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숲을 거닐다 - 장영희 문학 에세이
장영희 지음 / 샘터사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람들로부터 어떻게 그렇게 책을 많이 읽냐는 질문을 종종 받곤 한다. TV를 안보고 컴퓨터 하는 시간을 줄여 책을 본다는 앵무새 같은 대답을 하지만, 컴퓨터 하다가 시간을 보낼 때도 허다하고 읽지도 않고 책을 쌓아 둔 경우는 차마 말로 못할 지경이다. 나의 실체를 모르니 그런 질문을 받고 대답을 할 때마다 낯간지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요즘의 독서는 일상생활처럼 자연스러워 오히려 책이 읽어지지 않을 때가 위기로 다가올 지경에 이르렀다. 책이 쌓이는 것은 그냥 무시해 버릴 수 있는데, 책이 읽히지 않아 몸부림을 칠 때가 가장 괴롭다. 아무리 책장을 뒤져봐도 읽고 싶은 책이 없고, 힘겹게 책장을 펼쳐도 이내 덮어버릴 때는 진부함이 밀려와 일상생활을 마비시키기도 한다. 그럴 때 구원 같은 책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최근 나의 진부함을 떨쳐주고 독서열을 다시 끌어당겨 주었던 책은 장영희 교수님의 <문학의 숲을 거닐다>였다. 두툼한 책이었음에도 쉼 없이 달게 읽었을 정도로 너무나 귀중한 책이었다.

  

  진부함에 몸을 뒤척였던 적이 언제였냐는 듯 밤늦도록 책을 읽는 모습을 보며 내심 기쁘면서도 이런 즐거움을 안겨준 분이 장영희 교수님이라는 사실에 뿌듯했다. '문학'이란 단어가 들어간 제목 때문에 조금은 망설이기도 했고, 교수님의 에세이를 모두 읽어 아껴둔 책이기도 했는데 이토록 재미나게 읽힐 줄은 몰랐다. 교수님의 책은 모두 즐겁게 읽고, 많은 감동을 받긴 했어도 그중에서 가장 두툼한 책이라 오랜 시간이 걸릴 거라 지레짐작한 터라 순식간에 읽어버린 게 미안할 정도였다. 그러나 책을 읽는 순간을 허투로 보내지 않았고, 깊이 몰두하며 읽었기 때문에 이 글을 쓴 노고에 합당한 읽기였노라고 스스로에게 합리화를 시켜본다.

 

  '이 책은 2001년 8월부터 3년간 <조선일보> '문학의 숲, 고전의 바다' 라는 북 칼럼에 게재되었던 글을 모은 것'이라고 한다. 신문사 측은 ' '아, 이 책을 한 번 읽어보고 싶다.' 하고 도서관이나 책방으로 뛰어가게 해 달라'는 주문을 했다는데, 그 부분에서 많은 고민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문학 교수로서 비평적으로 글을 다루기보다, '그 작품이 내 마음에 어떻게 와 닿았는지, 어떤 감동을 주었는지, 그래서 그 작품들로 인해서 내 삶이 얼마나 더욱 풍요롭게 되었는지 솔직하게 쓰려고 노력' 했다고 한다. 내가 이 책을 읽기 전에 가졌던 고민이 '문학 교수'의 입장에서 글이 너무 깊게 들어가 버리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는데, 이미 저자는 그것을 간파하고 많은 독자들을 수용할 수 있는 글을 쓰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문학보다 개인적인 글들이 더 많이 들어가 버렸다고 했는데, 오히려 그런 면이 독자들에게 문학을 편하게 알리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이 책을 읽으면서 관심 있는 책이 나올 때마다 온라인 서점에서 검색하고, 절판되지 않은 책을 장바구니에 담느라 나름 바빴다. 내가 읽었던 책도 저자의 시선에서 생소한 책으로 보이는 마당에, 읽지 않은 책들에 대한 욕구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 중에서 유독 관심이 갔던 책들을 몇 권 구입하곤 했지만, 소유를 하자 읽기에 대한 열망이 사그라지는 것을 보고 소유하기 위한 독서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러면 어떠랴. 책장에 책이 쌓이다 보면 언젠가는 읽게 될 것이고 느지막이 교수님의 글을 떠올리며 읽더라도, 지금의 감동이 이어질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책을 못 읽자 일상까지 무너지는 내게 이 책은 단순히 문학을 알리는 것에만 일념하지 않고, 저자의 경험을 나누고 문학에 빗대어 위로를 해 주었다. 그랬기에 읽기를 멈출 수가 없었고, 마음이 한껏 고조돼 다른 책을 읽을 힘까지 얻은 것이다.

 

  연재의 제목이 '문학의 숲, 고전의 바다'였기 때문인지 고전에 관한 소개가 대부분이었고, 고전을 좋아한다고 말하면서도 열심히 읽지 않는 내게는 무척 흥미로운 책이었다. 거기다 소설의 줄거리라든지, 시만 달랑 싣고 말거나, 그 주변의 에피소드만 언급하고 말았더라면 지루한 읽기가 되었을 것이다. 저자는 늘 글의 소재가 되는 제자들에게 미안하다고 할 만큼 제자들의 이야기, 주변 이야기, 소소한 일상 이야기를 곁들어 문학을 논하였기에 부담이 없었고 '가랑비에 속곳 젖듯' 문학이 내 마음에 스며듦을 느낄 수 있었다. 평소에 궁금했던 작품에 대한 해소도 할 수 있었고, 정말 읽고 싶은 작품들은 따로 체크를 해 두어 꼭 읽어보려 했다. 그 가운데 문학과 일상을 잘 버무려낸 저자의 역량 덕에 문학도, 삶도 잘 와 닿은 것이 무엇보다 기뻤다.

 

  문학을 문학으로만 논했다면 아무리 명문장이라 할지라도 스쳐버렸을 게 뻔하다. 저자는 '문학의 주제를 한마디로 축약한다면 '어떻게 사랑하며 사는가'에 귀착된다. 동서고금의 모든 작가들은 결국 이 한 가지 주제를 전하기 위해 글을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많은 작가들이 사랑에 관해 전달한 메시지를 언급하기도 했는데, 논어에 나오는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살게끔 하는 것이다.' 란 구절을 언급하며 '사는 게 힘들다고, 왜 날 못살게 구느냐고 그렇게 보란듯이 죽어 버리면, 생명을 지켜 주지 못한 채 남아 있는 사람들이 사랑할 몫도 조금씩 앗아가는 것이다.' 라고 했는데 그 말이 마음에 박히고 말았다. 늘 힘들다고 투정부리고 내 삶은 왜 이모양이고 불평만 했는데, 나의 삶에 사랑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사랑하지도 못했고, 나를 살리기 위해 나를 제대로 사랑하지도 못했다는 생각과 함께 문학의 이면을 제대로 캐내지 못한 부끄러움이 일었다.

 

  지금껏 나는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독서를 하고 있다고 자부해 왔다. 그러나 이 책을 읽는 동안 고전이든 현대문학이든 절대로 삶과 따로 결부시켜 동떨어진 것으로 볼 수 없음을, 또한 도피한다고 도피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의 깊이로 더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삶이 주는 기쁨은 인간이 맞닥뜨리는 모든 고통과 역경에 맞설 수 있게 하고, 그것이야말로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이다.' 라고 말한 서모셋 몸의 말처럼 나의 독서는 도피성이 아니라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과정이었다는 귀중한 뜻을 발견하게 되었다. 윌리엄 포크너의 말처럼 '문학은 인간이 어떻게 극복하고 살아가는가를 가르친다.' 라고 생각하자 문학에 대한 탐독이 헛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 또한 깨달았다.

 

  무조건 읽기에만 급급했던 나의 독서가 부끄러웠다면 앞으로 만날 문학작품에 내 삶을 대비시켜 보기로 했다. 먼저 살다간 이들의 삶을 통해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고, 그렇다보면 더 이상 문학을 도피하기 위한 대처방법으로 대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이 생겼다. '신은 다시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뜨린다고 나는 믿는다.' 며 꿋꿋이 일어나 우리에게 이런 울림과 깨달음을 선사한 장영희 교수님께 나의 작은 변화가 닿는다면 그것보다 큰 영광은 없을 것 같다. 글을 통해 이런 사유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 독서의 즐거움인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으며 책장을 넘기는 나의 손길은 무척이나 조심스러우며 행복했다고, 마음은 흡족함으로 넘쳐났다고 고백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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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유 - 양장본
법정스님 지음 / 범우사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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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양손가득 무소유를 한 꾸러미씩 들고 서점을 나오면서도 참으로 기분이 이상했다. 절판된 <무소유>를 한껏 소유했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어제 이 책을 발견하고 오늘 이렇게 사들고 나선다는 사실에 기시감까지 느껴졌다. 근교의 언니 네에 온 김에 도스또예프스끼 보급판이 있을까 하고 서점에 들렀었다. 결국 원하던 책을 발견하지 못하고, 엉뚱한 책만 사들고 나오다 카운터에 쌓여 있는 <무소유> 양장본과 문고본을 발견했다. 의아해서 새로 출간됐냐고 묻자 그렇다는 대답이 들려왔다. 그렇게 서점을 나와서도 이상해 <무소유>의 출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지인에게 문자를 보냈다. <무소유>가 출간됐다고, 서점에 쌓여 있는 걸 봤다고, 이제 구입하면 되겠다고.

 

  그러나 지인의 반응은 뜨악했다. 지금 장난 하냐고, 온라인 서점에도 없고, 일반서점에도 없는 <무소유>를 어디서 봤냐는 답장과 함께 책이 있으면 당장 구입해 달라고 했다. 이미 버스를 타고 언니 네를 향하고 있었고, 서점도 문 닫을 시간이라 분명 <무소유>를 봤다고 하소연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래도 믿는 눈치가 아니라 서점에 전화해서 재고가 넉넉히 있는지, 내일 몇 시에 문여는 지까지 물어보았다. 서점 주인은 책이 넉넉히 있으니 아무 때나 천천히 오라는 답변을 해주었다. 그럼에도 지인은 오후까지 책이 남아있다는 보장이 어디 있냐고 다그쳐대 할 수 없이 아침 일찍 서점에 가 양장본 6권, 문고본 5권을 구입했다. 6만원이 훌쩍 넘는 책 가격을 보면서 '이건 법정 스님의 뜻이 아니야!'란 생각을 하면서도 손에 쥐어진 책을 보며 흡족해 하던 찰나, 갑자기 이런 심부름을 시킨 지인에 주눅 들어 부랴부랴 책을 사들고 나온 내가 어이가 없었다. 아니, <무소유>를 발견해 그 소식을 알려주었을 뿐인데 왜 그렇게 안달복달해서 나까지 초조하게 만들었냔 말이다!

 

  책이 무거워 집에 가는 내내 투덜거렸지만, 이번 기회에 양장본과 문고본을 한 권씩 마련해서 내심 뿌듯했다. 고등학교 때 언니에게 <무소유>를 빌려 읽어서 언제고 '다시 읽어보마.' 했던 것이 법정 스님이 입적하시고 유언에 따라 책이 절판되자 그제야 조바심이 났다. 재출간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래도 감감 무소식이라 이내 시큰둥해져 버렸다. 그런데 막상 책을 보니 생각이 달라져 구입하고 싶은 마음이 동하는 걸 보고 책에 대한 소유욕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왠지 쉽게 읽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책장에 고이 모셔 두었다. 하지만 시선이 <무소유>에 닿을 때마다 내게 남겨진 숙제인 듯 찜찜한 건 마찬가지였다. 결국 책을 구입한지 이틀 만에 초조함을 이기지 못해 책을 꺼내들었고, 마치 법정 스님이 내 옆에 계신 양,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잡고 꼿꼿한 자세로 정독했다.

 

  책은 읽을 때마다 그 느낌이 다르다곤 하지만, 열여덟 살에 읽은 <무소유>와 서른 살에 읽은 <무소유>는 세월의 흐름만큼이나 긴 강을 건너온 기분이었다. 기억 속에 사라진 이야기가 다시 살아난 것 같았고, 흐리멍덩한 이미지들은 선명해지고 있었다. 읽은 책을 다시 읽는 다는 것은 지워진 이야기를 다시 살려내는 거라 생각했는데, <무소유>를 읽는 동안에는 법정 스님의 성품이 더 또렷하게 다가왔다. 젊은 시절에 썼던 글이라서 그런지 글 속에 풍기는 스님의 이미지와 최근의 모습을 비교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미 <무소유> 안에도 날카로운 시선과 카랑카랑한 성품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것을 발견했다. 단지 덜 무르익어 조심스러웠을 뿐, 세월의 흐름과 함께한 참선이 스님의 성품을 단단하게 해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책을 읽는 내내 괜히 질책당하는 기분이 들면서도 그 대상이 오로지 나뿐이더라도 싫지 않았다. 질책을 당하는 읽기였다면 분명 불편했어야 마땅한데 오히려 마음이 편한 것도 이상했다. 아무래도 질책 당할 것이 많은 내 자신을 오랫동안 방치하다 <무소유>를 통해 제대로 임자를 만났다는 기분이 들었나보다.

 

   책에 메모지를 붙이는 작업과 짧은 느낌을 남기는 작업에도 숭고하리만큼 정제 된 행동을 보였다. 책에 대한 경건의 표현인지, 법정 스님에 대한 존경의 시선인지 헷갈릴 정도로 메모지를 덕지덕지 붙이면서도 이 모든 내용을 기억해 보겠다고 애쓰는 내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났다. 그럼에도 그 작업을 멈출 수 없었던 것은 너무 좋은 글귀가 많았고, 나의 환경에 따라 다른 울림으로 다가온다는 것이 신기했다. 분명 열여덟의 나는 이 문장을 읽었을 때 별 감흥 없이 지나쳤겠지만, 현재 서른의 나에게 특별하게 다가옴을 느꼈기에 더 간직하고 싶었다. 종교와 사상, 인생철학이나 배움을 떠나 한 사람의 뜻이 깃든 책 앞에서 한껏 낮아지고 만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드러내기 위해 골프를 취미로 삼는 사람들 앞에 '오늘 나의 취미는 끝없는, 끝없는 인내다.'라는 글부터 시작해 '진짜 양서는 읽다가 자꾸 덮이는 책이어야 한다.'로 건너가 '우리는 미워하고 싸우기 위해 마주친 원수가 아니라, 서로 의지해 사랑하려고 아득한 옛적부터 찾아서 만난 이웃들이다.'라며 문장이 점점 깊어질 때면 스님이 말한 양서의 정의처럼 자꾸 읽기를 멈추고 덮기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카랑카랑한 스님의 사유를 나눠 받으면서 범접할 수 없는 거리감을 느끼곤 했는데, 내 마음에 와 닿는 문장들 앞에서는 스르르 무너져 성큼성큼 다가가고 말았다. 그러면서 '우리들의 소유 관념이 때로는 우리들의 눈을 멀게' 하고, '언젠가 한 번은 빈손으로 돌아갈'거란 생각을 가진 스님을 닮아가고자, 혹은 삶의 본보기로 삼고자하는 거창한 뜻이 있어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아님을 알게 되었다. 단지 나를 질책할 누군가 필요했고, 질책 가운데서 현재의 내 상황을 돌아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하다는 무언의 절망어린 반항이 내제되어 있는지도 몰랐다.

 

   그래서인지 책을 읽고 나자 <무소유>를 읽기 전부터 겁냈던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내가 변화해야 한다고, 내 삶의 방향을 통째로 바꿔야 한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올곧은 분으로 인식되어 있어서인지 그분의 글 앞에서도 지레 겁을 먹었나보다. 법정 스님의 사유를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도 없고, 내가 수용할 수 있는 부분만 수용하며 이런저런 생각을 해도 그것만으로도 충분한데, 순식간에 따라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혼란스럽게 한 것 같다. 그것은 책을 읽는 자세로서도, 스님의 뜻에 합한 좋은 생각도 아니며, 글의 깊이에 동조하며 나와 다름을 받아들이는 것에 의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질을 흐리는 나의 자세 때문에 책을 읽으면서도 걱정이 앞섰지만, 조금씩 본질을 찾아가니 책 속으로 빠져들 수 있어 그 과정도 감사하게 다가왔다.

 

  한 꼭지가 끝날 때마다 글을 쓴 연도가 나왔는데, 약 30년 전후로 쓴 글들이라 놀라웠다.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았다는 베스트셀러를 떠나 지금 읽어도 낯설지 않은 현실에 씁쓸하기도 했고, 오래전에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안목에 감탄했다. 보통 사람이 살지 못한 정제된 삶을 사는 것, 그러면서도 보통인 우리와 부대끼며 다르지 않는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책 제목이 <무소유>라 이 책을 소장하는 여부에 대해서도 고민이 많았지만, 앞에서도 말했던 것처럼 법정 스님의 사유에 나를 대입해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렇다보면 '소유'에 대한 정죄뿐만 아니라 인생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성찰들이 곳곳에 드러나 있음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고, 왜 이 책이 그토록 사랑받는지, 많은 사람들이 법정 스님을 존경하는지를 여실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평범함에서 나오는 진리. 그것을 너무 잘 이끌어 내셨기에 그 분 앞에 숙연해지는 마음 또한 감추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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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유 애찬 2010-05-30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무소유~ 참 좋은 책입니다. 처음에 문고판으로 4권 사서 한권은제가 읽고 나머지 세권은 지인에게 하나씩 선물 하고 그리고 양장본 처음에는 두권 구입해서 하나는 제가 하고 한권은 선물 드렷네요 그 구하기 어렵다는 무소유 문고판.양장본 둘다 쉽게 제눈에 띄어서 저는 고가에 안주고 정가에 샀는데 온. 오프라인서점 모든곳에서 사실 정말 구하기 어려운건 사실이죠.. 그리고 최근에 그 구하기 어려운 무소유 양장본 파는곳 발견해서 또 두권 구매해서 어제 받았어요..사재기는 아니고 다 선물 하고 있어서... 다른 책보다 제가 짧막하게 되어 있는 그런 책을 좋아 해서 제 독서 취향과도 맞아 떨어지구요... 그래서 오두막 편지 일기일회. 아름다운 마무리 . 맑고 향기롭게도 다 구매 해서 읽었네요..

구하기 어렵다고는 하지만 제눈에는 쉽게 보여서 전 아무 문제 없이 사서 읽고 있어요.. 교보문고에서도 한번씩 점별 검색 하면 재고 있는경우도 있구요..오늘두 보니까 범우사 홈피에 정가에 판매 하더라구요...무소유 양장본

안녕반짝 2010-06-01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고등학교 때 빌려 읽고는 다시 한 번 읽어야지 했는데 이제야 발견하고 읽게 되었답니다. 문고본까지 사왔는데 양장본 읽고나니 바로 또 읽고 싶어지더라구요^^
무소유에 이어 <오두막 편지>를 읽고 있는데 역시 좋네요!
수필은 원래 좋아하는터라 간만에 우리 글의 아름다움을 느끼며 읽고 있답니다^^
 
눈으로 하는 작별
룽잉타이 지음, 도희진 옮김 / 사피엔스21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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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책에서 의외의 발견을 할 때, 책의 겉모습만 보고 제멋대로 한 추측이 빗나갈 때 책을 읽는 즐거움을 느낀다. 그런 경우는 흔치 않아서 즐거움을 맘껏 만끽하곤 한다. 책을 아껴 읽으며 자주 사색하고, 나의 일상을 되돌아보며 짧은 호흡을 뱉어낸다. 그렇게 읽은 책은 책장을 덮었을 때 특별한 감흥이 일지 않는데, 이미 책을 읽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나에게 그런 즐거움을 안겨준 책은 <눈으로 하는 작별>이었다. 제목과 겉표지만 보고 눈물샘을 자극하는 뻔한 소설이라고 착각했었다. 그러나 웬걸. 이 책은 에세이였고, 문화의 차이가 느껴지는 몇몇 에피소드가 이질감을 던져 주었지만 상당히 흡족한 책이었다.

 

  저자는 중화권에서 사회문화 비평가이자 베스트셀러 작가로 다양한 이력을 가진 지식인이었고, 그런 내면은 책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저자가 가진 지식을 고리타분하게 나열하는 것이 아닌 일상과 맞물려 그려 냈기에 지식이라는 편견을 없애고 알찬 글들을 만날 수 있었다. 책의 시작과 말미에 부모님에 관한 글이 실려 있어 하나의 인생을 관통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특히나 아버지에 관한 추억이 가득한 책의 끝부분은 저자의 절절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부모님에 관한 추억과 죽음 앞에서 조금은 숙연해지고, 삶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저자의 경험이 구석구석이 녹아 있었다. 그래서인지 공감할 수 있는 부분도 많았고, 색다른 세계를 경험하는 듯한 부분도 많았다. 순식간에 읽어버릴 수 있는 에세이임에도 속도가 나지 않았던 것은 저자가 펼쳐놓은 삶의 면모가 낱낱이 보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저자와 비슷한 연배의 사람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더 많은 공감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생은 누가 더 많이 살았느냐, 어떠한 무게를 갖고 있느냐보다 같은 곳을 바라볼 때 동감을 얻어낼 수 있다 생각한다. 그런 생각을 갖게 해준 작가가 바로 룽잉타이였고, 나의 인생보다 앞서나간 것 같은 많은 이야기가 많았지만 그 안에서 내게 맞는 이야기들도 넘쳐난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저자는 중국의 고전 시들을 많이 인용하며 잔상들을 남겼는데, 고전 시가 내 마음에 와 닿지 않더라도 나름대로의 해석들이 나를 울컥하게 만들 때가 많았다. '어떤 외로움은 곁에 얘기를 나눌 누군가와 내 마음을 알아주는 개 한 마리가 덜어줄 수도 있다.', '사랑이란 속절없이 사라지는 존재라 해도, 반딧불이 밤하늘에 빛을 뿌리며 날아다니는 이유를 생각하면 서로 사랑했던 그 시절조차 부정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란 문장 앞에서 어떻게 나와 다르다고 떨쳐 버릴 수 있겠는가.

 

  저자가 명쾌한 문장가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글의 다양함 속에서 독자의 다양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아무리 듣기 좋은 시 구절도 문학적인 가치만 언급한다면 지루할 것이고, 가족에 대한 애틋함도 자신의 경우만 얘기한다면 공감을 얻지 못할 것이다. 저자는 그 모든 것을 적절히 섞었을 뿐만 아니라 유머도 집어넣고, 생활 속의 자잘한 에피소드까지도 기꺼이 드러냈다. 어느 날은 문학과 사회 현상에 대해 깊이 있는 글을 써내다가도, 계란 하나 삶는 것에도 가정부에게 타박을 들을까 전전긍긍하는 모습에 웃음을 터트리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아들과의 대화나 메일을 주고받을 때는 항상 긴장하게 되었다. 세대가 다르다는 차이를 느끼고, 자신의 의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모습 앞에서 버릇없음, 요즘 아이들의 모습을 느끼다가도 엄마를 생각하는 마음 앞에서는 괜히 찡해지기도 했다.

 

  3부로 이야기가 나뉘어져 있긴 하지만 너무나 다양한 소재의 글을 만나서인지 나름대로 정리한다는 것이 벅차게 다가온다. 오랜 시간 꼼꼼히 읽었음에도 평소와는 달리 느린 독서여서 그런지 많은 이야기가 뒤엉킨 기분까지 든다. 그러나 저자의 글을 읽으면서 내 일상의 자잘함을 되돌아 볼 수 있었고, 이런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것에 행복을 느꼈다. 그 안에는 분명 나와 다른 것에 생경함을 느끼기도 했다. 저자가 살고 있는 타이베이의 풍경, 타이완의 문화, 그들의 삶 속에 녹아 있는 일상이 그랬다. 하지만 그런 과정 자체도 타인의 삶을 통해 나를 걸러내고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된 것만은 분명하다. 오히려 그런 생경함 때문에 내게 주어진 환경에 감사하게 된 경우도 많았다. 문화의 다름은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계에서 충분히 감내할 수 있는 것일 뿐, 그것이 타인과 나를 연결해 주는 데 방해를 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이해하가고 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 대해. (중략) 서로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이별하는 사이가 아닐까.' 라고 말했다. 저자가 부모와 자식 간에 그런 생각을 가졌다면 이 책을 읽는 독자는 더 다양한 단상들을 엮어볼 수 있을 것이다. 삶, 관계, 사랑, 이별, 죽음 등 그런 식으로 바라보다 보면 자신의 현재 위치는 물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방법이 보일지도 모른다. 꼭 이렇게 거창하게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신의 갇힌 시선에서 타인의 드러낸 시선을 경험해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다. 내가 놓쳐 버리고 잊어 버렸던 기억들, 스치고 무시해 버렸던 추억들이 저자를 통해 생생히 되살아 날 것이다. 그로인해 현재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존재감이 드러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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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의 밤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우석균 옮김, 알베르토 모랄레스 아후벨 그림 / 열린책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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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베르토 볼라뇨의 작품을 읽게 된 것은 <볼라뇨, 로베르토 볼라뇨>란 책이 666원에 나와 구입해 놓았던 때문이 아니라 루이스 세풀베다 때문이었다. 덕분에 남미 문학에 조금씩 눈을 뜨게 되었고, 비슷한 분위기를 찾던 중 루이스 세풀베다를 발굴한 열린책들에 <로베르토 볼라뇨>의 작품이 출간 된 것을 알게 되었다. 을유문화사에서 <아메리카 나치 문학>이 출간되어 있지만 한 작가의 작품을 출간하기 전에 작가를 소개하는 책을 특가에 내놓은 것이나, 앞으로 계속해서 로베르토 볼라뇨의 책을 출간한다고 하니 열린책들의 책들로 먼저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책의 행간이 너무 좁아 답답한 마음에 읽지도 않고 덮어버려 첫 대면은 그다지 순조롭지 못했다. 

 

  그런 책을 다시 붙들게 해 준 것도 루이스 세풀베다의 작품을 읽은 직후였고, 같은 칠레 출신 작가라는 이유로 비슷한 분위기를 뿜어내길 바랐다. 하지만 <칠레의 밤>을 읽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작가의 글은 역사의 암울함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소재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르나 완전히 같을 수도 없고 그런 비교조차도 무의미 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호하게 흩어지는 로베르토 볼라뇨의 글부터가 생소했고, 그 안에서 과연 내가 낯선 남미 작가를 포용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그런 걱정은 당장 글을 읽는 것에서부터 불거졌다. 아무리 집중을 해서 읽어도 한 곳으로 모을 수 없었고, 어디에도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기분인 것 같아 착잡했다. 책의 흐름도 허용하지 않은 모호한 글이 서운했고, 이대로 로베르토 볼라뇨라는 작가와의 조우가 실패할까봐 두려웠다.

 

  열심히 읽었지만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아 절반쯤 읽다 책을 덮었다. 이대로 읽는다는 것이 무의미 했고, 이런 읽기라면 차라리 묵혀뒀다 읽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다행인지 선급함인지 생각보다 다시 펼쳐든 시기는 짧았고, 그 만남으로 인해 저자의 다른 작품을 읽어보고 싶은 호기심을 충분히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몸이 불편해 안경을 벗고 누워있다 머리맡에 쌓여 있는 책들 가운데서 우연히 <칠레의 밤>을 꺼내 들었고, 그 길로 남은 페이지를 순식간에 읽어버렸다. 가까이 끌어당긴 활자의 덕분인지 집중력이 좋아서인지 알 수 없으나, 그날의 독서는 처음의 독서와 달랐던 것만은 확실하다. 마치 내가 보지 못했던 활자의 이면을 보기라도 한 듯, 전혀 다른 책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중간부터 트인 독서 때문에 앞부분이 조금 모호하긴 했으나 큰 장애가 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힘겨운 과정을 거쳐 와서인지 차근차근 정립되는 기분이었고, 흩어졌던 조각들이 속속들이 맞춰지기까지 했다. 이바카체 신부의 독백이자 고백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구성만큼이나 독특했다. 뚜렷하게 책의 내용이 들어온 부분에서부터 이바카체 신부는 더 명확하게 다가왔으나, 태연자약하게 자신의 경험을 들춰내는 그를 보며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말았다. 자신의 삶에 대해 흘러온 인생에 대해 고백한다고 하면서 어떻게 이렇게 무미건조할 수 있는지, 어떠한 반성도 없이 뻣뻣할 수 있는지 당시의 상황은 어쩔 수 없었다는 어떠한 말로도 그를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오로지 그의 태도에 기가 막혔고 그를 비난하고 싶은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이바카체 신부의 고백은 독특했지만 특이할만한 게 없었다. 그가 말하는 내용이 특이할만한 게 없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말하는 태도가 그랬다는 뜻이다. 분명 모호한 글을 읽으면서도 책을 놓을 수 없는 흡인력에 끌려가면서도 흥미로움을 유발시킨 건 아니었다. 이바카체 신부가 비평가 페어웰의 영지에서 파블로 네루다를 만난 일, 동성애의 은밀함과 문학적으로 농락당할 때만 해도 그가 가진 지식적인 면모와 조금은 진부한 일상의 자잘한 감상들이 그냥 그러려니 했다. 신부라는 위치에서 보이는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신랄하고 풍자의 요소를 띠고 있다고 해도 크게 관여하지 않으려했다. 아니, 관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저자는 이바카체 신부를 비롯한 여러 등장인물들을 실존인물에서 데려왔고, 자국의 굵직한 사건들과 엮어냄에도 배경지식이 부족한 내가 소설과 현실을 구별할 개제가 못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바카체 신부는 그런 나의 속성을 이해하려는 듯 점점 태연자약하게 끔찍한 일들을 아무렇지 않게 풀어냈다. 존재하지 않는 늙다리 청년에게 헛소리를 해대는 것부터 하며, 아옌데가 지배할 때의 극한 상황을 나열하지만 그리스 비극을 읽으면서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은 듯 평안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비밀 요원들에 의해 유럽을 탐방하고 다시 칠레로 돌아왔을 때 그를 기다리고 있는 일은 쉽게 간과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가 오프스 데이(프랑코 치하 스페인과 칠레에서 신중하게 독재 정권에 봉사했다고 한다.) 회원이라는 것도 나중에 알았지만, '피노체트 장군과 군사 평의회 앞에서 마르크스주의 교리를 강의'하게 된 것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긴 했어도 행위에 대해 어떠한 괴로움도 없었고, 다른 사람들이 그 일로 인해 입방아를 찧을 때만해도 조바심이 나긴 했지만 곧 묻혀 버리자 그 일을 계기로 문학가로서 비평가로써 한 단계 더 발돋움을 할 뿐이었다.

 

  거기다 마리아 카날레스라는 미국인 남편을 둔 작가 지망생이자, 작가와 예술가들을 위한 살롱을 개최했던 여인의 집에서 일어난 일도 아무렇지 않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곳은 다름 아닌 비밀경찰인 남편이 심문 장소로 이용하던 장소였다. 어느 날 술에 취한 손님이 지하실로 잘못 들어갔다 벌거벗겨진 채 팔 다리가 묶인 남자를 발견하지만 조용히 빠져 나온다. 그리고 그 일은 시간이 꽤 흐른 후에 밝혀졌고,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파티는 지속되었고 사람들은 모였다. 모두들 그때의 일을 회피하려 했고, 이바카체 신부도 그랬지만 거의 폐가로 변한 저택에 찾아가 마리아 카날레스를 만나는 장면은 더 기괴하다. 자신의 문학 경력을 걱정하고, 예전 생활을 영위하지 못한 불평을 해대며, 심문 장소로 사용된 장소를 태연히 보여 주려하고, 집에서 심문이 자행되는 동안에도 TV를 봤던 마리아 카날레스에 치를 떨면서도 이바카체 신부도 똑같은 파렴치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리아 카날레스는 이미 드러난 사실 앞에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을 까발렸을 뿐이고, 아무리 이 소설이 이바카체 신부의 고백이라고 할지라도 잘 포장하고 있다는 차이만 있는 것 같았다.

 

  단 두 문단으로 이루어진, 한 문단도 책의 말미에서 '그 후 지랄 같은 폭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한다.'로 끝나는 이 책은 혼란스러움, 환상, 풍자, 비평, 신랄함 등 유쾌하지 않은 많은 사실을 내포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각박했고, 역사의 소용돌이 안에서 살아가고 있으면서 자신을 지키기에 급급한 모습만 보였다. 소설의 배경과 등장인물, 저자의 삶을 아무리 꼼꼼하게 설명해 주어도 나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같아 그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것만도 무척 힘겨웠다. 활자의 이면의 세계를 알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나의 자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단순히 소설로 치부해 버릴 수 있다면 내 마음이 조금은 가벼웠을까. 드러난 진실 앞에도, 실존했던 인물과 사건 앞에서도 아무런 감흥이 없는 나의 태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 부분은 저자의 작품을 탐하며 천천히 풀어나가야 할 것 같다. 앞으로 출간될 그의 작품을 읽으면서, <볼라뇨, 로베르토 볼라뇨>란 책도 참고하면서 한 작가의 격정적인 문학의 세계로 빠져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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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불류 시불류 - 이외수의 비상법
이외수 지음, 정태련 그림 / 해냄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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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외수 작가와의 첫 만남이었던 <외뿔>이 마음에 들어, 그의 신간이 나왔다고 해서 조심스레 두 번째 만남을 가졌다. 그의 책을 마주하면서 조심스러웠던 이유는 수많은 작품 중에서 이제 겨우 두 번째 만남이니 이외수란 작가를 또 다른 틀에 묶지 않길 바랐다. <외뿔>로 인해 저자에 잘못된 이미지를 벗겨 냈으니 혹시나 또 다시 실수할까봐 겁이 났는지도 모르겠다. 더군다나 그의 소설은 아직 마주하지 못한 채 에세이만 연달아 읽으니 이런저런 걱정이 된 것 같다. 한 작가와의 작품을 읽는 다는 것은 시기와 작품의 종류도 무척 중요하다는 것을 알기에, 좀 더 시간을 갖고 여러 작품을 만나며 나름대로의 판단을 하길 바랐다.

 

  나의 걱정과는 달리 책을 펼치자마자 한 번의 쉼 없이 끝까지 읽어버렸다. 이 글을 썼을 저자의 힘겨움 앞에 너무 빨리 읽어버린 것이 민망할 정도였다. 나를 사로잡는 문장 앞에 나름 시간을 갖고 사색에 빠지기도 했으니 책을 읽는 시간에 대한 무색함이 그리 뻔뻔했던 것은 아니었노라고 스스로를 위로해본다. 이 책은 <이외수의 비상법>이라는 소제목도 가지고 있는데, 이런 종류의 책을 읽다보면 주제에 크게 부합 한다기보다 다양한 소재의 글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럼에도 '비상법'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는 것은 좀 더 자유로운 영혼을 꿈꿀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외수의 책을 읽다보면 한 노인의 잔소리를 귀찮아하면서도 꾸역꾸역 나름 즐겁게(?) 듣고 있는 형상이다. 저자도 자신을 '노인'이라며 '허허' 거리며 잔소리를 늘어놓기도 하고, 충고도 하며, 객기도 부려보니 나 또한 편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책을 읽은 지 얼마 안 돼 마음에 '쿵' 하고 충격이 온 문장은 '떡밥도 없는 빈 낚시를 일상의 강물에 드리우고 성공이라는 이름의 대어가 걸려들기를 바라는 조사들이여.' 였다. '내 모습이다.'라고 메모지를 붙이며 '이 노인의 눈에는 참으로 가련해 보이네.'란 시선을 맘껏 받아내고 있었다. 그러면서 떡밥 좀 물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 달라고 반성하던 마음은 금세 사라져 침을 흘리고 있는 나를 보니 더욱 한심해졌다.

 

  반평생 글을 써온 글쟁이의 입장에서, 혹은 인생을 더 살아온 노인의 입장에서 자신만의 비상법을 말하고 생각을 드러낸 것이지, 그것을 날것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현재 나의 상황과 맞는 부분에서는 한껏 받아들여도 되나, 나의 색깔과 맞지 않고 어긋나는 부분에서는 거부감을 일으키기보다 또 다른 의견이 있다고 치부해 버리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그런 읽기 방법이 이 책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데 도움이 된 것 같다. 개인적으로 내 마음에 사랑의 아픔이 내재되어 있어서인지, 저자가 사랑을 논하는 부분에서는 한 토시도 놓치지 않고 눈에 불을 켜고 읽었다. 모두 수용할 수는 없었으나 나의 마음을 울리고, 뒤흔드는 문장들이 많아 위로를 많이 받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위로라는 것이 희망을 준다거나 어떠한 기대감을 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약간은 자조적인 색감을 띄어 나의 마음과 적당히 버무려야만 효과가 나타났다.

 

  <외뿔>에서 저자의 유머를 경험해서인지 이 책에서는 그의 유머가 신선하다기 보다는 익숙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오히려 유머의 이면을 맛보아서인지 씁쓸하다고 해야 할까? 다양한 소재에 대한 글을 읽다보니 많은 생각들이 뒤섞여 온전히 정신을 차릴 수 없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유머도 그랬고, 시사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나, 사회현상에 대한 비판까지 마구마구 뒤섞여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때도 많았다. 대부분 짧은 문장이라 독자에게 문제제기를 남겨둔 채 살짝 모습을 감춰버리는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그럴 때마다 그 허전함을 채우고자 메모지에 간단히 나의 느낌을 써서 붙이기도 했는데, '나이 서른이 넘었는데 외울 수 있는 시가 한 편도 없다면 그의 영혼은 얼마나 삭막할까.' 라는 곳에는 '헉!'이라고 짤막하게 메모해 놓은 것을 보며 되레 겸연쩍었다. 명언처럼 툭툭 던져주는 문장들 속에는 이렇듯 나를 찔러대는 글들이 많았기에 메모할 일이 많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다양한 느낌을 간직하고 있어서인지 이 책을 덮고 나서 내게 남아있는 느낌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 순간순간 느끼는 것은 많았지만 남겨진 것이 무어냐고 한다면 정작 대답할게 궁색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정으로 충분한 책이었기에, 또한 그 다양한 문장들을 하나의 느낌으로 엮을 수 없음을 알기에 결론에 큰 의의를 두지 않으려고 한다. 결론이 나올법한 주제도 아니었고, 그런 주제를 던져주지도 않았다. 지극히 저자의 주관적인 생각이 담긴 글이고, 그 생각의 펼쳐짐에서 독자가 느낄 수 있고 수용할 것이 많다면 그것만으로 된 것이다. 비상하지 못하고 현재의 수준에서 머무른다고 해도, 자신의 마음을 어느 정도 갈아엎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자못 환상을 꿈꾸며 맘껏 비상하려는 자들에게 '기적은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대 자신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라는 말이 도움이 될는지. 오히려 그들의 날개를 꺾는 말일지라도 날개가 꺾인 이들에게 더 큰 힘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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