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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특별판)
로맹 가리 지음, 김남주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그토록 유명한 책이지만 이제야 읽었다. 아무래도 단편에는 길게 몰입하지 못하는 성정 탓이다. 이야기에 좀 얽혀들라치면 금세 끝인가 싶은 허무함, 그리고 잠시의 쉴 틈도 없이 종이 한 장만 넘기면 새로 이어지는 전혀 새로운 이야기, 이 친구랑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화장실 갔다 오고나니까 자리에 앉아있는 친구는 갑자기 낯선 이- 이런 느낌에 익숙해지지 못해서 단편을 잘 집어들지 않게 되었다. 어찌보면 답답한 이야기지만, 좋은 장편이 선사하는 몰입의 맛에 길들여진 탓이다.
그런데도, 깜짝 놀랄만큼 이 단편집은 멋졌다. 작가는 종횡무진 이야기의 세상을 넘나든다. 그는 저 높은 곳에서 이 세상의 여러 꼬락서니, 때론 처절하게 때론 알싸하게 돌아가고 있는 형편을 두루 살피고 있었다는 것처럼, 어느 한 순간 어느 한 군데의 이야기를 탁 잡아채서 풀어낸다. 그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이야깃거리가 되는 것들. (정말, 작품집 안에 하나둘은 끼어있음직한 허투른 이야기가 어째 하나도 없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시점도 자유로이 넘나든다.
때론 단 여섯 쪽에 불과한 문장으로 한 편의 가감없이 완벽한 이야기를 풀어내기도 한다. 그건 정말... 내겐 놀라움 그 자체였다. 짧아서가 아니라 너무 완벽하게 느껴져서다. ('킬리만자로에서는 모든 게 순조롭다') 그 이야기는 마치 한 편의 장편의 줄거리만 같다. 단 여섯 쪽에 그 모든 이야기를 풀어내다니, 그런데도 부족하거나 넘침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 짧은 글을 쓴 사람은- 어쨌든 단편의 절묘한 아름다움을 아는 사람이구나, 싶다. 그 안에 들어있는 모든 모험의 상상, 인간 세상이 품고있는 함의, 잔인하고 심술궂은 심성, 무모한 희망과 절망, 아이러니, 그리고 이야기를 완성시키는 기막힌 맞물림. 문장도 아름답다.
"아라비아 사막에서 길을 잃었어. 모래 위에 당신 이름을 쓰지. 난 사막이 좋아. 당신 이름을 쓸 자리가 많으니까. 목이 몹시 마르지만, 우리는 기운을 잃지 않고 있어. 구원은 언제나 마지막 순간에 온다는 걸 여행가들이라면 모두 알고 있거든. 습도가 높아서 당신 어머님이 고생하시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아, 평생에 한 번이라도 받아보고 싶었던 편지가 아닌가.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한 인간의 시적인 상상에서 비롯된 향긋한 거짓말이었다. 그저 거짓말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이 자신의 전 생을 걸고 만들어낸 역작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숭고함마저 느껴지는 거짓말이 주는 감동도 잠시, 일반의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심술궂고 무지, 단순한 일상은 쉽게 거기에 재를 뿌린다. 작의 말마따나 '그런 식으로 영원을 제멋대로 축소시키면서.'
한 편 한 편이 모두, 어쩔 수 없이 다음 장을 바로 넘기지 못하게 만들었다. 금방 읽은 짧은 이야기들을 곱씹어보고 싶게 만드는 작가의 힘, 그것이 단편집을 제대로 읽게 만들었다고나 할까. 한 편은 침대에서, 한 편은 지하철에서, 또 한 편은 도서관 앞 잔디밭 벤치에 앉아서, 또 한 편은 일터에서 잠깐, 이렇게 가방에 이 작은 책을 넣어갖고 다니며 어디서나 한 편 씩 읽었다. 그러다보니 금세, 아쉽게도 끝이 나 버렸다. 심지어 가장 짧고 강렬했던 한 편은 마음이 따뜻하고 책을 좋아하는 친구들과 조용한 술집에서 만날 때 읽어주기도 했다. ^^
유태인인 작가가 이차대전을 겪었으니 어쩌면 그 이야기가 뻔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작가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이야기>라는, 세상에서 가장 독특하고 충격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그 결말은 그야말로 모골이 송연해진다. 인간의 심성이 들여다보여서이다.
<고상함과 위대함>에서도, <역사의 한 페이지>에서도 전쟁의 흔적이 보인다. 그러나 그 역설, 그 풍자와 해학, 그 기막힌 발상에는 어떤 진부함의 흔적도 없다. 언제나 들어왔던 익숙한 시점을 훌쩍 넘어서서, 아무도 생각지 않았지만 과연 한 편에서는 그랬음직한 이야기들을 끄집어내는 건 로맹 가리의 큰 장점이다. 그의 역발상은 참신하여 읽는 즐거움을 주면서도 오히려 그 표면 속의 깊이를 느끼게 하니 참 매력적이다.
<우리 고매한 선구자들에게 영광 있으라>도 놀랍다. 그건, 인류에 대한 작가의 비전인가? 특별히 책 서두에 사샤 치포츠킨의 "달빛 산책" 중에서 뽑아낸 말을 붙여둔 걸 눈여겨 볼 만하다.
"인간이라- 우리로서는 물론 이의가 전혀 없고말고. 언젠가는 인간이 될 게 아닌가! 좀더 참고 좀더 버텨야 해. 일만 년 정도밖에 남지 않았잖아. 이 친구들아, 기다릴 줄 알아야 해. 뭐니뭐니 해도 크게 보고, 지질학적 시대 단위로 시간을 헤아리는 법을 배우고, 상상력을 가져야 한다네. 그러면 인간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지. 인간의 시대가 올 때 그 자리에 남아 있기만 하면 되는 거야. 지금으로서는 자취와 몽상과 예감 뿐이지만- 지금 인간은 그 자신의 선구자일 뿐, 우리 고매한 선구자들에게 영광 있으라!"
<벽>, <도대체 순수는 어디에>, <비둘기 시민>, <어떤 휴머니스트>, <영웅적 행위에 대해 말하자면> 들, 모두모두 짜릿한 읽는 즐거움을 주었다. 표제작인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는 정말로 덮어두고 한동안 가만 있고 싶어졌다. 그림이 그려지고 영상이 펼쳐지는 이야기이다. 그럴 시간이 필요했다. 이 강렬한 제목에 대해서도 더 알고 싶어진다. 우리말로 <새들이 페루에 가서 죽는다>가 아니라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라는 것만해도 갑자기 그것은 다른 말 색을 띈다. 프랑스 어 <Les Oiseaux Vont Mourir Au Perou> 란 과연 어떤 제목인가? 내가 공부해서 알아내기 어려우니 나중에 프랑스어를 잘 아는 사람에게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류트>도, <몰락>, <가짜>, <본능의 기쁨>, <지상의 주민들> 도 기억에 남는다. 어쨌든, 던져버릴 것 하나 없는 알짜배기 단편들의 모음집, 그 무게가 상당하다. 보고 덮고 하기를 되풀이하며 다 읽었으니 이젠? 마치 생 떽쥐뻬리의 <어린 왕자>를 스치듯 읽고 곱씹으며 읽고 하기를 거듭했듯, 이 책 또한 한동안 가방에 넣어다니며 다시금 하나씩 읽고싶다. 때로 스치듯, 때로 곱씹으며 하나씩 우려내 그 맛을 음미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