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양장)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윤성원 옮김 / 문학사상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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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왠만해선 두 번씩은 잘 읽지 않는데, 어쩌다 이 책을 두 번 읽게 되었다. 다른 이유도 아니고, 도서관에서 우연히 하루키 코너에 서게 되었는데, 이 책 제목은 아주 익숙한데 도무지 내용이 생각이 안 나는 것이다. 뒤적여보니 언젠가 읽은 것 같기도 한데 딱히 기억이 나질 않아서 황망했다. (뭐 요즘이야 그리 드문 일도 아니지만..) 분량도 짧은데 한 번 기억을 더듬어볼까? 그런 생각이었다. 읽다보니, 생각이 났다. <상실의 시대>에서처럼, 하루키 책이란 뭔가 다르군, 하던 느낌도 떠올랐다. 이 책, 스토리텔링이 아니라, 다른 여러가지로 인상깊은 책이었다. 

하루키를 처음 문단에 데뷔하게 만들어준 책, 군조상이라는 걸 받았던 처녀작이다. 군조상이 아니었으면 거의 수상은 어려웠을 거라니, 군조상은 아마도 새로운 형식이나 실험적인 걸 높이 평가하나보다. 지금도 그렇게 느껴지지만, 이 처녀작에서도 하루키의 소설은 정말 일본이라는 나라와는 별개로 느껴진다. 근래 일본 작가의 유행에 편승하여 나도 스물 남짓 작가의 책들을 폭식했지만, 그 속에서는 거의 틀림없이 '일본'이라는 나라라기보다는 '일본적'이라는 느낌이 배어나왔다. 우선은 문체가 가장 그랬다. 일본 작가들은 이렇게 쓰는구나.. 이런 느낌이 드는 책이 대부분이었다. 어쩌면 일본어와 한국어의 상관관계 때문에 번역상 그런 느낌이 들 수도 있겠지만, 일본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을 하는구나, 하고 뜻밖으로 느낀 때가 아주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하루키의 '비일본적인 책'들은, 그게 외국인들에게 특히 어필할 수 있는 동기가 되었다거나 하는 점과는 별개로 그런 무국적성은 왠지 떠다니는 인간의 뉘앙스를 풍긴다. 소속이 없는 인간.. 소속에 구애받지도 않고 소속에서 위로를 받지도 못하는 떠도는 영혼이라니, 이거야말로 현대인의 삶의 한 특질을 구성하는 요소가 아닌가 말이다. 하루키의 책이 이야기의 흐름이 아니라 단편적인 독백들, 흘리듯 내뱉은 대사들에 의해 기억되곤 하는 게 이런 이유에서가 아닐까. 지금은 많은 작가들이 그런 방식의 책을 내고 있지만, 그 당시 일본에서는 그게 처음이었다 하고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작가들이 그 이후 하루키에게 빚지고 있다는 말들을 많이 한다. 그래서 하루키는 문학사에 자신의 이름을 길게 남기게 되고 독자들은 뭔지 이유를 알 수 없는 쓸쓸한 생애에 대해 생각하게 되곤 한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는, 영락없이 책 속의 화자가 작가와 동일시되기 때문에 하루키의 독백을 듣는 것 같다. 청춘의 어느 한 시기, 하루키의 일기를 보고 있는 것만 같다. 서른 즈음의 어느 날, 그 옛날 뭔가 쓰려고 하면 느껴지던 부담감 같은 것도 전혀 없이, 재능이나 능력이 있든 없든, 아무튼 자신을 위해 무언가 써보고 싶다고 생각하던 하루키. 매일 조금씩 단락을 지어, '오늘은 여기까지'란 식으로 써나갔다. 그래서 1에서 40까지 번호가 매겨진 이야기가 나왔다.  

모든 건 스쳐 지나간다. 누구도 그걸 붙잡을 수는 없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이런 말을 하면서, 하루키는 그 시기 자신의 이야기를 끝낸다. 그래, 그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고, 이런 일기와 같은 글이라면, 누구나 써낼만한 이야기라면, 공감할 만하지 않은가.  

밋밋하기 이를 데 없는 이야기에 청량함을 주는 게 하트필드의 이야기였다. 1909년 오하이오 주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죽도록 모험소설과 괴기물을 써댔고, 많은 걸 증오했고, 좋아한 건 딱 세 가지 총과 고양이와 어머니가 만든 쿠키였다는 소설가. 주인공인 화자가 당대의 헤밍웨이, 피츠제럴드와 견줄 만하다는 작가. 글에 대해 많은 것을 데릭 하트필드에게서 배웠다, 그는 1938년 6월의 어느 맑게 갠 일요일 아침, 오른손으로는 히틀러의 초상화를 끌어안고 왼손으로는 우산을 펴들고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옥상에서 뛰어내려 납작해져서 죽었다고 소개한다. 심지어 '후기에 대신하여' 라고 소설 말미에 덧붙인 양식의 글에서 하트필드의 무덤을 방문한 이야기를 한다. 자신을 이 길로 오게 만든 사람의 자취를 찾는 여정을 소개하며, 5월의 부드러운 햇살 아래에서는 삶도 죽음과 마찬가지로 편안하게 느껴졌다, 이 소설은 그런 곳에서 시작되었다 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마치는 것이다.  

영향을 준 사람이나 영향을 받았다는 사람이나, 나의 삶과 참 동떨어지게 흘러가는군, 하는 생각을 했다. 돌아보면 언제나 하루키는 흘러가듯 보내버리는 행위들을 무심한 듯 이야기하고, 거기에는 어떤 이유도 붙어있지 않고 설명도 없는데, 독자인 나는 그걸 의식의 흐름으로 읽고 있는 거다. 하루키 소설에서 묘사되는  행위들은 곧 의식으로 인식되는 것, 그런 독특한 체험을 하게 된다. 낯선 느낌이다. 낯설어서 한동안 머무는 그런. 

하트필드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필요에 의해서 허구로 지어낸 것이었다. 이 소설에서 가장 반짝이는 것은 하트필드의 이야기였다. 주인공과 하트필드의 동일시와 분리가 소설에 다층적 매력을 부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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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쉽게 찾기 호주머니 속의 자연
윤주복 지음 / 진선북스(진선출판사)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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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처음 나무와 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면서 접한 책이 윤주복 님의 <식물관찰 도감>이었다. 정작 산에 갈 때 들고 가기가 좀 무겁다는 점만 빼면, 초보인 나에게는 너무나 유용해서 "바로 이게 내가 찾던 거야!" 라는 소리가 절로 나오던 책이었다.  

제법 시간이 흐르면서, 여러 들꽃에 익숙해졌다 싶었는데, 의외로 나무는 익숙해지기가 쉽지 않았다. 풀꽃들은 사실 꽃피는 그 때를 제외하면 존재감이 많이 드러나지 않아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게 마련이다. 지나다 어딘가서 '반짝' 하는 느낌이 올 때, 돌아보면 거기 노랗게 뽀리뱅이가 피어있기도 하고 붉게 지칭개가 피어있기도 한거다. 풀꽃들은 겨우내 대부분 잎조차 스러진다. 그렇게 풀꽃들은, 거개가 꽃으로 자신의 온 존재를 알린다. 그래서 요즘 나오는 대부분의 들꽃 쉽게찾기 하는 책들은 그 꽃의 색으로 구분해 들어가는 식으로 편집이 되어 나온다. 나름 합리적인 선택이라 여긴다. 일반인에게는 게절별, 꽃색별 접근이 학술적인 접근에 우선하는 것이리라. 그런데 나무는? 

나무는 사실, 언제나 그 자리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는 게 풀과는 다르다. 겨울, 잎을 다 떨구고도 나무는 그 자리에 언제나 있다. 풀처럼 없어졌다가 나타나는 게 아니니까, 꽃 피는 것으로만 자신을 알리지는 않는다. 물론 꽃피우는 건 중요한 일이지만, 그건 너무나 짧은 순간, 한 해 중에 잠깐에 불과한 시간이다. 산과 들과 집 근처, 학교 마당이나 관공서에도 나무는 당당히 자기 존재를 알리며 서 있다. 그래서 나무는 꽃 뿐만 아니라 그 잎, 그 줄기, 그 열매, 그 겨울눈.. 등등으로 찾아들어가는 게 훨씬 유용한 방법이다.  

내가 다섯 해 이상을 살아온 아파트에서 어느 날 발치에 떨어진 나무잎 하나를 주웠다. 처음 보는 잎이었다. 고개를 젖혀 위를 보니, 족히 7~8 미터는 됨직한 낯선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그 나무 그리 크도록, 한 번도 바라보지 않았던 걸까. 한번 올려다 본 적도 없었을까. 처음에는 어린 나무였을텐데. 그러면 그때는 내 눈 높이보다 약간 더 높았을지도 모르는데. 이미 커버린 나무는 잎을 관찰하기도 어려울만큼 커버렸다. 대체로 너무 높은 높이에 있었다. 무성한 초록잎, 그 중 하나가 발치에 떨어져 내게로 온 거다. 집에 와서 내가 가진 도감으로 그 잎을 찾자니 너무나 힘이 들었다. 꽃을 본 것도 아니니, 그냥 도감 전체에서 찾다가 운 좋으면 빨리 그것과 같은 잎 모양을 찾을 수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잎이 크게 나와있지 않은 것도 많았다. 그래도 어찌어찌 끈기있게 뒤져서 그 나무가 튤립나무라는 것을 알아내기는 했다. 그건, 그때로서는 처음 듣는 이름, 튤립나무 혹은 백합나무였다. 꽃 모양이 튤립꽃을 닮아서 그런 이름을 가진, 그래도 꽤 유명한 나무였다. 이미 가로수로도 많이 심어진 나무란다. 얼핏 플라타너스를 닮아보일만큼 울창하고 멋지게 자란다. 그게 우리 아파트에 두 그루가 있었다는 걸, 그 때 처음 알았다. 반가웠다. 

나무는 그렇게, 잎으로 자신을 드러내기를 즐긴다. 꽃과 열매는 잠깐이니까. 줄기는 실은 구분하기가 잎에 비하면 더 까다로우니까. 그래서, 잎으로 나무를 찾는 방법이 없나? 하고 살폈다. 일반인을 위한 도감으로는 꽤 정평이 나 있는 진선출판사, 전문용어를 쉬운 일반어로 바꿔서 일반인이 다가서기 쉽게 설명해주기로 이미 정평이 나 있는 윤주복님, 그들의 합작품이 이 책, <나무 쉽게 찾기>라는 도감이다. 물론 계절별로 꽃 색으로 구분을 해 두었지만, "잎 모양으로 나무 찾기"라는 항목이 맨 처음에 붙어 있다. 이 책에 나와있는 총 612종의 나무가 그 잎 모양으로 찾아들어갈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 책의 가장 크고 유용한 장점이 그것이 아닐까 한다. 그 잎들을 찾아들어가는 것도 물론 그냥 나열식은 아니다. 홑잎과 겹잎, 홑잎 중에는 어긋나기와 마주나기, 어긋나기 중에서도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는 잎과 없는 잎, 이런 식으로 찾아 들어갈 수가 있으니 그야말로 나무잎 한 가지만 있으면 도감을 펼쳐 비교를 시도해 볼 수 있다. 그리고 비슷한 잎을 찾으면 그 밑에 적힌 이름으로 들어가 세부 내용을 살펴보며 확인해 볼 수 있게 되어있다.  

이즈음에 늘상 산에 다니며 지나치던 나무들에게 이름을 불러주기를 시도하던 나에게 이 책은 단비와 다름없다. 이 책으로 굴피나무를, 비목나무를, 붉나무를 제대로 만나게 되었다. 성당 뜰에 있는 모감주나무도, 학교 담에 덩굴진 계요등도 마찬가지다. 어린 시절을 도시에서 자라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제대로 만나지 못했던 나에게, 나무 도감이라는 책이 그 아름다운 나무들의 이름과 삶을 알려준다는 것은 그야말로 나에게 경이 그 자체다. 이미 열 권 남짓 식물 도감을 갖고 있는 나에게도 이 책은 너무나 유용하고 고마운 도감으로 자리잡았다. <겨울나무 쉽게 찾기>라는 책도 있다는데, 올 겨울부터 겨울 나무를 자주 만나게 된다면 그것도 구입하게 될 것이다. 겨울눈과 잎 흔적의 모양으로 구분해 들어가는 나무의 세계라... 

한 권의 책이 그 책을 필요로 하는 사람의 손에서 얼마나 큰 가치와 효용을 지니는지, 이 책이 그 쉬운 예가 될 것이다. 주변에서 만나게 되는 나무들 하나 하나를 이 도감을 통해 이름을 불러주게 되고, 그럴 때마다 하나씩 밑줄을 그어가는 일, 너무나 즐거운 놀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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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네코무라 씨 하나
호시 요리코 지음 / 조은세상(북두)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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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 

어디서 이런 만화가 튀어나왔을까? 다소 엽기적이지만 거의 고전적인 보호자 스타일의 가정부, 그것도 자신의 주제를 조금도 잊지않고 있는 고양이 가정부라니! 네코무라의 탄생 자체가 신기하기 짝이 없는데 천연스럽게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거의 판타지 수준이다. 이 작품의 재미를 창출해내는 건 역시 작가 호시 요리코의 참신하고도 영리한 발상!  

오늘의 네코무라씨가 만일 이쁘장하고 순진하고 약간은 보호본능까지 자극하는 젊은 여자 정도였다면, 그러니까 이 이야기의 네코무라씨에 만일 그 사람을 대입시킨다면, 이 만화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그저그런 이야기여서 한 번 흘낏할 만한 것도 아닐테다. 자신을 두고 외국으로 떠나버린 주인을 만나러 가기 위해 가정부 일을 자원하고, 성실히 일하고, 여태 배우고 살아온 대로 한번 맺은 인연에는 정을 주고 살아가는 사람. 네코무라씨가 가진 특성들은 그런 선량하고 다소 고지식한 보호자 스타일의 가정부다. 조금도 특별할 것이 없을 것 같은.  

그런데, 어느 순간 그 평범한 가정부에 고양이 네코무라씨를 대입시키는 순간, 모든- 모든 것들이 유쾌해지기 시작한다. 이 만사형통하고 오지랖도 넓은 고양이의 존재를 모든 등장인물들이 천연스럽게 받아들이질 않나, 게다가 네코무라씨 자신은 자신이 사람 세상의 고양이 주제라는 걸 절대 잊지도 않는다. 오로지 인간적인 능력이 뛰어난 고양이이니 선처해 주신다면... 이런 자세로 일관한다. 거기서 온갖 소소한 즐거움, 유쾌한 반전, 평이하지 않은 에피소드들이 천방지축 발생하는데, 그게 이 만화의 묘미가 아닐까. 정말 특이할 것도 없는, 오히려 너무나 평이해서 교과서 수준의 이야기를 슬쩍 패러디 하는 것일까, 생각마저 하게 만드는 스토리가 네코무라씨의 설정으로 단번에 통통 튀는 상상력의 세계로 들어가 버린다. 게다가 네코무라씨는 진정한 고양이의 특성을 서슴지 않고 내비치기도 하는데, 그게 또 보는 이를 키득거리게 만든다. "뭐야, 정말! 이 만화~ ^^ " 

예컨데 주인집 반항아 오니코 아가씨에게, 성장기에는 영양가 있는 음식을 많이 먹어야 한다며 다들 포기한 식사를 끝까지 챙겨주는 네코무라씨, 하루는 오니코가 발칵 하며 애써 만든 네코무라이스를 집어던져 버린다. 와장창, 하고 깨지는 접시와 쏟아져 버린 네코무라이스, 네코무라씨는 그걸 주워들고 이렇게 말한다. "아까우니까 주먹밥으로 만들어 먹어야지.. 절대로 버릴 순 없어!" ㅋㅋ 

그런데 좀 있다 보면, 정말 네코무라씨는 저녁에 퇴근해서 돌아간 가정부 센터에서 저녁밥으로 그걸 뭉쳐서 먹고 있다. 너무 피곤해서 이야기하며 먹다가 그만 쿵, 하고 앞으로 엎어져 상에 코를 박고 잠들어버린다. 네코무라씨를 들어올려 잠자리에 누이러 가는데, 그런 네코무라씨의 얼굴에는 밥풀이 한금~ ^^  

이 만화에서는 요즘 만화들이 어디서나 흔하게 구사하는 과장된 놀라움 같은 제스츄어도 별로 없다. 그저 다들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니 나 또한 그리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자연스럽게 네코무라의 특이한 존재를 평이하게 받아들였다가, 갑자기 불쑥 "뭐야, 역시 고양이였잖아!" 하는 깨달음이 올 때 킥킥! 웃을 수밖에 없다. 호시 요리코, 정말 영리하다. 

건성건성 그리는 듯 단순하기 이를 데 없는 그림도 이 내용이라면 완전 짱! 만화는 역시 모든 것을 제쳐놓고 아이디어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만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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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네코무라 씨 하나
호시 요리코 지음 / 조은세상(북두)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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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ㅎ 은근 상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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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사랑이었네
한비야 지음 / 푸른숲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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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일을 하라! 

그 이야기를 이렇게 당차게, 계속해서 설득력있게 하는 이가 또 있나? '한비야처럼 살고 싶은' 모든 이들의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은 그녀의 '행로 자체'가 우리를 향한 설득이다. 이 펄펄 뛰는 삶을 살아온 주인공의 이야기는 늘 설렌다. 깜짝 놀랄만한 꿈의 현재형이고, 지금도 계속 또 새로운 꿈을 꾸면서 이룰 계획을 세우고 있고, 그 꿈을 이루어 가는 과정을 너무나 솔직 담백하고 힘차게 우리를 향해 재잘거린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루어 가는 과정에서 자기를 이끌어 온 것이, 그것이 사랑이었다고 말하는 여자. 

한비야씨라면, 주기적으로 책이 나온다. 어느 순간부터 그걸 빌려 보지 않고 사서 보게 되었다. 그 책 안에서 끓고 있는 긍정의 에너지를 가까이서 조금이라도 더 나눠받고 싶어서일 것이다. 그의 말마따나 그의 책은 점점 더 가열차게 달아오른다. 심지어는 이번처럼 사소하게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순간에도 그렇다. 글을 쓰는 품새도 더 단련되어간다. 그이의 삶 자체가 점점 더 뜨거워지고, 점점 더 확장되어가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계속 이어지는 그이의 책을 읽으면서 그 삶의 행로를 먼발치에서나마 바라보고 있는 것도 기쁨이다. 그이의 권유대로 월드비전에 관심을 갖고, 아이들에게도 소개하여 아프리카, 베트남으로 인연을 맺게 되는 것도 바라봄의 한 방법이다.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가 내가 처음 접했던 긴박한 세상과의 만남이었다면, 이번 책은 지은이가 잠시 쉬면서 삶의 여러 자락을 더듬어보며 풀어내는 이야기들과의 소소한 만남이라고 했다. 실은 그런 소소한 만남을 생각하며 나도 느긋이, 편안하게 읽을 작정으로 이 책을 들었지만, 정작 그 만남은 그리 소소하지도 그리 편안하지만도 않았다. 그이의 책은, 언제나처럼 어느새 끓어오르고 있었다. 나도 덩달아, 달아오르게 만들면서. 그 전염성은, 그 어떤 플루보다도 강력한 것 같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감염되고야 마는 것인지. 

어느 새 한 귀퉁이를 접어가며 읽었다. 여기저기서 몇 번은 보았음직한 문구들, 그런 문구들조차 다시 곱씹어보게 한다. 그이의 말이 아니라 그이의 삶이 그렇게 하게 만든다. 세상에 흔한 자기계발서의 문구는 그렇게 많은 유익한 경구를 담고 있지만, 그 안에는 스스로 치열한 삶이 담겨있지 않다. 그래서 그 무게가 너무나 다르다. 나도 이런 구절을, '이토록 평범한 구절을' 되새기며 살아가리라, 마음 먹는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하고,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체념할 수 있는 용기를 갖도록 노력하자.  

그리고 이 둘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를 기르는 게 중요하다." 

한비야님의 삶은 어느새 많은 이들에게 하나의 표상이 된 것 같다. 많은 젊은이들이 그이로 인해 인생의 행로를 스스로 더듬게 되고, 많은 나이먹은 이들도 그이로 인해 앞으로의 인생 행로를 더 소중하게 다듬어가도록 할 것이다. 한비야님이 열심히 알리려고 하는 세상은 사실 내게 있어서는 생면부지의 오지에 불과했고, 그 땅이 내게 어떤 의무감도 마음의 짐도 지우지 못했던 곳이었다. 그러나 실은 '언제나 엄연히 존재하는' 곳이라는 걸, 일깨우고 또 일깨우려는 게 그이가 하려는 일인 듯하다. 그것을 더 널리 알리려고 동분서주하던 지은이가 이제 또 현장의 경험을 정책에 반영하려고 다시 공부에 뛰어든다고 한다. 자신을 더 잘 쓰기 위해서란다. 그렇게 다시 또 다른 문 앞에 선다. 나는 또, 놀라움에 가득차 그녀를 바라본다. 공부를 끝낸 후의 그녀는 또 어떤 그녀가 되어있을까? 이번에는 <보스턴 견문록>을 들고 우리 앞에 서는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그것도 흔쾌히 지켜보고 싶다. 그이의 여정 자체가 저 어딘가에서 반짝이는 하나의 표지가 되어있으니 말이다. 한비야, 참 아름다운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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