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째 아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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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賞)이란 것이 참으로 이상해서, 아무런 편견 없이 대했던 작가라도 일단 상을 받았다고 하면 괜히 거부감이 느껴진다. 특히나 노벨 문학상 같은 큰 상이라면 얘기는 또 달라진다.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도 노벨 문학상을 받기 전에 구입해 놓았는데, 막상 상을 받고 나자 손이 더 안 갔다. 더군다나 상금 때문에 작가의 자식들 간의 불화가 일었다는 풍문까지 들려 상이라는 것에 더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내가 받은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책을 구입한지 3년 만에 겨우 꺼내들었음에도 초반 30페이지를 못 넘겨 몇 번의 덮음과 펼침을 반복했다. 깊은 밤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밤공기를 들이마시며 책을 읽었더니 그제야 차분하게 읽혔다.

 

  해리엇과 데이비드가 직장파티에서 처음 만났다고 시작되는 소설은 두 사람의 만남 자체보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한 암시 같았다. 그들이 순조롭게 결혼하고, 터무니없이 큰 집을 산 것과 아이들을 많이 낳겠다는 생각이 무언가 불안하게 만들었다. 지극히 평범한 부부였지만 당시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과는 분명 다르게 결혼생활을 시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휴가와 성탄절을 비롯한 축일 때 많은 비용을 들여 친척들을 불러 모아, 기꺼이 봉사하고 북적댈 공간을 만들어 주는 것을 보고, 해리엇 부부가 시대를 향해 가는 게 아니라 뒷걸음질 쳐서 어둠속으로 잠식해 들어간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렇게 큰 집도, 사람들이 북적대는 파티를 열지도, 아이들을 많이 낳지도 않았다. 친척들이 모일 때마다 아이가 하나씩 늘어났고, 모두들 비난하다시피 불쾌한 뜻을 내비쳤음에도 해리엇 부부는 뜻이 맞았고 더 많은 아이를 낳길 원했다. 임신과 출산, 육아의 기간이 늘어날수록 해리엇은 피곤하고 신경이 예민해졌으며, 데이비드는 더 많은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늦게까지 일해야 했고, 그들을 도와 해리엇 엄마가 늘 상주해 있어야 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아이를 더 낳는 것에 뜻을 굽히지 않았다. 적어도 벤이 태어나기 전까지는.

 

  벤을 임신했을 때부터 해리엇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아이가 하는 발길질이 남달랐고, 그것은 엄마인 해리엇이 느끼기엔 고통이었다. 특별히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한 채 진통제를 먹어가며 고통을 참아냈지만 아이가 태어나자 가족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은 벤을 좋아하지 않았다. 똑 부러지게 설명할 수 없는, 그렇다고 어떠한 진단도 내려지지 않고 진단할 수도 없는 벤의 증상이 사람들을 멀리하게 했고, 해리엇 조차도 감당하기 버겁게 만들었다. 벤의 탄생으로 네 아이들이 북적거리는 집안은 불행의 그림자가 드리워졌으며 가족의 행복은 거기서부터 멈췄고 앞으로도 나아지지 않았다.

 

  정상적이지 못한 아이가 집안에 있음으로 해서 얼마나 고통스러운 삶이 시작되는지 <다섯째 아이>는 잔인하게 기록해 갔다. 가족 구성원 하나하나를 들어가며 고통을 드러낸 것은 아니었지만 벤으로 인해 소소한 일상의 평화가 얼마나 처절하게 깨지는지를 세세하게 드러냈다. 해리엇은 벤을 위해 많은 부분 희생하고, 한편으론 원망도 하면서 그 시간을 견뎌냈지만 과연 그것이 현명한 방법과 선택이었는지에 관한 여부는 어느 누구도 판단할 수 없었다. 갈수록 과격해지고 고집이 심해지는 벤을 감당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해리엇 조차도 그런 벤을 보며 수많은 갈등과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벤이 어렸을 적에 도로로 뛰쳐나간 적이 있었는데, 해리엇은 속으로 '오, 그 애를 치어요, 제발, 그래요······라고 기도하'는 부분을 읽고, 절대로 벤을 통한 헤리엇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오만을 저지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데이비드 가족에게 평화와 행복은 벤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벤을 시설로 보내기도 했다. 하루 종일 약물에 취해 죽음을 향해가고 있는 벤을 직접 만나고 찾아온 것은 해리엇이었다. 벤을 그런 곳에 버려둔 것도, 벤을 다시 되찾아 옴으로써 '살해당하는 것으로부터 그 애를 구했기 때문에 그녀는 자기의 가족을 파괴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벤으로 인해 가족의 끈은 끊어져 버렸고, 벤이 다시 돌아왔을 땐 집은 텅 비어 버린 후였다. 벤이 커가면서 아이들은 집에서 멀어져 갔고 데이비드도 마찬가지였다. 벤으로 인해 넷째아이가 정서불안이 되어 갔으며 해리엇이 벤을 감당할 수 없음에도 무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녀 자신조차도 알 수 없었다. '벤에 대해 생각할 때 그건 사랑이나 온정의 마음에서가 아니었다. 그녀는 자기 내부에서 정상적인 감정의 불티 하나도 찾을 수 없는 자신이 싫었다.' 독자인 나도 해리엇을 그렇게 판단하려 했으며 아주 적은 동정밖에 던질 것이 없다는 것을 아프게 느껴가고 있었다.

 

  벤의 문제를 알기 위해 의사를 찾은 해리엇은 별 도움 없이 병원 문을 나서면서 의사가 가진 감정을 '인간 한계를 넘어서는 것에 대한 정상인의 거부, 이질성에 대한 공포, 또한 벤을 낳은 해리엇에 대한 공포였다.'고 읊조리는 것을 보고, 그 의사의 감정이 바로 나의 감정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소설의 주체가 되는 벤과 해리엇을 나 또한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았기에 우울함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정상적인 행복을 보길 원했고, 비정상적인 아이가 태어났다 하더라도 사랑으로 위기를 극복하길 바랐다. 내가 해리엇이었다면 그녀만큼 해 낼 자신이 없다는 것을 앎에도 그녀에게는 그런 삶을 살아달라고 강요했으며, 그렇게 살지 못한 해리엇을 내 세계에서 분리시켜 버렸다.

 

  소설은 끝나 가는데 도무지 달라질 것이 없었다. 나의 불안감을 확인시키듯 '세상의 대도시 아무데나 휩쓸려 그곳의 지하세계에 합류하여 그들의 머리로 살아갈 수 있을' 벤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을 맺었다. 어떠한 가능성과 절망도 던져주지 않은 채 모든 것을 독자에게 맡겨 버리는 저자가 야속할 정도였다. 두껍지 않은 책을 읽는 동안 마음고생을 심하게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몸속의 진액이 다 빠져 나가버린 것 같이 힘겨웠다. 고통을 모두 드러내놓고 모든 것을 앗아가는 소설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온 몸을 훑고 지나가는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뿐이었다. 그 고통의 대가가 내게 남겨진 우울이라면, 앞으로 그녀의 다른 작품을 읽을 용기를 절대 낼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인간 한계를 넘어서는 것에 대한 정상인의 거부, 이질성에 대한 공포'가 내게서 완전히 떨어져 나갈 수 없을 것이라는 절망적인 수긍만이 남겨져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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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후예 알베르 카뮈 전집 10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199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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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장에 고이 잠들어 있던 카뮈 책 중 <태양의 후예>를 꺼낸 것은 카뮈 전집이 완성되었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20권의 책이 세트로 판매가 되는 것도 모자라 특별 양장본으로 제작이 되어 있는 것을 보고 갖고 싶은 욕망에 몸부림이 쳐졌다. 이미 카뮈 전집 중 11권이 있기 때문에 입맛만 다시고, 그 여세를 몰아 전집이나 읽어보자며 꺼낸 것이었다. 소설이나 산문을 꺼내들었더니 너무 묵직해서, 사진과 짤막한 글이 들어 있는 <태양의 후예>를 골랐다. 카뮈 전집을 번역한 김화영님은 이 책을 1992년 파리에서 지인에 의해 발견했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진행 중이던 '카뮈 전집' 번역 계획 속에 이 책을 포함시켜 현재 독자인 우리가 보게 된 것이다.

 

  이 책은 앙리에트 그렝다의 사진에 카뮈의 짤막한 글이 담겨 있어, 카뮈의 흔적을 엿보려고 했던 독자라면 조금은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온전히 카뮈의 흔적을 느끼기 보다는 글과 사진이 같이 어우러져있는 공동작업의 결과이기 때문에 어쩌면 내면의 깊이를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카뮈 전집 중에서 이제 한 권밖에 읽지 않은 나도 그 점을 염려한 것은 아니었으나, 오히려 이 책으로 인해 휴식을 취한 기분이었고 형언할 수 없는 신선함을 안은 것 같았다. 

 

  보통 사진이 실려 있는 책들은 책 따로 글 따로 인 경우가 흔하다. 찍는 이와 글쓴이가 같아도 동일시되는 느낌이 부족한 경우도 있고, 극히 드물게 공동작업의 경우에 일치되는 느낌을 책들을 만나게 된다. <태양의 후예>는 일치되다 못해 사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 정도로 강렬한 책이었다. 사진에 짧은 텍스트를 붙인 책이 얼마나 큰 감동을 주고 이면을 보게 할까 걱정했던 마음은 어느새 사라져 버리고, 이어지는 사진을 보며 어떤 텍스트를 써냈을지 기대하며 보게 되었다. 이 책에는 총 30장의 사진과 카뮈의 글이 실려 있는데, 이 책이 탄생한 배경에는 카뮈와 각별한 우정을 자아냈던 시인 르네 샤르의 발문이 참고가 되었다.

 

"젊은 사진작가 앙리에트 그렝다와 카뮈가 이 고장을 샅샅이 누비고 돌아다니면서 날이 갈수록 더욱 강렬하게 느끼게 된 기쁨과, 앙리에트 그렝다의 초기 사진 작품들을 보았을 때, 본의 아닌 기교 때문에 그만 본질을 훼손하게 된 그림 엽서의 사진들이나 순수한 연구 자료들과는 다른, 보클뤼즈 지방의 영상, 초상, 풍경들을 가져봤으면 하고 느꼈던 나의 욕심이 만나서 태어난 것이다".(142~143쪽)

 

  처음에 옮긴이의 말을 읽다가 헷갈렸던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이었다. 앙리에트 그렝다와 카뮈가 프로방스를 '샅샅이 누비고 돌아다니면서' 만들어 낸 작업의 결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앙리에트 그렝다와 카뮈가 아닌, 르네 샤르와 카뮈였고 르네 샤르가 앙리에트 그렝다의 초기작을 보고 이 책을 만들기로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전히 아리송하긴 해도 어찌 되었든 같은 장소를 누비고 다닌 사람들의 공감대로 한 권의 책이 탄생되었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그렝다의 사진과 카뮈가 본 고장이 어느 정도의 시기차이가 있을지 모르겠으나, 굳이 그 시간을 따지기보다 혼연일치되는 사진과 글의 매력을 느끼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혼연일치'라는 표현을 과감하게 쓸 정도로 사진과 카뮈의 글을 극찬하는 것은 사실감 때문이었다. 나 또한 온라인상에서 돌아다니는 사진에 짤막한 글을 붙여본 경험이 있는데, 영감이 떠오를 때는 쉽게 글이 나오지만 반대일 때는 허구적인 느낌이 들 정도로 일치되지 못한 글을 붙일 때도 있다. 카뮈는 내가 경험한 허구적인 느낌을 배제시키고 사실적인 묘사와 사진 밖의 풍경은 물론 시적인 느낌과 함께 삶을 뛰어넘는 시선을 그릴 줄 알았다. 왼쪽 면에는 카뮈의 글이, 오른쪽에는 그렝다의 사진이 실려 있음에도 한 사람의 작업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아니, 오히려 한 사람의 작업이라고 생각되어지지 않을 정도의 완벽한 조화라고 해야 맞을지 모르겠다.

 

  버드나무 가지가 하늘을 향해 뻗어 있는 사진을 보며 '늙은 버드나무 둥치에서 신선한 가지들 다발로 뿜어 나온다. 이 세상 최초의 정원이다. 새로운 새벽마다 최초의 인간.' 이라고 텍스트를 붙인 것이나, 늘어지는 갈대 사진을 보며 '여기 눈 앞 가까이엔 사랑의 침상. 벌써 잠자리는 따뜻하다. 멀리서, 그이들 웃는 소리 들린다.' 라고 표현하는 것만 봐도 완벽의 의미를 뛰어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단아한 표현하며, 흑백사진임에도 사진이 생생하게 살아있게 만들어 주는 능력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기도 했다. 옮긴이는 '비약과 생략법으로 인하여 더욱 아름다운 것이 카뮈의 시적 텍스트다.'라고 말했는데, 어렵게 들리는 의미를 직접 보고 읽으면서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옮긴이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독자들의 몽상을 도와주려는 의도에서(과연 이런 것이 가능할까?) (중략) 일종의 주석을 사진 뒷면에 붙여놓았다.'고 했는데 그 주석이 별 도움이 안 될 때가 더 많았다.

 

  주석은 옮긴이의 개인적인 느낌이 드러나기도 했고, 카뮈가 남긴 텍스트를 좀 더 풍부하게 해 줄 요량으로 카뮈의 작품에서 세세하게 발췌한 것들이었다. 사진과 짤막한 글에서 이미 풍부함을 느껴서인지 그것들을 읽을 때면 오히려 흐름이 끊겨 술렁술렁 읽고 넘길 때도 많았다. 그렇더라도 묻힐 뻔 했던 독특한 책을 카뮈 전집에 포함 시켜 준 옮긴이의 공로에 힘입어 여러 사람의 조화로 탄생된(주석을 붙인 옮긴이의 노고도 포함해) <태양의 후예>는 그 자체로 독자들에게 즐거움을 안겨 줄 수 있을 것이다. 책 제목에 크게 연연해하지 않고 의미도 잘 떠올려 보지 않는 나인데도 책을 보고, 읽고 나자 이렇게 기막힌 제목을 붙일 수 없다는 감탄사가 절로 터져 나올 정도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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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치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5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김근식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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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양을 하고 스위스에서 러시아로 돌아오는 백치인 미쉬낀 공작과 로고진이라는 청년이 기차에서 만나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되고 있었다. 미쉬낀은 친척인 리자베따 쁘로꼬피예브나를 찾으러 오는 길이었고, 로고진은 나스따시야 필리뽀브나라는 여인에게 아버지 몰래 다이아몬드를 선물해 도망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 만남은 단순한 우연처럼 보일지라도 앞으로 펼쳐질 사건에 중요한 시발점이 되었으며, 미쉬낀 공작과 로고진 사이에 나스따시야란 여인이 얽혀 파란만장한 사건을 전개하게 된다. 미쉬낀 공작은 백치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약간은 어수룩하고, ‘상처받지 않고 수치스러움을 느끼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가 요양을 간 것이나, 확실하지 않은 친척을 찾아 상뜨 뻬쩨르부르그로 오는 것이나, 나스따시아와 아글라야 사이에서 갈팡질팡 한 것이나 순수하면서도 대책 없음이 답답하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다행히 예빤친 장군의 부인인 리자베따 쁘로꼬피예브나를 찾게 되었고, 그 집의 세 딸과 어울리면서 특히 막내인 아글라야와 복잡 미묘한 관계를 맺게 된다. 공작은 그들과 교류하면서 스위스에서 요양할 때의 이야기부터 자신의 모든 것을 온전히 드러낸다. 그런 공작의 태도를 보며 많은 사람들은 흥미를 느끼고, 종종 백치라는 별명이 무색할 정도로 특별한 능력을 드러내는 그를 보며 낯섦을 느낄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우유부단함과 순수한 내면으로 인해 나스따시아와 아글라야와 로고진의 사각관계는 더 복잡하게 얽히고, 결국 모든 것은 그가 요양한 곳에서 출발할 때보다 더 못한 모습으로 되돌아가고 만다.



나스따시아란 여인은 절세미인으로 또쯔끼라는 재산가에 의해 성적으로 농락당한 여인이었다. 고아로 태어나 그의 보살핌을 받긴 했으나 나스따시아를 버리고 다른 여인과 결혼하려는 사실을 알고 복수를 하게 된다. 또쯔끼는 예빤친 장군과 그런 나스따시아를 따돌리려 했고, 그 방책이라는 것이 예빤친의 비서인 가브릴라 이볼긴과 결혼을 시키려 한다. 철저하게 돈으로 계산된 입막음이었고, 그 사실을 알게 된 로고진이 나스따시아를 차지하기 위해 더 많은 돈을 그녀에게 주기로 한다. 이렇듯 나스따시아의 미모에 빠져 그녀의 참된 모습은 보지 못한 채 오로지 차지하려고만 하는 수많은 남자들 사이에서 그녀는 점점 자신의 본 모습을 감추고, 종잡을 수 없는 히스테릭한 여인으로 변모해 가며 사회에서 받은 상처를 복수로 풀어내려 한다. 그런 그녀 앞에 나타난 것이 미쉬낀 공작이었고, 공작이야말로 그녀의 본 모습을 볼 줄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으며 진심으로 사랑해 준 단 한 사람이었다.



나스따시아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들이 생각하는 행복은 거리가 멀고 파멸만이 올 것이라는 것을 앎에도 그녀에게 매혹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예빤친 장군마저 그녀의 환심을 사려 했고, 로고진과 이볼긴이 돈으로 자신의 환심을 사려 하는 것을 비웃는 그녀의 행동은 그들을 농락 한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그런 그녀를 보고하기 위해 미쉬낀 공작도 그녀에게 청혼한다. 얽히고설킨 관계를 정리하기 위해 그녀는 자신의 생일 날 의중을 밝히는데 추측을 깨고 로고진과 결혼을 공표하고 그곳을 떠나 버린다. 하지만 로고진을 선택한 것은 진심이 아니었고, 로고진에게서도 도망간 그녀가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은 미쉬낀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미쉬낀 공작도 반년 가량 모스끄바로 떠나있다 후견인의 상속자가 되어 예빤친 장군의 별장에서 그의 가족과 여름을 보내게 된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고, 나스따시아가 떠남으로써 무언가가 조금은 정리된 듯 했다. 미쉬낀에게 호감을 보이고 있는 아글라야와 역시 그녀를 좋아하는 공작이 이뤄질 가능성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 둘이 썩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고, 그렇다고 미쉬낀과 나스따시아가 탐탁했던 것도 아니었다. 서로의 마음이 정확히 전달되지 못하고 교류하지 못한 채 오해와 불신이 쌓여갔고, 나스따시아의 재등장으로 사건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나스따시아가 그렇게 사라져 버린 뒤에도 로고진은 그녀를 포기하지 못하고, 곁에서 수많은 노력을 들였음에도 그녀가 끄떡도 안하자 미쉬낀과의 관계를 의심하게 된다. 나스따시아가 나타나면서 아글라야도 마찬가지로 질투심을 동반한 히스테리를 부리게 되고, 네 명의 관계를 무엇으로 풀어야 할지 최선의 방책의 복선은 드러나지 않았다. 나스따시아는 상처를 깊게 받은 여인이었고, 로고진은 잘못된 방법으로 사랑을 하고 있었으며, 아글라야는 질투와 사랑의 혼돈을 정립하지 못했고, 미쉬낀 공작은 똑 부러지지 못한 행동과 사고로 답답함만을 자아낼 뿐이었다. 적어도 미쉬낀 공작이 나스따시아와 아글라야 가운데서 한 사람을 선택해 결혼을 했더라면 이러한 비극까지 가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누가 누구와 엮이든 절대 행복할 수 없는 비극이 잠재해 있는 복잡한 사랑의 얽힘이었다.



나스따시아는 공작을 아글라야와 적당히 엮어 정리하려고 하지만 한편으로 아글라야를 농락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런 나스따시아와 단판을 짓기 위해 찾아온 아글라야 앞에서 보란 듯이 공작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며 공작과 결혼하자는 말을 하고, 공작은 그 둘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다 제대로 된 행동을 하지 못해 아글라야에겐 상처만 주고 나스따시아와의 결혼이 진행되고 만다. 무언의 불안감이 계속 되는 가운데 결혼식 전날 나스따시아는 로고진에게 납치되고, 공작이 로고진을 찾아갔을 때 나스따시아는 방수포에 싸인 시체로 그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녀를 살해할 수밖에 없던 로고진, 그를 위로하는 공작과의 대면은 그들에게 내제되어 있는 모든 문제를 초월한 인간 대 인간으로 마주하는 최초이자 마지막 장면이었다.



로고진의 살해로 충격적인 결말을 맞이한 그들에게 남은 건 그에 상응한 당연한 귀결인지도 몰랐다. 로고진은 시베리아 유형을 선고받고, 아글라야는 공작을 포기하고 전혀 어울리지 않는 외국인과 결혼한다. 그녀의 가족도 국외에서 체류하면서 뿔뿔이 흩어진 가운데 공작 또한 원래의 백치상태로 돌아가 소설은 끝이 난다. 많은 아쉬움이 남아 ‘~하지 않았더라면’ 이란 상황을 만들어 내봤자 최선의 방책도, 어떠한 불행과 일련의 흐름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체념한 채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도스또예프스끼는 그가 창조해 낸 인물들 간의 갈등과 의식을 통해 러시아인의 기질과 당시의 사회상, 인간 깊숙이 숨겨 있는 모든 본능을 끌어냈다. 그 길고도 긴 여행 속에 몇몇 인물들만 드러냈지만 그 이외에도 다양한 인간군상은 새로운 의식의 너머를 가늠하게 했다.



그 중에 돋보였던 인물은 폐병을 앓고 있는 18세 청년 이뽈리뜨였다. 자신의 상처받은 내면을 신의 탓으로 돌리고, 자살을 시도하기도 한다. 자신에게 호의를 보인 공작을 비롯한 사회에 대해 통렬한 증오심을 드러낸 그는 나스따시야가 살해 된 뒤 역시 병으로 목숨을 잃게 된다. 그가 보인 행동과 사고는 스캔들에서 잠시 벗어나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어 주긴 했어도, 역시 유쾌하거나 비극을 넘어선 만남이 아니었다는 데서 안타까움이 인다.



오랜만에 읽게 된 도스또예프스끼 작품 가운데서도 장편을 읽어서인지 무척 긴 과정이었다는 느낌이 든다. 상, 하를 읽어낸 공백이 커서 묵직한 부담감은 덜했으나, 소설이 주는 무게감은 여전히 나를 비틀거리게 만든다. 그가 펼쳐놓은 세계에서 흩어진 의미들을 일일이 챙기는 것이 불가능 하다는 것도 알고, 그것을 따져가며 책을 읽은 것도 아니었다. 그의 책을 읽는 것은 ‘문제를 끊임없이 그 삶을 추구하는 데 있지, 그 삶을 발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607쪽)’라고 말한 이뽈리트처럼 끊임없이 그의 세계를 탐독해 가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의 책을 놓을 수 없고 2독, 3독을 하고 싶은 이유이기도 하다. 철저히 의미를 찾고 메시지를 분석하는 작가가 아닌, 읽는 과정을 즐기는 작가라고 말하고 싶은 그의 작품을 계속 접하는 것이야말로 그가 남겨 놓은 소설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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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다 성경 : 동물 이야기 - 성경의 비밀을 푸는 동물 이야기 열린다 성경
류모세 지음 / 두란노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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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물 이야기>를 끝으로 열린다 성경 시리즈 1탄이 마무리 되었다. 7권의 책 중에서 세 권밖에 못 읽었지만, 아직 읽어보지 못한 책들과 이 시리즈와는 전혀 다른 2탄이 언젠가 출간된다는 것에 관심이 간다. 그만큼 성경을 이해하고 숨은 뜻을 발견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한 권의 책을 읽더라도 배경지식을 조금이나마 알고 읽을 때 책이 완전히 다르게 다가오는 것을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열린다 성경 시리즈가 주는 개운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기도 하지만 이스라엘 역사를 말하고 있기 때문에 작은 지식이라도 습득하고 성경을 대하면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열린다 성경 시리즈를 대할 때마다 한가지의 주제로 책 한권을 쓸 수 있을 정도로 방대하다는 것에 놀라곤 한다. 이 시리즈 중 처음 만났을 때도 놀라웠는데, 새로운 시리즈를 만날 때마다 성경의 다양함에 다시 한 번 감탄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한 마디도 땅에 떨어뜨릴 수 없이 귀하듯, 열린다 성경 시리즈로 그 말씀이 더 귀하게 다가오는 느낌이다. 자칫 의미를 몰라 지나치기 쉬운 구절들을 의미상 해석을 해 주는 것은 물론 그 이면의 숨은 뜻까지 알려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약 2000년이 지난 지금에도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은 현대인에게도 깊은 영감을 주지만, 시대적 배경이 너무 달라 이해할 수 없거나 왜곡되는 경우도 많다. 이 책을 그런 오류를 줄여나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도 좋고, 성경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 시각이라고 생각하며 만나도 좋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성경에서 나오는 동물들이 이렇게 많고, 이런 의미가 담겨 있는지 몰랐었다. 기껏해야 양이나 나귀 정도밖에 떠올리지 못했는데 개, 소, 돼지, 여우, 올빼미를 지나 벌과 메뚜기, 나방, 이까지 포함하고 있어 다양함에 주눅이 들 정도였다. 말(馬)만 하더라도 단순히 타고 이동하는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말을 많이 두지 말라'고 하시며 전쟁과 교만의 상징이 되지 않게끔 하셨는데, 우리가 잘 아는 솔로몬 왕은 하나님이 금하신 것을 행한 불명예스런 왕이었다. 말을 많이 두지 말라는 것 이외에도 아내와 금은을 많이 축적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 모든 것을 어겨 '지혜의 왕' 이면에는 불순종의 왕이라는 명칭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또한 나귀와 구유에도 우리가 잘못알고 있는 것들이 많았다. 나귀라고 하면 당시의 이스라엘에서는 짐을 나르는데 쓸모 있는 짐승이었지만,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것이나 구유에 누인 예수님의 모습은 스스로 낮아지시고 순종하는 모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흔히 구유라고 하면 말구유를 떠올려 지저분하다고 생각하기 일쑤인데, 당시의 구유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를 뿐더러 예수님이 뉘이신 곳은 말구유가 아닌 나귀 구유라고 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것들을 수정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깨닫게 되었다. 혼자만의 오해 속에 그냥 넘겨버린 사실들이 바로잡힘으로써 하나님이 어떠한 존재인지, 하잘것없는 나를 위해 어떠한 모습으로 오셨는지를 더 절실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저자는 다른 책에서도 그랬듯이 동물 이야기를 통해서 성경의 참된 의미를 알려주고 있었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거나 오해하고 있는 것들을 바로잡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지 꼭 짚고 넘어갔다. 만약 그런 오류를 단지 수정만 하고 넘어간다면 방대한 지식으로 머리가 비대해지는 현대의 그리스도인의 편협한 모습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지식도 중요하나 그 안에서 어떻게 믿음을 바로 잡아나가야 하는지를 알려주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참뜻을 알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배경지식을 좀 더 안다고 젠체하게 될지도 모른다. 한데 섞여 있는 양과 염소를 보면서 '믿음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믿음에 대한 왜곡된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을 충고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바로 보아야 할 것들이 어떤 것인가를 다시 한 번 성찰하게 도와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책에 나온 동물들을 일일이 언급하며 내가 잘못 알았던 것들을 짚어 나간다는 것은 무리다. 또한 이 책에 실린 동물과 관련된 모든 것을 온전히 이해했다고 볼 수도 없다. 그러나 이 책을 읽는 동안 성경에 한 발짝 다가간 느낌이 들었고, 책 속에 실린 색다른 의미나 성경 구절 하나로 마음이 들뜨기도 했고 아프기도 했다. 하찮은 참새마저 보호하시는 하나님이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 라고 말씀해 주실 때면 나의 존재감이 불쑥 솟아오르곤 했다. 성경을 알아가는 것도 중요하고, 나의 믿음을 키워 나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 안에서 나의 존재감을 세워가는 것도 무척 중요하다는 뜻이 와 닿았다. 하나님께서 주신 내 존재 자체를 부인하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으며 하나님이 누리게 해준 세상의 모든 것들을 기꺼워할 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섰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열린다 성경 시리즈로 인해 성경과 한층 가까워진 것은 사실이다. 재미나게 책을 읽은 이상 모든 것이 내 안에 축적되지 않더라도 성경이 어렵다는 편견을 깨준 것만도 감사했다. 무엇보다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며, 하나님을 증거하며, 이 기쁨을 타인에게 나눌 수 있는가에 중점을 둬야 한다는 깊은 뜻도 헤아리게 되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시인하고, 주일 성수를 잘하고, 십일조를 잘 내고, 건축헌금을 분에 넘치게 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으며 '핵심은 바로 '손접대(구제)'에 있다.' 고 말한다. 이 말씀이 오로지 성경지식으로 채우려는 나의 발걸음을 멈칫하게 만들었고, 사실을 알아가는 데만 그치지 않고 영안을 트이게 하는 것에 게을리 하지 않게 해주었다. 모든 것을 예수님과 같이 행동할 수 없지만, 다양한 노력(성경 배경을 알아가는 것도 포함해서)을 통해 그분을 닮아가는 삶을 사는 것이 우리가 당면한 숙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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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 축복처럼 꽃비가 - 장영희가 남긴 문학의 향기
장영희 지음, 장지원 그림 / 샘터사 / 2010년 5월
평점 :
품절


  이틀간의 휴가가 주어져 종일 집에서 뒹굴 거리다 해질녘에 책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간단한 볼일도 있고 근처 공원에서 책을 읽기 위해서였다. 계속 집에만 있어서 광합성을 좀 하고 싶기도 했고 휴일의 여유로움을 만끽하고 싶었다. 공원에서 책을 보는 것이야말로 그 두 가지의 목적을 충족시키는 거라 생각하고 그곳에 제격인 에세이를 들고 갔다. 고 장영희 교수님의 1주기에 맞춰서 출간된 <이 아침 축복처럼 꽃비가>란 책을 공원에서 읽으니, 책의 내용이 온 몸으로 전달되는 것은 물론 글로나마 이렇게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감격으로 다가왔다.

 

  순식간에 읽어버릴 수도 있었지만 이틀간의 휴가를 모두 활용하기 위해 장영희 교수님의 책은 모두 공원에서 읽었다. 집중해서 읽느라 햇볕을 너무 많이 쬐여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도 모를 정도였다. 첫날은 '사람과 풍경'에 관한 에세이를 읽었고, 둘째 날은 '영미 문학'에 관한 부분을 읽었다. 자연 풍경과 스며드는 글은 나와 하나가 되었고 그런 곳에서 책을 읽을 수 있는 현재의 모습이 참 싱그러웠다. 이런 시간을 혼자서 만끽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글은 내 마음을 흔들었고 담요 한 장을 무릎에 덮고 있는 내 모습도 자연 속에 동화되길 바랐다.

 

  공원에서 책을 읽은 첫 날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문장은 아주 짧았다. "난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해. I Think I can." 미국의 유명한 동화 <꼬마 기차>에 나오는 말이라는데, 'Yes, I can.' 보다 색다르게 다가왔다. 이 말을 구분해서 가르치는 것이 미국적 사고방식의 근간인지 모른다는 저자의 말처럼 "난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해."에 더 마음이 기울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한탄하기보다, 사소한 것이라도 표면으로 드러내 할 수 있다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거는 것이 현재 나에게 필요한 것 같다. 첫 날 나선 산책에서 얻은 것은 그 단순하고도 뼈 있는 진리였다.

 

  이처럼 저자의 수필을 읽다보면 간결한 문장 하나에 힘을 얻기도 하고, 유치한 개그에 깔깔거리며 웃기도 하며, 일상 속에 묻혀있는 자잘함을 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 학생들을 가르치고 또 다른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모든 것을 글의 소재로 삼고, 그 안에서 사람들이 지나쳐 버리기 쉬운 참된 의미까지 발견해 주는 저자의 글은 그래서 더 힘이 되는지도 모르겠다. 문학을 사랑하는 마음이 밑바탕이 되어 짧은 글귀로 독자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타인의 이야기, 자신의 경험담으로 글을 진솔하게 만들어갔다. 어떠한 요소가 들어 있던지 간에 인간의 삶이 저변에 깔려 있어 생동하는 모습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이 가장 좋았던 것 같다. 혼자 고립되어 있지 않다는 생각, 낯모르는 타인의 이야기를 통해 느낄 수 있는 공감대, 글로 남겨진 향연 가운데서 그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

 

  저자의 에세이와 <영미시 산책> 시리즈를 이미 만나서 구성은 낯익었을지 모르나, 고인이 된 저자의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것에 더 의의가 깊었다. 마치 오래전에 알고 지낸 친구를 다시 만난 듯 반가움이 앞섰고, 편안한 분위기에 몸도 마음도 긴장을 풀 수 있었다. 그런 연유로 공원에서 책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이고, 타인이 날 봤다면 이상한 사람 취급했을지라도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책 내용에 따라 희로애락을 느꼈다. 한 줄의 시에 마음을 놔버리고 아파하기도 하고, 저자가 제자들에게 한 말을 나의 좌우명을 삼아도 되겠다 싶기도 했다. 그런 시간들이 합쳐져 한 권의 책을 읽어냈지만 그 속에 내포된 의미는 한 권의 책으로 결부시킬 수 없는 더 귀중한 것들이었다.

 

  저자의 <영미시 산책>에 삽화를 그려주었던 화백 김점선님이 살아 계셨더라면, 분명 이 책의 삽화도 그 분이 그려주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글과 잘 어우러진 삽화를 보고 있자니 자연스레 저자와 같은 해에 돌아가신 김전선 화백이 떠올랐고 '잠시 떠나고 싶지만 영원히 떠나고 싶지는 않은 곳이 바로 이 세상입니다. (중략) 오늘이 나머지 내 인생의 첫날이라는 감격과 열정으로 사는 수밖에요.' 라던 저자의 말이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글 속에서 만나는 삶에 대한 애착과 불안감, 감사를 마주하면서 저자를 기억하는 수많은 친구들과 독자들이 있어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또한 한정판의 혜택으로 저자의 육성과 창작 추모곡이 있는 CD를 들으면서 잠시나마 저자를 추모할 수 있는 시간이 갖기도 했다. 저자가 읊어준 에밀리 E. 디킨슨의 <만약 내가······>란 시는 내 곁에서 직접 낭송해주고 있는 것 같아 더 애달프게 다가왔다.

 

  저자의 글을 읽으면서도 더 이상 다른 글을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서글프게 다가오기도 했다. 그러나 사진으로 보는 저자의 일생을 보면서 저렇게 치열하게, 문학을 사랑하는 마음은 뜨겁게 간직한 모습을 통해 다시금 용기를 얻었다. 나의 현재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자고, 앞으로 같이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에 연연해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얼마든지 저자가 흩뿌려 놓은 글로 다시 만날 수 있고, 그녀가 남긴 참 된 의미를 깨달아 간다면 그보다 더 좋은 만남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봄날의 끝자락에서 나에게 자연 속에서 독서를 할 수 있게 만들어준 저자에게 다시 한 번 고마운 마음이 들었고, 나의 힘든 마음을 위로하여 준 것 같아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았다. 어디에 있든지 늘 우리와 함께 한다는 마음으로 하루를 힘차게 살아가는 모습을 분명 고인은 더 좋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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