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씩 행복해지는 이야기 - 수의사 헤리엇이 만난 사람과 동물 이야기
제임스 헤리엇 지음, 김석희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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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을 몇년만에 다시 꺼내서 읽으니 역시나 스멀스멀, 행복한 느낌이 밀려온다. 최근 들어 몇몇 일로 한참 우울했던지라 무엇보다 그 행복감이 소중하고 반가워 한꼭지씩 읽던 것을 내쳐 다 읽고 만다. 그 뿐일까? 그 행복감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또 한권을 찾았다. 내게 수의사들이 뭐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정말로 세세하게 보여준 처음이자 마지막인 사람, 헤리엇의 이야기.  그 첫번째, <수의사 헤리옽, 크고 작은 모든 것들, 전덕애 옮김, 거창고등학교출판부 펴냄, 1986 >, 이 책을 통해 헤리엇을 처음 만났다.

꼭 거짓말 같지만 내게 너무도 우연히 다가와 지금까지도 즐겨 읽는, 보석같은 나의 소장품인 특별한 책이 그것이다. 지금은 꽤 많은 책들이 번역 출판되어 헤리엇은 이미 유명한 수의사가 되었지만, 내가 그를 처음 알았던 1990년에는 글쎄, 이곳 거창이라는 조그만 시골 말고는 그 책은 그리 알려지지 않았을 듯하다. 지금 생각해도 그건 참 신기한 일이다. 89년에 거창으로 살러 왔으니, 내겐 아직 한참 생소한 곳이었는데, 아는 분이 그 책을 소개해주셨다. 두 권으로 한 셋트였는데, 상권과 하권이 모두 300쪽이 넘었으니 적은 분량은 아니었다. 거창고등학교 츨판부에서 펴낸 그 책, 몇 권이나 찍어냈을까? 거고에서 영어선생님으로 일한 적이 있는 전덕애 선생님이 번역을 하셨기에 출판될 수 있었던 책이었다. 미국에서 공부하다가 읽게 된 책을 귀국해서 일하는 중에 틈틈이 번역하신 것. 그때 국민학교 5학년이었다던 아들과 함께 읽으며 얼마나 웃었던지 몰랐다는 책, 그러나 웃음 뿐만이 아니라 너무나 따뜻한 인간애와 용기를 함께 선사해주었다고 하던 책이다. 그러니 번역해서 다른 이들에게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연유로 이 책이, 그렇게 작은 시골 한 귀퉁이에서 다른 어디보다도 빨리 소개될 수 있었던 것인데, 내가 그 책을 읽게 되었다는 것이 어찌나 귀한 우연이라고 생각되는지 나는 지금도 내게 그 책을 소개해주신 분께 감사하는 마음이 든다. 그때 그책을 읽으며, 어떻게 이렇게나 재미있으며, 이렇게나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책이 있을까 신기하게 생각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때도 한번 읽고 만 것이 아니라, 혹은 거실 한 귀퉁이, 혹은 식탁 위, 혹은 화장실 안에 두고 늘 손에 잡았던 것을 잊을 수 없다. 어디를 펼쳐도 좋았다. 혼자 낄낄거리며 웃다가보면  어느새 감동 먹고 숙연해지기도 하고... 하여간 좋은 책이란 건 이런 거구나, 하고 나혼자 이 책에 온갖 상을 수여하기도 했다. 그때야 인터넷이란 게 세상에 널린 것도 아니어서 그 책 말고는 어떤 정보도 얻지 못했으니, 내게 <수의사 헤리옽>이라는 책은 그저 어느날 뚝 떨어진 행운이라고밖에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게 내 손을 거쳐 다른 도시에 살고 있던 친구와 후배들의 손에 들어가 한 스무 남짓 횟수를 돌더니 책이 닳아서 내 손에 들어왔다. 빌린 책인데 돌려드리기 민망할 정도가 되어서... 물어물어 사러갔다. 거창고등학교 앞 서점에서 그 책을 팔고 있었다. 한 권에 3000원.. (참 옛날 이야기다 ^^) 두권 한 셋트를 새로 사서 얼른 돌려드리고, 그 낡은 책은 이제 함부로 돌리지 않는 내 귀중품이 되어 이날 이때까지 이어져왔다. 지금 다시 봐도 전덕애 선생님의 번역은 정말 재미있다. 매끈함과는 거리가 있지만, 정말 정감이 넘치는 번역이다. 딱 책의 모양새에 어울리고, 출판된 내역과도 어울린다. 여러가지가 종합적으로 어우러져, 이 책은 나름의 가치를 물씬 풍긴다. (완전, 포쓰다!) 물론 그 책을 탐독했던 친구와 후배들의 반응은 열광적이었다... 그들에게도 난데없는 행운이 뚝 떨어졌던 셈이다. 

그 이후로도 그저 수의사 헤리엇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질 때, 요크셔 지방의 동물들과 사람들의 어울려사는 이야기에 그저 귀기울이고 싶어질 때, 혹은 그냥 킬킬 웃고 싶어질 때면 그 책을 펴들었다. 한 토막을 읽고 싶었을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잡으면 언제나 앞뒤로 오며가며 다 읽어버리고 하권까지 찾게 되었다. 그래서 물론, 지금까지 열 번도 훨 넘게 읽어왔다. 

오래 살다보니 드디어 국내 유명 출판사에서 정식으로 번역 출판이 되고, 드디어 수의사 헤리엇이라는 사람에 대해서도 대략이나마 알게 되었다. 내가 처음 읽었던 책이 네 권 연작 중의 첫 번째 책이었다는 것도, 그 이후로도 몇 권의 책으로 요크셔 지방 이야기가 이어져 나왔다는 것도. 어쨌거나 수의사 헤리엇 선생님은 내게는 한점 등불같은 분으로 남아있다. 그의 삶이 담긴 이야기는 언제나 흥미진진하고 나를 사로잡는다. 그런 이가 실제로 존재했다는 것이 그저 내 마음에 훈기를 준다. 그의 삶의 방식, 인간과 동물과 자연에 대한 사랑, 그의 용기, 게다가 그의 넘치는 위트! 온세계 사람들에게 이미 고전이 된 이야기들이지만, 언제나 따뜻함과 즐거움을 선사한다는 것은 얼마나 기분 좋은 이야기인가. 그걸 생각만 해도 내 마음 속에서 헤리엇의 작은 등불이 깜빡거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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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이 2009-10-06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귀한 책과의 인연이네요. 정말 이런 조우는 잊지못하죠.. 사람과의 어떤 우연이나 인연도 반갑지만 어느날 어찌하여 들어온 내 손의 책 한권 그것도 아주 향기롭고 좋은책 ^^
그나저나 김석희 번역본 말고 전덕애 선생님 버젼 읽고 싶어지네요 ^^ 수의사 헤리엇 ..정말 소설을 쓰래도 이렇게 재밋고 감동적으로 쓸수잇을까요..무엇보다그 바탕을 흐르는 따뜻한 인간애? 동물애? ㅎㅎ 참 좋은 책이에요. 근데 제본등 모냥새가 책에 못미친다는거~~ 제 생각.

2009-10-07 18: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무료배송] 안데스 텀블러 선물세트 A(안데스 선물 텀블러+안데스의 선물 싱글백+커피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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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선 반가운 공정무역 커피, 

일회용 종이컵을 조금이라도 덜 쓰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텀블러, 

유기농 커피와 커피쿠키,  

그것들을 모두 담아놓은 종이상자도 예뻐서 허투루 버리지않게 되겠습니다.

주고받는 사람에게 모두 기분좋은 선물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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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son's Zinnia (Paperback)
Lobel, Anita / Greenwillow / 199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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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에게 사랑을 담아.

A.

B.

C.

D.

E.

F.

N.

V.

Z.

나는 꽃을 그리는 걸 좋아해요....
1989, 아니타 로벨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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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2009-02-23 0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인가요. 참 근사하네요.
 
Alison's Zinnia (Paperback)
Lobel, Anita / Greenwillow / 199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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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언제까지나 한국어로는 번역 출판되기 어려울듯한 그림책. 그러니까 그냥 원래 이 책을 만들 때 사용한 언어인 영어로만 가능한 책. 그러나 전혀 아쉬움이 없다.  

눈을 홀리듯 아름다운 그림으로 이 그림책은 빛을 발하고, 그것으로도 어쩌면 충분히 아름다운 한 권의 책을 즐길 수 있는 셈이다. 눈이 시리게 새파란 화분에 담긴 스물여섯 가지의 꽃들이 풍성하게 아름다운 표지에서부터, 책의 페이지를 한 쪽씩 넘기면 꽃의 향연이 시작된다. 아니타 로벨의 꽃그림은 사실적인데도 그 풍부한 색감이나 독특한 개성으로 하여 아주 회화적이다. 그 꽃들을 어디에 둘 것인지도 꼼꼼하게 계산되어서 커다랗게 클로즈엎된 꽃들은 적절한 배경 앞에서 자연스럽게 살아나 자신의 모습을 최대한 아름답게 뽐내고 있다.  

그 꽃들은 A에서 시작해서 B, C, D... 이렇게 한 면 씩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다가 결국은 .. X, Y, Z 로 끝난다. 그러니까 이 꽃들은 알파벳 머릿글자와 함께 존재한다. Amaryllis, Begonia, Chrysanthemun, Daffodil...    Violet, Water lily, Xanthium, Yucca, Zinnia.    

화면 가득 커다랗게 향연을 벌이는 이들 꽃들을 보는 즐거움은 상상 이상이다. 나는 이 책을 수시로 면을 바꿔가며 벽에 붙은 선반에 세워둔다. 그것은 마치 작은 화분을 둔 것과 같다. 어느날은 제비꽃이 거실 선반에 놓이고 어느 날에는 노란 수선화가 봄을 내뿜는다. 장미꽃, 작약, 목련, 백합과 같이 큼지막한 꽃들로부터 패랭이꽃 물망초, 제비꽃처럼 자그마한 꽃송이 더미들까지 사시사철 한 권의 책이 빚어내는 풍요로움은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그렇게 그저, 스물 여섯 권의 꽃을 그린, 내가 좋아하는 어느 화가의 그림-책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흡족한.  

이 책에서 본 물망초 꽃을 실제로 꽃집에서 화분으로 발견했을 때의 놀라움! 물망초는 유명한 꽃이지만, 어쩌면 이름만으로 유명한 꽃인 듯하다. Forget-me-not, 이것이 그 꽃의 이름이다. 한자로 물망초-라 하면 '잊지말라는 풀'인 셈이다. 그 꽃은 다섯 꽃잎이 새파랗고 속이 노란, 동글동글 귀엽고 청아한 꽃이다. 우리나라의 들판에 흔히 자라는 꽃마리를 닮았다. 마리, 혹은 꽃마리와는 역시나 친척이어서 과가 같은 지치과이다. 이런 식으로 한 권의 그림책의 영향을 받기도 한다. 나는 몇 년 째 아이들과 함께 수시로 이 그림책을 들여다보는데, 그 아름다움과 이름을 함께 즐긴다. 요즘 봄이 되면 꽃집에 많이 나오는 노랗고 안에 나팔이 달린 수선화는 Daffodil, 속에 빨간 작은 동그라미가 있으면서 나팔이 없는 하얀 색 수선화는 Narcissus 이다. Violet 하면 꽃잎이 약간 크고 색이 다채로운 서양의 바이올렛이 떠오르는데, 의외로 이 책에 있는 Violet은 우리나라 들판과 아파트 화단에도 봄이면 조롱조롱 꽃을 피우는 바로 그 보라색 제비꽃이어서 다정하게 느껴진다.

이렇게 꽃만 즐겨도 좋건만, 덤이 또 있으니 그 재미도 즐겨보는 게 좋겠다. 영어 말놀이가 한 쪽에 한 줄씩 이어지는데, 듣고보면 신기하고 재미있다. 소리내서 읽어야 재미있는 꼬리따기 놀이다. 아주 치밀하게 짜여져있어서 읽다보면 작가가 그걸 만들어내느라 고심하는 모습이 떠오르는 듯하여 내게도 슬그머니 미소가 지어진다. 하나의 문장이 모두 일관되게 같은 형식을 따른다. 말하자면  

A-a-A-B,  B-b-B-C,  C-c-C-D,이렇게 시작하여  ... Y-y-Y-Z,  Z-z-Z-A. 이렇게 마무리가 되는 식이다. 정확하게 몇을 소개하면 

Alison acquired an Amaryllis for Beryl. 

Beryl bought a Begonia for Crystal. 

Crystal cut a Chrysanthemum for Dawn. 

... 

Yolanda yanked a Yuca for Zena. 

Zena zeroed in on a Zinnia for Alison. 

여기 나오는 Alison, Beryl, Crystal, Yolanda, Zena 들은 아래 작고 긴 네모칸의 그림에 등장하는 아이들의 이름이다. 그 아이들이 다음의 아이들을 위해 꽃과 함께 뭔가를 '하고' 있는 그림이 그려져있다. 위의 동사들이 그림으로 표현되는 셈이다. 그리고 Amaryllis, Begonia 들은 물론 꽃의 이름들인데 마지막 Zinnia 꽃으로 끝난다. 마지막 Z 문장에 Zena가 Alison을 위해 Zinnia 꽃을 준비하는데, 그게 이 책의 제목이다. <Alison's Zinnia>. 이와 같이 잘 준비된 말의 향연 또한, 즐기기에 얼마나 좋은것인지! 얼마나 재미있는 발상인가? 이런 생각을 해낸 데다가 그림까지 이렇게 잘 그리는 화가라니.( 이 작업을 하는 일이 어렵기만 했으랴, 또한 얼마나 즐거웠으리!) 그의 깜찍한 발상과 공들인 그림으로 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 어른과 아이들- 이 한껏 즐거웠을까를 생각하면 무작정 기분이 좋아진다.  

내 주변에 이 책을 아는 이들이 이미 꽤 있다. 우연히 수 년 전에 내 손에 들어온 이래 더이상 구하지 못해 내 소중한 책이 여러 지인들 사이에 (위험하게) 돌다가, 얼마전 이곳에서 이 책을 구할 수 있다는 걸 알고 너무 기뻐서 주문한 새 책을 그림그리는 친구에게 주었다. 주는 나나 받는 그이나 어찌나 기뻤던지, 마치 책 한 권으로 행복을 나누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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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2009-02-23 0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험하게 '에 괄호를 보고 씨익 웃네요. 그렇지요. 구하기 힘든 책을 빌려주는 것은 위험한 일이에요. 제 주변에 이 책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듯한테 아침에 월척한 기분으로 바로 구매하러 갑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sprout 2009-02-24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란님, 잘 하셨어요, 제 생각에도 이 책은 월척이에요 ^^ 리뷰 보고 공감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들꽃 아이 길벗어린이 작가앨범 10
김동성 그림, 임길택 글 / 길벗어린이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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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먼저,

깜짝 놀랐다. 책을 보는데 임길택 선생님이 나와서이다.

예전에 창비에서 출판된 <산골마을 아이들>이란 책에서 먼저 읽었던 짧은 이야기였다. 군대도 가기 전에 첫 발령을 받았던 곳, 강원도 산골의 자그마한 학교에서 겪은 일이다. 물론 임길택선생님이 쓴 '동화'이지만, 그분이 쓴 동화의 대부분이 실은 실제로 그분이 겪은 일이었다는 이야기를 다른 여러 책에서도 본 적이 있는지라 자연스럽게 그렇게 읽혔다. 이 책에 나오는 '보선이'는 이름도 실제 그대로라지 않는가. 그러니 거기 나오는 '김선생님'이 내게는 그저 '임선생님'으로 읽혔다. 그런데 그 책 속에, 젊은 임선생님이 그대로 서 있었다. 정말 그 얼굴을 하고... 놀랍고 반갑기도 하고, 아쉽게 떠난 분이라 공연히 좀 서럽기도 했다.

내가 사는 곳은 경남 거창인데, 이곳에서 동화읽는어른모임을 하다가 임선생님을 알게 되었고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때 이미 돌아가신 뒤였다.. 생전에는 모임과 상관없이 두어번 뵈었을 뿐이다) 선생님이 마지막으로 재직하셨던 곳이 거창에 있는 초등학교였으니 인연도 깊은 터여서 각별한 마음으로 선생님의 책들을 보아왔다. 수 년 전부터 조촐하나마 거창에서 '임길택 문학의 날'을 기일 전후로 맞춰 지내게 되면서 선생님의 지난 모습들을 더듬어보게 되었다. 예전 모습이 그대로 담긴 사진들을 여럿 보다가 보니, 어느새 익숙해진 젊은날의 모습이 오늘 펼쳐든 이 책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어 깜짝 놀랐던 것이다. 울컥 반가운 마음이었으나 역시나 부재로 인한 아쉬움이 함께 밀려온다.

길벗어린이의 이 '작가앨범' 시리즈는 독특하다. 4~50 여남은 쪽에 처음부터 끝까지 그림과 글이 함께 주인으로 가지만, 그림책이라 할만한 책들은 아니다. 주로 초등학교 중, 고학년은 되어야 읽기 편한 글들이다. 대체로 애초에 이렇게 그림과 함께가 아니라 글만으로 먼저 발표되었던 이야기들을 찾아 그림과 함께 오롯이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내는 듯하다. 이렇게 했을 때, 자칫 동화집 속의 이야기 한 편으로 묻혀버릴 수 있었던 이야기가 자못 아름다운 이야기책 하나로 세상에 새로 태어나는 것이니, 그리 눈밝지 않은 독자들에게는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한다. (물론 더러는 이미 너무나 널리 읽힌 이야기가 상상의 너른 들을 벗어나 그만 작가의 그림 속에 갇혀버리는 아쉬운 경우도 있었다.)

임길택 선생님의 이야기들은 한결같다. 어느 것이나 아이들과 함께 했던 교육 현장의 이야기들이고, 또 어디에서나 아이들의 마음으로 들어가고싶어했던 한 교사의 애틋함이 느껴진다는 게 그렇다. <들꽃 아이>도 어찌나 진솔한지, 보는 내내 마음이 따라간다. 애틋하고도 청량하다. 이제 갓 교대를 졸업해 아직 군대도 다녀오지 않은 젊은 교사의 첫 부임지가 산골 속에 묻혀있는 아담한 학교다. 6학년을 맡아 마음을 바짝 죄며 학교생활을 하던 중, 봄날 어느 때부터인가 교실에 꽃병 가득 산꽃, 들꽃들이 꽂히기 시작한다. 아이들이 모두 그 꽃을 '보선이'가 꺾어 온 거라 일러준다. 보선이는 지각이 잦아 선생님이 먼저 익힌 아이였다. 그 아이의 생활기록부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공부는 뒤떨어지나 정직하고 맡은 일을 열심히 함.'

선생님은 6학년을 맡아 더 많은 아이들을 중학교에 보내야하던 때였지만, 막상 아이들에게 생활기록부를 보여주며 하는 이야기는 "저는 여러분이 공부를 잘 하여 수나 우를 올리는 것도 좋지만, '어려운 친구를 도울 줄 알고 맡은 일을 끝까지 잘 해냅니다'와 같은 행동도 함께 오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와 같은 이야기들이다. 그런 선생님과 소통할 수 있는 아이들은 행복하지 않았을까. 보선이는 꽃이 채 시들기도 전에 새로운 꽃으로 바꿔놓는 일을 한 해 동안 그치지 않는다. (!!) 아이들이 더러 그 꽃의 이름을 묻고 선생님이 그 많이 보기만 하였던 꽃의 이름을 도대체 모른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다가 드디어 식물도감을 사서 아이들과 함께 풀꽃들의 이름을 함께 불러주게 된다.

이 책을 보다가 나는 잠시 멈추고 생각해본다. 봄이 가고 여름이 다 가도록 며칠마다 새로운 꽃을 꽃병 가득 꽂아두는 보선이, 그 꽃을 보다가 이름이 궁금하게 되어 선생님께 이름을 묻는 반 동무들, 그 이름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어 식물도감을 찾아보는 선생님. 그들이 이루고 있는 교실의 온기를. 내가 도시에서 초등학교를 보내고 있던 70년대를 함께 보냈던 그 아이들 그 선생님이, 강원도 산골에서 그런 봄과 여름을 보내고 있었다는 생각을 하면 어쩐지 눈시울이 다 뜨거워지는 것이다. 그들은 얼마나 소중한 한때를 보내고 있었던 것일까... 아이들은 선생님과 함께 동무가 꺾어온 꽃을 보며 이름을 불러준다. 붓꽃, 원추리, 참나리, 패랭이꽃... 어느날엔가는 식물도감을 찾다가 새로 꺾어온 그 꽃이 '개불알꽃'이라는 것을 알고는 교실이 떠나가도록 함께 웃는다. 한 아이, 들꽃 아이 보선이가 동무들과 선생님을 이런 세계로 초대하자 그들이 그 초대를 기쁘게 받아들여 함께 즐기고 있는 것이다. 색바랜 사진과 같은 한 장의 그림에서 선생님과 아이들이 식물도감을 찾으며 함께 웃음보를 터뜨리고 있다. 그 순한 웃음의 물결에 내 마음이 동참한다.

보선이는 어떻게 그렇게 꽃들을 꺾어온 것일까? 선생님은 어느날 보선이네 집까지 가보기로 한다. 보선이가 손전등을 가지고 학교에 다닌다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던 것이다. 보선이에게 '집에 가마', 고 일러두고 더위가 한풀 꺾이기를 기다려 자전거를 빌려타고 보선이의 집을 향해 나아간다. 길을 가다 냇물이 나오면 보선이가 학교를 오가며 저 물을 어쨌으리, 하며 그 길을 간다. 더이상 자전거가 나아갈 수 없는 길이 나와 세워놓고 혼자 산길을 간다. 빽빽한 숲속, 보선이가 눈길 주고 지나갔을 그 꽃들에 눈길 주며 푸르고도 푸른 그 길을 지나간다. 그러나 어느 새 깊은 숲속은 조금씩 어두워지고, 갈림길에 길을 잘못들고, 그만 깜깜해져버리니 손전등 하나 없이 가는 길이 무섭기만 하다. 하늘엔 별이 하나둘 돋아난다. 그제야 선생님은 보선이가 '이토록 먼 길을 손전등을 들고 다녔구나', 하고 이해하게 된다. 그 보선이를 생각하니 무섭던 길에 갑자기 힘이 난다. 보선이가 집에서 얼마나 기다릴까 싶어서이다. 그제야 비로소 선생님은 달빛에 드러난 숲의 모습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있고, 잊었던 숲 속의 냄새를 다시 맡을 수가 있다. 편안한 마음으로 두 고개째 등성이를 넘어서야 저 아래 골짜기에서 반짝이는 불빛을 찾아낸 선생님은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한달음에 불빛을 좇아 내달려 마을에 다다르니 이미 열 시가 넘어있고, 다섯 집 뿐인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불빛 아래 기다리고 있었다.... 30년 전 학교가 생긴 이래 마을을 찾아 준 이로 선생님이 처음이라며 모두모두 감자떡 메밀묵 옥수수 들과 같이 귀한 음식을 장만해놓고 기다리고 있던 거였다. 그날 마치 잔치같은 귀한 대접을 받고 별빛 아래 잠을 이룰 수 없었던 선생님..

그런 이야기들이 마치 한숨같이 펼쳐진다. (아니 한숨이라니... 그것은 공연히 안타까움에 젖은 내 정서고, 실은 산길 걸으며 혼자 부르는 노래처럼 펼쳐진다, 고 해야할 지도 모르겠다) 겨울이 되어 눈보라가 심해지자 보선이는 그예 결석을 하게 된다. 졸업하는 날까지 보선이는 학교에 오지 못한다. 김선생님은 3월이 되면 군인이 되어 이곳을 떠나야하고, 겨울 교실에는 늦가을 보선이가 꺾어왔던 노박덩굴이 아직도 노랗게 벽에 걸려있는데. 창밖엔 어젯밤부터 내리던 눈이 그칠 줄 모르고 내리는데 선생님은 그 눈을 바라보며 보선이 생각을 한다. 그렇게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젊은 선생님의 모습은, 그대로 임길택 선생님의 모습이다.

글과 그림, 어우러져 한 권의 책이 반짝인다.

김동성 작가의 그림이 빼어나다. 언제나 내가 기대할 수 있는 그 이상의 그림을 선물처럼 보여준 작가라 한껏 미더운 터이지만, 날이 갈수록 그 깊이를 더해가는 게 놀랍다. <삼촌과 함께 자전거 여행>에서도, <메아리>에서도 <엄마 마중>에서도 그는 놀랄만큼 아름다운 그림의 세계로 나를 끌어들였다. 이번에도 이 한권의 책에 그림을 어우러지게 하기 위해 작가가 들인 공은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빛이 난다. 그가 잡아낸 한 순간은 산골학교의 교무실에서도, 텅빈 교실에서도, 식물도감을 펼쳐든 그 한순간에도 너무나 적절한 아름다움으로 빛난다. 꽃 무더기 속에 웃고 있는 보선이나 숲 속 길을 걸어가는 선생님, 어두워지는 숲의 모습, 저 멀리 반짝이는 불빛어린 동네의 모습이나 눈 내리는 창밖을 마주 한 채 서있는 선생님을 담은 텅빈 교실의 모습은 뭐라 더이상 말을 붙일 수도 없을 만큼 아름답고 생생하다. 그저 가만 보고 있으면 내가 그 세월 속으로, 그 숲의 공간 속으로 뛰어들어가버리게 되는 농밀한 그림들이다. 한 부분도 소홀함이 없으니 어느 장을 펼쳐도 그러하다.  김동성 작가가 잡아내는 한 순간은 그토록이나 내게 보는 즐거움을 주었다.

임길택과 김동성과 길벗어린이 출판사. 그들의 궁합이 훈훈하고 오달지다.

갓 출판되어 따끈한 책을 내게 선물한 내 친구에게 무한 감사. 이제 내 손으로 한 권을 더 신청하여 들고 갈 곳이 생겼다. 지난 해 거창 가북면 두곡산방에 해광스님이 나무를 깎아 만들어 세운 임길택 시비, 그 앞에 이 책을 바치고 싶다. 당장이라도 이 아름다운 책 한 권을 그 어울리는 곳에 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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