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치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5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김근식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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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양을 하고 스위스에서 러시아로 돌아오는 백치인 미쉬낀 공작과 로고진이라는 청년이 기차에서 만나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되고 있었다. 미쉬낀은 친척인 리자베따 쁘로꼬피예브나를 찾으러 오는 길이었고, 로고진은 나스따시야 필리뽀브나라는 여인에게 아버지 몰래 다이아몬드를 선물해 도망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 만남은 단순한 우연처럼 보일지라도 앞으로 펼쳐질 사건에 중요한 시발점이 되었으며, 미쉬낀 공작과 로고진 사이에 나스따시야란 여인이 얽혀 파란만장한 사건을 전개하게 된다. 미쉬낀 공작은 백치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약간은 어수룩하고, ‘상처받지 않고 수치스러움을 느끼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가 요양을 간 것이나, 확실하지 않은 친척을 찾아 상뜨 뻬쩨르부르그로 오는 것이나, 나스따시아와 아글라야 사이에서 갈팡질팡 한 것이나 순수하면서도 대책 없음이 답답하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다행히 예빤친 장군의 부인인 리자베따 쁘로꼬피예브나를 찾게 되었고, 그 집의 세 딸과 어울리면서 특히 막내인 아글라야와 복잡 미묘한 관계를 맺게 된다. 공작은 그들과 교류하면서 스위스에서 요양할 때의 이야기부터 자신의 모든 것을 온전히 드러낸다. 그런 공작의 태도를 보며 많은 사람들은 흥미를 느끼고, 종종 백치라는 별명이 무색할 정도로 특별한 능력을 드러내는 그를 보며 낯섦을 느낄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우유부단함과 순수한 내면으로 인해 나스따시아와 아글라야와 로고진의 사각관계는 더 복잡하게 얽히고, 결국 모든 것은 그가 요양한 곳에서 출발할 때보다 더 못한 모습으로 되돌아가고 만다.



나스따시아란 여인은 절세미인으로 또쯔끼라는 재산가에 의해 성적으로 농락당한 여인이었다. 고아로 태어나 그의 보살핌을 받긴 했으나 나스따시아를 버리고 다른 여인과 결혼하려는 사실을 알고 복수를 하게 된다. 또쯔끼는 예빤친 장군과 그런 나스따시아를 따돌리려 했고, 그 방책이라는 것이 예빤친의 비서인 가브릴라 이볼긴과 결혼을 시키려 한다. 철저하게 돈으로 계산된 입막음이었고, 그 사실을 알게 된 로고진이 나스따시아를 차지하기 위해 더 많은 돈을 그녀에게 주기로 한다. 이렇듯 나스따시아의 미모에 빠져 그녀의 참된 모습은 보지 못한 채 오로지 차지하려고만 하는 수많은 남자들 사이에서 그녀는 점점 자신의 본 모습을 감추고, 종잡을 수 없는 히스테릭한 여인으로 변모해 가며 사회에서 받은 상처를 복수로 풀어내려 한다. 그런 그녀 앞에 나타난 것이 미쉬낀 공작이었고, 공작이야말로 그녀의 본 모습을 볼 줄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으며 진심으로 사랑해 준 단 한 사람이었다.



나스따시아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들이 생각하는 행복은 거리가 멀고 파멸만이 올 것이라는 것을 앎에도 그녀에게 매혹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예빤친 장군마저 그녀의 환심을 사려 했고, 로고진과 이볼긴이 돈으로 자신의 환심을 사려 하는 것을 비웃는 그녀의 행동은 그들을 농락 한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그런 그녀를 보고하기 위해 미쉬낀 공작도 그녀에게 청혼한다. 얽히고설킨 관계를 정리하기 위해 그녀는 자신의 생일 날 의중을 밝히는데 추측을 깨고 로고진과 결혼을 공표하고 그곳을 떠나 버린다. 하지만 로고진을 선택한 것은 진심이 아니었고, 로고진에게서도 도망간 그녀가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은 미쉬낀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미쉬낀 공작도 반년 가량 모스끄바로 떠나있다 후견인의 상속자가 되어 예빤친 장군의 별장에서 그의 가족과 여름을 보내게 된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고, 나스따시아가 떠남으로써 무언가가 조금은 정리된 듯 했다. 미쉬낀에게 호감을 보이고 있는 아글라야와 역시 그녀를 좋아하는 공작이 이뤄질 가능성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 둘이 썩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고, 그렇다고 미쉬낀과 나스따시아가 탐탁했던 것도 아니었다. 서로의 마음이 정확히 전달되지 못하고 교류하지 못한 채 오해와 불신이 쌓여갔고, 나스따시아의 재등장으로 사건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나스따시아가 그렇게 사라져 버린 뒤에도 로고진은 그녀를 포기하지 못하고, 곁에서 수많은 노력을 들였음에도 그녀가 끄떡도 안하자 미쉬낀과의 관계를 의심하게 된다. 나스따시아가 나타나면서 아글라야도 마찬가지로 질투심을 동반한 히스테리를 부리게 되고, 네 명의 관계를 무엇으로 풀어야 할지 최선의 방책의 복선은 드러나지 않았다. 나스따시아는 상처를 깊게 받은 여인이었고, 로고진은 잘못된 방법으로 사랑을 하고 있었으며, 아글라야는 질투와 사랑의 혼돈을 정립하지 못했고, 미쉬낀 공작은 똑 부러지지 못한 행동과 사고로 답답함만을 자아낼 뿐이었다. 적어도 미쉬낀 공작이 나스따시아와 아글라야 가운데서 한 사람을 선택해 결혼을 했더라면 이러한 비극까지 가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누가 누구와 엮이든 절대 행복할 수 없는 비극이 잠재해 있는 복잡한 사랑의 얽힘이었다.



나스따시아는 공작을 아글라야와 적당히 엮어 정리하려고 하지만 한편으로 아글라야를 농락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런 나스따시아와 단판을 짓기 위해 찾아온 아글라야 앞에서 보란 듯이 공작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며 공작과 결혼하자는 말을 하고, 공작은 그 둘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다 제대로 된 행동을 하지 못해 아글라야에겐 상처만 주고 나스따시아와의 결혼이 진행되고 만다. 무언의 불안감이 계속 되는 가운데 결혼식 전날 나스따시아는 로고진에게 납치되고, 공작이 로고진을 찾아갔을 때 나스따시아는 방수포에 싸인 시체로 그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녀를 살해할 수밖에 없던 로고진, 그를 위로하는 공작과의 대면은 그들에게 내제되어 있는 모든 문제를 초월한 인간 대 인간으로 마주하는 최초이자 마지막 장면이었다.



로고진의 살해로 충격적인 결말을 맞이한 그들에게 남은 건 그에 상응한 당연한 귀결인지도 몰랐다. 로고진은 시베리아 유형을 선고받고, 아글라야는 공작을 포기하고 전혀 어울리지 않는 외국인과 결혼한다. 그녀의 가족도 국외에서 체류하면서 뿔뿔이 흩어진 가운데 공작 또한 원래의 백치상태로 돌아가 소설은 끝이 난다. 많은 아쉬움이 남아 ‘~하지 않았더라면’ 이란 상황을 만들어 내봤자 최선의 방책도, 어떠한 불행과 일련의 흐름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체념한 채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도스또예프스끼는 그가 창조해 낸 인물들 간의 갈등과 의식을 통해 러시아인의 기질과 당시의 사회상, 인간 깊숙이 숨겨 있는 모든 본능을 끌어냈다. 그 길고도 긴 여행 속에 몇몇 인물들만 드러냈지만 그 이외에도 다양한 인간군상은 새로운 의식의 너머를 가늠하게 했다.



그 중에 돋보였던 인물은 폐병을 앓고 있는 18세 청년 이뽈리뜨였다. 자신의 상처받은 내면을 신의 탓으로 돌리고, 자살을 시도하기도 한다. 자신에게 호의를 보인 공작을 비롯한 사회에 대해 통렬한 증오심을 드러낸 그는 나스따시야가 살해 된 뒤 역시 병으로 목숨을 잃게 된다. 그가 보인 행동과 사고는 스캔들에서 잠시 벗어나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어 주긴 했어도, 역시 유쾌하거나 비극을 넘어선 만남이 아니었다는 데서 안타까움이 인다.



오랜만에 읽게 된 도스또예프스끼 작품 가운데서도 장편을 읽어서인지 무척 긴 과정이었다는 느낌이 든다. 상, 하를 읽어낸 공백이 커서 묵직한 부담감은 덜했으나, 소설이 주는 무게감은 여전히 나를 비틀거리게 만든다. 그가 펼쳐놓은 세계에서 흩어진 의미들을 일일이 챙기는 것이 불가능 하다는 것도 알고, 그것을 따져가며 책을 읽은 것도 아니었다. 그의 책을 읽는 것은 ‘문제를 끊임없이 그 삶을 추구하는 데 있지, 그 삶을 발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607쪽)’라고 말한 이뽈리트처럼 끊임없이 그의 세계를 탐독해 가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의 책을 놓을 수 없고 2독, 3독을 하고 싶은 이유이기도 하다. 철저히 의미를 찾고 메시지를 분석하는 작가가 아닌, 읽는 과정을 즐기는 작가라고 말하고 싶은 그의 작품을 계속 접하는 것이야말로 그가 남겨 놓은 소설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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