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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준 선물 ㅣ 마음이 자라는 나무 5
유모토 카즈미 지음, 이선희 옮김 / 푸른숲주니어 / 2005년 5월
평점 :
절판
올여름, 특이한 방식으로 이 책이 내게로 왔다. 아들이 방학 중에 읽어야 할 필독도서로 도서관서 빌려놓은 것을 내가 먼저 보게 되었다. 아들의 여름 방학이 내게 준 선물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청소년을 위해 <완득이>가 나오고 <스프링벅>이 나온다. 그 이야기 속에 우리의 청소년들은 이 시대의 무게 속에서 때로 방황하고 때로 솟아오른다. 그런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우리나라의 아이들에게 이 책은? 우리나라의 작가들이 <여름이 준 선물>과 같은, 이런 책을 쓸 생각을 할 수 있을까? 그야말로 너무나 우리 아이들의 이야기와는 동떨어진... 가까운 일본의 작가가 쓴 이야기인데도 너무나 다른 한 순간을 살아가고 있는 아이들의 이야기라 생경스러웠다. 그런데 아름다운 이야기라서, 우리의 아이들이 눈에 밟혀서 마음이 아팠다.
초등학교 6학년, 사립중학교 입학이라는 나름대로 무거운 과제를 안고 있는 시기의 아이들이다. 그런데 그 사실이 크게 이야기를 끌고가지는 않는다. 그저 바탕일 뿐. 아이들은 다른 일에 몰입한다. 바로, 그 아이들에게 우연히 다가온 주제, 죽음. 약간 묘하게 우정을 유지해가는 세 아이들, 류와 하라와 모리에게 어느날 죽음이 슬쩍 다가온다. 하라의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화장하는 것까지 지켜본 하라가 잠시 그 사실에 골몰하게 되면서 다른 아이들도 막연히 갖고 있던 죽음이라는 것에 호기심을 갖게 된다. 엉뚱하고 즉각적인 모리가 죽음을 곁에서 느껴보자고 제안하는데, 아이들답게 대상이 호기롭게 정해진다. 이웃에서 마치 죽은 듯 버려진 듯 살아가고 있는 할아버지를, 죽을 때까지 지켜보자고 약속을 정하는 것. 그때의 기분을 알고 싶어서, 라는 것이 목적이다. 당돌하다.
지켜보는데, 전혀 예기치 않았던 쪽으로 일이 흘러간다. 아이들의 시선을 눈치챈 할아버지가 갑자기 깊은 잠에서 깨어난 듯 생생하게 살아나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기 시작한 것. 그러면서 아이들과 할아버지 사이에 유대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아주 의외의 만남이 갖고 온 개방성이랄까, 그들은 열린 마음으로 상대를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서로에게 특별한 사람이 되어간다. 여러가지 일들이 생기기도 하고, 아이들이 일으키기도 한다. 그 와중에 나이 먹은 이들의 추억에 관한 짧은 단상이 있다. 인상적이다.
"그렇게 많은 추억이 두 사람의 마음속에 간직되어 있었다니, 정말로 놀라운 일이었다. 어쩌면 나이를 먹는 것은 즐거운 일인지도 모른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추억은 늘어나는 법이니까.
그리고 언젠가 그 추억의 주인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려도 추억은 공기 속을 떠돌고, 비에 녹고, 흙에 스며들어 계속 살아남는다면... 여러 곳을 떠돌면서 또 다른 누군가의 마음에 잠시 스며들지도 모른다. 처음으로 간 곳인데, 와 본 적이 있다고 느끼게 되는 것은 바로 그런 추억의 장난이 아닐까? "
마치 어린왕자의 도르래 이야기 같은 구절이다. 아날로그적인 작가의 감수성에 공감이 간다.
할아버지는 어느날 갑자기, 마치 잠을 자듯 자연스럽게 돌아가신다. 아이들은 어리둥절하다가, 불현듯 아픔을 느낀다. 가까운 사람, 마음을 나누던 대상이 갑자기 사라져서 더이상 아무 것도 나눌 수 없다는 사실에 커다란 상실을 느끼는 것이다. 먼 친척 누군가가 돌아가셔서 장례를 치르는 과정과는 너무나 다른, 혈연이 아니라 오로지 그 인간의 내용으로서 가까웠던 이의 부재가 주는 상실감이다. 아이들은 그런 것을 감당하며 성장한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아이들의 표현에 따르면, 이렇다.
"난 이제 한밤중에도 혼자서 화장실에 갈 수 있어. 무섭지 않아.
왜냐하면 우리에겐 저 세상에 아는 사람이 있잖아. 그건 아주 마음 든든한 일이잖아!"
지은이는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십여 년이 지나서야 외할아버지를 '저 세상에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게 되었던 경험을 가진 사람이다. 할아버지의 영정 아래서 원고를 쓰고, 밤에는 이부자리 안에서 영정을 올려다보면서 "내일도 열심히 할게요" 라는 말을 하고 잠이 들곤 했다. 그리곤 아주 부드럽고 좋은 꿈을 꾸면서.. 죽음의 한 모습을 이렇게 편안하게 받아들이게 하는 이야기 그 너머에는 작가의 경험과 따뜻한 마음이 자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