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의 밤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우석균 옮김, 알베르토 모랄레스 아후벨 그림 / 열린책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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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베르토 볼라뇨의 작품을 읽게 된 것은 <볼라뇨, 로베르토 볼라뇨>란 책이 666원에 나와 구입해 놓았던 때문이 아니라 루이스 세풀베다 때문이었다. 덕분에 남미 문학에 조금씩 눈을 뜨게 되었고, 비슷한 분위기를 찾던 중 루이스 세풀베다를 발굴한 열린책들에 <로베르토 볼라뇨>의 작품이 출간 된 것을 알게 되었다. 을유문화사에서 <아메리카 나치 문학>이 출간되어 있지만 한 작가의 작품을 출간하기 전에 작가를 소개하는 책을 특가에 내놓은 것이나, 앞으로 계속해서 로베르토 볼라뇨의 책을 출간한다고 하니 열린책들의 책들로 먼저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책의 행간이 너무 좁아 답답한 마음에 읽지도 않고 덮어버려 첫 대면은 그다지 순조롭지 못했다. 

 

  그런 책을 다시 붙들게 해 준 것도 루이스 세풀베다의 작품을 읽은 직후였고, 같은 칠레 출신 작가라는 이유로 비슷한 분위기를 뿜어내길 바랐다. 하지만 <칠레의 밤>을 읽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작가의 글은 역사의 암울함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소재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르나 완전히 같을 수도 없고 그런 비교조차도 무의미 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호하게 흩어지는 로베르토 볼라뇨의 글부터가 생소했고, 그 안에서 과연 내가 낯선 남미 작가를 포용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그런 걱정은 당장 글을 읽는 것에서부터 불거졌다. 아무리 집중을 해서 읽어도 한 곳으로 모을 수 없었고, 어디에도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기분인 것 같아 착잡했다. 책의 흐름도 허용하지 않은 모호한 글이 서운했고, 이대로 로베르토 볼라뇨라는 작가와의 조우가 실패할까봐 두려웠다.

 

  열심히 읽었지만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아 절반쯤 읽다 책을 덮었다. 이대로 읽는다는 것이 무의미 했고, 이런 읽기라면 차라리 묵혀뒀다 읽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다행인지 선급함인지 생각보다 다시 펼쳐든 시기는 짧았고, 그 만남으로 인해 저자의 다른 작품을 읽어보고 싶은 호기심을 충분히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몸이 불편해 안경을 벗고 누워있다 머리맡에 쌓여 있는 책들 가운데서 우연히 <칠레의 밤>을 꺼내 들었고, 그 길로 남은 페이지를 순식간에 읽어버렸다. 가까이 끌어당긴 활자의 덕분인지 집중력이 좋아서인지 알 수 없으나, 그날의 독서는 처음의 독서와 달랐던 것만은 확실하다. 마치 내가 보지 못했던 활자의 이면을 보기라도 한 듯, 전혀 다른 책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중간부터 트인 독서 때문에 앞부분이 조금 모호하긴 했으나 큰 장애가 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힘겨운 과정을 거쳐 와서인지 차근차근 정립되는 기분이었고, 흩어졌던 조각들이 속속들이 맞춰지기까지 했다. 이바카체 신부의 독백이자 고백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구성만큼이나 독특했다. 뚜렷하게 책의 내용이 들어온 부분에서부터 이바카체 신부는 더 명확하게 다가왔으나, 태연자약하게 자신의 경험을 들춰내는 그를 보며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말았다. 자신의 삶에 대해 흘러온 인생에 대해 고백한다고 하면서 어떻게 이렇게 무미건조할 수 있는지, 어떠한 반성도 없이 뻣뻣할 수 있는지 당시의 상황은 어쩔 수 없었다는 어떠한 말로도 그를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오로지 그의 태도에 기가 막혔고 그를 비난하고 싶은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이바카체 신부의 고백은 독특했지만 특이할만한 게 없었다. 그가 말하는 내용이 특이할만한 게 없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말하는 태도가 그랬다는 뜻이다. 분명 모호한 글을 읽으면서도 책을 놓을 수 없는 흡인력에 끌려가면서도 흥미로움을 유발시킨 건 아니었다. 이바카체 신부가 비평가 페어웰의 영지에서 파블로 네루다를 만난 일, 동성애의 은밀함과 문학적으로 농락당할 때만 해도 그가 가진 지식적인 면모와 조금은 진부한 일상의 자잘한 감상들이 그냥 그러려니 했다. 신부라는 위치에서 보이는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신랄하고 풍자의 요소를 띠고 있다고 해도 크게 관여하지 않으려했다. 아니, 관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저자는 이바카체 신부를 비롯한 여러 등장인물들을 실존인물에서 데려왔고, 자국의 굵직한 사건들과 엮어냄에도 배경지식이 부족한 내가 소설과 현실을 구별할 개제가 못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바카체 신부는 그런 나의 속성을 이해하려는 듯 점점 태연자약하게 끔찍한 일들을 아무렇지 않게 풀어냈다. 존재하지 않는 늙다리 청년에게 헛소리를 해대는 것부터 하며, 아옌데가 지배할 때의 극한 상황을 나열하지만 그리스 비극을 읽으면서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은 듯 평안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비밀 요원들에 의해 유럽을 탐방하고 다시 칠레로 돌아왔을 때 그를 기다리고 있는 일은 쉽게 간과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가 오프스 데이(프랑코 치하 스페인과 칠레에서 신중하게 독재 정권에 봉사했다고 한다.) 회원이라는 것도 나중에 알았지만, '피노체트 장군과 군사 평의회 앞에서 마르크스주의 교리를 강의'하게 된 것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긴 했어도 행위에 대해 어떠한 괴로움도 없었고, 다른 사람들이 그 일로 인해 입방아를 찧을 때만해도 조바심이 나긴 했지만 곧 묻혀 버리자 그 일을 계기로 문학가로서 비평가로써 한 단계 더 발돋움을 할 뿐이었다.

 

  거기다 마리아 카날레스라는 미국인 남편을 둔 작가 지망생이자, 작가와 예술가들을 위한 살롱을 개최했던 여인의 집에서 일어난 일도 아무렇지 않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곳은 다름 아닌 비밀경찰인 남편이 심문 장소로 이용하던 장소였다. 어느 날 술에 취한 손님이 지하실로 잘못 들어갔다 벌거벗겨진 채 팔 다리가 묶인 남자를 발견하지만 조용히 빠져 나온다. 그리고 그 일은 시간이 꽤 흐른 후에 밝혀졌고,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파티는 지속되었고 사람들은 모였다. 모두들 그때의 일을 회피하려 했고, 이바카체 신부도 그랬지만 거의 폐가로 변한 저택에 찾아가 마리아 카날레스를 만나는 장면은 더 기괴하다. 자신의 문학 경력을 걱정하고, 예전 생활을 영위하지 못한 불평을 해대며, 심문 장소로 사용된 장소를 태연히 보여 주려하고, 집에서 심문이 자행되는 동안에도 TV를 봤던 마리아 카날레스에 치를 떨면서도 이바카체 신부도 똑같은 파렴치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리아 카날레스는 이미 드러난 사실 앞에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을 까발렸을 뿐이고, 아무리 이 소설이 이바카체 신부의 고백이라고 할지라도 잘 포장하고 있다는 차이만 있는 것 같았다.

 

  단 두 문단으로 이루어진, 한 문단도 책의 말미에서 '그 후 지랄 같은 폭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한다.'로 끝나는 이 책은 혼란스러움, 환상, 풍자, 비평, 신랄함 등 유쾌하지 않은 많은 사실을 내포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각박했고, 역사의 소용돌이 안에서 살아가고 있으면서 자신을 지키기에 급급한 모습만 보였다. 소설의 배경과 등장인물, 저자의 삶을 아무리 꼼꼼하게 설명해 주어도 나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같아 그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것만도 무척 힘겨웠다. 활자의 이면의 세계를 알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나의 자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단순히 소설로 치부해 버릴 수 있다면 내 마음이 조금은 가벼웠을까. 드러난 진실 앞에도, 실존했던 인물과 사건 앞에서도 아무런 감흥이 없는 나의 태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 부분은 저자의 작품을 탐하며 천천히 풀어나가야 할 것 같다. 앞으로 출간될 그의 작품을 읽으면서, <볼라뇨, 로베르토 볼라뇨>란 책도 참고하면서 한 작가의 격정적인 문학의 세계로 빠져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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