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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와 함께 한 베니스 여행
크리스티나 비외르크 지음, 잉가 카린 에릭슨 그림, 윤희기 옮김 / 미래사 / 2003년 6월
평점 :
품절
수 년 전 김석철의 <세계 건축 기행>이라는 책에서 베니스의 싼 마르꼬 광장과 두깔레 궁전에 대한 이야기를 본 게, 베니스라는 곳에 대해 실제로 들여다본 처음이었던 것 같다. 사실 베니스라는 도시는 정말로 유명한데도 나는 그 곳에 정말로 아예 차가 없고 집과 집 사이에 바닷물이 다닌다는 걸 알고 많이 놀랐다. 벙어리 장갑으로 맞잡은 듯한 모양새의 물의 도시, 곤돌라가 그 물길 사이를 누비면서 관광객을 실어나르는 낭만의 도시, 바로 마주보고 있는 앞집과의 사이에 바다가 있어 창문으로 뭔가를 던질 수는 있어도 대문을 나서서 대문으로 들어설 수는 없는 이상한 집들의 도시... ^^ 들여다볼수록 신기한 도시였다. 내 사는 곳을 넘어 상상하기 어려운지라, 물에 세워진 베니스라는 도시는 실제로 보기 전에는 참 믿기 어려운 신기루와 같이 느껴졌다. 물그림자의 이미지랄까.
책을 통해 그 도시의 이야기를 듣고, 그다음부터 어디서든 베니스가 등장하면 잘 보았다. 2월의 가면축제도 신문에 나오고 가끔 물에 잠기는 싼 마르꼬 광장의 이야기도 나왔다. 무라노 섬의 유리도 꽤 알려진 듯했다. 어쨌든, 나는 베니스가 보고 싶었다. 베네찌아를 꿈꿨다. 걸어서 몇 시간이면 도시 전체를 한바퀴 다 돈다는 크기도 맘에 들었다. 내가 먼 유럽의 어딘가를 여행할 수 있을거라는 꿈을 꾸기도 전부터 나는 맨 먼저 베네찌아를 마음에 품었다.
올 1월, 정말로 베네찌아의 바닷길을 보고, 운하를 바포레또로 다녔고, 리알또 다리 난간에 서서 운하를 내려다보았다. 꿈만 꾸던 일이 정말로 이루어지기도 하는 거다... 지금 생각해도 그게 정말이었나? 싶은 여행을 다녀온 것이다. 베니스에서는 단 이틀, 메스트레 역에서 기차를 타고 베니스 산타루치아 기차역으로 드나들며 이틀을 보냈다. 하루는 걷고 하루는 바포레또를 타고 물로 다녔다. 베니스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좋았다. 겨울이었고, 하루는 비가 왔고, 하루는 햇살이 따뜻했다. 서로 맞잡은 벙어리 장갑의 형상으로만 생각했던 베니스의 조각난 땅들은 물러나서 보면 접시 위의 물고기였다. 걷거나 배를 타거나- 그것이 베니스의 방식이다. 그런 방식이 가능한 크기의 땅이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베니스에서는, 걷거나 배를 타고 있을 때가 너무나 좋았다. 싼 마르꼬 광장을 거쳐 작은 광장 삐아제타로 빠지면 바로 바다다. 곤돌라들이 바다에 박아놓은 수많은 기둥들에 매인 채 출렁거린다. 두엇은 햇빛 넘실대는 바다 물 위로 관광객을 태우고 유유히 나아가며 실루엣을 남긴다. 베니스에서는, 너무 많은 것들이 출렁거린다. 정말로 물의 그림자만 같다.
책 몇 권을 보고 갔지만, 막상 베니스에서는 다니고 싶은대로만 다녔다. 그러고도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했다. 비오는 날 배를 타고 무라노 섬에 도착했고, 걸어 다니면 어디나 다리가 나왔고 투명한 아름다움을 지닌 유리들이 나왔다. 점심 시간이 지나 다 닫혀버린 식당들 때문에 난감한 차에, 어찌 문 열린 한 곳을 찾아 들었는데, 그 곳이 내 전체 여행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식당이 되었다. 그곳은 관광지라기보다는 시골이었다. 인심좋고 바쁠 것없는 할아버지들이 모여 수다를 떠는, 동네 사랑방 같은 곳이었나. 그런데 실내는 온통 아름다운 그림들, 짙은 노랑색으로 셋팅된 식탁들, 물을 마시기에는 과분하다싶은 유리잔들, 바구니 가득 담겨져 서비스로 제공되던 커다란 스틱 모양의 과자들까지 허술한 데가 없었다. 후다닥 해치우는 급함도 없고, 모든 것이 천천히 기분 좋게 진행이 되었다. 작은 식당이었지만 칸막이 너머 다른 방에서는 할아버지들의 유쾌한 웃음이 끊이지 않았고, 우리는 베니스 특산 해물 요리와 스파게티를 먹었다. 밖에는 비가 오고, 서두를 일도 없고, 이곳에서는 생이 유쾌하고도 품위있으며, 그래서 어쩐지 세상 저 너머같다는 느낌마저 드는 오후였다. 그때 그곳의 풍경이 잊혀지질 않는다. 확실히, 베니스에서는 시간이 달리 흐르는 것이 아닐까? 그곳에도 걱정이 있고 삶의 애환이 없을 수야 없겠지만, 내 땅에서 나와 사람들이 겪어가는 그런 종류의 것과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어보였다. 그들은 자신의 삶이 만족스러운 듯 보였다. 세계적인 관광지로서 풍족한 경제가 그런 여유를 주는 것일까? 그것 만은 아닐 것이다. 베니스 중심의 상가를 지나다니면 - 베니스는 정말 상가가 많다. 관광객에게 상품을 파는 곳이 전체의 절반은 될 것 같이 느껴진다 - 그곳에는 그래도 내가 쓰는 시간과 같이 뭔가가 흘러가는 것 같은데, 베니스의 외곽 무라노 섬에서는 오히려 다른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 작은 곳에서 느낀 특별함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각설하고, 그리 두서없이 다녀도 베니스는 대충은 다 둘러볼 수 있다. 작으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그저 만족스럽기만 했는데, 다녀와서 우연히 이 책을 보고나니, 아니! 하고 후회가 되기도 한다. 아빠와 함께 일주일간의 베니스 여행을 하는 여자아이의 이야기인데, 글을 쓴 이가 크리스티나 비외르크다. 내가 좋아하는 리네아의 이야기를 쓴 사람이다. 어린이를 주인공으로 삼아 이야기를 풀어가는데 그 방식이 '크리스티나 비외르크 방식'이다. 나름의 방식을 만들어낸 사람이라는 이야기다. <모네의 정원에서>를 들고 빠리의 오랑쥬리 미술관을 찾고싶게 만드는... 바로 그 사람이다. 베니스 이야기도 그렇게 풀어낸다. 어린이만이 대상이 아니라, 어른들이 더 좋아할 수도 있는 책이다. 정보의 양이 만만치 않은데, 이야기 속에서 천천히 흘러간다. 같이 다니면 되게끔.
아쉽다. 내가 또 베니스에 가는 행운을 누릴 수 있을까? 벤델라가 이야기하는 그곳들 중에는 '여행정보책'에 소개되지 않는 소소한 즐거움이 가득한 곳들이 너무나 많다. 내가 놓친 것들, 다 아쉽다. 앞으로 베니스를 여행할 이들, 혹은 언젠가 베니스를 여행할 꿈을 지금 꾸고 있는 이들이라면 다른 어느 책보다 이 책을 놓치면 후회할 것이다. 하지만 이미 베니스를 다녀온 사람이라면, 절대 이 책은 한동안 안보는 게 좋을 것이다. 놓친 것들에 대해 후회가 밀물처럼 밀려들테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