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래빗 시리즈 01 : 피터래빗 이야기 베아트릭스 포터 베스트 콜렉션 1
베아트릭스 포터 글.그림, 김동근 옮김 / 소와다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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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저기서 분명 '피터래빗'은 많이 들어봤는데 책은 제대로 접한 적이 없었다. 우연히 지인이 이 책을 예약판매 했다고 하기에 이번기회에 한번 읽어볼까 하고 주문한 책이 며칠 전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첫번째 책을 꺼내서 읽었다. 폭신한 침대에 누워 이 책을 읽으니 타샤 튜더 할머니가 바로 생각이 났다. 이 책을 알게 해준 지인에게 타샤 할머니가 생각난다고 말했더니 저자가 타샤 할머니의 롤모델이었단다. 거기다 저자가 작은 사이즈 책의 동물 문학의 원류라고 하니 더 신기하고 반가웠다.

 

  저자의 책보다 타샤 할머니의 책을 먼저 접했기 때문에 이 책을 읽자마자 타샤 할머니가 생각이 났다고 했는데, 화풍은 분명 달랐지만 생동감 있는 동물들과 현실과 상상이 묘하게 어우러지는 이야기가 닮아있었다. 첫번째 이야기는 말썽쟁이 장난꾸러기 피터가 아빠 토끼를 잡아간 맥그리거 아저씨네 텃밭에 들어가면서 생긴 에피소드를 담고 있다. 엄마 토끼가 외출하면서 맥그리거 씨네 집에만 가지 말고 얌전히 놀라고 했는데 피터만 그 말을 귓등으로 듣고 곧장 텃밭으로 달려갔다. 야채들로 배를 채우다 맥그리거 아저씨와 딱 마주친 피터는 도망치다 신발과 옷가지를 모두 잃어버리고 아저씨에게 잡히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탈출한다.

 

  몇 번의 위기를 겪은 후에 겨우 집으로 돌아왔지만 맥그리거 아저씨를 피해 달아나다 물을 뒤집어쓰는 바람에 피터는 밤새 몸살이 나고 말았다. 엄마 토끼의 보살핌으로 피터는 잠들기 전에 향긋한 국화꽃 차를 마셨다. 엄마 토끼의 말을 잘 들었던 다른 토끼들은 더 맛있는 저녁을 먹었지만 피터에게는 당장 음식보다 하루의 고단함을 풀어줄 휴식이 필요해 보였다.

 

  잠들기 전의 아이에게 잠깐 들려 줄 정도의 짧은 분량의 이야기였다. 그럼에도 혹여나 닳아질세라 아껴 읽었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피터가 속한 공간과 사건 속으로 푹 빠져들었다. 저자는 밖에서 맘껏 뛰어놀 수 없는 허약한 아이들을 위해 개구쟁이 꼬마 토끼 피터래빗 이야기를 만들어 그림 편지로 보내주기도 했다고 하는데, 그 아이들이 밖에서 뛰어놀 수 없어도 그 편지로 얼마나 생동감 있는 이야기를 들었을지 상상이 갔다. 짧은 시간에 내가 느꼈던 그런 기분이 다양한 아이들에게도 닿았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저자 소개를 읽어보니 타샤 할머니가 롤모델로 삼을 만큼 두 사람은 많이 닮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동물들을 생생하게 표현하는 것하며 자연을 사랑하고, 용도는 다르긴 하지만 그림책을 팔아서 번 돈으로 아름다운 땅을 구입한 것도 그랬다. 도시에 찌든 일상에 심하게 젖어 있는 삶은 아니지만 종종 자연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멀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때 이런 책을 만나면 무척 반갑다. 어릴 적 뛰어놀던 시골의 풍경으로 나를 데려감은 물론, 동심을 불러일으켜 잠시 나이와 처지를 잊고 순수하게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주니 말이다. 이제 나머지 이야기를 만나야겠다.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벌써부터 조바심이 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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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나의 정원
타샤 튜더 지음, 김용지 옮김, 리처드 W. 브라운 사진 / 아인스하우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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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에 창밖을 내다보곤 깜짝 놀랐다. 눈이 자주 오지 않는 이곳에 폭설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눈이 쌓여 있었다. 윗지방에 살 때 하도 눈을 많이 봐서 아무렇지도 않은데 눈이 흔하지 않은 이 지역에서는 신기하다고 난리다. 오후가 되니 금세 눈이 녹아 질척거리는 거리에서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만 목격되고 있다. 오랜만에 매서운 겨울바람이 아닌 눈으로 겨울을 느끼고 있는데 나에겐 그 무엇보다 마음을 따뜻하게 녹여준 책 한권을 만났다.

 

  타샤 할머니의 정원을 보고 있노라면 현재 내가 지내고 있는 계절을 잊기 일쑤고 아름답고 매혹적인 꽃들의 향연에 빠지게 된다. 지금껏 타샤 할머니 책을 마주할 때마다 신비롭고 반갑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계속 반복해도 지겹지 않을 정도로 타샤 할머니의 손길이 묻어난 정원과 코기 코티지는 너무나 사랑스럽다. 이미 익숙하게 만나본 책을 왜 또 구입 하냐고 물을지 모르지만 타샤 할머니의 정원은 봐도 봐도 지겹지가 않다. 오히려 더 자주 들여다보니 익숙해서 눈앞에 선하게 그려질 정도다.

 

  리처트 W. 브라운의 사진이 그 생생함을 잘 전달해 주고 있어 이 책이 더 반가운지도 모른다. 타샤 할머니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파파라치라고 해도 좋을 만큼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모습을 고스란히 담았다. 인공적이지 않고 생생한 정원을 둘러보고 타샤 할머니가 어떤 생활을 하는지 지켜보는 일이 그래서 즐겁다. 정원의 사계절과 19세기 풍경을 가득 담은 집안 구석구석이 이미 익숙해도 친근하고 포근함이 느껴지는 이유다.

 

  타샤 할머니의 책이 출간될 때마다 바로 구입해서 봤지만 이번에는 좀 더 특별했던 것 같다. 자연이라곤 쳐다볼 겨를 없이 몸도 마음도 움츠러드는 겨울에 이 책을 접해서인지 뭔가 마음이 조금씩 녹아내린 기분이었다. 꽁꽁 얼어붙은 땅 속에서 봄을 준비하는 움직임을 느끼듯 주변의 풍경을 다시 돌아보게 된 것만으로도 큰 성과다. 타샤 할머니의 정원처럼 정성들인 꽃들의 향연을 보기는 힘들겠지만 자연이 주는 평안함과 안락함이 이 책으로 인해 나에게 전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무척 아껴 보았음에도 순식간에 타샤 할머니의 정원 여행이 끝나버렸다. 여전히 나에게 조근조근 정원의 이야기를 들려주실 것 같은 타샤 할머니. 종종 코기 코티지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타샤 할머니의 흔적을 이렇게라도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격스럽다. 겨울에 아름다운 꽃들을 보는 것. 무엇보다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그 열정과 온기를 전해주려는 한 사람의 인고의 노력이 타인에게도 전해질 수 있다는 게 감사하다. 나는 과연 무엇으로 타인에게 그런 온기를 전할 수 있을지 잠시 고민하며 타샤 할머니의 정원을 다시 한번 머릿속에 그려보며 행복감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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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 미제라블 만화로 읽는 불멸의 고전 1
빅토르 위고 지음, 권수연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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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의 성공으로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이 재조명 되고 있다. 어렸을 적 『장 발장』이라는 책으로 익히 들어온 이야기가 다시 이렇게 관심을 받지 않았다면 나 또한 제대로 만나려는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다. 왜 책 제목이 장 발장이 아닌 '비참한 사람들'이란 뜻을 지닌 『레 미제라블』인지 이제야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레 미제라블』이 작품의 전체를 아우르는 제목이라는 생각은 확고해 졌지만 현재와 닮아있는 이야기가 마음 아프게 다가왔다.

 

  묵직한 원작소설도 구매를 했지만 현재 상영 중인 영화를 놓치고 싶지 않아 만화로 읽는 불멸의 고전 시리즈로 먼저 만나고 싶었다. 이 책을 읽고 전체 이야기를 훑은 다음 영화를 보고 원작소설을 정독하려는 계획 때문이다. 막상 한권으로 된 이 책을 읽고 나니 굉장히 방대하고 촘촘한 이야기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인지하게 되었다. 만화로 읽는다지만 그런 이야기를 잘 압축해 놓아서인지 쉽게 지나칠 수 없어 나름 꼼꼼하게 읽었다. 많은 이야기와 인물들이 얽혀 읽고 나서도 단박에 전체적인 분위기를 아우르진 못했지만 『레 미제라블』에 담긴 의미와 메시지는 충분히 읽혔다. 당시의 문화와 역사, 개인의 끈질긴 삶과 비참하고 불행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울림을 주기에 충분했다.

 

  수많은 인물들과 역사적 배경,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도 변화지만 장 발장이란 인물에 가장 큰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빵을 훔쳤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히고 몇 번의 탈옥 끝에 죄가 더 늘어나 도형장에서 19년을 복역하고 나온 장 발장. 그에게 희망이 있었을까.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극심했던 당시에 이런 생계형 범죄도 쉽게 간과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그는 얼마나 많은 절망을 안고 살았을까. 19년 만에 자유인이 되었지만 피폐해진 마음은 그를 다시 죄짓게 만들었다. 그는 유일하게 보통 사람으로 대해주었던 미리엘 주교의 집에서 은수저를 훔쳐 달아났다. 그러나 미리엘 주교는 그가 죄가 없다고 증언했고 그 사건으로 인해 장 발장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모한다.

 

  자신의 신분을 숨기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에 철저히 과거를 숨기고 다른 이름으로 살아가며 많은 사람들을 돕는다. 도시를 풍요롭게 하고 미혼모의 아이 코제트를 우여곡절 끝에 구하고 자신의 딸처럼 키운다. 장 발장에게 삶이 그렇게만 흘러갔다면 이 방대한 이야기가 더 극적으로 보이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장 발장의 삶은 너무나 파란만장했다. 그를 쫓는 경찰 자베르를 평생 감내해야 했고 몇 번의 위기도 극복해야했다. 그럼에도 그는 도망치고 숨는 데만 급급한 것이 아니라 전장에서, 약한 사람들 편에서, 코제트를 사랑하는 마리위스의 뒤편에서도 성심성의껏 자신의 신념대로 행동한다.

 

  장 발장의 죽음으로 이 방대한 이야기는 마무리 되지만 결코 비참하거나 후회 있는 죽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평생 자신을 쫓아다니는 자베르를 용서하고, 코제트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질투심을 느꼈던 마리위스에게 자신의 삶을 털어놓고 혹여나 해가 될까 둘의 결혼식에 나타나지 않고 숨을 거둔다. 그가 코제트와 마리위스에게 '영원토록 서로 사랑하라. 서로 사랑하는 것, 이 세상에서 그것만큼 중요한 일은 거의 없다.'고 남긴 마지막 말이 가슴을 찡하게 울리는 것은 그가 치열하게 살아온 삶을 지켜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결코 누군가를 사랑할 것 같지 않았던 전과를 가진 한 인물이 자신을 사랑으로 대해주었던 타인으로 인해 변모하고, 그 또한 타인을 사랑하고 용서하면서 경험했기에 얕은 감동이 아닌 진한 울림을 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한 권으로 읽는다지만 굉장히 방대한 이야기를 압축해 놓았다고 앞서 말했었다. 그렇기에 장 발장이란 인물을 중심으로 소소한 느낌을 털어놓았지만 이 책의 줄거리를 몇 마디로 요약하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원작소설로 다시 만나고 싶고 영화는 어떻게 풀어놓았을지 더욱 궁금하다. 이 책으로 인해 『레 미제라블』을 제대로 읽겠다는 다짐은 물론 빅토르 위고의 문학세계가 궁금해졌다. 그가 남긴 작품 목록을 훑어보면서 올해는 빅토르 위고의 작품을 여러 편 만나봐야겠다는 나름대로의 계획도 세웠다. 현재 흥행중인 영화가 현대인들에게 남긴 메시지는 힐링이라고 한다. 작품 속에서도 그렇지만 누군가에게 위로 받고 도움을 받고 싶은 사람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내면과 직시하고 있는 현실이 팍팍하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의 작품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위로를 줄 수 있는 것. 그것이 고전이 주는 희망의 메시지고 위대함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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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다니엘 글라타우어 지음, 김라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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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읽는 내내 20대 초중반에 이메일로 연락을 했던 사람들이 생각났다. 그들은 지금 뭘 하며 살고 있을까가 궁금한 것이 아니라 내가 느꼈던 설렘이 이 책 속에 가득 들어있음이 무척 반가웠다. 깊이 공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나도 이메일로 연락하던 누군가를 좋아해본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얼굴도 연락처도 몰랐지만 이메일을 주고받으면서 답장을 기다리게 되는 설렘을 나누다 보니 상대방이 좋아진 것이다. 작품 속의 에미와 나의 다른 점이 있었다면 기혼이 아닌 피 끓는 청춘이었고 그들과 연애를 한다고 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 책을 내가 그 당시에 읽었다면 더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드는 것보다 결혼한 현재 읽게 되어서 더 좋았다고 말하고 싶다.

 

  잘못 전송된 이메일로 인해 온라인 속에서 깊은 관계를 맺게 되는 에미와 레오. 에미가 결혼을 했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고 예상한대로 이야기가 흘러갈 거란 나의 진부한 생각을 뒤로한 채 오랫동안 이메일이 이어졌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정신없이 읽다보니 그들이 일년 동안 이메일을 주고받았다는 물리적인 시간을 자각하지 못했지만 지극히 사적이면서도 정작 사적인 이야기는 많이 드러나지 않은 그들의 메일을 보며, 겉으로 보이지 않는 내면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숨어있는지를 발견하게 되었다. 가족 이외에 나만의 든든한 편이 있었으면 하는 마음, 그냥 툭 던져도 내 마음을 알아주고 자연스레 따라오며 마음을 터놓게 되는 사람, 마음 깊숙이 감춰둔 절제와 유혹의 경계선에서 갈등하는 마음 등 나와 동떨어진 얘기라고 치부할 수 없었다.

 

  그들의 결혼 여부를 떠나 밀당이 통하지 않는 알 것 다 아는 어른이라는 사실에 마음이 더 편했는지도 모르겠다. 작품 속의 그들과 나의 나이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다는 사실보다 내가 결혼했다는 사실이 오히려 부담 없이 읽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결혼 전이었다면 그들을 미화시켜 환상속의 순수함으로 그들을 가두려했을 것이다. 길을 가다 평범한 사람들의 속마음을 읽는 것처럼 그들의 소소하면서도 장황하고 감정에 치우치고 경계선을 넘을 듯 말듯 긴장감까지 주는 그들의 대화를 끊을 수가 없었다.

 

  그들이 주고받은 이메일 안에서 굉장히 다양한 면을 보았지만 그들의 순수함도 짚고 넘어가고 싶다. 그들은 끝내 만나지 못했지만 알은체를 하지 않는 대신 카페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후 나눈 이메일을 보면서 그들의 순수함에 웃음이 터졌다. 에미가 레오가 누구인지 너무 궁금해 그날 카페에서 본 사람들을 차례대로 나열하면서 자기 취향의 사람이 없었다는 말을 하면서 최악의 사람을 언급하는 장면이 나온다. 레오는 '봉두난발 괴물은 제가 아닙니다.' 라고 말하지만 얼마 뒤 그가 답장을 하지 않자 그 봉두난발 귀신이었을 거라며 투정부리는 에미의 메일을 보고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외모, 나이, 직업, 현재 처한 환경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내면의 드러냄이라는 사실을 깨닫기도 했다.

 

  그들이 서로에 기대는 마음이 커질수록 이메일을 기다리는 시간도 길어지고 나누는 시간도 길어졌다. 그러다보면 중독 상태가 온다. 온통 마음이 쏠려 있다보니 그 전의 생활패턴을 잃어버리고 온통 매달리게 되는 마음. 꼭 사람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그런 중독 상태에 빠져봤을 거라 생각하기에 그들의 메일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무척 궁금했다. 의외의 복병 에미의 남편이 그들의 메일을 읽게 되고 레오가 미국으로 떠나면서 그들은 연락이 두절된다. 아마 후속편이 없었다면 허무함과 궁금함 속에서 엄청난 상상의 나래를 펼쳤을 것이다. 후속편을 주문해놓고 기다리는 동안 내가 과연 그들에게 바라는 마음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둘의 결합도 아니고 그렇다고 평생 이메일 친구로 남길 바라는 것도 아닌데 그 중간은 진정 없는 것인지 내가 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레오가 에미와의 메일을 끊기 위해 시도한 여러 메일 가운데 '물리적으로 따지자면 그녀는 내 공기에 지나지 않았어요. 훅 하고 한번 불면 사라져버리는.(331쪽)' 이런 구절이 나온다. 진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지만 그들의 관계를 무어라 단정 지을 수 없는 현실에 조금은 막연해졌다. 나의 내면속의 수많은 또 다른 나라고 치부해버리고 책을 덮어 버리기엔 그들이 나누었던 소소한 이야기와 추억들이 나에게도 깊이 배어 있는 탓일 것이다. 내가 마음에 품었던 이메일 친구들처럼 그들이 사라져버리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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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생활 풍경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아모스 오즈 지음, 최정수 옮김 / 비채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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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옆집에서 청소기 돌리는 소리, 베란다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 창문 아래서 나는 풀벌레 소리. 현재 내 주변을 맴돌고 있는 소리 들이다. 아직 날씨가 더운데도 하늘만 봐서는 가을이 성큼 다가온 것 같다. 푸른 하늘을 보고 있으면 무료한 줄 모르겠는데 나를 채우고 있는 일상은 과연 무료함인지 기대함인지 아니면 알찬 나날인지 문득 생각하게 만드는 하늘이다. 『시골 생활 풍경』 책 제목만 들으면 평화로운 시골 마을의 이야기가 펼쳐질 것 같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나의 일상이 한없이 평화로워 보여도 나의 속내를 들여다보지 않는 이상 정확히 알 수 없듯이 이 작품도 직접 만나기 전까지 한없이 너그러워보였다.

 

  아모스 오즈, 작가 이름만 듣고 무한한 신뢰를 보내게 된다. 그리고 또 한번 그 신뢰의 탄탄함에 감탄했다. 저자는 '젊은 작가는 이런 책을 쓸 수 없을 겁니다.' 라고 했다. 총 8개의 단편 중 마지막 「다른 시간, 먼 곳에서」 작품을 제외하고 텔일란이란 마을의 배경이 되고 있다. 한 마을이라는 공간적 공통점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판이하게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종종 작품에서 등장했던 인물들이 다른 작품에서 등장하곤 하는데 그런 소소하면서도 세심한 장치가 한 마을이라는 공간적 배경을 묶어주고 있다.

 

  한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하지만 집 안 깊숙이 들여다본 이야기는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안나 카레니나 1권 중, 문학동네)'는 말의 전형을 보여주는 듯 했다. 이 작품속의 인물들의 고만고만한 행복과 나름나름의 불행을 어쩜 이렇게 섬세하게 드러나는지 왜 젊은 작가는 이런 책을 쓸 수 없는지 너무나 명확했다. 저자는 '일반적인 의미의 인간 실존을 담고 있을 뿐이다. (...) 내 작품은 뭔가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라고 했는데 인간 실존을 담고 있는 저자의 작품에 매료된 것은 오래전이다. 또한 '뭔가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지만 독자로 하여금 스산한 마음 가운데 슬픔과 애잔함을 간절히 불러일으킨다. 그렇다고 해서 눈물이 왈칵 쏟아질 정도의 슬픈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고향에 홀로 계신 부모님을 생각할 때의 마음처럼 찡한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게 하는 작품들이었다.

 

  두 번 읽은 작품이어서 그런지 「친척」이 가장 인상 깊었다. 독신인 여의사 길리 스타이너는 조카 기드온이 도착한다는 연락을 받고 버스 정류장으로 마중을 나갔다. 그러나 기드온은 도착하지 않았고 걱정이 된 그녀는 수많은 가능성을 열어둔 채 빈 버스를 다시 한번 확인한다. 버스 운전기사는 '오늘 저녁에 도착하지 못한 사람은 내일 아침에 틀림없이 나타날 테고, (...) 모두 조만간 도착할 겁니다.' 라고 하지만 그녀는 기드온이 자신의 집에서 머물렀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결국 자신의 침실로 들어간다. 기드온이 도착하지 않았다는 사건 이외에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상을 그린 작품에 왜 이렇게 매료되었을까. 아무래도 텅 빈 집에 누군가를 받아들이기 위한 작은 배려에도 불구하고 결국 혼자 남은 그녀의 모습이 애잔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기드온이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쓸쓸한 풍경이 아니라 우리 내면의 한자리에 차지하고 있는 외로움을 예고 없이 만나버린 기분이었다.

 

   「땅파기」는 한때 국회의원이었던 아버지와 남편을 잃고 마을의 학교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딸 라헬과 아랍인 청년 아델이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다. 노인은 밤마다 땅 파는 소리 때문에 잠을 깨고 나름대로 조사도 해보지만 허탕이다. 딸은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고 아델에게도 그 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딸도 의아해한다. 옮긴이는 '아델과 그를 못마땅한 눈길로 지켜보는 케뎀의 관계를 통해 이스라엘과 아랍 세계 사이의 해묵은 분열 문제도 건드린다.'고 했는데 한 집에서 전혀 다른 환경과 사상을 지닌 그들의 미묘함만 지켜봐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결코 가까워지지 않는 그 세 사람을 통해서 집 안에서도 얼마나 사람이 광활하고 멀게 생각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아버지의 '우리는 기울어가는 그림자다. 지나간 어제처럼 말이다.' 란 말처럼 말이다.

 

   그 외에도 다양한 마을 사람들의 사연이 전해진다. 서른 살 이혼녀를 짝사랑하는 17살 소년의 내면 묘사가 뛰어난 「낯선 사람들」, 아들이 자살한 뒤 서로 다른 영역에서 활발히 활동하지만 아무런 생각 없이 살아가는 부부의 이야기 「노래하기」, 어느 날 갑자기 집을 나간 아내를 찾아다니는 면장은 정작 서로에 대해 너무 무심했음을 깨닫게 되는 「기다리기」 등 우리가 잃어버렸던 것들을 다양하게 전해준다. 그것은 시간일수도, 대화일수도, 사랑일수도 있고 앞으로 잃어버릴 것들에 대한 경고일지도 모른다. 모두 평범해 보이지만 나름대로의 상처와 고민과 불안함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 끝이 명확하지 않은 이유는 우리의 인생이 아직도 진행형인 것처럼 그들의 이야기도 진행형이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은 아니었을까?

 

사람에게는 소중하고 잃고 싶지 않은 것이 한 가지씩은 있게 마련이야. 그것이 고양이나 개일지라도 말이야. 아니면 안락의자를 좋아할 수도 있지. 비가 내리는 전원 풍경을 좋아할 수도 있고 그것도 아니면 창가에서 바라보는 석양이라든가.  「낯선 사람들」 중

 

  무언가 계속 잃어가는 중이라면 소중하고 잃고 싶지 않은 것을 늘려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소소한 일상 속에서 좋아하는 것들을 늘려가다 보면 팍팍하고 호락호락하지 않은 삶일지라도 더 살아가고 싶은 이유가 자꾸 생기는 것은 아닐까? 테일란 마을을 통해 얼마나 다양한 삶의 군상을 보여주며 운집해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어찌 그것이 테일란 마을의 일일 뿐이겠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속을 축소해 놓은 것 뿐, 어쩌면 우리 주변에서 쉽게 만나볼 수 있지만 귀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마주하게 된 생경한 모습이라고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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