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다니엘 글라타우어 지음, 김라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4월
평점 :
이 책을 읽는 내내 20대 초중반에 이메일로 연락을 했던 사람들이 생각났다. 그들은 지금 뭘 하며 살고 있을까가 궁금한 것이 아니라 내가 느꼈던 설렘이 이 책 속에 가득 들어있음이 무척 반가웠다. 깊이 공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나도 이메일로 연락하던 누군가를 좋아해본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얼굴도 연락처도 몰랐지만 이메일을 주고받으면서 답장을 기다리게 되는 설렘을 나누다 보니 상대방이 좋아진 것이다. 작품 속의 에미와 나의 다른 점이 있었다면 기혼이 아닌 피 끓는 청춘이었고 그들과 연애를 한다고 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 책을 내가 그 당시에 읽었다면 더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드는 것보다 결혼한 현재 읽게 되어서 더 좋았다고 말하고 싶다.
잘못 전송된 이메일로 인해 온라인 속에서 깊은 관계를 맺게 되는 에미와 레오. 에미가 결혼을 했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고 예상한대로 이야기가 흘러갈 거란 나의 진부한 생각을 뒤로한 채 오랫동안 이메일이 이어졌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정신없이 읽다보니 그들이 일년 동안 이메일을 주고받았다는 물리적인 시간을 자각하지 못했지만 지극히 사적이면서도 정작 사적인 이야기는 많이 드러나지 않은 그들의 메일을 보며, 겉으로 보이지 않는 내면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숨어있는지를 발견하게 되었다. 가족 이외에 나만의 든든한 편이 있었으면 하는 마음, 그냥 툭 던져도 내 마음을 알아주고 자연스레 따라오며 마음을 터놓게 되는 사람, 마음 깊숙이 감춰둔 절제와 유혹의 경계선에서 갈등하는 마음 등 나와 동떨어진 얘기라고 치부할 수 없었다.
그들의 결혼 여부를 떠나 밀당이 통하지 않는 알 것 다 아는 어른이라는 사실에 마음이 더 편했는지도 모르겠다. 작품 속의 그들과 나의 나이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다는 사실보다 내가 결혼했다는 사실이 오히려 부담 없이 읽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결혼 전이었다면 그들을 미화시켜 환상속의 순수함으로 그들을 가두려했을 것이다. 길을 가다 평범한 사람들의 속마음을 읽는 것처럼 그들의 소소하면서도 장황하고 감정에 치우치고 경계선을 넘을 듯 말듯 긴장감까지 주는 그들의 대화를 끊을 수가 없었다.
그들이 주고받은 이메일 안에서 굉장히 다양한 면을 보았지만 그들의 순수함도 짚고 넘어가고 싶다. 그들은 끝내 만나지 못했지만 알은체를 하지 않는 대신 카페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후 나눈 이메일을 보면서 그들의 순수함에 웃음이 터졌다. 에미가 레오가 누구인지 너무 궁금해 그날 카페에서 본 사람들을 차례대로 나열하면서 자기 취향의 사람이 없었다는 말을 하면서 최악의 사람을 언급하는 장면이 나온다. 레오는 '봉두난발 괴물은 제가 아닙니다.' 라고 말하지만 얼마 뒤 그가 답장을 하지 않자 그 봉두난발 귀신이었을 거라며 투정부리는 에미의 메일을 보고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외모, 나이, 직업, 현재 처한 환경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내면의 드러냄이라는 사실을 깨닫기도 했다.
그들이 서로에 기대는 마음이 커질수록 이메일을 기다리는 시간도 길어지고 나누는 시간도 길어졌다. 그러다보면 중독 상태가 온다. 온통 마음이 쏠려 있다보니 그 전의 생활패턴을 잃어버리고 온통 매달리게 되는 마음. 꼭 사람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그런 중독 상태에 빠져봤을 거라 생각하기에 그들의 메일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무척 궁금했다. 의외의 복병 에미의 남편이 그들의 메일을 읽게 되고 레오가 미국으로 떠나면서 그들은 연락이 두절된다. 아마 후속편이 없었다면 허무함과 궁금함 속에서 엄청난 상상의 나래를 펼쳤을 것이다. 후속편을 주문해놓고 기다리는 동안 내가 과연 그들에게 바라는 마음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둘의 결합도 아니고 그렇다고 평생 이메일 친구로 남길 바라는 것도 아닌데 그 중간은 진정 없는 것인지 내가 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레오가 에미와의 메일을 끊기 위해 시도한 여러 메일 가운데 '물리적으로 따지자면 그녀는 내 공기에 지나지 않았어요. 훅 하고 한번 불면 사라져버리는.(331쪽)' 이런 구절이 나온다. 진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지만 그들의 관계를 무어라 단정 지을 수 없는 현실에 조금은 막연해졌다. 나의 내면속의 수많은 또 다른 나라고 치부해버리고 책을 덮어 버리기엔 그들이 나누었던 소소한 이야기와 추억들이 나에게도 깊이 배어 있는 탓일 것이다. 내가 마음에 품었던 이메일 친구들처럼 그들이 사라져버리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