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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샤의 스케치북
타샤 튜더 지음, 김용지 옮김 / 아인스하우스 / 2011년 5월
평점 :
품절
나에게도 소중한 보물이 한가지 있다. 중3때부터 10년 넘도록 기록한 독후감 노트다. 가끔 그 노트를 들여다보면 내가 기록한 글임에도 놀랄 때가 많다. 투박하지만 솔직한 모습, 당시의 고민이 스며있는 글을 보고 있노라면 지금 나의 기록은 많은 것을 감춘 형식적인 것이 아닌가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언젠가부터 나의 내면은 감춘 채 타인의 시선을 좇아 무언가를 남긴다. 글의 진정성은 내 자신이 가장 먼저 알고 그 다음은 글을 읽는 타인일터인데 나는 현재 누구를 속이며 누구를 위해서 쓰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오래 묵은 노트부터 내가 남긴 독후감까지 거창하게 이야기를 끄집어내게 된 연유는 타샤 할머니의 스케치북 때문이었다. 이 책을 구입했을 때 바로 읽었지만 오랜만에 다시 펼쳐서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늘 곁에 스케치북을 두고 주변에 있는 사물들을 그렸던 타샤 할머니. 타샤 할머니는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지만 이 그림들이 모여 동화책을 내고 버몬트에 코기 코티지를 지을 땅까지 구입하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타샤 할머니의 스케치북을 보고 있으면 무언가 꾸준히 열정을 가진다는 사실에 다시 놀라게 되고, 그 시간과 노력은 꼭 보답이 되어 돌아온다는 것을 느꼈다.
나의 20대는 책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시간들이었다. 책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거의 10년 동안 책을 무지막지하게 읽었는데 그 행위가 밑거름이 되어 책과 관련된 일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서른 살의 나이에 오로지 책을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말이다. 2년 동안 책과 관련된 일을 하고 지금은 고향으로 다시 돌아왔지만 타샤 할머니의 스케치북을 보면서 나의 20대가 생각이 났다. 당시에 무작정 책이 좋아서 읽긴 했지만 이걸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알 수도 없었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언젠가는 쓰일 날이 있겠지란 무모한 생각으로 독서를 하다 보니 때론 의욕이 꺾이고 내가 무엇을 위해 독서를 하고 있는지 방황할 때가 많았다. 2년 동안 책과 관련된 일을 한 경험이 무척 소중한 경험으로 다가오면서도 나의 부족함을 많이 느낀 시간이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좀 더 많이 배워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나 자신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다짐을 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시간' 이라는 개념을 생각해 낸 것은 '인간'이니까 시대에 얽맬 필요는 없겠지요. 나는 지금까지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았고 내 삶을 마음으로부터 즐겼습니다. 그래서 행복했습니다. 『타샤의 스케치북』 110쪽
오늘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를 기다리면서 참 막막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잠시 동안 나의 현실이 팍팍하다고 생각하자 세상이 무너진 듯 온통 잿빛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어깨를 늘어트리고 느린 걸음으로 집에 와서 이 책을 펼치기 전까지도 앞으로 어떻게 이 세상을 헤쳐 나가야 할지 답도 없는 근원적인 고민을 하게 되었다. 타샤 할머니의 생동감 있는 스케치, 그것도 사진을 보고 그린 것이 아니라 타샤 할머니 주변에 있는 사물들, 함께 생활하는 동물들과 사랑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니 뭐가 그렇게 막막하다고 이러는가 싶었다.
타샤 할머니도 결코 편안한 세월을 살았다고 할 수 없는데도 '원하는 대로 살았고 행복했다'고 말하고 있었다. 좋아하는 정원을 가꾸고 그림을 그리다보니 아이들도 키울 수 있었고 꿈에 그리던 넓은 평원에 아름다운 집을 지을 수도 있었다. 꿈꾸던 삶이 이뤄졌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몇 살 때 이뤄지고 몇 살 때 더 큰 일이 일어났다는 시간적인 관념은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자신이 지루할 정도로 소소한 삶을 살다보면 언젠가 삶은 응답을 하게 될 것이고, 그 안에서 진정한 행복을 찾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생각의 전환과 변화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늘상 타샤 할머니의 책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좋다, 그립다, 대단하다 뿐이었다. 오늘 내가 느낀 절망감과 타샤 할머니의 스케치북이 만나서 새로운 용기를 주었듯이 때론 타인의 소소하고 꾸준한 열정이 감동이 되어 다가올 때가 있다. 변화하기 싫어하고 새로운 것을 도전하는 것에 겁먹는 나에게 '까짓것 하면 돼지'라는 생각이 든 하루였다. 33년째인 똑같은 나 자신과 마주하는 일이 이젠 지겨워질 때도 됐으니까. 오늘은 타샤 할머니에게 더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어진다. 나에게 이런 용기를 주어서 정말 감사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