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쉬낀
알렉산드르 푸시킨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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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고등학교 시절 어려워 했던 도스또예프스끼 작품을 진집을 통해 새로이 탐독하고 있을 때이다.

책을 펼칠때마다 나오는 수많은 러시아 작가와 작품들.. 그 가운데 가장 많이 나오고 궁금했던게 고골의 외투 폰비진의 미성년 그리고 뿌쉬낀의 작품들이였다. 그 가운데 뿌쉬낀을 가장 궁금해했던 이유는 다른 작가들은 한 작품들이 집중적으로 나온 반면 뿌쉬낀은 정말 여러가지 작품이 나왔다. 그래서 정말 궁금해서 인터넷 서점을 검색해 봤는데 한권으로 된 전집은 절판이 된 후였고 단행본으로 나온 책들 중에서 몇권이 있었다. 그래서 그 중에서 소설집을 사서 읽고 다른 단행본을 사려고 하는 중에 우연히 광주의 한 서점에서 뿌쉬낀의 한권으로 된 전집을 보게 되었다. 손때가 타고 너널 너덜 하고 굉장히 두껍고 3만 9천원의 가격표를 달고 있었지만 이미 내게는 그런 악조건 보다 갖고 싶다는 열망이 컸다. 그때는 그 책을 살 여건이 안되어서 그냥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는데 자꾸 눈에 밟혀 정말 참을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틀후에 광주에 사는 친구에게 부탁해서 그 책을 구해 달라고 했다. 아.... 그 말을 하고 나니 왜 그렇게 가슴이 뛰던지..

정말 정말 설레였다. 그러나 친구에게서 날아온 소식은 절망적이였다.

서점은 가보았으나 그 책을 누가 사가버렸고 주문을 하려해도 절판된 책이라 구할수가 없다는 것이였다.

병이 나버렸다.

갑자기 상황이 그렇게 돌아가니 갖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그러다 불연듯 출판사에 문의를 해보자란 생각이 들어 출판사 홈피에지에 글을 올렸더니 재고 문의를 해보라며 전화번호 하나를 알려 주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전화를 걸었다. 재고가 있었다.

책이 약간 더럽다며 9천원이나 깍아준 책은 생각보다 깨끗했고 책이 내게 왔을때의 기쁨은 말할 수가 없었다.

책을 보는 사람들마다 이거 책 맞냐는 핀잔도 집으로 들고 가는 길에 마주친 사람들의 힐끔거림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마냥 기뻤다.

그렇게 내 생애 가장 두꺼웠던 책....

무려 1793페이지짜리의 뿌쉬낀 전집을 손에 쥐게(너무 두꺼워서 다 못 쥐었다. ㅋ..)되었다.

2005년 1월 21일 금요일의 일이였다.

 

1999년 뿌쉬낀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열린책들에서 발행된 책이였다. 1999년이면 나는 고3.. 그때 러시아 작품에는 관심도 없었고 뿌쉬낀을 알지도 못했을 뿐더러 알았다고 해도 이렇게 두꺼운 책을 살 용기도 없었을 것이다. 뿌쉬낀 200주년 탄생 기념이라는 이름앞에 전집을 발행해준 열린책들이 얼마나 고맙던지...

그 유명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라는 시가 뿌쉬낀이 썼다는 사실도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고 러시아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작가라는 사실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의 작품외에도 알게 된 것이 너무나 너무나 많아져 갔다.

 

 

이 책을 받고 가장 놀랐던건 엄청난 양의 작품수였다.

이 전집에서 크게 서정시,장편 서사시,희곡,민담,운문 소설, 소설로 나뉘어져 있다. 서정지가 약 400페이지 장편 서사시가 360여 페이지 희곡은 190여페이지 민담은 46페이지 운문소설 270여 페이지 소설은 370페이지 해설 및 연보가 146페이지로 된 엄청나고 방대한 전집이다. 페이지 수로만 따져 보더라도 시인이라는 뿌쉬낀의 명성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인데 거기다 다양한 장르와 운문소설이라는 새로운 시도까지 한 뿌쉬낀의 역량이 느껴져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해설의 제목을 번역자 석영중 씨가 '아, 뿌쉬낀' 이라고 한 것처럼... 나도 '아, 뿌쉬낀'이라는 감탄사 에 많은 것들을 내포시킬 수 밖에 없었다.

단순한 생각으로 이렇게 많은 작품을 썼다면 굉장히 오래 살았을 거라는 생각을 했는데 네델란드 화가 요하네스 얀 베르메르를 떠올리며(그의 작품은 40여점 정도 밖에 안된다고 알려져 있다.) 38세의 짧은 생을 살다간 뿌쉬낀의 삶에 작품수에 생의 기간을 따지는 단순함은 깨트려 버렸다. 그러나 그 짧은 생을 살면서 문학적 가치까지 지니고 있는 이렇게 많은 작품들을 남겼다는 데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러시아 문학의 아버지, 국민 시인, 천재 작가, 민족의 혼등 뿌수낀을 따라다니는 수많은 수식어가 뿌쉬낀의 위대함도 그리고 러시아 국민들의 뿌쉬낀에 대한 열정을 다 채워주지 못한다는 사실 또한 어쩜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다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일테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뿌쉬낀을 어떻게 나의 짧은 소견으로 정리할 수 있을까.. 13살부터 시를 쓰기 시작해 결투로 인한 사망에 이르기까지 창작에 대한 그의 열정은 짧은 나의 어휘력으로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것조차도 무의미 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뿌쉬낀에 대해서 자꾸 할말이 많아진다.

 

수많은 작품들을 읽으면서 드는 느낌은 어느 것 하나 허접하지 않다는 것이였다. 이렇게 다양한 분야의 작품을 남겼음에도 대단하다라는 감탄사가 나올 수 밖에 없었던건 창작이라는 전제를 갖고 있는 분야라도 분명 그 하나 하나는 다르다는 걸 알기에 그를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렇게 다 잘 쓸 수 있단 말인가..

질투심.. 짜릿함.. 뿌듯함.. 안타까움 그렇게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국민시인이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모두다 느낄 수 잇는 시들...

그리고 시대적 배경과 황제를 찬양하는 시들.. 정치적이고 헌사가 깃든 시들.. 그의 시안에서도 그 세계는 무궁무진했다.

또한 유렵과 아시아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러시아의 지리적 특성을 살린 다양하고 풍부한 그의 시들과 작품들은 한 작가의 작품을 읽고 있음에도 내가 갖는 세계는 광활했다.

그 가운데 운문소설이라는 독특한 장르를 만날 수 있었는데 장르의 구분이 무색할 정도의 뿌쉬낀의 문학세게에서 운문소설은 장르를 들먹이며 운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분명 시의 형식을 빌고 있으면서 소설을 가미하고 있으며 잠시라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흡인력은 뿌쉬낀이 아니면 할 수 없다라는 과감한 표현도 던져 보게 된다.

실로 너무나 흥미있고 재미 있었던 운문소설 '예브게닌 오네긴'의 스토리는 평범하지만 이 작품이 러시아 문학사에서 불고 온 파장이 컸던만큼 많은 자유스러움을 보여 주었던 만큼 '우리보다 200년을 앞서갔던 작가' 라는 지적을 한 고골처럼 오랜 시간이 흐른뒤 읽어도 변함없는 이 놀라움은 고골의 표현에 기댈 수 밖에 없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뿌쉬낀의 작품을 내가 논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뿌쉬낀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만 풀어도 넘쳐나는데 어떻게 그의 작품을 논할수가 있겠는가..

그 일은 다행히 도스또예프스끼가 정의해 주었다.

'모든 것을 포용하는 보편성...'

고전주의적인 엄격함.. 낭만주의적인 열정과 사실주의가 어우러진 뿌쉬낀의 세계... '균형'이라는 한마디의 표현을 나도 인정해야 겠다.

전통의 수용과 파괴, 진지함과 유머, 현실과 이상등 조화를 이루는 뿌쉬낀의 작품들.. 누군가 왜 뿌쉬낀의 시에 맞는 음악을 작곡하지 않냐는 질문에 차이꼬프스끼는 <그의 시는 그 자체가 음악> 이라고 대답해 뿌쉬낀의 위대함을 나타냈던 것처럼 여러사람들의 찬사속에 그는 균형을 갖추었다고 그들의 표현을 인정하지 않고는 나로써는 도저히 뿌쉬낀을 표현할 길이 없다.

 

그렇게 1년이 넘는 뿌쉬낀과의 긴 여행을 마쳤다.

뿌쉬낀의 작품을 읽는 동안 그의 삶....

창작에 대한 열정을 모두다 이해했다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뿌쉬낀의 세계로 들어 갔던 그 시간들은 뿌쉬낀이 느꼈을 희열에 가까웠노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행복한 시간들이였다.

 

아, 뿌쉬낀...

당신의 작품은 영원하리라...

 

과연 뿌쉬낀은 나의 말을 들을 수 있을까...

밤이 깊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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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 1 - 그대가 하늘이오
허수정 지음 / 시골생활(도솔)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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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지 다양한 시각이 필요하다는 것을 많이 느낀다.

어떠한 것을 같이 겪었다해도 생각하는 것과 말이 모두 다른 것 처럼 상황은 천차만별이 될 수 있다. 그랬기에 해월 최시형도 남다른 의미로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얼마전에 읽은 '한국 철학 스케치'라는 책에서 동학과 농민봉기의 밑바탕을 보아서인지 낯선 해월이 아닌 조금 더 그를 이해하려는 마음이 깔려 있어 친숙함이 밀려오기도 했다.

해월을 먼저 읽고 철학 스케치를 읽었다면 뒷북을 쳤을지도 모르는데 철학 스케치를 먼저 읽게 되어서 나와는 동떨어진 세계며 결말은 허무했다 이런 식으로 치부해 버리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 책의 결말의 배경이 되는 우리나라의 19세기 말의 역사적 배경을 다른 책에서 조금씩 주워들은 기억이 나 헷갈리기도 하고 여러 시각으로 볼 수 있기도 했지만 해월의 깊은 마음은 뒤로 갈수록 드러나지 않아 주객이 전도 된 느낌이였다.

해월이 그러한 입장을 취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이해시키기 위해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던 시대적 배경을 설명한거라 볼 수도 있지만 해월은 순간 늙어버렸고 현실은 복잡해져 가는 상황에서 충분히 해월의 변화를 만끽할 수 없었던 것은 아쉬웠다.

 

그의 위대한 죽음이 감동을 자아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철학 스케치를 통해 어느 정도 간과했지만 자칫 인물주의로 빠질뻔 한 심리를 교묘히 잡아준 것이 아니였나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어찌 되었건 중요한 것은 해월이기에 사람 해월, 그를 좇기로 했다.

 

그러나 책을 읽는 내내 들었던 아쉬움은 해월의 덜 드러남도 아니요 그의 뜻이 빛을 보지 못한 것도 아니였다. 해월의 깨달음, 백성들의 고통이 왜 내 마음을 콕콕 쑤시지 못하냐는 깊이의 얕음이였다.차라리 나의 마음은 후벼 파서 한이 쌓이게 할 것이지(이건 내가 굉장히 싫어하는 분위기다.) 스쳐지나가는 듯한 느낌을 나는 왜 지울 수 없는 것일까.

어느 정도 해월의 삶의 고충을 안다는 거만함에서 나오는 푸념일 수도 있으나 왜 나의 마음은 저릿저릿 아파오지 않는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 해월만 좇자고 했으나 나의 다짐대로 해월만 좇다 보니 그의 노고와 깨달음을 많은 이가 알아주지 않았다는 투정일 수도 있다.

 

동학에 입분하기 전 그는 평범했다. 오히려 세상살이에 대한 맛을 잃어버려 불신으로 하루하루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그가 교주 최제우를 만나고 완전 달라졌다.

믿을 수 없는 현상을 보고 한울님을 영접하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그는 깨달음이 깊어져가 전국을 누비며 포덕을 할때는 그 모든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어 성인으로 볼 수 밖에 없을 정도였다.

보통의 인간으로서는 행할 수 없는 것을 한울님의 뜻에 가까이 다가가려 자신을 절제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노력하고 뜻을 전하고 다녀도 그를 이용하려 하고 오해하고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지금껏 역사의 아슬아슬함 속에서 외길만을 걸어오며 수 많은 가능성 중에서도 남들이 걷지 않는 험란한 길을 걸으며 정치적으로 희생양이 되어온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안타까웠다.

그러나 그들의 공통점은 이러한 것들도 개의치 않았다는 것이다. 오로지 어긋나는 사람들의 모습을 안타까워하며 가슴 아파할 뿐 자신은 돌보지 않는다.

그리고 의를 행하며 그들이 갖게 된 신념을 지킨다. 그 의와 신념은 특정 소수를 위한 것이 아니며 특별한 곳에서, 특별함을 위한 것도 아니며 모든 사람들이 대상이고 평범함 일상에서 끌어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가 영접했던 한울님을 논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것은 옳고 그르다를 따질 계제도 아니며 무조건 긍정적으로 봐야 한다는 생각도 아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해월이 행했던 것, 품고 있는 뜻이다.

 

사람 하나하나가 소중하고 만물이 소중하다는 생각.

그랬기에 무력으로 해결되는 것은 없으며 악순환만 되풀이 되며 사람 하나하나가 만물이라는 생각. 그 뜻은 고귀하고 명철하다.

그리고 그것을 행하고 널리 알리고자 했던 해월도 그래서 위대하다.

늘 백성들을 아껴주고 그들 편에서 많은 부분을 이해해 주었기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따랐다는 것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해월의 됨됨이와 그가 믿고 의지하는 깨달음이다.

나 같은 소소한 인간은 해월의 깨달음의 근처도 못가지만 평범한 해월도 그렇게 변화하였기에 인간된 삶을 갈구해 본다.

해월의 삶에 비추어 적어도 다른이에게 방해하는 삶 만은 살지 말아야 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그 방해가 한시적인 깨달음을 준다해도 나 또한 내 자신에게 떳떳한 삶을 살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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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적 책읽기 - 지식을 경영하는
스티브 레빈 지음, 송승하 옮김 / 밀리언하우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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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효율적인 책 읽기를 갈망하는 것보다 책 읽을 시간의 부족함을 아쉬워 하는 것 같다. 시간이 한정 되어 있으니 효율적인 독서가 필요한 법이겠지만 직접 독서의 현장(?)에서 지내다 보니 그러한 효율성을 별로 믿지 않게 된 것 같다.

분명 전략적인 독서를 원하면서도 반신반의 하는 태도.

모순적이긴 하지만 이 책을 손에 쥐고서도 저자가 말하는 독서법은 무엇인지 마음을 쉽게 열지 못했다. 무언가 잔뜩 요구하거나 고리타분 했다면 전략을 알기도 전에 책을 덮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선은 부담이 없었다. 적당히 그런 느긋함을 즐기려는 찰나 현재 내가 고민하고 있는 것을 한방에 날려주는 문구를 발견하고 말았다.

 

'서재의 절반은 앞으로 읽을 책으로 채우라.'

 

오... 나의 구세주 이탈로 칼비노.

내 방에는 책이 550여권 정도 되는데 읽어야 할 책이 200권이 넘는다. 읽을 책과 따로 구분해 뒀으며 나름대로 장르별로 나누어 놓아 기분대로 취향대로 골라 읽는다는 장점을 내세웠지만 저 책을 읽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헤어 나오지 못했고, 별로 유익하지 않는 책들로 시간을 낭비하며, 그러면서도 책을 계속 쌓아놓는 현상을 나 자신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저자는 칼비노의 말을 빌어 나의 고민을 간단히 해결해 버린다.

바로 희망 도서 목록을 만들라는 것이다. 그 희망도서 목록은 현재 내가 읽지 않은 책들이며 그 공간이 나의 삶을 지탱해주기까지 한다니 한순간에 나의 압박감은 희망으로 바뀐 것이다.

여전히 나의 손길을 기다리는 책들의 마음이 느껴지긴 하지만 희망 도서 책꽂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진다.

 

이처럼 저자는 우리의 독서에서 크게 무엇을 바꾸는 것이 아닌 또한 우리가 안고 있는 독서 방식을 비판하는 것이 아닌 책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 나오는 애정으로 그득 차 있다.

또한 그러한 얘기들이 지루하거나 딱딱하게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가독성 높게 그러면서도 요즘은 확실히 던져 주며 독서에 대한 틀을 넓혀 주고 있었다.

어쩌면 책을 읽는 동안 깊은 수긍은 하면서도 나의 독서 습관에서 커다란 변화를 시도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 깊은 수긍속에는 특별함을 기대했던 아쉬움이 있더라도 내가 알고 있는 독서법에서 크게 다를바가 없다는 것 또한 인정하는 마음이리라.

그랬기에 편안했고 메모할 것도 많았지만 그것들을 다 받아들이고 변화시킬 수가 없기에 정말 자신에게 와 닿는 몇가지만 실행해 본다면 좋은 계기가 될 것 같다.

 

나의 첫 번째 실행은 쌓아 있는 책을 희망도서로 만드는 심적인 변화였고 두 번째 것은 내게 무척이나 민감하고 고민되는 부분이라서 아직 실행을 할지 안할지 끊임없는 생각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바로 가장 큰 혼란을 주는 책에 메모를 남기느냐 원본을 훼손하지 않느냐이다.

나는 조금은 민감한 원본주이자이다. 그나마 요즘에 생각이 조금 틔여서 메모지를 붙이는데 메모지를 붙이더라도 메모를 쓰거나 대충 붙이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조심스럽다.

저자는 메모를 해야 한다는 의견을 인터넷에 올리자 수 천개의 댓글이 올라온 사례를 말해 주었는데 양쪽 다 수긍이 갔다. 그래서 나의 혼란은 더 짙어지고 있다.

더 고민을 해봐야 할 것 같지만 아직은 원본주의자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어찌되었 건 책에서 나는 커다란 두가지를 끌어 내었다. 아직 나의 것으로 만들지 못한 것도 있지만 분명 저자가 제시한 수 많은 방법들을 다 실행할 순 없다.

그것은 나만의 독서법을 잃어 버리는 정체성 상실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 자신에게 필요한 독서법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 독서법을 발견하고 실행할 때 진정한 전략 독서가 될 것이다.

무조건 남들이 좋다는 방법을 좇다가는 뒤죽박죽이 되고 말 것이다.

저자는 수 많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여러 독서법을 제시하고 있으니 이제 그 독서법을 음미해 볼 차례다. 자신에게 꼭 맞는 독서법을 찾길 바라는 마음을 담으며 늘 책과 함께 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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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버트로스의 똥으로 만든 나라 - 누구나 꿈 꾸는 세상
후루타 야스시 지음, 요리후지 분페이 그림, 이종훈 옮김 / 서해문집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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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부터 흥미를 불러 일으켰지만 책의 구성 또한 독특했다.

짧막한 글과 함께 나오는 재치있는 그림들이 책장을 넘기는 손짓을 자꾸 조심스럽게 만들었다.

짧막한 책이였지만 읽어가면서 이 책의 내용이 사실일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마지막에 나우루 공화국에 대한 사진과 정보는 새로운 발견이라는 흥분과 함께 책을 통한 간접경험 및 체험은 내 얼굴에 꿈꾸는 듯한 미소를 만들어 주었다.

나우루 공화국... 나우루 공화국.. 정말 이런 나라가 존재 했었다니..

세상은 넓고도 좁으며 비슷하면서도 다르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렇게 나우루 공화국은 그 존재만으로도 내 마음속에 작은 꿈을 선사해 주었다.

 

남태평양 적도부근에 떠 있는 작은 섬나라, 바티칸과 모나코에 이어 세계에서 셋째로 규모가 작은 독립국 나우루 공화국...

섬둘레는 약 19km.. 자동차로 천천히 돌아도 30분 밖에 걸리지 않고 여의도의 2.5배 정도 크기에 18석의 의회 그리고 두 곳 밖에 없는 호텔등등.. 과거의 부유함은 흘러간채 가난하지만 비교적 즐겁게 살고 있는 나라.. 과연 이런 작은 나라.. 과장하자면 동화속 같은 나라가 존재 하다니 아직 그 사실이 믿겨지지 않는다.

그냥 섬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곳이 한 나라라니...

그리고 한때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였다니 그 사연이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앨버트로스라는 새의 똥.. 즉 인광석의 엄청난 자원덕에 상상속에서나 존재했을 그런 나라였다. 빈부의 격차 없이 모두가 부자였고 결혼을 하면 나라에서 집도 그냥 주고 전용비행기로 해외로 쇼핑을 다니고 일을 전혀 하지 않아도 풍요롭게 살 수 있는 나라가 나우루 공화국이였다.

그런 풍요속에 사람들은 게을러져 갔고 그 안에서 자행된 만행이며 인광석을 탐낸 다른 나라의 침략속에 점점 황폐해져갔다.

작고 특수한 나라이기에 이해가 가능했던 어린아이 장난 같던 정치와 사고가 가능했던 나라.. 그 안에서 처음 갖었던 신비감은 인간의 타락이라는 경지까지 내려갔다. 충분히 더 나은 국가를 만들 수 있었음에도 과거의 풍족한 생활에 젖어 편하게 풍요를 누리려던 어리석음은 비참한 결과를 낳게 되었다.

인간이라는 동물의 특성상 한번 맛본 편안한 삶을 잊을 수가 없게 되고 그 욕망 추구를 위해 소중함의 척도를 잊은채 욕심을 채워가기 바쁘다는 걸 안다. 그 예시를 보여준 것이 나우루 공화국이 아닌가 싶다.

작은 나라이기 때문에 이런 동화같은 애기가 가능했고 더디긴 했지만 자각 또한 빠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믿기지 않는 존재의 사실 앞에 참 많은 것을 꺼내 보게 되었다.

가끔씩 자주 그런 삶을 꿈꾸면서도 정말 그런 나라가 존재했다고 하자 왜 그들의 삶이 무료하게 느껴졌을까?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늘 불평불만을 안고 살면서 그런 예를 보면서도 왜 행복하다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어서 만족을 모른다는 생각과 한편으로는 물질적 풍요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느꼈기에 그들이 부럽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욕망은 자아 실현이라고 하는데 나우루 공화국 사람들은 그 많은 물질로 모두다 자아실현을 이루었을까? 아닐 것이다. 그 실현을 이루었다면 나라의 운명이 그리 화려한 퇴보의 길을 걷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그 풍요는 무료하고 모든것을 멈추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육체는 풍족했으나 결코 이성은 풍족하지 못했던 삶.. 그 삶이 모든 사고를 무기력하게 만들어 버린 것 같다.

그런 나라의 예를 보았음에도 나도 무언가를 위해 움직이는 모습은 만족할줄 몰랐던 나우루 공화국 사람들을 닮았는지도 모르겠으나 그 움직임은 훨씬 더 건전하길 바라는 마음이 가득하다.

 

동화책을 읽는 듯한 느낌이였으나 인정해야 하는 진실이 있는 이야기..

신비로웠다. 나우루 공화국을 가보고 싶다는 충동저인 생각이 들정도였다. 현실을 인정하며 즐겁게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직접보고 싶기도 하고 그 작은 나라를 꼭 둘러보고 싶다는 생각도 강했다. 도보로 그 나라를 다 돌아볼 수 있는 곳... 상상만 해도 꿈을 꾸는 듯 하다.

과거의 풍요와 만행을 통해 작은 나라라고 무시한듯한 나의 생각은 그 풍요와 만행을 비판하는게 아니다.

꿈꾸는 듯한 곳이 존재했다는 사실.. 왠지 나우루 공화국은 모두다 새로운 꿈을 동시에 꿀 수 있다는 환상이 짙어 또다른 만행을 내가 심고 있는 느낌도 들지만 이 넓은 세계에서 보지도 가보지도 못한 나라를 통해 느끼는 이 친밀감은 주체하지 못해 잠시 걸쭉한 꿈을 꾸었다고 생각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나또한 넘치는 꿈을 꾸고 있는 듯 하다..

나우루 공화국이 남태평에 떠있듯 내 마음에도 그렇게 둥둥 떠다니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어느새 나의 작은 꿈이 되어버린 나우루 공화국...

제대로 중독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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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역 옥루몽 1 - 대한민국 대표 고전소설
남영로 지음, 김풍기 옮김 / 그린비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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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고전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읽는 이의 영혼을 울리는 것' 이라고 한다.

그런 연유에 부쩍 고전이 좋아진 요즘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고 읽게 되었다.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특히 좋아하는 나로써 그런 문학을 즐길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무척 뿌듯해하고 있었다. 처음엔 그렇게 고전을 즐기고만 있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외국의 고전은 이렇게 많고 다양한데 우리가 알고 있는 고전은 무엇이고 즐기는 고전은 무엇이라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안타까웠다.

우리의 고전을 나열해 보려해도 선뜻 선뜻 나오지가 않았고 어느시대 무엇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또 제대로 읽은 적이 있는지 어느 것 하나 뚜렷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우리의 고전은 알지 못한채 외국의 고전을 탐독하고 있는 내가 조금은 씁쓸해져 갔다. 그러던 중 옥루몽이라는 제목만 들어본 적이 있는 고전이 완역이 되어 발행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런 씁쓸함을 조금은 날려 주는 것 같아 반가웠다. 우리에게도 훌륭한 고전이 있다고 자랑하고 만끽하고 싶은 마음이 그득했다.

 

고전의 첫 어려움이라 하면 아무래도 언어가 아닌가 싶다.

내가 알지 못하는 어휘와 지금과는 확연히 다른 언어에서 그런 말의 어려움은 더 커져가는 것이다. 그러나 저번달에 홍석중의 '황진이'를 읽어서인지 꼼꼼히 정리된 주석과 함께 읽기에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그 안에는 재미가 가미되었기 때문에 훨씬 수월했던 면도 있었다.

그리고 반가웠던건 현대인이 쓴 고전이 아닌 말 그대로의 고전이기에 생소한 언어속에서 그 시대의 언어가 배어나와 고전을 읽는 즐거움을 더해 주었다는 것이다. 현대의 고전이 아닌 고전속의 고전...

말장난 같지만 그렇게 옥루몽의 매력에 빠져갔다.

 

옥루몽에서 주요 인물은 양창곡이다. 양창곡과 맺어진 인연이든 아니든 많은 인물이 나타나지만 양창곡이 중심이 되어 점점 스케일이 커져간다. 범상치 않은 양창곡의 출생.. 뛰어난 재능.. 그리고 장원급제하여 펼쳐지는 활약상이 그려져 있다. 1권에서는 그의 활약상이 전부 드러나지 않고 시작에 불과해 다음 이야기가 몹시 궁금해졌다.

그러나 1권에서 양창곡이 주요인물이긴 하지만 그에 못지 않은 앞으로 스토리를 이끌어 갈 인물들도 등장한다. 양창곡 같은 인재에게는 많은 인연이 따르는 법...

처음 마음을 열고 사랑을 나눈 강남홍을 두고라도 1권에서 세명의 부인을 맞이하게 된다. 앞으로 한명의 여인을 부인으로 더 맞을테고 강남홍과의 재회를 앞두고 있으니 옛날에는 자연스럽고 당연했던 풍속이였으나 고전에 대한 어쩔 수 없음이 드러나 질투가 나기도 했고 괜히 실망스럽다는 둥 그러면 그렇지 라는 둥 ... 그쪽에 관한 양창곡의 면모에 대해서 투덜대고 있었다. 진한 로멘스라도 바라는 것이였을까? 왜 나는 앞길을 보지 못하고 여기서 머뭇거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자기의 의지와는 다르게 부인으로 맞은 황소저를 보며 여러 부인들 사이에서 꼭 이런 사람은 한명쯤 있다는 생각에 양창곡과 다른 부인들과의 어려움이 훤히 그려져 이 문제는 이만 여기서 접기로 했다.

이것 말고도 조금씩 조금씩 고전이라는 매력에 빠져가는 것이 많았으므로..

그 매력중에 단연 돋보였던건 시조가 아닌가 싶다.

강남홍과 벽성선이 기생이라는 신분도 있었지만 양창곡과의 정을 나눔에 있어 시로 마음을 주고 받는 것에 대해 고전의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지식과 배움의 산물이며 가장 보편화된 드러남이 시조이듯 범위가 너무 한정되어 있다는 느낌도 들었지만 그 시대 상의 특징을 따라 즐기다 보니 외국의 명시에도 견줌에 손색이 없을 것 같았다.

다만 주고 받는 시가 대부분이라 배경을 알고 읽으며 마음에 더 와닿듯 따로 떼어 놓으면 다소 동떨어진 느낌이 들더라도 말이다.

 

또한 현명함과 인과 덕을 중시하는 면모에서 편안함을 느꼈다.

책 속의 많은 것들을 알고 있는 것의 대부분이라 고리타분하게 생각되어질지 몰라도 우리는 그런 면에 익숙함으로 시나브로 그 안에서 편안함을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면을 1권의 끝부분에 나오는 양창곡과 나탁과의 싸움에서 볼 수 있듯이 전쟁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고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역시나 흥미진진했고 순식간에 읽어내려갔다.

그 부분이 아니더라도 그런 면모는 책 전체에서 자주 볼수 있었기에 그 시개속의 빠짐이 짙어져갔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처음 기대 했던 우리의 고전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기도 했었다. 다소 익숙한 스토리며 순수한 우리 고전이 아닌 중국이 무대가 되었고 많은 현인들이나 가르침이 다 중국에서 비롯된 것이였다. 그 당시 중국이 우리에게 미친 영향을 보면 당연한 결과였겠으나 왠지 우리나라만의 순수한(?) 고전을 바란터라 터무니없는 기대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확실하게 느꼈던건 개인적으로 좋아하던 19세기 러시아문학을 읽으면서 느꼈던 즐거움과 만족감이 옥루몽에서도 드러났다는 것이다. 고전이라는 장르의 틀속에 담으려 했던 나의 편견을 깨어주듯 옥루몽은 그 매력을 안은채 편하게 재미나게 많은 가르침을 담은채 그렇게 다가왔다.

우리의 고전...

옥루몽을 읽는 것 하나만으로 자랑하고 싶고 널리 알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이제야 우리의 고전이라고 떳떳이 내 놓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작품을 만난 것 같아 문학을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써 한없이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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