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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 아이 ㅣ 길벗어린이 작가앨범 10
김동성 그림, 임길택 글 / 길벗어린이 / 2008년 7월
평점 :
아, 먼저,
깜짝 놀랐다. 책을 보는데 임길택 선생님이 나와서이다.
예전에 창비에서 출판된 <산골마을 아이들>이란 책에서 먼저 읽었던 짧은 이야기였다. 군대도 가기 전에 첫 발령을 받았던 곳, 강원도 산골의 자그마한 학교에서 겪은 일이다. 물론 임길택선생님이 쓴 '동화'이지만, 그분이 쓴 동화의 대부분이 실은 실제로 그분이 겪은 일이었다는 이야기를 다른 여러 책에서도 본 적이 있는지라 자연스럽게 그렇게 읽혔다. 이 책에 나오는 '보선이'는 이름도 실제 그대로라지 않는가. 그러니 거기 나오는 '김선생님'이 내게는 그저 '임선생님'으로 읽혔다. 그런데 그 책 속에, 젊은 임선생님이 그대로 서 있었다. 정말 그 얼굴을 하고... 놀랍고 반갑기도 하고, 아쉽게 떠난 분이라 공연히 좀 서럽기도 했다.
내가 사는 곳은 경남 거창인데, 이곳에서 동화읽는어른모임을 하다가 임선생님을 알게 되었고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때 이미 돌아가신 뒤였다.. 생전에는 모임과 상관없이 두어번 뵈었을 뿐이다) 선생님이 마지막으로 재직하셨던 곳이 거창에 있는 초등학교였으니 인연도 깊은 터여서 각별한 마음으로 선생님의 책들을 보아왔다. 수 년 전부터 조촐하나마 거창에서 '임길택 문학의 날'을 기일 전후로 맞춰 지내게 되면서 선생님의 지난 모습들을 더듬어보게 되었다. 예전 모습이 그대로 담긴 사진들을 여럿 보다가 보니, 어느새 익숙해진 젊은날의 모습이 오늘 펼쳐든 이 책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어 깜짝 놀랐던 것이다. 울컥 반가운 마음이었으나 역시나 부재로 인한 아쉬움이 함께 밀려온다.
길벗어린이의 이 '작가앨범' 시리즈는 독특하다. 4~50 여남은 쪽에 처음부터 끝까지 그림과 글이 함께 주인으로 가지만, 그림책이라 할만한 책들은 아니다. 주로 초등학교 중, 고학년은 되어야 읽기 편한 글들이다. 대체로 애초에 이렇게 그림과 함께가 아니라 글만으로 먼저 발표되었던 이야기들을 찾아 그림과 함께 오롯이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내는 듯하다. 이렇게 했을 때, 자칫 동화집 속의 이야기 한 편으로 묻혀버릴 수 있었던 이야기가 자못 아름다운 이야기책 하나로 세상에 새로 태어나는 것이니, 그리 눈밝지 않은 독자들에게는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한다. (물론 더러는 이미 너무나 널리 읽힌 이야기가 상상의 너른 들을 벗어나 그만 작가의 그림 속에 갇혀버리는 아쉬운 경우도 있었다.)
임길택 선생님의 이야기들은 한결같다. 어느 것이나 아이들과 함께 했던 교육 현장의 이야기들이고, 또 어디에서나 아이들의 마음으로 들어가고싶어했던 한 교사의 애틋함이 느껴진다는 게 그렇다. <들꽃 아이>도 어찌나 진솔한지, 보는 내내 마음이 따라간다. 애틋하고도 청량하다. 이제 갓 교대를 졸업해 아직 군대도 다녀오지 않은 젊은 교사의 첫 부임지가 산골 속에 묻혀있는 아담한 학교다. 6학년을 맡아 마음을 바짝 죄며 학교생활을 하던 중, 봄날 어느 때부터인가 교실에 꽃병 가득 산꽃, 들꽃들이 꽂히기 시작한다. 아이들이 모두 그 꽃을 '보선이'가 꺾어 온 거라 일러준다. 보선이는 지각이 잦아 선생님이 먼저 익힌 아이였다. 그 아이의 생활기록부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공부는 뒤떨어지나 정직하고 맡은 일을 열심히 함.'
선생님은 6학년을 맡아 더 많은 아이들을 중학교에 보내야하던 때였지만, 막상 아이들에게 생활기록부를 보여주며 하는 이야기는 "저는 여러분이 공부를 잘 하여 수나 우를 올리는 것도 좋지만, '어려운 친구를 도울 줄 알고 맡은 일을 끝까지 잘 해냅니다'와 같은 행동도 함께 오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와 같은 이야기들이다. 그런 선생님과 소통할 수 있는 아이들은 행복하지 않았을까. 보선이는 꽃이 채 시들기도 전에 새로운 꽃으로 바꿔놓는 일을 한 해 동안 그치지 않는다. (!!) 아이들이 더러 그 꽃의 이름을 묻고 선생님이 그 많이 보기만 하였던 꽃의 이름을 도대체 모른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다가 드디어 식물도감을 사서 아이들과 함께 풀꽃들의 이름을 함께 불러주게 된다.
이 책을 보다가 나는 잠시 멈추고 생각해본다. 봄이 가고 여름이 다 가도록 며칠마다 새로운 꽃을 꽃병 가득 꽂아두는 보선이, 그 꽃을 보다가 이름이 궁금하게 되어 선생님께 이름을 묻는 반 동무들, 그 이름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어 식물도감을 찾아보는 선생님. 그들이 이루고 있는 교실의 온기를. 내가 도시에서 초등학교를 보내고 있던 70년대를 함께 보냈던 그 아이들 그 선생님이, 강원도 산골에서 그런 봄과 여름을 보내고 있었다는 생각을 하면 어쩐지 눈시울이 다 뜨거워지는 것이다. 그들은 얼마나 소중한 한때를 보내고 있었던 것일까... 아이들은 선생님과 함께 동무가 꺾어온 꽃을 보며 이름을 불러준다. 붓꽃, 원추리, 참나리, 패랭이꽃... 어느날엔가는 식물도감을 찾다가 새로 꺾어온 그 꽃이 '개불알꽃'이라는 것을 알고는 교실이 떠나가도록 함께 웃는다. 한 아이, 들꽃 아이 보선이가 동무들과 선생님을 이런 세계로 초대하자 그들이 그 초대를 기쁘게 받아들여 함께 즐기고 있는 것이다. 색바랜 사진과 같은 한 장의 그림에서 선생님과 아이들이 식물도감을 찾으며 함께 웃음보를 터뜨리고 있다. 그 순한 웃음의 물결에 내 마음이 동참한다.
보선이는 어떻게 그렇게 꽃들을 꺾어온 것일까? 선생님은 어느날 보선이네 집까지 가보기로 한다. 보선이가 손전등을 가지고 학교에 다닌다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던 것이다. 보선이에게 '집에 가마', 고 일러두고 더위가 한풀 꺾이기를 기다려 자전거를 빌려타고 보선이의 집을 향해 나아간다. 길을 가다 냇물이 나오면 보선이가 학교를 오가며 저 물을 어쨌으리, 하며 그 길을 간다. 더이상 자전거가 나아갈 수 없는 길이 나와 세워놓고 혼자 산길을 간다. 빽빽한 숲속, 보선이가 눈길 주고 지나갔을 그 꽃들에 눈길 주며 푸르고도 푸른 그 길을 지나간다. 그러나 어느 새 깊은 숲속은 조금씩 어두워지고, 갈림길에 길을 잘못들고, 그만 깜깜해져버리니 손전등 하나 없이 가는 길이 무섭기만 하다. 하늘엔 별이 하나둘 돋아난다. 그제야 선생님은 보선이가 '이토록 먼 길을 손전등을 들고 다녔구나', 하고 이해하게 된다. 그 보선이를 생각하니 무섭던 길에 갑자기 힘이 난다. 보선이가 집에서 얼마나 기다릴까 싶어서이다. 그제야 비로소 선생님은 달빛에 드러난 숲의 모습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있고, 잊었던 숲 속의 냄새를 다시 맡을 수가 있다. 편안한 마음으로 두 고개째 등성이를 넘어서야 저 아래 골짜기에서 반짝이는 불빛을 찾아낸 선생님은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한달음에 불빛을 좇아 내달려 마을에 다다르니 이미 열 시가 넘어있고, 다섯 집 뿐인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불빛 아래 기다리고 있었다.... 30년 전 학교가 생긴 이래 마을을 찾아 준 이로 선생님이 처음이라며 모두모두 감자떡 메밀묵 옥수수 들과 같이 귀한 음식을 장만해놓고 기다리고 있던 거였다. 그날 마치 잔치같은 귀한 대접을 받고 별빛 아래 잠을 이룰 수 없었던 선생님..
그런 이야기들이 마치 한숨같이 펼쳐진다. (아니 한숨이라니... 그것은 공연히 안타까움에 젖은 내 정서고, 실은 산길 걸으며 혼자 부르는 노래처럼 펼쳐진다, 고 해야할 지도 모르겠다) 겨울이 되어 눈보라가 심해지자 보선이는 그예 결석을 하게 된다. 졸업하는 날까지 보선이는 학교에 오지 못한다. 김선생님은 3월이 되면 군인이 되어 이곳을 떠나야하고, 겨울 교실에는 늦가을 보선이가 꺾어왔던 노박덩굴이 아직도 노랗게 벽에 걸려있는데. 창밖엔 어젯밤부터 내리던 눈이 그칠 줄 모르고 내리는데 선생님은 그 눈을 바라보며 보선이 생각을 한다. 그렇게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젊은 선생님의 모습은, 그대로 임길택 선생님의 모습이다.
글과 그림, 어우러져 한 권의 책이 반짝인다.
김동성 작가의 그림이 빼어나다. 언제나 내가 기대할 수 있는 그 이상의 그림을 선물처럼 보여준 작가라 한껏 미더운 터이지만, 날이 갈수록 그 깊이를 더해가는 게 놀랍다. <삼촌과 함께 자전거 여행>에서도, <메아리>에서도 <엄마 마중>에서도 그는 놀랄만큼 아름다운 그림의 세계로 나를 끌어들였다. 이번에도 이 한권의 책에 그림을 어우러지게 하기 위해 작가가 들인 공은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빛이 난다. 그가 잡아낸 한 순간은 산골학교의 교무실에서도, 텅빈 교실에서도, 식물도감을 펼쳐든 그 한순간에도 너무나 적절한 아름다움으로 빛난다. 꽃 무더기 속에 웃고 있는 보선이나 숲 속 길을 걸어가는 선생님, 어두워지는 숲의 모습, 저 멀리 반짝이는 불빛어린 동네의 모습이나 눈 내리는 창밖을 마주 한 채 서있는 선생님을 담은 텅빈 교실의 모습은 뭐라 더이상 말을 붙일 수도 없을 만큼 아름답고 생생하다. 그저 가만 보고 있으면 내가 그 세월 속으로, 그 숲의 공간 속으로 뛰어들어가버리게 되는 농밀한 그림들이다. 한 부분도 소홀함이 없으니 어느 장을 펼쳐도 그러하다. 김동성 작가가 잡아내는 한 순간은 그토록이나 내게 보는 즐거움을 주었다.
임길택과 김동성과 길벗어린이 출판사. 그들의 궁합이 훈훈하고 오달지다.
갓 출판되어 따끈한 책을 내게 선물한 내 친구에게 무한 감사. 이제 내 손으로 한 권을 더 신청하여 들고 갈 곳이 생겼다. 지난 해 거창 가북면 두곡산방에 해광스님이 나무를 깎아 만들어 세운 임길택 시비, 그 앞에 이 책을 바치고 싶다. 당장이라도 이 아름다운 책 한 권을 그 어울리는 곳에 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