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제임스 설터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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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권의 책을 읽어낸 느낌치고는 너무나 생경해 당황스럽다. 언뜻 에드워드 호퍼를 떠올리게 만드는 겉표지에 친근감이 갔지만 다른 화가의 작품이라는 사실과 낯선 저자의 이름이 긴장감을 주었다. 책을 펼쳐보고 싶은 마음을 강렬하게 만들면서도, 책장을 여는 순간 현재의 나로 다시 되돌아올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겉표지, 저자, 제목만으로 이토록 긴장하기는 오랜만이었고 그 기억을 상기시키듯 책을 읽는 내내, 책장을 덮고 난 뒤까지 끈적끈적하게 달라붙는 느낌은 상실과 환희라곤 맛볼 수 없는 지지부진함이었다.

 

  단편을 읽으면서 이렇게 길을 잃어 본 것은 처음이다. 이야기의 시작과 끝은 물론이고 책 속에 들어와 있는 도중에도 길을 잃기 일쑤였다. 등장인물의 이름을 잃고, 이야기의 흐름을 잃었으며, 그들의 의식가운데 담겨있는 고뇌를 잃었다. 그래서인지 10편의 단편을 읽었음에도 어떤 한 인물이 뚜렷이 기억나지 않았고, 각자의 색깔을 까지고 있음에도 하나의 덩어리로 뭉뚱그려진 느낌이 들었다. 분명 그들을 좇고 있었는데 왜 그렇게 헤맸으며 걸핏하면 길을 잃었던 것일까. 삶에서 마주치기 싫었던 것들을 그들 가운데 마주하고 말아 도망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나름대로의 색깔을 지녔다고는 해도 비슷한 느낌으로 기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공통된 소재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결혼, 사랑, 불륜, 배신으로 점철된 사람들의 이야기는 도피하고 싶은 인생의 단면이었다. 행복한 삶을 향해가도 독자들의 마음을 움직일까 말까인데 이런 주제들로 채워진 단편들 속에서 무엇을 갈망해야 하고, 무엇을 나누어야 하는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절망과 극단의 끝에서 범희망적인 가치를 꿈꿀 수 있다 해도 나의 내면은 온통 기억하고 싶지 않은 얼룩들로 채워진 것 같다. 아내의 귀걸이를 정부에게 선물로 주고 쾌락에 몰두하는 남자, 자신의 집에 머물러 있는 시인과의 관계를 눈치 챈 부인, 젊은 시절의 사랑을 다시 만났지만 겁이 나 도망치는 남자, 사랑의 실패와 성적 욕망이 뒤범벅된 여자들의 이야기 등 어느 하나 유쾌한 축에 못 드는 이야기들뿐이다.

 

  그런 이야기를 피하고 싶으면서도 간과할 수 없었던 것은 인간 내부에 깊이 포진되어 있는 뒤틀린 욕망과 어긋나고 싶지 않은 삶에 대한 반듯한 잣대 때문이 아니었을 까란 생각이 들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꼭꼭 감추어둘 욕망을 서슴없이 드러내고, 행동하며, 거리낌 없이 삶을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 적어도 이 책 속의 인물들은 내 눈에 그렇게 보였다. 그렇다고 그들이 상실감에 겨워 불행하다는 느낌이 든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본능에 충실하며, 있는 그대로 삶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저자 또한 뚜렷한 결말을 내어주거나 인물들의 감정을 드러내기보다, 옆에서 지켜보며 담담히 그려내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 모든 이야기를 창조한 것이(많은 소재를 실재에서 재구성했다하더라도) 저자라고 해도 타인의 인생의 단면을 기록한 듯 어떠한 감정이입이 없어 보일 정도였다. 다만 '행복은 다른 걸 갖는 게 아니라 언제나 똑같은 걸 갖는 데 있다는 걸 난 몰랐어.' 라고 말한 <방콕>의 여인처럼 삶의 진리가 책 속에 듬성듬성 박혀 나를 한없이 찔러대고 있었다.

 

  이 책의 제목인 <어젯밤>은 가장 마지막에 실려 있어 그런 분위기를 고조시켜 주었다. 병든 아내의 자살은 도운 남편은 애인과 함께 뜨거운 밤을 보내지만, 다음 날 아침 침실에서 걸어 나오는 아내를 보고 경악하고 만다. 애인과의 관계는 그렇게 끝이 났고, '그냥 그게 전부였다.'라고 끝맺음을 한 부분에서 이 책의 독특한 분위기를 완벽하게 마무리 짓고 있는 것 같았다. 단편집이기에 꼭 순서를 지킬 필요는 없으나 순차적으로 읽어나간 뒤 만난 <어젯밤>은 마지막에 실려 있는 것이 유종의 미를 거두려 거드름을 피웠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나와는 거리가 먼, 혹은 내가 살고 싶지 않은 삶을 살아낸 사람들을 지켜보면서 불쾌감이 일었지만 비난할 여지는 충분하지 않았다. 길을 헤맸을지언정 그들의 인생을 지켜본것 뿐이고,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내고 있는 삶의 일부분을 본 것뿐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무어라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단지 나와는 다른 삶이라는 차이를 둘 밖에는.

 

  대화체 옆에 연결된 문장 때문에 읽기에 헷갈렸던 나만큼이나 옮긴이는 번역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고 한다. 너무나 유명한 작가이고 문장에 들어있는 엄청난 의미를 온전하게 옮긴다는 것은 어쩜 불가능 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 또한 어색한 번역체를 읽다 단아한 우리 문장을 읽을 때의 차이를 알기에 옮긴이의 고역과 내가 느낀 낯섦을 이해하는 바이다. 하지만 모두가 찬사하는 작품이더라도 나와 맞는다는 보장은 없다. 그런 면에서 <어젯밤>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고 싶고 제임스 설터라는 작가에 대해 조심스러워 진다. 먼 훗날 원서로 그의 책을 읽을 때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경험을 하게 되는 날이 오더라도, 현재 나에게 제임스 설터는 미지의 세계에서 온 작가다. 앞으로 그의 행보를 지켜봐야겠지만 낯설고 당황스러운 첫 만남으로 그를 판단해 버리는 실수를 범하지 않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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