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
호시노 미치오 지음, 이규원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5년 7월
평점 :
품절


책장의 수많은 책을 보면서 언제 저 책을 다 읽을까 걱정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아직 내가 소화하지 못한 책은 적절한 시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스스로 합리화를 시킨다. 그런 억지가 종종 들어맞을 때가 있는데, 『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가 그랬다. 이 책에 대한 명성은 오래전부터 들어온 터라 진작 구입해 놓고는 펼쳤다 덮곤 했다. 이상하게 책이 잘 안 읽혔는데, 이 책은 그러게 읽어대면 안될 것 같아서 아껴두었었다. 그렇게 책장에 묵혀두다 최근에 다시 꺼내게 되었는데, 마치 물 만난 물고기마냥 순식간에 읽어버렸다. 그리고 그 여운을 이기지 못해 저자의 다른 책을 꺼내서 읽기도 하고, 내게 없는 책을 주문하기도 했다.

 

  저자의 책을 불현듯 꺼내든 것은 요즘 소설만 읽어댄 탓도 있었고, 거대한 자연을 느끼고 싶은 욕망도 있었다. 그렇게 알래스카를 만나고 싶어 책을 펼쳐 들었건만, 그가 1996년에 불곰의 공격으로 숨을 거뒀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안타까움이 일었다. 내가 중 3때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그로부터 약 15년이 지나서야 그의 책을 처음 마주하게 되었다. 그가 지금까지 살아있었다면 더 많은 글과 사진들을 만날 수 있었을 거라는 독자입장의 욕심만 드러낸 것이 부끄러웠다. 저자는 19살 때 알래스카에서 여름을 보낸 계기로 죽을 때까지 알래스카의 자연을 담아낸 사진작가였다. 우연히 헌책방에서 본 알래스카의 마을에 반해 그곳으로 편지를 보냈고, 기적처럼 답장이 와 알래스카로 건너가 거대한 자연을 맛보았다. 그가 담아낸 사진 속의 알래스카, 거칠지만 진심이 드러나는 그의 글 앞에서 알래스카와 그와의 오래전 인연을 다시 한 번 떠올리게 되었다.

 

  그는 알래스카의 자연을 담아내면서 그곳의 주민들과 우정을 나누곤 했는데, 그런 만남들을 지켜볼 때마다 그가 모든 것을 마음으로 담아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진에도, 그곳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에도 진심이 느껴졌다. 카리부 떼를 쫓아 몇 날 며칠을 고생하면서도 지평선으로 사라지는 이리를 보며 '그 배후에 있는, 지금까지 이리가 살아온 눈에 보이지 않는 공간. 그래서 풍경은 이리나 곰 한 마리만으로도 하나의 완성된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가 찍어내고 싶은 사진이 분명할 때도 있었지만, 이렇듯 알래스카 곳곳에서 만나는 생명체 앞에서 느끼는 경이로움에 대한 감탄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알래스카의 사진과 글을 보고 있노라면 이유 없이 내 마음이 맑아진 듯한 기분이 든다. 지금의 알래스카는 저자가 경험했을 때보다 많은 것이 변했을지라도, 당시의 알래스카를 온전히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감사하다.

 

  알래스카의 황홀한 자연 경관 뒤에는 문명의 훼방이 늘 위협하고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알래스카 원주민이 안고 있는 문제들이 아닐까 싶다. 알코올중독 문제, 이상할 정도로 높은 자살률, 폭력, 가정 붕괴 등등 가장 뿌리 깊은 근본 원인은 알코올과 관계가 깊다고 한다. '전통적인 삶과 파도처럼 밀려오는 서구문화 사이에서 흔들리는 정체성을 잃고 자신감을 상실해가는 그들에게, 알코올은 도저히 어쩌지 못하는 배출구 노릇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며 저자는 안타까워한다. 평화로워 보이기만 하던 알래스카에는 이미 문명의 때가 찌들어 있었다. 원전 개발이다 뭐다 해서 그곳을 더욱 황폐화시켜가고 있는 원인 역시 인간이라는 사실이 안타깝게 느껴진다. 그러면서도 그 해결책을 제시해 주지 못하는 무책임함에 깊은 회의를 느낀다.

 

  저자는 1971년 처음으로 알래스카에 갔을 때, 그 여행을 통해 '누구나 더없이 소중한 인생을 꼭 한 번만 산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민족과 환경의 차이 없이 이 한가지 공통점에 대해서는 다르지 않다고 했는데, 저자가 만난 사람들과 알래스카의 광활한 자연을 보고 있노라면 동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해설을 남긴 오오바 미나코씨는 저자의 책을 읽다 보면 '아무리 비참한 사람의 이야기라도 절망적으로 흐르는 일이 없다는 것이 흥미롭다.'고 했다. 알래스카 사람들의 이야기를 할 때면 절망적인 이야기가 많았음에도 그는 그것을 그대로 전달해주면서도, 그 이후에는 좀 더 희망적인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라는 여운을 남기곤 했다. 아마 그가 20여 년 동안 보아온 자연의 경이로움 앞에서 배운 긍정적이고 넉넉한 마음이 아니었을까? 다시 한 번 그의 맑은 내면이 내게 와 닿는 것 같다.

 

  오랫동안 묵혀뒀던 책을 꺼내들었음에도 마치 어제 만난 책을 다시 꺼낸 듯 마음이 참 평안하다. 저자가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 알래스카는 당시와는 무척 다르게 변했다는 사실을 차치하고 온전히 사진과 글 속의 풍경을 기억하고 싶다. 그것이 저자가 독자에게 전하려 했던 메시지일 것만 같고, 그렇게라도 간직하지 않으면 저자의 노력이 헛될 것만 같다. 또한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알래스카가 내 기억에서 영영 잊힐 것만 같다. 언젠가 알래스카에 당도해 그가 남긴 흔적을 밟을 수 있다면, 그곳에서 다시 한 번 바람 같은 그의 이야기를 떠올려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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