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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생활 풍경 ㅣ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아모스 오즈 지음, 최정수 옮김 / 비채 / 2012년 1월
평점 :
옆집에서 청소기 돌리는 소리, 베란다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 창문 아래서 나는 풀벌레 소리. 현재 내 주변을 맴돌고 있는 소리 들이다. 아직 날씨가 더운데도 하늘만 봐서는 가을이 성큼 다가온 것 같다. 푸른 하늘을 보고 있으면 무료한 줄 모르겠는데 나를 채우고 있는 일상은 과연 무료함인지 기대함인지 아니면 알찬 나날인지 문득 생각하게 만드는 하늘이다. 『시골 생활 풍경』 책 제목만 들으면 평화로운 시골 마을의 이야기가 펼쳐질 것 같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나의 일상이 한없이 평화로워 보여도 나의 속내를 들여다보지 않는 이상 정확히 알 수 없듯이 이 작품도 직접 만나기 전까지 한없이 너그러워보였다.
아모스 오즈, 작가 이름만 듣고 무한한 신뢰를 보내게 된다. 그리고 또 한번 그 신뢰의 탄탄함에 감탄했다. 저자는 '젊은 작가는 이런 책을 쓸 수 없을 겁니다.' 라고 했다. 총 8개의 단편 중 마지막 「다른 시간, 먼 곳에서」 작품을 제외하고 텔일란이란 마을의 배경이 되고 있다. 한 마을이라는 공간적 공통점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판이하게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종종 작품에서 등장했던 인물들이 다른 작품에서 등장하곤 하는데 그런 소소하면서도 세심한 장치가 한 마을이라는 공간적 배경을 묶어주고 있다.
한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하지만 집 안 깊숙이 들여다본 이야기는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안나 카레니나』 1권 중, 문학동네)'는 말의 전형을 보여주는 듯 했다. 이 작품속의 인물들의 고만고만한 행복과 나름나름의 불행을 어쩜 이렇게 섬세하게 드러나는지 왜 젊은 작가는 이런 책을 쓸 수 없는지 너무나 명확했다. 저자는 '일반적인 의미의 인간 실존을 담고 있을 뿐이다. (...) 내 작품은 뭔가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라고 했는데 인간 실존을 담고 있는 저자의 작품에 매료된 것은 오래전이다. 또한 '뭔가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지만 독자로 하여금 스산한 마음 가운데 슬픔과 애잔함을 간절히 불러일으킨다. 그렇다고 해서 눈물이 왈칵 쏟아질 정도의 슬픈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고향에 홀로 계신 부모님을 생각할 때의 마음처럼 찡한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게 하는 작품들이었다.
두 번 읽은 작품이어서 그런지 「친척」이 가장 인상 깊었다. 독신인 여의사 길리 스타이너는 조카 기드온이 도착한다는 연락을 받고 버스 정류장으로 마중을 나갔다. 그러나 기드온은 도착하지 않았고 걱정이 된 그녀는 수많은 가능성을 열어둔 채 빈 버스를 다시 한번 확인한다. 버스 운전기사는 '오늘 저녁에 도착하지 못한 사람은 내일 아침에 틀림없이 나타날 테고, (...) 모두 조만간 도착할 겁니다.' 라고 하지만 그녀는 기드온이 자신의 집에서 머물렀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결국 자신의 침실로 들어간다. 기드온이 도착하지 않았다는 사건 이외에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상을 그린 작품에 왜 이렇게 매료되었을까. 아무래도 텅 빈 집에 누군가를 받아들이기 위한 작은 배려에도 불구하고 결국 혼자 남은 그녀의 모습이 애잔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기드온이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쓸쓸한 풍경이 아니라 우리 내면의 한자리에 차지하고 있는 외로움을 예고 없이 만나버린 기분이었다.
「땅파기」는 한때 국회의원이었던 아버지와 남편을 잃고 마을의 학교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딸 라헬과 아랍인 청년 아델이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다. 노인은 밤마다 땅 파는 소리 때문에 잠을 깨고 나름대로 조사도 해보지만 허탕이다. 딸은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고 아델에게도 그 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딸도 의아해한다. 옮긴이는 '아델과 그를 못마땅한 눈길로 지켜보는 케뎀의 관계를 통해 이스라엘과 아랍 세계 사이의 해묵은 분열 문제도 건드린다.'고 했는데 한 집에서 전혀 다른 환경과 사상을 지닌 그들의 미묘함만 지켜봐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결코 가까워지지 않는 그 세 사람을 통해서 집 안에서도 얼마나 사람이 광활하고 멀게 생각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아버지의 '우리는 기울어가는 그림자다. 지나간 어제처럼 말이다.' 란 말처럼 말이다.
그 외에도 다양한 마을 사람들의 사연이 전해진다. 서른 살 이혼녀를 짝사랑하는 17살 소년의 내면 묘사가 뛰어난 「낯선 사람들」, 아들이 자살한 뒤 서로 다른 영역에서 활발히 활동하지만 아무런 생각 없이 살아가는 부부의 이야기 「노래하기」, 어느 날 갑자기 집을 나간 아내를 찾아다니는 면장은 정작 서로에 대해 너무 무심했음을 깨닫게 되는 「기다리기」 등 우리가 잃어버렸던 것들을 다양하게 전해준다. 그것은 시간일수도, 대화일수도, 사랑일수도 있고 앞으로 잃어버릴 것들에 대한 경고일지도 모른다. 모두 평범해 보이지만 나름대로의 상처와 고민과 불안함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 끝이 명확하지 않은 이유는 우리의 인생이 아직도 진행형인 것처럼 그들의 이야기도 진행형이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은 아니었을까?
사람에게는 소중하고 잃고 싶지 않은 것이 한 가지씩은 있게 마련이야. 그것이 고양이나 개일지라도 말이야. 아니면 안락의자를 좋아할 수도 있지. 비가 내리는 전원 풍경을 좋아할 수도 있고 그것도 아니면 창가에서 바라보는 석양이라든가. 「낯선 사람들」 중
무언가 계속 잃어가는 중이라면 소중하고 잃고 싶지 않은 것을 늘려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소소한 일상 속에서 좋아하는 것들을 늘려가다 보면 팍팍하고 호락호락하지 않은 삶일지라도 더 살아가고 싶은 이유가 자꾸 생기는 것은 아닐까? 테일란 마을을 통해 얼마나 다양한 삶의 군상을 보여주며 운집해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어찌 그것이 테일란 마을의 일일 뿐이겠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속을 축소해 놓은 것 뿐, 어쩌면 우리 주변에서 쉽게 만나볼 수 있지만 귀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마주하게 된 생경한 모습이라고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