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Q84 1 - 4月-6月 ㅣ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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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니까, 또 평들도 엄청난 것 같고, 슬쩍 훑어본 내용도 흥미로울 것 같아서 시작했다. 이 작가의 다른 책을 그리 많이 읽진 않았지만 어쨌든 <상실의 시대>의 하루키류와는 소문대로 많이 달랐다.  달랐지만, 여전히 읽는 즐거움을 주는 하루키. 이번에는 문체보다도 이야기에 더 집중하게 되었다. 그만큼 처음부터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만들어 끌고간다.  

덴고와 아오마메를 엇갈리면서 한발짝씩 나아가고 있는데 1권은, 4월에서 6월까지의 기간. 10살 때 한 순간의 섬광과도 같은 순간을 깊게 공유한 둘은 이후 엇갈려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그들의 속에는 상대가 각인되어있지만, 그걸 의식하고 있는 아오마메와 봉인하고 있는 덴고의 각자의 형편이 전개된다. 그렇게 한 땀 한 땀, 스스로의 시간을 채워가는데 그 둘은 달리 어찌할 수 없이 서로 한 군데로 모이고 있다..는 것. 덴고는 덴고대로, 아오마메는 아오마메대로 더할 수도 덜할 수도 없이 빽빽하다. 둘, 뿐만 아니라 모든 등장인물들이 뿜어내는 포스는 하도 강렬해서 저절로 읽는 내게도 힘이 들어간다. 게다가 너무 많은 수수께끼들. 하나씩 풀려나가기도 전에 하나씩 덧붙여지며 긴장을 높인다. 작가의 책중 표현처럼,  '하나의 감옥에서 멋지게 빠져나온다 해도, 그곳 역시 또다른 좀더 큰 감옥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 트릭이 중첩된다. 

그날 밤도 달은 두 개였다. 둘 다 보름달에서 이틀분만큼 이울었다. 아오마메는 브랜디 잔을 손에 들고, 아무리 해도 풀리지 않는 퍼즐을 바라보듯이 그 크고 작은 한 쌍의 달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보면 볼수록 그 조합은 점점 더 수수께끼로 가득한 것처럼 느껴졌다. 만일 할 수만 있다면 그녀는 달에게 묻고 싶었다. 무슨 사연이 있어서 갑자기 너에게 저 초록빛 작은 동반자가 딸리게 되었느냐고. 하지만 물론 달은 대답해주지 않는다. 

달은 누구보다 오래도록 지구의 모습을 근거리에서 보아왔다. 아마도 이 지상에서 일어난 현상이며 행위 모두를 목격했을 것이다. 하지만 달은 침묵한 채 말을 하지 않는다. 한없이 차갑게, 적확하게, 무거운 과거를 품어안고 있을 뿐이다. 그곳에는 공기도 없고 바람도 없다. 진공은 기억을 아무 상처없이 보존하기에 적합하다. 어느 누구도 그런 달의 마음을 풀어낼 수 없다. 아오마메는 달을 향해 잔을 치켜 들었다. 

"요즘 누군가와 껴안고 자본 적 있어?" 아오마메는 달에게 물었다. 달은 대답하지 않았다.  

"친구는 있어?" 아오마메는 물었다. 달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게 쿨하게 살아가는 거, 이따금 피곤하지 않아?" 달은 대답하지 않았다.

쿨하게 살아가는 것, 더이상 쿨하게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은 아오마메가 그렇게 말한다. 달은 침묵. 그러나 하루키의 책에서는 침묵조차 그저 소리하나 없이 고요한 것이 아니다. 침묵 자체가 뭔가를 스스로 말하고 있는 것만 같다.  

많은 순간 아오마메에 경탄하고, 때로 공감한다. 세계의 기묘함에 대해, 노부인의 말처럼 만일 우리가 단순히 유전자의 탈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어째서 우리 인간 중 적지 않은 자들이 그토록 기묘한 형태의 인생을 살아가는 걸까. 우리가 심플한 인생을 심플하게 살고, 쓸데 없는 건 생각하지 말고, 그저 생명유지와 생식에만 힘을 쏟으면, DNA를 전달한다는 그들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될 게 아닌가. 인간들이 복잡하게 굴절된, 때로는 너무나 이상하다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종류의 삶을 사는 것이, 유전자에게 과연 어떤 메리트가 있다는 것일까.  

이 책을 읽다보면, 평범하기 짝이 없고 일상 다반사의 나날을 살아가는 나-우리 같은 사람들은 사실 그저 유전자의 탈것일지도 몰라, 싶은 생각이 덜컥 든다. 이 책의 인간들은 어찌나 굴절된 종류의 삶을 살아가는지.. 가슴이 쿵쿵거릴만큼, 놀랍다. 어찌됐든 그토록 기묘한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아오마메는 독백한다. 무엇이 어찌 되었든 나는 이 인생을 살아나가는 수밖에 없다. 그것이 아무리 기묘한 것일지라도, 일그러진 것일지라도, 그것이 나라는 탈것carrier의 존재 방식이다.   

쿨하다. 달보고 '그렇게 쿨하게 살아가는 것, 이따금 피곤하지 않아?' 했던 아오마메는 실상 달만큼이나 쿨하고, 사는 건 그만큼 피곤하다. 그래도 그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그게 자신의 길이기에 간다는 것. 아오마메는 이 소설의 분위기를 강하게 휘감고 느와르로 이끌어간다. '소설에는 이런 인물이 있어야만...' 실은 1권을 덮고 나니 이런 말을 할 여유가 생긴다. 1권을 읽는 동안에는 아오마메에게 휘둘려, 감지덕지하면서 그녀의 쿨하고 터프한 매력에 끌려 다니기만 한 걸.

하늘에 두 개의 달이 떠 있다든가, 뭔가 엇갈려버려 다른 곳으로 들어와버린 '장소'라기보다는 '시간'이라는 개념, 모호하지만 그러니까 덴고의 입을 빌어 말하는 바, 시간이 일그러진 모양으로 흐를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의 가정이다.  

인간의 뇌는 최근 이백오십만 년 동안 그 크기가 약 네 배로 증가했다. 무게만으로 보면 뇌는 인간의 몸무게의 2퍼센트를 차지할 뿐이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신체의 총 에너지의 약 40퍼센트를 소비한다. 뇌라는 기관의 그러한 비약적인 확대에 의해 인간이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은 시간과 공간과 가능성의 관념이다.

시간이 일그러진 모양으로 흐를 수 있다는 것을 덴고는 알고 있다. 시간 그 자체는 균일한 성분을 가졌지만, 그것은 일단 소비되면 일그러진 것으로 변해버린다. 어떤 시간은 지독히 무겁고 길며 어떤 시간은 가볍고 짧다. 그리고 때때로 전후가 바뀌거나 심할 때는 완전히 소멸되기도 한다. 있을 리 없는 것이 덧붙여지기도 한다. 인간은 아마도 시간을 그처럼 제멋대로 조정하면서 자신의 존재의의 또한 조정하는 것이리라.

1Q84라는 낯선 시간, 아직 1권만으로는 잘 알 수 없지만(2권까지 보면 상쾌하게 알 수 있을까? 글쎄..) 이 일그러짐과 상관이 있지 않겠는가. 흥미로운 시간, 탐구대상으로 삼기에도 버거울 인간들, 하늘에 떠 있는 두 개의 달. 도대체 하루키가 어떻게 이 소설을 풀어갈 지 기대가 만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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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버설 횡메르카토르 지도의 독백 ㅣ 미스터리 박스 1
히라야마 유메아키 지음, 권일영 옮김 / 이미지박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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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거덩...! 이, 뭐란 말인가!

정말 무시무시했다. 인간의 머리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이 정도까지... 지구 상에는 이런 생각을 하고 사는 인간도 있구나, 싶었다. 너무 심하게 잔혹하니까, 나중에는 오히려, 그저 딴세상 이야기처럼 현실성없이 들렸다. 그래서인가, 기시 유스케의 무작스레 잔혹한 책 <검은 집>같은 책보다 오히려 덜 무서웠다. 훨씬 강도높고 또 기상천외의 잔혹인데도 한발짝 물러나서 읽히는, 그래서 오히려 감정 이입과는 거리를 둘 수 있었다. 어쨌든, 천만다행이었다. 감정이입까지 되게 써 놓았으면 첫번째 이야기를 못 넘어갔을테니까.

나 자신에 대해서 깜짝 놀랄만큼, 너무 재미있게 읽었다. 지구상의 일이 아니라 마치 먼먼 어느 우주의 일인 것처럼 여유만만하게 말이지. (그래서 끝까지 다 읽을 수 있었으리.) 그렇게 읽으니 기가 막히게 재미있었다. 가슴이 써렁해지는 차가움, 감정이 철저히 배제된 행동만의 섬세한 아름다움, 마치 암흑의 우주를 방향도 없이 유영하듯 자유로운 상상력, 그리고 가끔 덜커덕, 하고 어둔 밤에 발에 걸리듯 하는 깜짝스러운 공포. 그런 예측 불허의 짜릿함이 내게 주는 맛이 생각보다 꽤 컸다. ... 재미있게 읽으면서도 실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혼란스러움의 정체는? 내가 이 책을 이렇게 즐길 수 있으리라고는 정말 반쯤까지 읽으면서도 생각도 하지 못했다. 중반을 넘었을 때, 정말 호기심을 억제하지 못하고 빠져드는 상황, 대체 끝은 어디인가? 하는 스릴을 즐기고 있지 뭔가.  

담대한 하드코어. 책이어서 다행이다. 영화였으면, 뭔가 진짜로 보여준다면, 정말이지 얼마나 끔찍할 것인가! 절대로 안 보고 싶다.  

에그 맨
C10H14N2(니코틴)과 소년-거지와 노파
Ω의 성찬
소녀의 기도
오퍼런트의 초상
끔찍한 열대
유니버설 횡메르카토르 지도의 독백
괴물 같은 얼굴을 한 여자와 녹은 시계 같은 머리의 남자  

이 여덟 편의 짧지만 완성도 높은 이야기들. 하나하나 제목을 떠올려보면 다 새롭다. 특히 'Ω의 성찬' 의 끔찍한 상상력은 가히... 경지라 하겠다. '오퍼런트의 초상'도 역시, 이야기를 끌고가는 힘은 엽기성이 아니라 역시 스토리텔링인 것. 그러고보면 끔찍한 묘사를 빼버리고 나면 이 책의 이야기들은 얼마나 참신함으로 넘치는지 모른다. 물론 '재미'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언젠가 세세한 내용은 다행히도 대부분 기억에서 지워지겠지만, 또 다행하게도 이 책을 읽었을 때의 저릿저릿하던 느낌은 끝까지 잊히지 않을 것 같다. 그거야말로 꼭 한번이라도 느껴보고 싶었던 것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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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미술 이야기 - 피렌체편 - 김태권의 미술지식만화
김태권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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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조르조 바사리가 썼다는 <르네상스 미술가 열전>이라는 책이 있다 한다. '고대의 재생'을 뜻하는 '르네상스'라는 명칭을 처음으로 썼고, 르네상스 시기에 활동했던 200여명의 예술가의 전기를 기록한 책이라는데.  

물론 그 책을 본다면, 많은 정보와 그 당시를 알게 해줄만한 생생한 지식이 담겨 있겠지만, 막상 내가 그걸 얼마나 즐기면서 읽을 수 있을 것이며 또 그 안에서 얼마만한 양의 정보를 건져내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으려나? 크게 기대할 수 없다는 게 현실일 것이다. 그런데 <십자군 이야기> 이래 내가 좋아하게 된, 박학다식한 데다: 보는 각도 공감가고: 유머 감각있는 김태권 작가가 그걸 풀어 보여주겠다는데, 어찌 안 볼 수가 있으랴! 기대하고 보았는데(도) 이 책은 상당히 재미있고 유익했다.  

주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안젤로의 이야기, 보티첼리의 변천사, 도나텔로의 살아있는 듯한 조각품, 위대한 자 로렌초가 이루어내는 피렌체 메디치 가문과 그가 전폭적으로 지원한 예술가들의 관계 등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그 이야기들은 종종 시대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비견될 만한 거리로 함께 등장해서 이해를 돕는다. 작가가 미학을 전공했을 뿐 아니라 역사와 철학에 큰 관심을 갖고 있으며 지금도 그리스, 라틴 문헌을 공부하고 있다는 걸 알고나면 어째서 이렇게 종횡무진 르네상스를 오갈 수 있는지도 수긍이 간다. 요즘은 신문을 통해 에라스무스의 라틴어 격언을 소개하는 것도 보고 있다.  

현재와는 딱히 접점을 갖기 어려웠던 고대 그리스 로마와 중세, 또 르네상스 시대, 어쩌면 학교에서 세계사와 미술사를 통해 딱 그만큼만 알았을, 당연 복잡하고 의미도 못 찾겠고 재미조차 없다 생각하고 말았을 수도 있는 그 시대들이 그를 통해 이렇게 다가오는 게 신기하고 좋은 느낌이다. 지난 겨울 피렌체에서 보냈던 단 하루, 오랫동안 우피치 미술관의 보티첼리 방 안에 있는 커다란 작품들 앞에서 설레며 서성댔던 기억이 새롭다. 그리고 안타깝다. 그때 어째서 도나텔로의 <막달라 마리아>가 있는 두오모 미술관에 들르지 않았던 것인지,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의 겉 모습에만 감탄하며 그냥 지나쳤던 것인지, 이 책을 보면서 얼마나 후회되는지 모른다. 마사초가 그린 브랑카치 예배당의 <낙원에서의 추방>은 또 어떻고...

어쨌든, 미술사의 가장 찬란했던 시기 15, 16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로의 여행을 김태권이라는 가이드와 함께 갈 수 있다는 건 행운임에 틀림없다. 뒷면 미술사연표에 등장하는 더 많은 작가들과 얽힌 이야기들, 예컨데 미켈안젤로와 라파엘로의 시대, 뒤러의 판화 이야기, 베네치아에서 활동했던 티치아노를 통해 보는 베네치아 미술 들에 관한 이야기도 계속 이어지면 좋겠다. 그러나- <십자군 이야기 1,2>를 차마 잇지 못하고 있는 걸로 볼 때, <르네상스 미술 이야기, 피렌체 편> 다음의 이야기는 언제서야 빛을 볼 지 저으기... 의심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기대하며 기다리지 않을 수 없다는 게 열혈 독자된 이의 사명 혹은 운명일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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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28 12: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1-02 15: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특별판)
로맹 가리 지음, 김남주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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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유명한 책이지만 이제야 읽었다. 아무래도 단편에는 길게 몰입하지 못하는 성정 탓이다. 이야기에 좀 얽혀들라치면 금세 끝인가 싶은 허무함, 그리고 잠시의 쉴 틈도 없이 종이 한 장만 넘기면 새로 이어지는 전혀 새로운 이야기, 이 친구랑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화장실 갔다 오고나니까 자리에 앉아있는 친구는 갑자기 낯선 이- 이런 느낌에 익숙해지지 못해서 단편을 잘 집어들지 않게 되었다. 어찌보면 답답한 이야기지만, 좋은 장편이 선사하는 몰입의 맛에 길들여진 탓이다. 

그런데도, 깜짝 놀랄만큼 이 단편집은 멋졌다. 작가는 종횡무진 이야기의 세상을 넘나든다. 그는 저 높은 곳에서 이 세상의 여러 꼬락서니, 때론 처절하게 때론 알싸하게 돌아가고 있는 형편을 두루 살피고 있었다는 것처럼, 어느 한 순간 어느 한 군데의 이야기를 탁 잡아채서 풀어낸다. 그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이야깃거리가 되는 것들. (정말, 작품집 안에 하나둘은 끼어있음직한 허투른 이야기가 어째 하나도 없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시점도 자유로이 넘나든다.  

때론 단 여섯 쪽에 불과한 문장으로 한 편의 가감없이 완벽한 이야기를 풀어내기도 한다. 그건 정말... 내겐 놀라움 그 자체였다. 짧아서가 아니라 너무 완벽하게 느껴져서다. ('킬리만자로에서는 모든 게 순조롭다') 그 이야기는 마치 한 편의 장편의 줄거리만 같다. 단 여섯 쪽에 그 모든 이야기를 풀어내다니, 그런데도 부족하거나 넘침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 짧은 글을 쓴 사람은- 어쨌든 단편의 절묘한 아름다움을 아는 사람이구나, 싶다. 그 안에 들어있는 모든 모험의 상상, 인간 세상이 품고있는 함의, 잔인하고 심술궂은 심성, 무모한 희망과 절망, 아이러니, 그리고 이야기를 완성시키는 기막힌 맞물림. 문장도 아름답다.  

"아라비아 사막에서 길을 잃었어. 모래 위에 당신 이름을 쓰지. 난 사막이 좋아. 당신 이름을 쓸 자리가 많으니까. 목이 몹시 마르지만, 우리는 기운을 잃지 않고 있어. 구원은 언제나 마지막 순간에 온다는 걸 여행가들이라면 모두 알고 있거든. 습도가 높아서 당신 어머님이 고생하시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아, 평생에 한 번이라도 받아보고 싶었던 편지가 아닌가.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한 인간의 시적인 상상에서 비롯된 향긋한 거짓말이었다. 그저 거짓말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이 자신의 전 생을 걸고 만들어낸 역작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숭고함마저 느껴지는 거짓말이 주는 감동도  잠시, 일반의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심술궂고 무지, 단순한 일상은 쉽게 거기에 재를 뿌린다. 작의 말마따나 '그런 식으로 영원을 제멋대로 축소시키면서.'  

한 편 한 편이 모두, 어쩔 수 없이 다음 장을 바로 넘기지 못하게 만들었다. 금방 읽은 짧은 이야기들을 곱씹어보고 싶게 만드는 작가의 힘, 그것이 단편집을 제대로 읽게 만들었다고나 할까. 한 편은 침대에서, 한 편은 지하철에서, 또 한 편은 도서관 앞 잔디밭 벤치에 앉아서, 또 한 편은 일터에서 잠깐, 이렇게 가방에 이 작은 책을 넣어갖고 다니며 어디서나 한 편 씩 읽었다. 그러다보니 금세, 아쉽게도 끝이 나 버렸다. 심지어 가장 짧고 강렬했던 한 편은 마음이 따뜻하고 책을 좋아하는 친구들과 조용한 술집에서 만날 때 읽어주기도 했다. ^^ 

유태인인 작가가 이차대전을 겪었으니 어쩌면 그 이야기가 뻔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작가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이야기>라는, 세상에서 가장 독특하고 충격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그 결말은 그야말로 모골이 송연해진다. 인간의 심성이 들여다보여서이다.  

<고상함과 위대함>에서도, <역사의 한 페이지>에서도 전쟁의 흔적이 보인다. 그러나 그 역설, 그 풍자와 해학, 그 기막힌 발상에는 어떤 진부함의 흔적도 없다. 언제나 들어왔던 익숙한 시점을 훌쩍 넘어서서, 아무도 생각지 않았지만 과연 한 편에서는 그랬음직한 이야기들을 끄집어내는 건 로맹 가리의 큰 장점이다. 그의 역발상은 참신하여 읽는 즐거움을 주면서도 오히려 그 표면 속의 깊이를 느끼게 하니 참 매력적이다.   

<우리 고매한 선구자들에게 영광 있으라>도 놀랍다. 그건, 인류에 대한 작가의 비전인가? 특별히 책 서두에 사샤 치포츠킨의 "달빛 산책" 중에서 뽑아낸 말을 붙여둔 걸 눈여겨 볼 만하다. 

"인간이라- 우리로서는 물론 이의가 전혀 없고말고. 언젠가는 인간이 될 게 아닌가! 좀더 참고 좀더 버텨야 해. 일만 년 정도밖에 남지 않았잖아. 이 친구들아, 기다릴 줄 알아야 해. 뭐니뭐니 해도 크게 보고, 지질학적 시대 단위로 시간을 헤아리는 법을 배우고, 상상력을 가져야 한다네. 그러면 인간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지. 인간의 시대가 올 때 그 자리에 남아 있기만 하면 되는 거야. 지금으로서는 자취와 몽상과 예감 뿐이지만- 지금 인간은 그 자신의 선구자일 뿐, 우리 고매한 선구자들에게 영광 있으라!"

<벽>, <도대체 순수는 어디에>, <비둘기 시민>, <어떤 휴머니스트>, <영웅적 행위에 대해 말하자면> 들, 모두모두 짜릿한 읽는 즐거움을 주었다. 표제작인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는 정말로 덮어두고 한동안 가만 있고 싶어졌다. 그림이 그려지고 영상이 펼쳐지는 이야기이다. 그럴 시간이 필요했다. 이 강렬한 제목에 대해서도 더 알고 싶어진다. 우리말로 <새들이 페루에 가서 죽는다>가 아니라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라는 것만해도 갑자기 그것은 다른 말 색을 띈다. 프랑스 어 <Les Oiseaux Vont Mourir Au Perou> 란 과연 어떤 제목인가? 내가 공부해서 알아내기 어려우니 나중에 프랑스어를 잘 아는 사람에게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류트>도, <몰락>, <가짜>, <본능의 기쁨>, <지상의 주민들> 도 기억에 남는다. 어쨌든, 던져버릴 것 하나 없는 알짜배기 단편들의 모음집, 그 무게가 상당하다. 보고 덮고 하기를 되풀이하며 다 읽었으니 이젠? 마치 생 떽쥐뻬리의 <어린 왕자>를 스치듯 읽고 곱씹으며 읽고 하기를 거듭했듯, 이 책 또한 한동안 가방에 넣어다니며 다시금 하나씩 읽고싶다. 때로 스치듯, 때로 곱씹으며 하나씩 우려내 그 맛을 음미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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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비의 소원 ㅣ 비룡소의 그림동화 116
소피 블랙올 그림, 시린 임 브리지스 글, 이미영 옮김 / 비룡소 / 2004년 3월
평점 :
절판


전체적으로 빨간 책, '루비'라는 중국의 당찬 여자아이가 만들어내는 밝고도 길한 분위기의 그림책이다. 그냥 있을 법한 이야기로구나, 라고 생각하고 보다가 난데없이 오래된 사진이 나타나고, 그게 이 책을 지은 이의 할머니의 '살아있는 이야기'였다는 걸 들으면 더 솔깃하다. 오래된 액자 틀에 끼워진 두 개의 인물, 하나는 주인공 루비의 어린 시절을 그림작가가 그린 것이고 다른 한 쪽은 할머니가 되어 살고있는 진짜 루비의 당당한 사진이다. 그 대비가 주는 공감이 신선하고 호기심을 갖게 한다. 

캘리포니아의 골드 러쉬로 하여 부자가 되어 돌아온 중국인 할아버지, 여러 부인을 거느리고 아이들만 해도 백 명이 넘을 만큼 대가족에 큰 집의 주인이다. 너무 많아 펼쳐진 양면의 그림책에 다 들어오지도 못할만큼 많은 식구들이 중심에 할아버지를 두고 가족 사진을 찍는 것처럼 앉아있는 게 재밌다.   

루비는 백 명 중의 한 아이에 불과했고 게다가 여자 아이였지만, 그 당시 보통의 여자 아이들이 걷는 길을 걷지 않는다. 공부를 좋아했고, 남보다 더 많이 노력했고, 스스로 남자애와 여자애한테 주어지는 차별이 부당하다고 느꼈으며, 할아버지가 기회를 주자 당당하게 그걸 이야기한다. 또 그런 루비의 이야기를 내치지 않고 전격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깨인 할아버지 덕에 대학 입학을 허가받는다. 루비가 다니게 된 대학에서는 루비가 첫 여학생이었다고 한다.  

이야기는 큰 갈등도 없이 잔잔하게 흘러가고 루비의 고민을 받아들인 할아버지는 선선히 루비에게도 같은 기회를 주니까 큰 어려움이 없었을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그건 오래된 관습에 반하는 것이었으므로 루비에게도 할아버지에게도 실은 큰 고민과 많은 생각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을 게다. 조금 아쉽게, 그런 고민의 흔적이 이 그림책에서는 별로 드러나지 않는다. 루비의 행운은 그저 선구적인 할아버지 덕분이었을까?  실제의 루비는 단지, 이제 곧 자기도 결혼을 해서 이 집을 떠나게 될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다가오는 설날을 맞지 않았던가. 미래의 선택에 대한 루비의 갈등과 걱정, 그리고 자신의 희망을 위한 노력 들이 좀더 생생하게 드러났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실화를 기반으로 한 거니까 실제로 안 그랬으면 어쩔 수 없지만, 그렇다면 루비 할머니에 대해서는 존경심은 약간 감해지고 행운이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버리는 걸.

그림을 그린 소피 블랙올이라는 작가는 이 그림책으로 에즈라 잭 키츠 상을 받았다고 한다. 중국을 정확히 모르니 이 그림이 어렴풋이 중국적이라는 건 알아도 얼마나 정확하고도 섬세하게 잘 표현했는지는 나로선 잘 알 수 없다. 하지만 꽤 익숙하게 보이니, 작가가 중국을 표현해야 하는 그림책을 맡으면서 중국의 그림 양식을 여러모로 관찰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그림마다 빨간 선으로 테두리를 해둔 것이 인상적이다. 루비가 좋아한 색이 빨간 색이고, 그 빨간 색은 중국에서 길한 색이니 일부러 택한 것일까? 아니면 중국의 전통적인 그림 양식 중에 그런 게 있는 것일까? 가족 사진에서 보여주는 빨간 테두리는 아주 특징적으로 보인다. 여러 무채색 중에 루비의 빨간 옷이 확 도드라져 보인다.  

'그림책 속에 나오는 한자 붓글씨는 아마도 직접 쓴 건 아니겠지?' 이름이나 출생지나 이력으로 보아선 전혀 중국과 연관이 되지 않아 이런 상상까지 하면서 보게 되었다. ^^

표지는 아주 호감이 간다. 호기심에 가득찬 한 아이가 빨간 문을 빼족이 열고 세상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있는 그 순간이,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걸 명쾌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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