단해 버리는 실수를 범하지 않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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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현의 얼굴 - 그의 카메라가 담는 사람, 표정 그리고 마음들
조세현 지음 / 앨리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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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참 활자에 중독되어 있을 때, 오로지 읽는 것에만 치중해 사진으로 채워진 책이나 데생 집 같은 책은 멀리했었다. 읽을거리가 없다는 이유에서였고, 느낌을 어떻게 남겨야 할지 난감했기 때문이다. 다양한 책을 접하면서 이런 생각이 얼마나 짧았는지를 깨닫게 되었고, 글에서 맛볼 수 없는 매력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 연유로 사진집에 조금씩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읽을거리가 없다는 편견은 깨진지 오래였으나 여전히 느낌을 남겨야 하는 부분에서는 어려움이 따른다.

 

  국내에서 굵직한 사진가로 알려져 있음에도 사진에 관해서 문외한인 내게는 이름조차 낯설었다. 책을 읽다 여기저기서 그에 관한 정보를 듣고는 그제야 약간의 기억이 떠올랐지만, 그와의 조우는 처음이니 이 만남으로 인해 온전한 시간이 되길 바랐다. 저자는 중국 시안에서 찍은 사진들로 채워 짧은 글과 함께 <얼굴>이라 책제목을 붙였다. '사람의 표정을 사진에 담는 건 마음과 마음을 나누는 일이다.' 라고 말한 저자는 그야말로 다양한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었다. 시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네 70~80년대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당시에 우리도 저런 표정을 가지고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순수한 웃음이 배어나는 얼굴이 많았다.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꾸미지 않은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담겨있는 얼굴을 보면서 평범한 사람들이지만 특별한 삶을 살아내고 있다고 느껴졌다. 저자 또한 그런 사람들의 통해 '삶이란, 그 존재로 이미 반짝반짝 빛난다는 것을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삶이 그 자체로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그들의 무심한 표정에서 배운다.' 라고 했듯이 일상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특권인 것 같았다. 무심한 표정의 이면에는 '타인을 향한 호기심으로 스스로를 무장해제시키는 웃음.' 도 담겨 있었다. 웃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서 무엇을 하며 살아갈까, 가족은 몇 명이나 될까, 자신의 삶에 행복해 할까 등 나름대로 다양한 상상을 하게 되었다.

 

  활자로 읽지 않고 이면을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사진의 매력이 아닌가 싶다. 예전에는 글이 없다고 투덜대며 쉽게 넘기던 책장을 오랫동안 붙들면서 사진이 찍힌 순간의 찰나와 사진 속에 담겨지지 않은 세계를 만들어 보려 애썼다. 저자도 '구구절절한 문장들을 거둬내고 간결한 한마디로 모든 이야기를 담아내는 것.'이 작업의 묘미를 느끼는 순간이라고 했으니, 그 사진을 보는 많은 사람들에게 묘미가 전달될 거라 생각한다. 사진을 찍으면서, 찍어온 사진을 보면서, 혹은 찍히지 않은 곳을 마음에 담으면서 사진가는 많은 것을 느꼈을 것이다. 그곳에 자신이 존재한다는 생각과 함께 살아있음을 불쑥불쑥 떠올리게 만드는 것이 사진을 찍는 일에 앞서 마음을 여는 일일 것이다. 풍경 속에 자신이 녹아들게 만들고, 마음에 따라 사진의 양상이 달라지듯이 사진을 찍는 것은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삶의 찰나를 살아가고 있는 과정이다.

 

  그 모든 것이 잘 녹아 있는 것이 시안 사람들의 얼굴이 찍힌 사진집이었다. 얼굴을 보며 단순하게 표정만 지나칠 때도 있고, 흔적을 추측하기도 하며, 사진 속 배경을 탐문하기도 했다. 잘 찍힌 사진집이 만들어졌다는 생각보다 마음과 마음이 얽혀 보는 이에게도 얽힘을 유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저자는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강의할 때 '사진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이며 때문에 사진가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고 강조한다고 한다. 사진에 대해 잘 알아야만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것을 타인에게 보여주는 사진가가 좋은 사진가이고, 사진을 보면서 찍는 이의 시선을 넘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독자가 깊은 시선을 가진 사람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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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인격 개암 청소년 문학 6
마거릿 피터슨 해딕스 지음, 최제니 옮김 / 개암나무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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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건은 순식간에 일어난다. 평화롭던 일상이 뒤집히고 익숙했던 사물들이 낯설게 보이는 시점은 사건이 발생하는 순간부터다. 그런 변화를 가져오는 사건은 기쁨을 동반하기보다 대부분 혼란과 당황스러움 복잡함을 달고 찾아오기 마련이다. 13살을 앞둔 베서니만 해도 그랬다. 일상의 변화를 맞이하다 못해 알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가운데 아무런 설명 없이 혼자 남겨지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일면식도 없는 마일리 이모 집에 오게 되었지만 부모님은 베서니를 그곳에 맡겨둔 채 떠나버리고 만다. 과연 그런 현실은 베서니가 감당할 수 있을까? 베서니의 부모님은 왜 갑자기 그런 결정을 한 것일까? 답답한 시간이 흘러가는 가운데 궁금증은 끊이질 않았고, 책장은 더디게 넘어갔다.

 

  책의 약 1/3 지점에서 조금씩 의문이 풀리기 시작했으니 초반의 지난함은 당연했다. 그 후로 해일이 몰아치듯 놀라운 사실들이 밝혀질 때마다 순식간에 뒤바뀐 분위기를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몰랐다. 처음에는 베서니의 부모님이 아무런 설명을 해 주지 않은 채 이모 집에 남겨두고, 핸드폰을 해지하면서까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이 무척 답답했다. 베서니가 할 수 있는 일은 부모님의 행동에 대해 자책하거나 이모네 집에서 적응하는 것밖에 없었다. 마일리 이모는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 했지만 베서니의 부모님과 통화하면서 엿듣고, 이모네 이웃들이 말하는 '엘리자베스'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말해줄 뿐이었다. 엘리자베스가 자신의 언니였다는 사실만으로 충격을 받은 베서니에겐 그 일은 시작에 불과했다.

 

  자신의 언니인 엘리자베스의 이야기를 자신에게도 사촌인 조스에게 전해들은 베서니는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분명 엘리자베스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고, 사고로 목숨을 잃은 후에 이모네와 부모님은 단절된 생활을 해왔었다. 무엇보다 그 모든 사실을 부모님은 자신에게 철저히 숨겨왔고, 베서니를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심하게 과잉보호를 했다. 그럼에도 부모님이 왜 자신을 이곳에 맡겨두고 떠나버렸는지 여전히 의문은 충족되지 않았다. 갑갑하고 답답한 상황만 이어질 뿐, 누구하나 속 시원히 사건의 전말을 말해주지 않았다. 모든 열쇠의 키는 부모님이 쥐고 있는데, 그런 부모님하고는 연락이 되지 않았고 최근 부모님의 행동에 이상이 찾아온 것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엄마는 늘 울기만 하고 아빠는 더 말이 없어졌다. 그리고 자신은 낯선 이모네 집에 맡겨져 지금껏 몰랐던 언니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 언니와 베서니는 너무나 닮아 언니가 어린 시절을 보낸 이모네 도시에서 많은 사람들이 베서니를 엘리자베스로 착각했다. 그런 베서니는 엄마부터 더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된다. 자신은 엘리자베스 언니의 복제 인간이라는 사실이었다. 아빠가 보낸 여러 개의 출생증명서와 거액의 돈,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다는 내용의 편지가 엄마의 말을 뒷받침 해 주고 있었다. 베서니는 정말 복제인간일까? 자신만의 고유 정체성을 지니지 못한 채, 언니를 잃은 슬픔으로 채워진 부모님의 복제품에 지나지 않은 것일까? 그때부터 베서니는 자신이 이곳에 와있다는 현실이 하찮게 느껴질 정도로 정체성 혼란을 겪게 된다.

 

  청소년들이 겪는 혼란을 질풍노도라고 표현할 정도로 존재감에 대한 고민과 방황은 꼭 한번쯤 찾아온다. 그러나 그런 혼란은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아래 이루어지는 감정이고, 그 과정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은 큰 영향을 받는다. 과연 베서니에게 닥친 현실을 질풍노도라고 단순하게 규명지어 버릴 수 있을까? 자신이 복제인간이라는 사실 앞에 정체성은 물론이고 존재조차 의심받고 있는 상황인데? 그동안의 자잘한 고민들과 의문들이 한낱 먼지처럼 느껴질 만큼 베서니에게 닥친 현실은 어느 누구도 가질 수 없는 혼란의 연속이었다. 혼란은 낯선 남자가 베서니의 뒤를 쫓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짐으로 두려운 감정으로 바뀌게 된다. 자신의 정체에 대해 정확히 모르는 상황에서 낯선 남자와 아빠의 과거 행적이 드러났지만 그의 곁에는 이모와 조스밖에 없었다. 그들이 과연 베서니를 그 남자로부터 보호해 줄 수 있을까?

 

  한 편의 서스펜스를 만난 듯한 느낌에 사로잡혀 더디게 넘겨지던 책장은 후반에 이르러 정신없이 넘어갔다. 과연 어떤 내막이 숨겨 있는지, 베서니의 정체는 그 동안의 사건과 어떻게 결부시켜질지 조마조마했다. 결국 부모님과 베서니를 뒤쫓던 남자가 대면하면서 그동안의 모든 사연이 밝혀졌다. 과연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란 의문의 과녁에 베서니가 복제인간이라는 화살은 명중했다. 그 사실이 언론에 밝혀짐으로 돈과 과학의 발전, 명예만을 중시하는 세태 속에서 베서니는 나름대로 잃어버렸던 정체성을 되찾는다. 자신을 괴롭혔던 언니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또 다른 인격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두 사람이 완전히 똑같지 않기 때문에 나는 그들의 능력을 따로 떼어 놓고 생각한단다.' 라고 말해주는 선생님이 있어 베서니는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자신의 출생에 아픔과 복잡한 사연이 얽혀있었지만 현재에 존재하는 자신을 더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베서니가 존재감을 찾아가는 과정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낯설었다. 그러나 청소년들이 겪고 있는 혼란과 방황이야말로 그들에게 현실로 인정하고 싶지 않을 만큼 복잡다단한 시기라는 것을 말해 주는 듯 했다. 존재의 가치가 무너질 때,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는 절망이 밀려올 때 청소년뿐만 아니라 인간은 좌절하고 만다. 각자에게 주어진 존재의 가치의 농도가 다를 뿐, 베서니처럼 복잡하고 특별한 경우라도 고민하고 성장하는 과정은 대부분 비슷하다. 만약 베서니가 혼자였다면 혼란함과 두려움을 잘 이겨냈을 거란 확신이 없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떠난 부모님은 제쳐두고라도 마일리 이모와 조스 언니가 곁에서 함께 그 시간을 견뎌 주었기에 베일리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 더 빨리 용기를 얻었는지도 모르겠다. 존재의 근원을 떠나 인간과 인간이 서로 기댈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게 되었고, 옮긴이의 말마따나 '지독한 안개 속을 걸어 나온 듯한 느낌'이라는 말에 동조하게 된 소설이었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소설과 함께 추천된 베토벤의 소나타 21번 '발트슈타인'을 들으며, 우리는 모두 고유한 인격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자신감을 얻는 것밖에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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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에서 영성으로
이어령 지음 / 열림원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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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이어령님이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도, 딸로 인해 종교를 갖게 되었다는 사실도 몰랐다. 최근에 출간된 저자의 첫 시집의 제목이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였기에 제목만 보고 그대로 받아들인 탓도 있었다. 그만큼 저자가 신앙을 가지고 안가지고의 여부에 대해 큰 의의를 두지 않았었다. 하지만 저자가 가진 사회적 위치와 그동안의 행보를 고려해 볼 때, 단순하게 치부하고 지나칠 일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일흔이 넘어서 세례를 받았다는 것, 딸의 기도가 밑바탕이 되었다는 것과 무엇보다 무신론자의 입장에서 써 낸 수많은 글들이 그동안의 내적 영성을 증거 함에도 현재의 중요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저자의 책을 그다지 많이 읽은 것은 아니기에 신앙에 관한 에세이를 만나게 된 것이 자못 당황스러웠다. 나 또한 신앙을 가지고 있기에 신앙에 대한 거부감이라기보다 그간의 저자의 행보와 신앙이 일치가 안 되는 낯섦이었을 것이다. 한 사람이 신앙을 가지는 것에 대한 내 시선 또한 이러할진대, 저자가 당면했을 시선들이 그제야 조금씩 느껴졌다. 현재를 이루고 있는 밑바탕이 과거가 되더라도, 현재가 더 중요한데 왜 그렇게 과거의 행보만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 모르겠다. 오랫동안 지식인으로써의 인식되어 있었던 영향이 가장 큰 것 같았다. 그 묵은 감정을 벗겨내고 신앙을 가진 한 사람으로 바라볼 때에 저자의 진심이 보일 거라 생각했다.

 

  초반에는 저자에 대한 인식을 벗기기는 힘들었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점차 마음을 열게 되었고 신앙에 대한 경험과 저자의 생각, 농도까지 모두 알아갔다. 교토, 하와이, 한국에서의 일들과 딸과의 대화로 이루어진 책 속에는 신앙이 중심이 되었지만 저자만의 집약적인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글에서 밝혔듯이 기독교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독자적인 생각은 오래전부터 정평이 나 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런 그가 실재로 신앙을 가지게 되었으니 세례를 받는 것부터 이슈가 되었다. 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세례를 받겠다고 말해놓고, 국내에서 받으면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을 것 같아 '러브소나타' 도쿄 대회 현장에서 세례를 받았는데, 5천 명이 넘는 한국 사람들이 모이는 바람에 더 크게 일을 벌이게 되었노라고 회상했다.

 

  세례를 받는 것부터 그 뒤에 끊임없이 들려오는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들 목도하면서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를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또한 그것 때문에 평범한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자유에도 제안을 받는다는 것도 알게 된 셈이다. 하나님 앞에서 자녀들의 모습은 고유의 가치를 지니고 있더라도 똑같은 사랑으로 감싸 주시는데도 저자는 보통 사람보다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딸의 기도가 육신의 아버지에게 닿아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 감격으로 다가왔다. 한 사람이 당하기엔 너무나 벅찬 시련이 저자의 딸에게 연속으로 다가왔음에도 좌절하지 않았다. 암을 앓는 것도 모자라 재발까지 했고, 아이 중 한명은 자폐증상과 함께 과잉행동증상으로 오랫동안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 거기다 총명하던 큰 아들이 혼수상태에 빠져 사망하는 일까지 그야말로 시련은 끊이질 않았다.

 

  암을 이겨낸 것만도 힘겨웠을 텐데 아이의 병을 고치기 위해 하와이까지 거처를 옮기는 고난이 안쓰러웠다. 그곳에서 시력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소식까지 겹쳐 저자는 급히 하와이로 날아간다. 그리고 그런 딸을 보며 딸을 낫게 해준다면 앞으로 하나님께 헌신하며 살아가겠다고 기도를 드린다. 딸의 눈은 국내에서 진료를 받은 뒤 기적처럼 나았고, 저자는 약속을 지키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이미 마음속에 하나님이 들어와 계신다는 것을 알았다. 저자가 신앙을 가지기 전과 후에 쓴 시들을 읽으면서 변화된 내적 영성을 보면서 하나님의 힘은 참으로 위대하시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의 마음에 온전히 들어가시는 것부터 기도로 변화시키는 것까지 저자가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을 낱낱이 보게 되면서 살아계신 그 분의 섭리를 깨닫는 시간이 되었다.

 

  한편으로는 저자의 광범위한 지식 때문에 잠시 책의 내용이 혼동되기도 했다. 신앙과 자신의 삶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을 드러낼 때는 장황한 것 같아 생각이 흩어지곤 했다. 오랫동안 글을 써왔기 때문에 그런 분위기가 자연스레 형성된 것 같았으나 개인적으로 신앙에 대한 주제로 깊이 들어가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신앙을 사람이 판단할 수 없고, 믿음의 척도를 비교할 수 없듯이 오로지 하나님만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겠지만 부족한 나의 눈으로 보여지는 여러 가지 것들에 생각이 묻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저자가 신앙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고, 딸의 눈물겨운 기도와 치열하게 삶을 살아온 그들의 모습이 있었다. 거기다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을 줄 아는 용기가 나를 부끄럽게 하면서도 너무나 편안하게 신앙생활하고 있는 내 모습이 교차됐다.

 

  저자도 저자지만 딸의 절절한 편지와 간증, 기도가 마음을 더 애달프게 했다.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려운 일이 닥치면 어떠한 시선으로 쳐다보는지와 신앙의 여부를 떠나 삶에 대한 시각이 보통 사람과 좀 더 다를 뿐이라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다. 치열하게 살아가는 모녀를 보면서 부모를 위해 자식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모습이 한편으론 부럽기도 했다. 저자는 일흔이 넘어 세례를 받는 것과 시집을 낸 것을 보고 사람들이 망령 났다고 수군댔다 했지만 오히려 그 나이에도 그런 일들을 할 수 있는 열정이 대단해 보였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글로 표현하고, 감사해 할 수 있는 모습 속에는 아픔, 절망, 환희, 성스러움 등이 모두 담겨 있었다. 날로 날로 깊어지고 짙어지는 믿음을 보면서 그 믿음을 닮아가야겠다고, 감사할 수 있을 때 맘껏 감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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