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숲을 거닐다 - 장영희 문학 에세이
장영희 지음 / 샘터사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람들로부터 어떻게 그렇게 책을 많이 읽냐는 질문을 종종 받곤 한다. TV를 안보고 컴퓨터 하는 시간을 줄여 책을 본다는 앵무새 같은 대답을 하지만, 컴퓨터 하다가 시간을 보낼 때도 허다하고 읽지도 않고 책을 쌓아 둔 경우는 차마 말로 못할 지경이다. 나의 실체를 모르니 그런 질문을 받고 대답을 할 때마다 낯간지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요즘의 독서는 일상생활처럼 자연스러워 오히려 책이 읽어지지 않을 때가 위기로 다가올 지경에 이르렀다. 책이 쌓이는 것은 그냥 무시해 버릴 수 있는데, 책이 읽히지 않아 몸부림을 칠 때가 가장 괴롭다. 아무리 책장을 뒤져봐도 읽고 싶은 책이 없고, 힘겹게 책장을 펼쳐도 이내 덮어버릴 때는 진부함이 밀려와 일상생활을 마비시키기도 한다. 그럴 때 구원 같은 책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최근 나의 진부함을 떨쳐주고 독서열을 다시 끌어당겨 주었던 책은 장영희 교수님의 <문학의 숲을 거닐다>였다. 두툼한 책이었음에도 쉼 없이 달게 읽었을 정도로 너무나 귀중한 책이었다.

  

  진부함에 몸을 뒤척였던 적이 언제였냐는 듯 밤늦도록 책을 읽는 모습을 보며 내심 기쁘면서도 이런 즐거움을 안겨준 분이 장영희 교수님이라는 사실에 뿌듯했다. '문학'이란 단어가 들어간 제목 때문에 조금은 망설이기도 했고, 교수님의 에세이를 모두 읽어 아껴둔 책이기도 했는데 이토록 재미나게 읽힐 줄은 몰랐다. 교수님의 책은 모두 즐겁게 읽고, 많은 감동을 받긴 했어도 그중에서 가장 두툼한 책이라 오랜 시간이 걸릴 거라 지레짐작한 터라 순식간에 읽어버린 게 미안할 정도였다. 그러나 책을 읽는 순간을 허투로 보내지 않았고, 깊이 몰두하며 읽었기 때문에 이 글을 쓴 노고에 합당한 읽기였노라고 스스로에게 합리화를 시켜본다.

 

  '이 책은 2001년 8월부터 3년간 <조선일보> '문학의 숲, 고전의 바다' 라는 북 칼럼에 게재되었던 글을 모은 것'이라고 한다. 신문사 측은 ' '아, 이 책을 한 번 읽어보고 싶다.' 하고 도서관이나 책방으로 뛰어가게 해 달라'는 주문을 했다는데, 그 부분에서 많은 고민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문학 교수로서 비평적으로 글을 다루기보다, '그 작품이 내 마음에 어떻게 와 닿았는지, 어떤 감동을 주었는지, 그래서 그 작품들로 인해서 내 삶이 얼마나 더욱 풍요롭게 되었는지 솔직하게 쓰려고 노력' 했다고 한다. 내가 이 책을 읽기 전에 가졌던 고민이 '문학 교수'의 입장에서 글이 너무 깊게 들어가 버리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는데, 이미 저자는 그것을 간파하고 많은 독자들을 수용할 수 있는 글을 쓰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문학보다 개인적인 글들이 더 많이 들어가 버렸다고 했는데, 오히려 그런 면이 독자들에게 문학을 편하게 알리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이 책을 읽으면서 관심 있는 책이 나올 때마다 온라인 서점에서 검색하고, 절판되지 않은 책을 장바구니에 담느라 나름 바빴다. 내가 읽었던 책도 저자의 시선에서 생소한 책으로 보이는 마당에, 읽지 않은 책들에 대한 욕구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 중에서 유독 관심이 갔던 책들을 몇 권 구입하곤 했지만, 소유를 하자 읽기에 대한 열망이 사그라지는 것을 보고 소유하기 위한 독서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러면 어떠랴. 책장에 책이 쌓이다 보면 언젠가는 읽게 될 것이고 느지막이 교수님의 글을 떠올리며 읽더라도, 지금의 감동이 이어질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책을 못 읽자 일상까지 무너지는 내게 이 책은 단순히 문학을 알리는 것에만 일념하지 않고, 저자의 경험을 나누고 문학에 빗대어 위로를 해 주었다. 그랬기에 읽기를 멈출 수가 없었고, 마음이 한껏 고조돼 다른 책을 읽을 힘까지 얻은 것이다.

 

  연재의 제목이 '문학의 숲, 고전의 바다'였기 때문인지 고전에 관한 소개가 대부분이었고, 고전을 좋아한다고 말하면서도 열심히 읽지 않는 내게는 무척 흥미로운 책이었다. 거기다 소설의 줄거리라든지, 시만 달랑 싣고 말거나, 그 주변의 에피소드만 언급하고 말았더라면 지루한 읽기가 되었을 것이다. 저자는 늘 글의 소재가 되는 제자들에게 미안하다고 할 만큼 제자들의 이야기, 주변 이야기, 소소한 일상 이야기를 곁들어 문학을 논하였기에 부담이 없었고 '가랑비에 속곳 젖듯' 문학이 내 마음에 스며듦을 느낄 수 있었다. 평소에 궁금했던 작품에 대한 해소도 할 수 있었고, 정말 읽고 싶은 작품들은 따로 체크를 해 두어 꼭 읽어보려 했다. 그 가운데 문학과 일상을 잘 버무려낸 저자의 역량 덕에 문학도, 삶도 잘 와 닿은 것이 무엇보다 기뻤다.

 

  문학을 문학으로만 논했다면 아무리 명문장이라 할지라도 스쳐버렸을 게 뻔하다. 저자는 '문학의 주제를 한마디로 축약한다면 '어떻게 사랑하며 사는가'에 귀착된다. 동서고금의 모든 작가들은 결국 이 한 가지 주제를 전하기 위해 글을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많은 작가들이 사랑에 관해 전달한 메시지를 언급하기도 했는데, 논어에 나오는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살게끔 하는 것이다.' 란 구절을 언급하며 '사는 게 힘들다고, 왜 날 못살게 구느냐고 그렇게 보란듯이 죽어 버리면, 생명을 지켜 주지 못한 채 남아 있는 사람들이 사랑할 몫도 조금씩 앗아가는 것이다.' 라고 했는데 그 말이 마음에 박히고 말았다. 늘 힘들다고 투정부리고 내 삶은 왜 이모양이고 불평만 했는데, 나의 삶에 사랑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사랑하지도 못했고, 나를 살리기 위해 나를 제대로 사랑하지도 못했다는 생각과 함께 문학의 이면을 제대로 캐내지 못한 부끄러움이 일었다.

 

  지금껏 나는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독서를 하고 있다고 자부해 왔다. 그러나 이 책을 읽는 동안 고전이든 현대문학이든 절대로 삶과 따로 결부시켜 동떨어진 것으로 볼 수 없음을, 또한 도피한다고 도피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의 깊이로 더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삶이 주는 기쁨은 인간이 맞닥뜨리는 모든 고통과 역경에 맞설 수 있게 하고, 그것이야말로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이다.' 라고 말한 서모셋 몸의 말처럼 나의 독서는 도피성이 아니라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과정이었다는 귀중한 뜻을 발견하게 되었다. 윌리엄 포크너의 말처럼 '문학은 인간이 어떻게 극복하고 살아가는가를 가르친다.' 라고 생각하자 문학에 대한 탐독이 헛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 또한 깨달았다.

 

  무조건 읽기에만 급급했던 나의 독서가 부끄러웠다면 앞으로 만날 문학작품에 내 삶을 대비시켜 보기로 했다. 먼저 살다간 이들의 삶을 통해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고, 그렇다보면 더 이상 문학을 도피하기 위한 대처방법으로 대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이 생겼다. '신은 다시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뜨린다고 나는 믿는다.' 며 꿋꿋이 일어나 우리에게 이런 울림과 깨달음을 선사한 장영희 교수님께 나의 작은 변화가 닿는다면 그것보다 큰 영광은 없을 것 같다. 글을 통해 이런 사유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 독서의 즐거움인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으며 책장을 넘기는 나의 손길은 무척이나 조심스러우며 행복했다고, 마음은 흡족함으로 넘쳐났다고 고백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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