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8
페터 한트케 지음, 안장혁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평점 :
절판


언젠가는 꼭 한 번 혼자서 여행을 떠나보고 싶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현재에 안정되어 갈수록 어딘가를 떠난다는 것이 불안해진다. 용기도 사라지고 무언가 새로운 환경을 맞이한다는 것이 겁이 난다. 국내 여행도 제대로 못 해봤는데 해외로 간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이렇게 내가 겁이 많고 소심한 사람이었나 싶다가도, 그나마 무언가를 잊어버리기 위해 여행을 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안심이 되었다. 실연을 당했을 때, 모든 것이 낙담스러울 때 어딘가로 간절히 떠나고 싶어진다. 하물며 누군가를 찾으러 갈 때는 오죽하랴. 그것이 나의 가족이라면, 갑작스레 떠나버린 연인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사람의 뒤를 좇아갔을 것이다.
 

  이 책의 주인공은 "나는 지금 뉴욕에 있어요. 더이상 나를 찾지 마요. 만나봐야 그다지 좋은 일이 있을 성싶지 않으니까."란 아내의 편지를 받는다. 그런 아내를 찾아 오스트리아에서 미국까지 건너왔지만 주인공에게는 절박함이 없었다. 아내가 묵고 있는 호텔에 연락을 취하면서도 비싼 호텔이라는 것을 알고 아내의 이런 저런 단점들을 되뇐다. 그리고 그들이 제대로 헤어지지 못해 서로를 미워하고 있음을 서서히 드러낸다. 주인공은 아내를 찾아 여행을 하는 것 같으면서도 아내의 이동에 대해서 그다지 큰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은 듯하다. 오히려 예전에 잠깐 만났던 클레어에게 전화해 필라델피아에 와 있다는 소식을 전한다. 혼자서 아이를 키우고 있던 그녀는 아이와 세인트루이스에 갈 생각이라며 여행에 동행하기를 권한다. 주인공은 그 여행에 동행하면서 클레어와 그녀의 딸 베네딕틴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모녀와 함께 하면서 그는 여행의 묘미를 느끼고, 조금씩 현재를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키워나가기도 한다.

 

  "당신은 장소를 바꾼다기보다는 미래 속으로 달려가려고 마치 타임머신을 탄 듯이 이곳으로 왔어. 하지만 이곳에서 앞으로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지는 알 수 없어."

 

  클레어는 주인공에게 미국의 모습을, 그리고 그가 향해가는 모습을 단적으로 알려준다. 처음엔 아내를 찾으러 왔지만 미국이란 낯선 도시에서 배회하는 그는 어디에도 정착할 수 없는 이질적인 존재로 보였다. 클레어와 베네딕틴을 만나 조금씩 오스트리아에서의 삶과 아내와의 결혼생활 등을 떼어내지만 어디로 가야하는지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마음이 가는 데로 이동하고, 돈을 아무 생각 없이 쓰며 앞으로의 계획 같은 것은 장착하지 않은 채 앞으로 쏜살같이 달려가려고만 했다. 그는 미국에 도착해서 '혼잣말증후군'에 빠지기도 한다. 누군가에게 하는 말이겠지 하고 그를 지켜보고 있어도 그의 말을 들어줄 대상이 없다는 것에 내가 더 계면쩍어졌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이상하게 보인다거나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때로는 자신에게 때로는 곁에 없는 아내에게 하는 말들을 듣고 있노라면 오히려 '혼잣말증후군'에 약간 길들여진 내가 그의 말을 귀 기울이고 싶을 정도였다.

 

  그는 미국에 머무는 동안 두 권의 책을 읽는다. 그 중에서도 『녹색의 하인리히』를 오랫동안 읽는데, 예전에 어느 책에선가 그 책에 대한 언급을 보아서 무척 궁금했다. 검색을 해도 그 책이 나오지 않아 여러 방법을 취하다 국내에는 『초록의 하인리히』로 출간된 것을 보고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이 책을 다 읽으면 그 책을 구입하기로 하고 우선은 주인공과의 동행에 충실했다. 분명 그의 여행과 그의 삶에 이 책이 어떠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알 수 있으나, 이 책을 읽지도 않고 그 책을 읽는다면 무언가 들떠버릴 것 같았다. "그의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그가 '적막한 숲 가장자리에 누워, 지난 100년의 목가적인 행복과 낭만을 가슴속 깊이' 느꼈을 때의 감정이 내게도 그대로 전해져."처럼 그가 종종 들려주는 책 속의 이야기에 만족해야 했다.

 

  그러면서도 아내에 대한 기억, 아내에게 남겨 있는 자신의 기억이 극을 향해 있음을 자주 상기시켜준다. 클레어와 베네딕틴과의 여행이 끝난 후 혼자서 여행을 하게 되는 주인공을 아내는 바짝 따라온다. 그러나 아내의 따라옴은 반가움이 아니라 테러하기 위한 따라옴이었다는 것을 알고 경악하게 된다. 그런 아내의 흔적을 느끼면서도 태연자약한 주인공이 안타까웠다. 좋은 헤어짐이란 것도 분명히 있는데, 그들은 좋은 헤어짐을 하지 못해 이렇게 서로를 한껏 몰아세우고만 있었다. 그러나 주인공은 "왜 유디트에게는 지금처럼 아무런 거리낌 없이 친절하게 대해주지 못했을까?"라는 말을 되뇌며 서서히 좋은 이별을 향해, 그리고 자신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어둠 속에 누워 '더이상 아무런 변명의 여지도 없으며 이성적으로도 설명이 안 되는 고통만 느껴졌다. 말하자면 무언가가 내게서 뜯겨나간 뒤에 생긴 빈자리, 그래서 다시 채워야 하는 빈자리 같은 것이 느껴졌다.'라며 무언가 자신을 뚫고 나왔음을 깨닫기도 한다.

 

  소설의 절정은 주인공이 존 포드 감독과의 만남을 통해 아내 유디트와 실제로 일어난 이야기라는 사실을 상기하는 부분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향한 적대감을 없애고 좋게 헤어지기로 한 뒤, 한 때는 '우리'였던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이다. 그 이야기가 이미 펼쳐진 것일 수도 있고, 앞으로 펼쳐질 수도 있지만 주인공의 여행도, 유디트의 떠나옴도 헛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긴 이별을 하기 위해 먼 곳을 돌아왔다는 마음도 들었고, 그런 여행을 통해 내면의 세계를 더 잘 알게 되었다는 마음도 들었다. 주인공의 여행을 지켜보며 어딘가를 떠나고자 하는 마음이 동하지는 않았지만, 목적을 가진 채 왔다 목적을 상실한 여행을 하는 방법도 매력적으로 보였다. 끝내 무언가를 건져내지 못한 여행이 아니었음을 알았기에 방법은 다를지라도 주인공의 뒤를 좇아보려고 한다. 그 첫 번째 여행으로 『초록의 하인리히』를 구입해 내 일상에서 주인공과 책 속의 하인리히의 여행에 동행하고자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반적이지 않은 독자
앨런 베넷 지음, 조동섭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을 보고 있는 노부인이 심상치 않다. 어떤 사연을 갖고 있기에 저렇게 즐거운 모습으로 책을 읽고 있는 것일까. <일반적이지 않은 독자> 라고 하니 분명 특별한 독자일거라 여겼다. 표지의 주인공은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였다. 어느 날 버킹엄 궁에서 개 짖는 소리에 이끌려 이동도서관을 가게 된다. 거기서 주방에서 일하는 노먼을 만나게 되고, 예의상 책을 빌려온다. 그렇게 한 권씩 빌려온 책들을 읽다보니 책에게 마음을 뺏기게 되었고, 업무에 지장을 줄 정도로 책을 읽게 된다. 그 전처럼 빈틈없이 일을 처리하지 못하고, 실수 연발에 심지어 모든 대화를 책과 연관시키는 여왕의 변화에 모두들 당황한다. 하지만 여왕은 자신의 변화보다 이제야 책을 만나게 되어 억울하다는 생각이 더 강하다. 책을 읽으며 보내는 하루가 짧다고 느껴질 정도로 여왕은 책의 매력에 빠지고, 그 안에서 새로운 삶을 만나게 된다.
 

  "여왕에게 독서란, 작가에게 글쓰기와 같은 의미였다. 즉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고, 작가가 글을 쓸 숙명을 받아들이듯 여왕은 책을 읽을 숙명을 인생의 이 황혼기에 받아들여야 했다."

 

  수많은 우여곡절 속에서 풍부한 독서를 하게 된 여왕은 독자를 넘어 작가의 영역까지 꿈꾸게 된다. 그래서 자신이 작위를 주었던 작가들에게 많은 것들을 얻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번번이 실망하게 되고 '작가는 소설을 통해서 만나는 것이 가장 좋으며, 작가란 소설 속 인물처럼 독자의 상상 속 인물을 뿐이라고.' 마음을 정한다. 평안하고 안정된 노년의 삶이 책으로 인해 이렇게 바뀌어 버린 것에 대해 여왕 자신도 혼란스러워 했던 것처럼 주변 사람들은 그런 여왕을 말리고 싶어 했다. 책이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왕의 노년을 복잡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여왕이 책을 좋아하고, 새로운 세계를 알아가는 모습은 무척 진지하다. 많은 독자들이 책을 읽으면서 맞게 되는 즐거움과 난관이 모두 보인다고나 할까. 그런 면에서 '일반적이지 않은 독자'인 여왕의 행보는 흥미로웠다.

 

  또한 책을 통해 많은 것이 변화되어 가는 과정 속에서 만나는 문장들이 무척 좋았다. '책은 심심풀이하라고 있는 게 아니라네. 책은 다른 삶, 다른 세상을 이루는 것이야.', '독자는 누구나 평등하다.', '독서는 자유롭고 광범위하고 쉴새없이 마음을 끌어.' 라는 문장만 보아도 여왕의 변화를 모색해 볼 수 있다. 책 속에서 권위를 찾으려 하지 않고, 저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스스로를 만학도 라고 불렀듯이 여왕은 지금껏 살아왔던 삶과는 다른 세상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그 과정 속에는 많은 일들이 있었고 다양한 메시지를 드러내기도 한다. 여왕이 책 때문에 변화 되는 것을 바라지 않은 비서관과 총리가 노먼을 떼어 놓기도 하고, 왕실의 보수적인 면과 형식에 사로잡힌 관료주의를 풍자하기도 한다. 분명 얇은 책인데도 많은 것을 담고 있어 때론 즐거움을, 때론 묵직함을 느끼기도 했다. 과연 여왕은 이런 상황을 어떻게 정리할까. 언제까지고 이렇게 독서만 할 수도 없고, 글쓰기에 대한 욕망만 키워나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여든 살 생일을 축하하는 행사에 많은 사람들 앞에서 누구도 생각지 못한 중대한 발표를 한다.

 

  그 발표로 책은 끝을 맺었기에 잠시 어안이 벙벙해지기도 했다. 이러한 선택을 할 만큼 여왕에겐 책이란 큰 의미였고, 새로운 자신의 모습을 찾아갈 수 있는 매개물이 되었던 것이다. 요즘은 스마트 폰의 영향 때문에 더욱 더 사람들이 책을 찾지 않는다고 하는데, 여왕에게 미쳤던 영향만큼은 아니더라도 새로운 세계를 만날 기회가 줄어든 현실이 무척 안타깝다. ' '책을 읽는 사람' 자체가 '일반적이지 않다'고 지은이가 던지는 걱정과 충고인지도 모른다.' 라는 옮긴이의 말처럼 이 책이 던져주는 메시지는 실로 방대하다. 이런 방대함을 누리기를 포기하지 않고, 책과 가까이 하는 사람들이 늘어간다면 '일반적이지 않은 독자'는 긍정적인 의미로 남게 되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언더그라운드 언더그라운드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왜 이 책을 하루키 마니아를 가르는 기준이라고 하는 지 알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
호시노 미치오 지음, 이규원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5년 7월
평점 :
품절


책장의 수많은 책을 보면서 언제 저 책을 다 읽을까 걱정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아직 내가 소화하지 못한 책은 적절한 시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스스로 합리화를 시킨다. 그런 억지가 종종 들어맞을 때가 있는데, 『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가 그랬다. 이 책에 대한 명성은 오래전부터 들어온 터라 진작 구입해 놓고는 펼쳤다 덮곤 했다. 이상하게 책이 잘 안 읽혔는데, 이 책은 그러게 읽어대면 안될 것 같아서 아껴두었었다. 그렇게 책장에 묵혀두다 최근에 다시 꺼내게 되었는데, 마치 물 만난 물고기마냥 순식간에 읽어버렸다. 그리고 그 여운을 이기지 못해 저자의 다른 책을 꺼내서 읽기도 하고, 내게 없는 책을 주문하기도 했다.

 

  저자의 책을 불현듯 꺼내든 것은 요즘 소설만 읽어댄 탓도 있었고, 거대한 자연을 느끼고 싶은 욕망도 있었다. 그렇게 알래스카를 만나고 싶어 책을 펼쳐 들었건만, 그가 1996년에 불곰의 공격으로 숨을 거뒀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안타까움이 일었다. 내가 중 3때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그로부터 약 15년이 지나서야 그의 책을 처음 마주하게 되었다. 그가 지금까지 살아있었다면 더 많은 글과 사진들을 만날 수 있었을 거라는 독자입장의 욕심만 드러낸 것이 부끄러웠다. 저자는 19살 때 알래스카에서 여름을 보낸 계기로 죽을 때까지 알래스카의 자연을 담아낸 사진작가였다. 우연히 헌책방에서 본 알래스카의 마을에 반해 그곳으로 편지를 보냈고, 기적처럼 답장이 와 알래스카로 건너가 거대한 자연을 맛보았다. 그가 담아낸 사진 속의 알래스카, 거칠지만 진심이 드러나는 그의 글 앞에서 알래스카와 그와의 오래전 인연을 다시 한 번 떠올리게 되었다.

 

  그는 알래스카의 자연을 담아내면서 그곳의 주민들과 우정을 나누곤 했는데, 그런 만남들을 지켜볼 때마다 그가 모든 것을 마음으로 담아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진에도, 그곳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에도 진심이 느껴졌다. 카리부 떼를 쫓아 몇 날 며칠을 고생하면서도 지평선으로 사라지는 이리를 보며 '그 배후에 있는, 지금까지 이리가 살아온 눈에 보이지 않는 공간. 그래서 풍경은 이리나 곰 한 마리만으로도 하나의 완성된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가 찍어내고 싶은 사진이 분명할 때도 있었지만, 이렇듯 알래스카 곳곳에서 만나는 생명체 앞에서 느끼는 경이로움에 대한 감탄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알래스카의 사진과 글을 보고 있노라면 이유 없이 내 마음이 맑아진 듯한 기분이 든다. 지금의 알래스카는 저자가 경험했을 때보다 많은 것이 변했을지라도, 당시의 알래스카를 온전히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감사하다.

 

  알래스카의 황홀한 자연 경관 뒤에는 문명의 훼방이 늘 위협하고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알래스카 원주민이 안고 있는 문제들이 아닐까 싶다. 알코올중독 문제, 이상할 정도로 높은 자살률, 폭력, 가정 붕괴 등등 가장 뿌리 깊은 근본 원인은 알코올과 관계가 깊다고 한다. '전통적인 삶과 파도처럼 밀려오는 서구문화 사이에서 흔들리는 정체성을 잃고 자신감을 상실해가는 그들에게, 알코올은 도저히 어쩌지 못하는 배출구 노릇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며 저자는 안타까워한다. 평화로워 보이기만 하던 알래스카에는 이미 문명의 때가 찌들어 있었다. 원전 개발이다 뭐다 해서 그곳을 더욱 황폐화시켜가고 있는 원인 역시 인간이라는 사실이 안타깝게 느껴진다. 그러면서도 그 해결책을 제시해 주지 못하는 무책임함에 깊은 회의를 느낀다.

 

  저자는 1971년 처음으로 알래스카에 갔을 때, 그 여행을 통해 '누구나 더없이 소중한 인생을 꼭 한 번만 산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민족과 환경의 차이 없이 이 한가지 공통점에 대해서는 다르지 않다고 했는데, 저자가 만난 사람들과 알래스카의 광활한 자연을 보고 있노라면 동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해설을 남긴 오오바 미나코씨는 저자의 책을 읽다 보면 '아무리 비참한 사람의 이야기라도 절망적으로 흐르는 일이 없다는 것이 흥미롭다.'고 했다. 알래스카 사람들의 이야기를 할 때면 절망적인 이야기가 많았음에도 그는 그것을 그대로 전달해주면서도, 그 이후에는 좀 더 희망적인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라는 여운을 남기곤 했다. 아마 그가 20여 년 동안 보아온 자연의 경이로움 앞에서 배운 긍정적이고 넉넉한 마음이 아니었을까? 다시 한 번 그의 맑은 내면이 내게 와 닿는 것 같다.

 

  오랫동안 묵혀뒀던 책을 꺼내들었음에도 마치 어제 만난 책을 다시 꺼낸 듯 마음이 참 평안하다. 저자가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 알래스카는 당시와는 무척 다르게 변했다는 사실을 차치하고 온전히 사진과 글 속의 풍경을 기억하고 싶다. 그것이 저자가 독자에게 전하려 했던 메시지일 것만 같고, 그렇게라도 간직하지 않으면 저자의 노력이 헛될 것만 같다. 또한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알래스카가 내 기억에서 영영 잊힐 것만 같다. 언젠가 알래스카에 당도해 그가 남긴 흔적을 밟을 수 있다면, 그곳에서 다시 한 번 바람 같은 그의 이야기를 떠올려 보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잔해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0
쥘리앵 그린 지음, 김종우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쉼 없이 움직이는 거대한 회색빛 도시를 떠도는 기분. 그 도시의 잔여물처럼 느껴지던 시기. 내게도 분명 그런 때가 있었다. 아무리 찬란한 햇살이 비추어도 도시는 늘 우울하고 그늘진 장소로 여겨졌었다. 바삐 돌아가는 도시 속의 부적응 자. 그런 모습이 나라고 해도 도시와 나는 맞지 않음을 인정해야 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도시가 주는 삭막함을 스스로 이겨내지 못한 탓도 있었지만 당시의 나는 모든 것이 불안정했기에 도시의 느낌을 그렇게 갖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런 도시 속에서 비겁한 자신과 조우하게 된다면 어땠을까? 아마 도시도, 자신도 못 견디게 무기력해져서 스스로 존재의 위협을 받았을 것 같다. 

  『잔해』의 필리프가 그랬다. 날씨 좋은 10월의 저녁,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던 센 강변에서 한 쌍의 커플을 보게 된다. 남자의 위협적인 태도와 겁먹은 여자의 모습에 끌려 뒤를 쫓지만 "저기요"라고 말하는 여자를 외면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 사건은 오래도록 필리프를 괴롭힌다. 아내보다 자신의 모든 이야기를 들어주는 처형한테도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사건은 필리프를 무상하게 만든다. 그 장소에 다시 가보기도 하고, 그 여자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사로잡히기도 하지만 괴로움은 풀리지 않는다. ‘부끄러운 것은, 진짜 부끄러운 것은 비겁한 것이 아니라 비겁하다고 알려지는 것이다.’라며 전전긍긍하다 고뇌하며, 의욕 없는 날들을 맞이하기도 한다. 

  그는 이 사건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자신의 얘기를 시시콜콜 들어주는 처형에게도, 한 집에 살지만 전혀 다른 생활을 영위해 가는 아내에게는 말할 것도 없었다. 겉으로 봤을 때 필리프는 남부러울 것 없었다. 아버지가 남겨주신 유산과 사업으로 부유했고, 잘생긴 외모와 아름다운 아내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사업에 의욕적인 것도 아니었고, 아내는 자신들이 결혼이 한 사건에 불과하다고 생각했고, 서로 사랑하지 않았다. 또한 둘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있었음에도 다른 도시의 기숙학교에서 지내게 했다. 그가 사랑받고 있는 대상은 처형 엘리안이었다. 집을 돌보지 않는 아내 앙리에트를 대신해 거의 안주인의 위치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엘리안은 그가 결혼한 순간부터 11년 동안 같은 집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런 필리프에게 센 강의 한 쌍의 커플의 사건이 오히려 큰 사건으로 다가왔다. 그로인해 실존에 대한 문제가 그의 내면에서 쉼 없이 들끓었다. 무기력함이 그를 지배했고, 허무함이 그의 삶을 바꿔버릴 듯 했다. 엘리안은 그런 사실은 모른 채 필리프를 깊이 사랑하고 있었고, 앙리에트는 가난한 애인을 두고 있었다. 앙리에트와 엘리안이 필리프가 사는 아파트로 오기 전까지 그들은 가난했다. 지금은 모든 것을 풍족하게 누리는 상황에서 사랑 없는 결혼을 영위해 나가다보니 앙리에트는 가난한 남자에게 끌렸다. 그 남자에게 ‘자신이 그를 만나는 것이 그의 가난 때문이라고 설명할 방법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그를 위해 언니를 설득해 필리프에게 돈을 빌리기도 한다. 필리프와는 거의 대화가 없어 돈을 요구할 수 없었고, 오히려 언니의 부탁을 더 잘 들어주기 때문이었다. 앙리에트는 ‘인간 존재란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서 본 삶에 대한 격렬한 애정을 내부에서 키워나가는 것’이다라고 말하면서도 필리프가 격렬한 애정의 대상이 아님을 인정하며 살고 있었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인 필리프, 엘리안, 앙리에트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격렬한 사건이 등장하지 않는 평범함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필리프와 앙리에트가 사랑 없는 결혼생활을 유지해가고, 엘리안이 앙리에트의 자리를 메우듯 필리프를 사랑하는 것, 그 사실을 앙리에에게 말하고, 앙리에트는 외도를 하면서 그 사람을 위해 언니를 통해 남편의 돈을 빌리는 것 등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다. 그러나 소설의 시작에서 “저기요”라고 말하는 여인을 도와주지 못한 자책감이 필리프를 괴롭혔듯이 이 작품에서는 사건의 흐름보다는 그들의 존재위치, 끊임없이 변해가는 내면의 깊숙한 부분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래서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일들 앞에서도 무심해 질 수밖에 없었다. 어떤 사건의 결과가 드러나기보다 과정이 담긴 소설임을 깨달았기에 그들이 도시에 떠도는 ‘잔해’같은 존재임을 인식하며 만나는 것이 더 편했다.

  서로 소통하지 못하고 각자의 영역을 살아가는 그들을 비난할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이해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수긍이 갔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면 깊숙이 잠재해있는, 보통 사람들이라면 절대 꺼내지 않았을 욕망들을 드러낸 채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때로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려 엘리안은 잠시 집을 나가기도 하고, 그런 엘리안을 필리프가 찾아가기도 하며, 앙리에트는 정부의 부탁을 거절하려고도 한다. 하지만 필리프가 그렇듯 이들 모두 무기력한 존재의 상징을 드러내듯 그들이 하고자 하는 행동들은 어떠한 변화도 꿰어내지 못한다. 심지어 필리프와 앙리에트의 아들이 방학을 맞아 집에 왔음에도 전혀 그 아이에게 관심을 기울여주지 않는 것 하며, 질투 아닌 질투 때문에 조카를 좋아하지 않는 엘리안 등 많지도 않는 가족이 왜 이렇게 이기적으로 살아가고 있나 싶었다.

  그러나 큰 변화는 아니더라도 필리프가 아들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 ‘멋있기는 하지만 무리결한 존재야.’라며 필리프를 바라보는 엘리안, 정부에게 돈을 주고 돌아오던 길에 위험한 일을 당할 뻔 했던 앙리에트, 드디어 센 강에서의 자신의 비겁함을 엘리안에게 말하는 필리프. 이런 것들이 큰 흐름을 바꿔놓지는 않았을지라도 도시를 떠도는 잔여물처럼 생각하지 않는다는 느낌에 반가웠다. 자신의 내면속으로만 파고들지 않고, 가족이라는 타인에게 조금씩 다가가려 하는 시도가 소설의 중심 화두였던 실존에 대해 조금은 긍정적인 시선을 주지 않았나 싶다. 그것이 미미할지라도 시간이 흐르고, 일상에서 일어나는 자잘한 일들을 경험하면서 그들이 존재 의식을 더 키워나가길 바랐다.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저자의『잔해』는 녹록치 않은 소설이었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내면의 격정을 만나게 되는 작품이었다. 존재 여부가 불투명할 때,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처럼 쓸쓸하고 고통스러울 때 이 작품을 만난다면 더 괴로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고통을 정면으로 마주했을 때 오히려 고통의 근원으로 더 다다갈 수 있는 법. 타인이 나를 위로하려 한다는 생각이 아닌, 스스로 만나는 내면이라 생각하고 이 소설을 대한다면 자신의 존재에 대한 근원과 함께 더불어 소설의 본질에 더 다다갈 수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